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9화

고백

“올해도 오신다고 하셔서 조금 걱정했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남부에 와주셨잖습니까.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번 안내는 이 아이가 대신할 겁니다.”

교황이 자신의 뒤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리타스가 맞이하러 오지 않는 게 의아했던 시도폰이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교황에게 인사하며 기사를 따라갔다.

‘사실 하도 자주 와서 아는 길이지만, 그나저나 카리타스는 뭘 하고 있길래 마중도 못 나오는 거지? 어디 아픈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도폰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고, 솔라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식사가 끝나고, 제망 영토 경영 건으로 회의가 열렸을 때가 되어서야 시도폰은 카리타스를 만날 수 있었다. 카리타스를 봐서 반가웠던 것도 잠시, 시도폰은 국왕이 제망의 영토를 다스리겠다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경영과 크게 친숙하지 않은 기사단이 그 일을 맡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왕실은 이미 이주민 정책 건으로 신뢰를 크게 잃은 상황이었다. 시도폰은 왕실이 어떻게 이런 제안을 뻔뻔하게 들이밀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해서, 제망을 운영하는 건에 대해서는 저희 남부 교회 쪽에서 맡는 것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사제의 말에 시도폰이 그 건에 대해서는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이후, 영지 경영 수익을 어떻게 배분할지, 세율은 어느 정도로 할지 등의 세부 사항을 논의한 끝에 회의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교황이 파장을 선언하고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회의 중간에도 그는 자주 마른기침을 하며 차를 마셨고, 일어날 때도 조수의 부축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도폰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카리타스를 알아차렸다.

“성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아까 식사 시간엔 안 보이시던데 혹시 어디 아프셨다거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회의에 쓸 자료 때문에 바빠서 점심을 걸렀을 뿐이에요. 음… 일하면서 간식을 먹었으니 그렇게 걱정스럽게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함께 회의장을 나서며, 시도폰이 카리타스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자 카리타스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저녁을 꼭 먹겠다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런 두 사람 뒤를 따라가던 솔라와 메릭은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카리타스가 시도폰에게 할 말이 있으니 조금 있다가 자신의 집무실로 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땐 솔라가 메릭의 반응을 살폈다.

카리타스에게서 미리 들었던 일은 아닌 듯, 메릭은 의아한 눈으로 카리타스를 보고 있었다. 시도폰이 물었다.

“언제쯤 가면 될까요?”

“사람을 보낼 테니 그를 따라서 와주세요. 그전에 너무 일찍 오진 마시고요, 오늘 날씨를 보니까 곧 눈이 올 것 같거든요.”

카리타스의 시선을 따라 시도폰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낮인데도 어둑어둑했고,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시도폰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추위라면 이제 익숙한걸요. 북부에서 음, 이제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 정도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기다리는 시간도 나름 재밌습니다.”

뒤이어, 숙소에서 할 일도 없다며 시도폰은 번거롭게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회의도 끝났으니 시도폰은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평화로운 시도폰과 다르게 솔라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두 분께선 원래 자주 대화를 나누셨으니 이렇게 따로 부르신 건 특이한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 호위가 전혀 모르는 일인 것처럼 굴어서 그런가.’

마음 같아선 시도폰과 동행하고 싶었지만, 솔라는 이런 상황에 시도폰이 누군가를 데리고 갈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찬 공기가 창문에 물방울로 맺혀 흘러내렸다. 솔라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삐걱거리는 소리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가셨군. 아무 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정작 당사자인 시도폰은 가벼운 마음으로 카리타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카리타스가 집무실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 답답한 실내가 아닌, 집무실 맞은편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었으니 시도폰은 정원에서 적당한 나무를 골라 그 아래에 섰다.

나무 그늘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본 하늘은 아까보다 더 짙은 색이었다.

‘잘못하면 정말 이야기하다가 눈이라도 내리겠는데? 눈이면 그나마 괜찮은 거고, 남부니까 비가 올 수도 있겠다. 우산을 가지고 올 걸 그랬네.’

한편, 카리타스는 일을 다 끝내고 돌아서서 창문을 보고 나서야 시도폰이 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도폰에게 입 모양으로 곧 나간다고 말하며 품에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메릭은 카리타스에게 외투를 챙겨주며 말했다.

“날이 추우니 실내에서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불편하시다면 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메릭은 창문에 커튼을 쳤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니, 전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시도폰은 카리타스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예쁘다. 갑자기 웬 꽃다발이야?”

“요새 경계에서 계속 승전보가 들려오니까, 그걸 기념하기 위한 꽃다발이야. 언제나 고마워.”

연둣빛이 도는 하얀색의 아담한 꽃들이 흰색 포장지에 곱게 다발로 묶여있었다. 리본은 당연하게도 하늘색이었다. 시도폰은 리본을 가지고 손가락에 감는 등 장난을 치며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뭐. 꽃 이름이 뭐야?”

“헬레보어(Hellebore)라는데, 그것보다는 크리스마스 장미라는 이름이 유명하더라고.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장미라니 마침 너한테 어울리는 것 같아서 이걸로 했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연이어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로 다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카리타스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떠올랐고 그걸 시도폰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 혹시 일을 덜 끝내고 온 거야?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거라면….”

카리타스가 다급히 대답했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잠깐 자신이 줬던 꽃다발을 내려다본 카리타스가 고개를 들고 시도폰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고동색의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폰의 뒤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미뤄두고 있었는데…. 나,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 상대는 메릭이고 작년 겨울부터 그렇게 됐어.”

“….”

휘둥그레진 눈이 카리타스를 본 채 멈춰있었다.

시도폰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식하지 못한 사람처럼 말없이 눈만 깜빡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는 시야에 들어온 헬레보어가 아까와 다르게 색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꽃다발을 쥔 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한참 말이 없던 시도폰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했다. 심지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카리타스는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못 들었거나 잘못 들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하게 되었다.

“축하해. 아페 저하도 북부로 올라와서 네 말 상대가 없을 걸 걱정했는데, 잘 통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다행이야.”

사실 시도폰은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메릭보다 내가 먼저 널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진심은 그가 카리타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삼켜졌다.

누군가와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의 얼굴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슬픈 얼굴로, 카리타스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도폰은 진심과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보았자 카리타스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난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해야 네가 다시 웃는 걸 볼 수 있을까.’

태연한 척하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시도폰은 흔들리려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낮추고 붙들어가며 말했다.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안 들키려면 조심해야겠다. 그것 때문에 불안했던 거야? 안색이 안 좋은데… 걱정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해. 네가 날 믿고 말해준 걸 텐데.”

“…응. 고마워.”

“행복해?”

시도폰의 물음에 카리타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눈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꽃다발에서 튀어나온 꽃송이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기 시작하자, 시도폰은 복도로 데려다주겠다며 카리타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손은, 평소처럼 카리타스의 손을 맞잡지 않고 그의 소매를 잡았다.

복도에 도착한 시도폰의 얼굴에선 미소가 조금 무너져내려 있었다. 카리타스가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때, 시도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행복하다니까 다행이야. 표정이 너무 심각하길래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날이 갑자기 추워지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소매를 붙들고 있던 시도폰의 손이 떨어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카리타스의 머리 위에 붙은 눈송이를 떼어주려다 단념하고 손을 내렸다.

고개를 숙인 카리타스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싫, 원망스럽지 않아? 나한테 실망하지 않았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카리타스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난 성녀잖아. 남들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마땅한 존재인데,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방금… 말한 거니까.”

시도폰은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넌 성녀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내 친구야. 네가 행복해졌다는데, 왜 그런 규칙을 어겼다고 널 원망할 거로 생각해. 전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 나도 이만 가볼게.”

대답을 듣지 않은 시도폰이 돌아섰다.

흑색의 망토가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져갔고, 카리타스는 나직하게 시도폰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작고 힘없는 목소리는 눈보라에 금방 묻혀버리고 말았다.

시도폰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카리타스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끝없이 흘러나왔지만, 세차게 내린 눈은 시도폰의 발자국을 하얗게 덮어 없앴다.

마치, 아무도 카리타스에게 찾아온 적 없었던 것처럼.

 


숙소에서 막 나온 기사가 시도폰을 알아보고 말을 걸려다가 묵례만 하고 지나갔다. 기사가 제 상태를 모르는 척해준 것을 깨달은 시도폰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었다.

다행히 다른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헬레보어는 오랜만에 본다든가, 플뢰르가 본 적 없는 꽃일 테니 보존 술식을 걸어두겠다든가 하는 말이나 해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장난스러운 반응에, 시도폰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꽃다발을 넘겨주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솔라, 안에 있나?”

“네,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물으며 솔라가 방문을 열었다. 시도폰은 그에게 변장 도구를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마을로 내려가시려고 하십니까?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솔라는 두 명분의 도구를 챙겼다. 의아한 얼굴로 시도폰이 솔라에게 물었다.

“자네까지 분장할 필요는 없네만…. 겨울이라 여름보다는 낫겠지만, 불편하지 않겠나?”

그러자 솔라는 변장하지 않은 채로 마을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들켰던 사실을 말해주었다. 불량배에게 코지가 붙들렸던 때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코지한테 보답을 안 해줬네. 이번에 외출하면 뭐라도 사다가 줘야겠군. 엔간한 건 다 가지고 있을 테니까…. 비싸고 예쁜 촛대는 어떨까? 그 애는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니까 초를 많이 쓸 거란 말이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솔라가 시도폰의 분장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기사단마저 알아보지 못할 얼굴로 변장을 하고 빠르게 신전을 벗어나 마을로 내려갔다.

문득 생각난 듯 솔라가 물었다.

“어디부터 가실 생각입니까?”

“음, 우선 코지에게 줄 선물부터 사고…, 술을 좀 마시고 싶네.”

의외의 말에 솔라는 아까 시도폰과 카리타스의 대화에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는 묵묵히 시도폰을 따랐고, 코지에게 줄 선물을 대신 챙긴 뒤 술을 주문했다.

조심스레 술을 마시기 시작한 시도폰은, 나중에 가선 솔라가 술을 따르기도 전에 술병을 뺏다시피 받아들고 자신의 잔에 냅다 들이부었다. 솔라는 그런 시도폰을 말리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 그의 속이 너무 상하지 않도록 안주를 계속 먹여주고 있었다.

‘피데이스가 생각나네.’

옆 테이블의 나이든 사내들이 두 사람 쪽을, 정확하게는 시도폰을 보며 말했다.

“저 처자는 실연이라도 당했나? 아주 그냥 들이붓는구먼.”

“젊을 땐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암. 나이가 들고 나서는 저런 것도 못 한다네. 상대해주는 아가씨는 좀 힘들겠지만, 잘 위로해주게나!”

이미 몇 잔은 걸친 듯 붉은 얼굴로 말하는 사내들을 무시하고, 솔라는 시도폰만을 보고 있었다.

술을 마시자고 데려왔지만, 정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만 퍼먹는 이런 상황은 솔라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솔라는 시도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러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대답이 똑같았기에 솔라는 이제 시도폰이 적당히 마시다가 잠들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여기선… 말… 못, 해.”

결국, 술에 처참하게 절여져 테이블에 엎어진 시도폰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말하지 않고 버텼다.

한숨을 쉰 솔라는 이걸 어떡하냐는 술집 주인의 시선에, 멀쩡히 걸어가 값을 치렀다. 그리곤 시도폰을 부축해 가게를 나섰다.

“단장님, 이렇게 나오긴 했지만 제가 당신을 이렇게까지 끌고 신전으로 들어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숙소를 잡을까요?”

“….”

들리는 대답이 없어 얼굴을 확인해보니 시도폰은 솔라에게 기댄 채 잠들어있었다. 솔라는 난감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여관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누군가 솔라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솔라 씨? 아니 얼굴이 다른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똑같네. 혹시 자매나 친척이신가요?”

“…본인입니다. 지난번에 원래 얼굴로 왔더니 들켜서 이번엔 분장한 것뿐이에요.”

“혹시 어깨에 멘, 죽은 개구리 같은 인간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말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당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코지가 놀란 눈으로 시도폰을 바라보았다. 코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술 냄새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집행자셨군요…. 아무래도 그 상태로 신전까지 올라가는 건 힘들겠네요.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믿을 만한 여관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앞장선 코지를 따르며, 솔라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코지는 그에게 고생이 많다고 말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코지가 거주관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시도폰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코지를 붙들었다.

“…코지다.”

침대에 누운 채, 코지의 치마를 붙잡은 시도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던 솔라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시도폰을 제지했고, 코지는 간신히 제 치마가 흘러내리려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은 코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여기선… 말 못 해.”

몇 번이고 들었던 말에 솔라가 말했다.

“여긴 여관입니다. 술집도 아니고, 신전도 아니니 편히 말씀하세요.”

“그래?”

그제야 시도폰은 정신을 차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목이 마른 듯 기침을 했고, 솔라가 건네준 물을 마신 뒤에야 갈라지지 않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몇 번 눈을 껌뻑인 시도폰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절대로. 알겠지?”

“맹세하겠습니다.”

“네가… 아니, 집행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자꾸 틀리는 호칭에 코지가 솔라의 눈치를 살짝 보았지만, 솔라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도폰은 천천히 아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야. 나는 카리타스가 행복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봐. 엄청 속상하고 서운하더라.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카리타스한텐 내가 그냥 친구였던 거잖아. 그래서, 그게….”

시도폰은 말하면서 점점 부끄러워졌는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솔라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반면, 코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머지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코, 코지?”

“미친 거 아냐?”

“내가?”

“너 말고!”

자신보다 더 화가 난 모습에 시도폰이 저도 모르게 웃자, 코지는 뭐가 재밌냐며 시도폰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것도 잠시, 코지가 손을 놓자 시도폰은 아프다고 툴툴거리며 제 볼을 문질렀다.

어느새 시도폰의 눈가에 맺히려던 물방울은 쏙 들어가 버렸다. 그걸 보고 나서야 코지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솔라처럼 팔짱을 꼬며 말했다.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널 좋아하는 사람도 엄청 많잖아. 그중에 네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사람이 카리타스 한 명뿐이겠어?”

코지의 말에 시도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그렇다니까, 맞죠, 솔라 씨?”

망설이던 솔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코지가 시도폰에게 보이지 않는 쪽 손으로 솔라의 팔을 살짝 꼬집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시도폰은 솔라까지 코지의 말에 동의하는 걸 보고 ‘정말 그런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코지는 시도폰을 다시 침대로 누우라고 밀었고, 술 때문에 나른했던 시도폰은 그대로 밀려가 침대에 뻗었다.

“봤지? 솔라 씨도 그렇다잖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자. 외박 안 들키려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거 아냐.”

“으응….”

시도폰은 자기 싫다고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더니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솔라와 코지는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도폰이 잠든 방과 그 방 사이의 문이 잘 닫혀있는지 확인한 솔라가 코지에게 물었다.

“혹시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맞아요. 지난번에 카리타스한테 받았던 서류 있죠? 그걸 받으러 불려갔다가 직접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시도폰한테 말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결국 말을 해버렸다니….”

“사실 저도 성녀님과 호위의 대화를 들어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말씀하실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께 들키기까지 했다고요?”

“예, 몰래 들은 거라 그분들은 저를 모르셨겠지만요.”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코지는 책상을 내려치려다가 옆방에서 자고 있을 시도폰을 생각해 천천히 주먹을 쥐며 말했다.

“교회에서 카리타스가 힘들어했다는 거, 그래서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어요. 시도폰이랑 편지로 연락은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니 아쉬워하는 것도요. 정말, 정말 백번 양보해서 메릭과 교제하는 것까지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걸 왜 시도폰한테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죠. 그때 이야기하는 거로 봐선 호위와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도 있었을 테고….”

“또요?”

눈을 세모나게 뜬 코지가 입을 삐쭉거리며 물었다. 턱을 괴고 있던 솔라는 자신이 과하게 추측했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집행자께 사랑했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든가? …설마 그럴 리가, 다른 사람이랑 교제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런 것까지 바랄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툴툴거리던 코지는 이제 이걸 어떡하면 좋냐고 머리를 감쌌고, 비슷한 심정이었던 솔라도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시도폰은 두 사람에게 추태를 부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솔라에게서 받아든 촛대를 코지에게 건네며 거주관까지 바래다주었다.

시도폰이 숙소에 다다라서 솔라에게 말했다.

“어제오늘은 정말 미안했네. 도와줘서 고마웠어.”

“…괜찮으신 겁니까?”

“솔직히 아직 충격이 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네. 코지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글쎄… 누군가를 그 애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뭐, 이대로 그런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문제가 있겠나?”

애써 어깨를 펴 당당하게 말하는 시도폰에 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식당으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식당이라면 카리타스와 만날 가능성이 컸다. 금방 쭈그러든 시도폰은 식사를 방으로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고, 솔라는 군말 없이 그 말에 따라 혼자 식당으로 향했다.

예상과 다르게 카리타스는 식당에 없었다. 대신 그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인지 메릭이 주방에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솔라는 그가 식당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성녀님께서도 똑같은 요청을 하셨는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별거 아닙니다. 오늘도 회의가 있을 예정인데 아직 준비가 덜 끝나셔서요. 자리에서 식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방 담당 사제가 알겠다며 바구니에 음식을 이것저것 담아주었다. 아까 메릭이 들고 간 것보다 양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집행자께선 기사시니까 보통 사람보다 많이 드시겠죠?”

“…감사합니다.”

차마 거기다 대고 시도폰이 자신보다 적게 먹는 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솔라는 묵직한 바구니를 안고 숙소로 돌아갔다.

시도폰은 솔라의 표정과 바구니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두 사람은 열심히 그것들을 먹어치우다가 남은 음식은 아침 훈련을 하고 온 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회의 장소에서까지 서로를 피할 수는 없었기에, 시도폰은 회의 동안엔 카리타스를 최대한 쳐다보지 않았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회의실을 나섰다.


“아니, 그런데 내가 이렇게 피해야 할 이유가 있나?”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시도폰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지나가던 기사가 뭘 피하냐고 물어보자 시도폰은 태연하게 자네 뒤에 붙어있는 유령이라고 대답했다.

“예? 정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잖나. 기사가 되어서 유령 같은 걸 믿으면 쓰나.”

“하지만 유령은 정말 무섭단 말입니다….”

“….”

지금 제 앞에서 유령이 무섭다고 몸을 꼬고 있는 이는 전장에서 태연하게 악마의 머리를 둔기로 몇 개씩이나 부순 이였다. 그 모습을 떠올린 시도폰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친구 만나러 가네.”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시도폰은 카리타스의 집무실을 찾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카리타스는 대화 내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시도폰은 짧게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이 일 이후로 그가 수행단을 데리고 남부를 떠날 때까지 카리타스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일은 없었다.


헬레보어(Hellebore) https://en.wikipedia.org/wiki/Hellebore

저는 여기서 Culture 항목의 첫줄을 참고했어요:

H. niger is commonly called the Christmas rose, due to an old legend that it sprouted in the snow from the tears of a young girl who had no gift to give the Christ Child in Bethlehem.

글고 헬레보어의 꽃말은 ‘존재 이유’(https://www.nihhs.go.kr/usr/persnal/Flower_today.do)라고 하는 곳도 있고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주세요.’(https://flo-lounge.co.kr/article/%EA%BD%83%EB%A7%90%EC%82%AC%EC%A0%84/3/1785/page/1/ )라고 하는 곳도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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