confido

4부 8화

카리타스의 결심

8월 말, 곧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에 부는 바람은 뜨뜻미지근했고, 기사들도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시도폰은 여론을 고려해서 일정을 느슨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 보니 여유 시간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거기에 일 처리 속도가 빠른 솔라가 가세하다 보니 대부분의 일과가 오전에 끝나거나 길어봤자 점심을 넘기지 않았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루카에게 건네준 시도폰은, 일을 다 해버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솔라에게 말했다.

“심심하네.”

“악마 퇴치라도 하러 가시겠습니까?”

일반인이 들었다면 무슨 그런 말을 시장 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하냐고 놀랐을 테지만, 여기서 청자는 집행자였다.

시도폰은 좋은 생각이라며 일어나 창을 챙겼다. 루카가 갑옷을 준비하겠다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시도폰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치실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갈 게 아니니까 괜찮네. 그냥 경계 성벽까지만 갈 거야. 그걸 넘어가진 않을 걸세.”

시도폰은 잔소리가 이어질까 봐 급하게 방을 나갔고 솔라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루카가 조심하라고 외치는 것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말을 하나씩 잡아 올라탔다. 문득 솔라가 물었다.

“저희끼리 갑니까?”

“사람 모이는 거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네. 자, 성벽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시도폰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솔라는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 않고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고, 잠시 후 두 사람은 경계에 도착했다.

시도폰이 자신이 이겼다며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자, 솔라는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었다.

“입으로만 그러는군. 진심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잖아.”

“전 당신께 언제나 진심입니다.”

“…음.”

어째서인지 진지한 표정의 솔라에게서 돌아선 시도폰이,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그들의 방문에 익숙해진 경계 순찰 기사들이 경례했고, 시도폰은 잘들 하고 있었냐며 성벽을 점검했다. 말을 매어둔 솔라는 시도폰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마찬가지로 점검에 집중했다.

가을은 순조롭게 지나갔다. 악마들이 자주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쩌다가 강한 악마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시도폰이 있었으니 길게 끌지 않고 금방 제압되곤 했다.

나날이 남부로 전해지는 승전보에 교회의 사람들도 들뜨기 시작했다. 시작의 땅을 넘어, 과거 제망의 영역을 전부 수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시도폰이 수행단을 데리러 남부로 향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왕국이 이번에 집행자께서 수복하신 제망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거군요.”

교황에게서 받은 서류를 읽던 카리타스가 말했다.

‘시도폰의 명예가 높아지고 기사단이 무사하니까 앞으로 뭔가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예상 못 했었는데. 내가 안일했네.’

작년보다 조금 야윈 교황이 마른기침을 뱉어내자, 시종이 서둘러 미지근한 물을 찻잔에 따랐다.

그것을 음미하듯 한 모금 머금었다가 넘긴 교황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물론 행정의 영역은 왕국에 맡기는 것이 관례이기는 하나,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같은 인간에게서, 국왕 폐하 휘하의 군사들이 수복해낸 땅이 아니니 말입니다.”

조금 불안해진 카리타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을 때, 그쪽의 기사단에 임무가 가중될 게… 저는 걱정됩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집행자께서 악마 열 마리를 상대하는 시간이, 땅문서 열 개를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도 처음 해볼 때만 힘든 것이지 막상 하다 보면 점점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분 주변엔 좋은 인재도 많으니….”

‘좋은 인재’라는 말이 말 그대로 정말 좋은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그 반대의 의미로 비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카리타스는 그 단어에 실린 미묘한 강세에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새로운 땅으로 토지 장사라도 하려고 저러시는 건가. 교회엔 그런 것까지 담당하는 부서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지 교회 소유 목장이랑 농경지 담당 부서가 있었지. 그쪽이랑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겠군.’

막을 수 없다면 기사단에 부담이 되지 않는 방향이 되도록 돕는 게 낫겠다 생각한 카리타스가 제 의견을 교황에게 전달하자, 교황은 잘 자란 학생을 쳐다보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카리타스와 메릭은 그 미소에 소름이 돋았지만, 둘 다 티를 내지 않은 채 자리를 파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수행단을 데리러 집행자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때 말씀을 한번 드려보는 것도 좋겠군요.”

“…네.”

한발 늦은 대답에 교황은 그저 카리타스가 일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고 격려의 말을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다고 거듭 대답하며 카리타스가 서두르되 차분하게 교황의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서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카리타스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손을 멈추고 경고했다.

“밖에서 그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가만히 계시길래 무언가 문제가 생기신 줄 알고 걱정이 되어서 그만.”

카리타스가 뒤돌아보니 당황한 얼굴의 메릭이 뻗으려던 손을 뒤로 한 채,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어. 이 사람한테 화낼 일이 아닌데.’

“미안해요. 별일 없으니까 가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치곤 표정의 변화가 미미했지만, 메릭은 이미 그런 얼굴에 익숙했기에 말없이 카리타스를 따랐다.

하지만 집무실에 도착하고, 오늘따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빈번히 다른 생각에 빠진 듯한 카리타스의 모습에 메릭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성녀님. 아무 일이 없으시다고 했지만, 역시 평소와는 다르신 것 같습니다. 혹시 피곤하신 거면 오늘은 이만하고 쉬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말에 카리타스는 아차-하는 표정을 짓더니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서류에 얼굴을 묻은 카리타스가 되지도 않는 집중력으로 일을 끝마친 것은 저녁 식사 직전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려고요.”

식사 후, 카리타스의 말에 메릭이 기쁘게 좋은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식후에 산책은 꼭 해야 한다며 카리타스를 데리고 나갔고, 카리타스의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며 주변 동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간간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해주었지만, 카리타스의 정신은 영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메릭은 조금 서운한 마음에 카리타스에게 장난식으로 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게 맞냐고 물었다.

“아… 미안, 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돌아가죠. 빨리 쉬고 싶어서요.”

예상보다 진지한 대답에 메릭은 당황하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걸음을 빨리했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 카리타스는 메릭에게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서운해하는 것 같았지.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멀쩡한 침대와 의자를 두고 문 뒤의 바닥에 주르륵 흘러내리듯 주저앉은 카리타스가 맞은편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느릿하게 져가던 해가 산등성이에 걸려있었다. 카리타스는 무릎을 세워서 앉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 수행단 인솔은 시도폰이 온다고 했으니까… 말하자.’

메릭과 교제하기로 했으면서 시도폰에게 계속 마음을 둔 것은, 카리타스가 마땅히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메릭에게는 온전한 마음을 주지 못했고, 시도폰은… 난 그 애의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계속 여지만 줬었지. 진짜 내가 생각해도 나빴어. 시도폰이 대놓고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내도 할 말이 없겠네.’

카리타스는 시도폰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여름날 보았던 것처럼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자기를 기만했냐고, 여태까지 주고받았던 수많은 말과 편지는 무엇이었냐고, 그렇게 외치는 모습을.

‘그러면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외롭지 않은 너를 부러워했다고, 너는 항상 주변에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었으니 외딴 섬 같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문득 고개를 든 카리타스는 아직 지지 않은 해가 눈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타오르는 태양은 언제나 시도폰의 머리카락을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뒤에서 그를 보고 있노라면 해가 다시 떠오르는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말없이 그 작은 등을 따르고 있으면 시도폰은 언제나 뒤돌아 웃어주었다. 그때 느낀 충족감은, 그 미소가 준 기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카리타스가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그 미소는 순식간에 눈물에 덮여 일그러졌다.

‘근데 넌 내 곁에 없잖아,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수 없잖아. 지난 몇 년 동안, 솔직히 메릭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어. 내 편이 생긴 것 같았고 실제로 메릭은 나를 많이 도와줬으니까.’

힘주어 쥔 소매에 주름이 졌다. 태양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카리타스는 계속 속으로 말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게? 곁에 있는 사람이 너였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거기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온전히 메릭한테 고마워하지도 못하고, 그가 주는 기쁨에서 너와 함께 했다면 가졌을 미래만 자꾸 상상하게 돼.’

일하다가 몸이 찌뿌둥해지면 함께 산책하고, 사소하지만 재밌는 일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걱정하되 함께 이겨내는 것, 카리타스는 메릭과 보낸 일상이 좋았다.

계속 해를 쳐다보느라 눈이 따끔거렸지만, 카리타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게 전부 너였더라면, 이라는 의미 없는 가정을 했는데 그 상상만으로 행복했었어. 그리고 금방 아쉬워졌지. 너는 내 곁이 아니라 저 멀리 북부의 어딘가, 그것도 아니면 경계의 어딘가에 있었으니까. 이럴 때면 악마가 가끔 부럽기도 했어. 적어도 너랑 마주 볼 수는 있었을 테니까.’

어느새 해가 지고, 카리타스는 텅 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엔 아까의 태양이 남긴 초록빛 잔상만이 남아있었다.

한참을 남아있던 잔상이 사라지고 나서, 카리타스는 다시 고개를 내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네게 모든 걸 말하고 나서,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어. 네가 아니라 메릭을 선택한 이상, 네가 날 원망하든, 나에게 실망을 하든 뭘 하든 전부 받아들일 거야, 말한 걸 후회하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다른 건 다 장담해도, 널 좋아하지 않을 자신은 없네. 어떡하지.’

누군가에게 혼나기라도 한 듯, 카리타스는 퍼뜩 고개를 저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런 척이라도 해야지. 그러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널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거고, 네 옆에 있을 수 없는 나를 싫어하지도 않을 거야. …언젠간 그렇게 되겠지.’

욱신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고, 카리타스는 젖은 얼굴로 일어서 침대로 향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힘겹게 이어져 침대 앞에 멈추었고, 쓰러지듯 누운 카리타스는 꿈도 꾸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번에도 집행자께서 가신다는 거야? 새 부대장인 프라이에님은 어쩌고? 물론 경계는 안정이 되긴 했지만, 집행자께선 올해만 해도 두 번이나 남부를 다녀오셨잖아.”

“그러게…. 무슨 일이 있으신가?”

기사단에서 빨래를 나르던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소리에 이디스가 몸을 숨겼다. 현재 부대장을 맡은 이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니, 눈에 띄었다간 질문 폭격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복도가 조용해지고 나서, 이디스는 주위를 살핀 후 한숨을 내쉬며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 없겠다고 털어놓던 프라이에의 표정을 떠올렸다.

‘미안, 한심한 말인 건 알겠는데 난 두코를 여기 두고 갈 수 없어.’

그 말을 함께 듣고 있던 시도폰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말했었다.

‘지금쯤이면 도착하셨겠지? 게이트도 완공됐으니까.’

잠시 후, 이디스는 프라이에의 방문을 두드렸다. 친히 문을 열어준 프라이에의 뒤로, 햇빛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두껍게 드리워진 커튼이 보였다. 이디스가 말했다.

“커튼, 걷을게요?”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프라이에였다. 그는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을 원망스럽게 보다가 ‘또 해가 떴네.’라고 중얼거렸다.

두코가 죽고 나서 프라이에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랬다가 왕국이 이민정책을 부정하게 조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나서 잠깐 정신이 돌아왔다가, 지금은 다시 이렇게 된 것이었다.

두코의 일로 상심하지 않은 이는 없었지만, 프라이에는 유독 정도가 심해, 시도폰마저 두코와 프라이에 사이를 대충 알아차려 버렸다.

‘그러니 군말 없이 가주신 거겠지. 빨리 괜찮아지셔야 할 텐데.’

시도폰과 솔라가 떠나고, 이디스는 크로마, 아페와 번갈아 가며 프라이에의 방에 찾아왔다. 프라이에는 사태 이전보다 조금 느리게 업무를 처리하긴 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었다.

이디스는 프라이에의 마음이 걱정되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플뢰르에게 의뢰해 다양한 꽃도 방에 들이고, 미리엄에게 부탁해 새로운 책도 얻어다 주었지만, 프라이에는 그것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두코가 떠오르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이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프라이에가 자기 손으로 커튼을 걷고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점점 늘었다.

이디스는 커튼을 깔끔하게 끈으로 묶으며 마침 창밖을 지나가던 아페에게 인사했다. 눈이 부신 듯 고개를 돌린 프라이에에게, 아페는 좋은 아침이라고 외치고 사라졌다. 이런 날은 자신이 아니라 이디스가 말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러셨으니까 내일은 괜찮겠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언젠간 내가 이렇게 해야 하는 날도 없어지겠지.’

그런 날을 기다리며 이디스가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 시도폰은 이디스의 예상대로 남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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