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2화

보호소 출발 전날

“오….”

자신들의 방 책상에서 책 한 권을 펼쳐두고 내려다보던 폰과 카리타스는 폰이 작게 중얼거린 이후로 말없이 종이를 넘겼다. 사제 관계였던 엘로와 아벨이 점점 미묘한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데, 그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난다는 것도 문제였고 사랑의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근데 이런 책은 어디서 구해온 거야?”

“그러게, 나도 거주관 도서관에 이런 내용의 책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냥 책 제목이 맘에 들었고 책등이랑 표지가 많이 닳았길래 재밌는 책이겠거니 하고 들고 온 거였는데.”

역시 이런 책은 좀 부담스럽지 않냐며 카리타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덮었다. 곧바로 책을 책장에 꽂아두려던 카리타스에게 폰은 ‘그래도 읽기 시작한 책이니 끝까지 읽고 싶어. 내일, 이어서 보면 안 될까?’라고 물었다.

“괜찮겠어? 나도 결말이 궁금하긴 한데.”

“응! 당황스럽긴 하지만 재미는 있는 것 같아.”

폰이 독서에 재미를 붙였으면 하는 마음은 코지와 카리타스가 같았기에, 카리타스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책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불을 끄고 각자 침대에 누워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밤 인사를 했다.

방엔 온열 도구로 데워진 공기가 감돌았고 들짐승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적막 속에서 폰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었다. 한쪽에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카리타스의 귀에는 쿵쿵거리는 제 심장 소리만 맴돌았다.


교황이 언젠가 자신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교황 본인의 미래가 아닌, 카리타스의 미래를 마음대로 짐작해버린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이긴 하나, 사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기억이 있다. 워낙 어이없는 이야기라 잊기 쉽지도 않다고 생각했건만, 어느 순간부터 그 내용이 기억나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 북부에서 지내는 것에 적응한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이 생활이 계속 이어져서 미래에도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폰과 만난 날부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고, 북부에 와선 탁 트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을 느꼈다.

반짝이는 복도가 아니라 바람을 맞아 풍화된 벽을 따라서 걷고, 책상에 앉아 가만히 서류만 들여다보다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수업 시간에 다 같이 공부를 하고 앉아있으면 꼭 학교에 간 것 같기도 했고 실없는 이야기를 마음껏 할 땐 살아있다고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귓가에 울리던 두근거림이 점차 잦아들었고 어느새 까무룩 잠들어버린 카리타스는 다음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어두운 창밖에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외에는 적막했다. 따뜻한 공기는 여전했고 폰이 자면서 내는 작은 숨소리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지표였다.

카리타스는 급하게 내팽개쳐서 주름이 진 이불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없는 걸음으로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니 온통 새까만 하늘과 그 속에 파묻힌 숲만 끝없이 뻗어있었다. 어느새 얼굴에 흐르고 있는 식은땀을 닦고, 카리타스는 제 쪽으로만 바람이 통하도록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서늘했던 것은 마음뿐만이 아니게 되었을 즘, 간신히 카리타스는 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카리? 무슨 일 있어?”

막 깨서 잠긴 목소리가 카리타스의 등 뒤에서 나직하게 울렸다. 시도폰은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여전히 창문은 열려있었고 추운 공기에 몸을 이불로 둘둘 감싼 시도폰이 겨우 눈을 떴을 때 카리타스는 평소 같은 얼굴로 밖을 보고 있었다.

“아, 깼어? 미안해. 그쪽으로 바람이 안 가게 열었는데 너무 오래 열어뒀나 봐.”

태연한 어조로 폰에게 다시 자도 괜찮다고 말하며 카리타스는 창문을 닫았다. 막, 자리에서 일어난 폰이 책상 위 작은 촛불을 켰고, 어두운 설원을 등진 카리타스는 촛불을 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폰을 바라보았다.

“잠도 많으면서, 지금부터 깨어있으면 나중에 점심 기도시간 때 졸 것 같은데? 얼른 다시 자자.”

“응, 나도 다시 잘 거야. 뭐 하나만 확인 좀 하고.”

웅얼거리던 폰은 점점 카리타스에게 다가가더니 보폭 정도의 거리에서 멈추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리타스를 살폈다. 갑자기 창문과 폰 사이에 갇힌 카리타스는 폰의 시선을 피해가며 왜 이러냐고 물었지만, 폰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꿈에서 느꼈던 공포로 두근거리던 카리타스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마침내 폰이 입을 열었을 땐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봤던 건 줄 알았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벽에 바싹 붙어서 거리를 좀 벌린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서야 카리타스를 빤히 바라보던 폰이 시선을 거뒀고 머쓱한 듯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봤던 표정이랑 비슷해서 걱정됐어. 무슨 꿈을 꿨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 미안, 그런 표정이 왜 나왔는지 잘 모르겠네? 꿈 내용도 기억이 안 나. 깨고 보니까 무서워했던 감각만 남아있었어.”

말할 수 없다. 당연히. 양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열심히 표현하자 폰은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다만 한 손으로 카리타스의 손을 잡고 끌고 갔다는 게 아까와는 다른 점일 것이다.

당황해하면서도 카리타스는 순순히 이끌려 시도폰의 침대 앞에 섰고 폰은 손을 놓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벽 쪽으로 붙어서 누웠다. 비어있는 자리를 두드리는 폰의 얼굴에서 걱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카리타스도 못 이기는 척 같이 누웠고, 두 사람은 기상 종소리가 끝날 때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아침부터 고기 냄새가 진동한다며 폰은 멧돼지 수육을 드디어 먹어볼 수 있는 거냐고 기뻐했다. 반면 떨떠름한 표정의 카리타스는 아침부터 웬 고기냐고 생각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음, 근데 우리 힘쓸 일 있나? 아침부터 웬 고기야?”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두코는 옆에 앉은 프라이에에게 물었지만, 프라이에도 영 생각나는 게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 시기에 하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오늘, 2월 13일 맞나?”

프라이에의 맞은편에서 반찬을 깨작거리고 있던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2월 14일을 되뇌던 카리타스의 머리를 어떤 사실이 스치고 지나갈 때, 두코가 생각났다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내일부터 우리 보호소에 봉사활동 하러 가잖아! 경계에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간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고기를 먹였구나? 열심히 힘써야 할 테니까.”

“보호소…. 그렇네, 그거구나.”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그 이후의 대화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젯밤의 꿈과 북부에 오기 전에 꿨던 꿈을 조합해보면 이번 보호소 봉사활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느라 폰이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거나, 스키피가 지나가면서 말을 건다거나 하는 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두코는 카리타스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며 폰을 쳐다보았다.

“사실 걱정되는 게 있긴 한데 물어봐도 말을 안 해주더라고…. 나중에 다시 물어볼까 해.”

“그건 그렇다 치고 학교 쪽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왠지 마음에 안 들게 웃긴 하지만.”

프라이에는 예비 사제들 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두코는 저런 표정들 많이 봤다며 질린다고 몸서리쳤고 어느새 정신을 차린 카리타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등지고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어떤 표정인지는 알 거 같아. 저런 것도 선이라고 봐야 할까. 도움을 아예 안 주는 것보다 낫긴 하겠지만.”

그 말에 뒤를 돌아본 폰은 오드샤와 눈이 마주쳤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깔끔하게 그릇을 비운 폰이 턱을 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난 오드샤가 이번 기회에 뭔가 깨달았으면 좋겠어. 그때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직접 보호소 아이들에게 봉사하면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프라이에는 ‘글쎄, 이미 봉사활동은 많이 했을 텐데.’라는 부분은 제외하고 ‘그러게’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확신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불신이라고 명명해도 괜찮을 정도로.

오전 모임에서 베론은 내일 보호소 봉사활동 일정을 설명했다. 수행 기간에 이뤄지는 구호 활동은 총 3회로, 보호소 봉사활동이 그 첫 번째이니만큼 열심히 하길 바란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워프 시설은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다. 옛날엔 직접 사람들이 걸어서 갔고 그것 또한 수행 일부였지만, 기동성을 고려해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거다. 보호소의 아이들은 대부분 10살도 안 되었으니 이 점에 유의해서 교육, 놀이 봉사에 참여하도록. 질문 있나?”

“구체적으로 저희가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요?”

적막한 와중에 폰이 손을 들고 질문하자 베론은 도착해서 한 번 더 설명을 해주겠지만-으로 답변의 서두를 열었다.

“일주일 동안 보호소에서 환자 치료 보조와 아이들 교육, 놀이 등을 담당하는 게 너희다. 생활 시설 점검은 기사들이, 환자 치료는 사제들이 맡을 테니 부담스러울 것 없지. 본래 수행단이 오지 않더라도 주기적으로 보호소 감찰을 하는 동안 진행되던 것들이지만 기사나 사제들이 본직을 수행하는 동안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서 수행단이 그 역할을 맡는 거다. 대답이 되었나?”

“네! 감사합니다.”

더는 질문이 없어 수행단은 그대로 해산했다. 곧바로 방으로 돌아온 폰은 짐을 꾸리면서 책 여러 권을 욱여넣다가 <장미의 설화>가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짐을 엎었다.

그 모습을 본 카리타스가 오늘 다 읽고 자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폰은 그게 좋겠다고 답하며 짐이 든 가방을 꾹꾹 눌러 잠갔다. 터질 것 같은 폰의 가방과는 다르게 카리타스의 가방은 옷가지 외에는 별로 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많이 안 챙겨가도 될까?”

“내 기준에서 필요한 건 다 챙긴 거 같은데, 넌 뭘 넣은 거야?”

“거기 가서 읽어줄 책이랑 노트랑 놀이도구, 옷. 딱 필요한 것만 넣었어.”

우쭐거리는 폰과 그의 가방을 번갈아 보던 카리타스는 가방을 열어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하, 하지만 겨우 잠근 건데.”

“그거 나중에 네가 매고 다녀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마차로 보호소까지 이동하긴 하겠지만 그 안에서 또 걸어야 할 수도 있잖아.”

결국, 폰은 느릿한 손놀림으로 가방을 열었고 카리타스는 가방 속의 많은 공간을 차지한 놀이도구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카리타스가 하나씩 도구를 밖으로 꺼내기 시작하자 폰은 말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그러면 남는 게 없는데!”

“괜찮아, 거기 가면 뭐라도 있겠지. 게다가 보호소에 주기적으로 방문했다고 하니 기사단 쪽에서도 뭔가 준비해둔 게 있을 거야. 우리가 고생할 필요는 없어.”

책까지 전부 빼내려던 카리타스는 폰의 표정을 보곤 책 한 권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폰이 들고 있던 책만 받아서 가방을 닫았다.

“책도 이 정도 두께 두 권짜리면 충분해. 우린 일주일만 있다가 오는 거니까.”

“…알겠어.”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폰이 입술을 삐쭉이며 대답했고 카리타스는 이후, 폰이 몰래 공책 한 권을 가방에 넣는 것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 표정이 정말 귀엽더라고.”

“응….”

보호소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데도 검술 훈련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본관에 모여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카리타스는 스키피와 검을 맞대는 와중에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스키피가 속으로 ‘주접이다.’라고 생각할 법한 말을 이어갔는데, 스텝을 밟다가 폰과 가까워지는 곳에 가면 입을 꾹 다물고 훈련에 집중하는 척했다. 다시 폰과 멀어지자, 스키피는 그쪽을 살짝 흘겨보다 당사자에겐 그런 것들을 말하느냐고 물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 어떻게 말해? 너도 참….”

“…아니, 들을 땐 당황스러워도 좋아할 것 같은데.”

분명 스키피는 카리타스의 차분하고 도도해 보이는 모습이 좋아서 가까이 갔던 건데 친해지고 사람을 다시 보니 이런 순애보가 따로 없었다. 카리타스를 그런 쪽으로 좋아했던 마음은 부스러져 사라졌고 지금은 얘네 언제 사귀냐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스키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동거까지 하는 사이니까 사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서 그 말만은 꾹 참고 검을 내질렀다. 

한쪽만 심란한 스키피 조와는 다르게 프라이에와 오드샤는 여전히 양쪽 다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검을 나누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프라이에는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느냐고 물었고 오드샤는 콧방귀를 뀌곤 전혀 반성 없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자꾸 뭘 반성하라고 말하는데 말이지, 평민이 뭐 대단한 게 있다고 인정해달라는 거야? 그럼 여기서라도 이겨보든지!”

챙-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며 프라이에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저릿한 통증에 프라이에는 오른쪽 손목을 주물렀고 그를 내려다보며 오드샤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꼭 네가 아니더라도 북부 수행 기간에 평민이 대단한 성과를 내오면 인정해주지, 엎드려 절이라도 할까? 맏이인 네가 이렇게 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어제는 네가 졌으면서 그런 말 함부로 해도 괜찮아?”

“흥, 어젠 우연히 힘이 풀린 거다. 그게 네 실력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제안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없겠군.”

오드샤는 검을 제자리에 돌려두고 본관을 나가버렸고 프라이에는 두코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침착하고 참을성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프라이에의 얼굴은 분노로 붉어져 있었다. 그는 두코가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그제 서야 자신의 상태를 인식했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 미안. 조금만 더 참을걸. 나만 그렇게 대했으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다 같이 싸잡혀서 그런 취급 받으니까 못 참겠더라고.”

“아냐, 잘 참았어. 얼굴에 검 날리고 그런 거 아니었잖아?”

“농담도.”

프라이에가 힘을 풀고 피식거리며 검을 주워들었고 두코는 그런 프라이에의 등을 팡팡 두들겨 주었다. 오드샤와 프라이에가 대전하는 동안 프라이에가 이긴 횟수는 드물긴 했다. 애초에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4살이나 났으며, 프라이에가 북부에 와서 검술을 배운 것과 다르게 오드샤는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가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다만 이렇게 검을 맞대는 동안은 그런 것들을 고려할 수가 없으니 오드샤는 제 실력만으로 이겼다고 저렇게 우쭐거리는 것이었다. 폰에겐 오드샤가 두고 간 검과 그의 자세가 계속 겹쳐 보였다. 닳고 닳은 프라이에의 것과 다르게 오드샤의 검은 새것처럼 매끈했고, 아직도 엉성한 다른 사람들의 자세완 다르게 오드샤의 자세는 귀족의 표본과 같았다.

오드샤가 저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살아온 배경을 고려하는 것은 언제나 아쉽게 살아온 사람들의 몫이고, 풍족한 게 당연한 이들은 자신의 재능과 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으니까. 앞서 프라이에와 오드샤를 비교해본 것도 폰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오드샤는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폰은 애써 오드샤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이미 머리꼭지가 단단히 돌아버린 상황에서 그 생각은 쉬이 잊혔고 오드샤가 절하는 모습이나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득해졌다.

“눈빛으로 사람 찌르겠네. 내일 보호소 가서 애들 어떻게 놀아줄지 생각해봤어?”

카리타스는 갑자기 튀어나와 폰의 시야를 가렸고 놀란 폰은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풀고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스키피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고 카리타스는 폰이 더 화를 내기 전에 팔짱을 끼고 본관 문을 열었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폰의 뒤로 두코와 프라이에가 따라 나가며 문을 닫았다.


자기 전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는 폰에게 맞장구를 쳐주던 카리타스는 어젯밤 꿈을 떠올렸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깬 꿈이었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마저도 기록해두기 전, 폰에게 들키는 바람에 참고할 만한 단서도 없었으니 꿈을 복기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얀 자작나무의 가지가 엉키고 엉켜서 하나의 기둥이 된다. 자작나무 숲은 끝없이 이어진 기둥을 이루고, 아치형의 장엄한 천장을 떠받친다.

끝을 모르고 높아지던 천장이 어느새 녹아내려 하나의 기둥만 남는다. 그 아래, 봉긋한 무언가는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고 당하긴 싫어. 조금이라도 기억해내면….’

조용히 눈을 감은 카리타스는 폰이 자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않았고 폰이 조심스레 자신을 침대에 눕히는 손길을 받아들였다.

폰이 확인차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을 땐 숨소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져 하마터면 깨어있다고 말할 뻔했지만, 지금 깨버리면 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간신히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억지로라도 솟아있던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집중했지만 실패했다. 다음 기억의 편린으로 넘어가자.

질척한 진흙 같은 것에 더러워진 사람이 울부짖고 있었다. 원인이 슬픔인지 분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그걸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흐물흐물한 말들엔 그런 것들만 담겨, 바닥으로 떨어지는 비명이 지독한 감정으로 호수를 만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도 그곳에 잠겨 들었다.

잠깐 그와 나의 시야가 뒤바뀐 것 같기도 했다. 시야는 마구잡이로 찢겨나갔다.

붉은색, 흰색, 검은색이 회전하고, 뒤섞인 풍경 속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빛나니 누군가는 웃었던 것 같다.

아니 울고 있었나?

“불 끌게? 잘자.”

머릿속에서 펼쳐진 풍경에 불쑥 폰의 말이 끼어들었다. 감은 눈으로 보이던 빛이 사라지고 깜깜한 어둠만이 남았다. 조용해지기까지 했으니 회상에 집중하기 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울부짖던 그 사람이 누군지, 그가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고 했던 건데 그러기는커녕, 불안감만 더해졌다. 조심스레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고 살짝 고개를 돌려보면 잠든 폰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도 내 쪽을 보고 자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방 익숙해진 풍경에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꿈의 마지막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던 것과 그 이유만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계시를 받을 때처럼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내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내 입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신의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푸른 정복을 입은 채 내 앞에서 무릎 꿇은 이는, 고개를 숙이고 전언에만 집중했다.

나이는 오드샤와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다부진 체격이 옷 위로도 드러났고 이 사람은 정말 기사구나-라는 딴생각만 머리에 들이차던 것도 기억한다. 어차피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

“…하여, 그대의 이름이 후세에 세례명으로써 이어지기를 바라니.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그제 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갈색 눈동자에 색유리가 비치고 그것을 등진 내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어조와 끝맺으며 취하는 동작은 엄숙한 기사의 것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표정만은 어렸을 적과 전혀 다르지 않았으니, 나는 그를 너무나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옆의 서기가 황금을 갈아 넣은 안료로 그의 이름을 받아적었다.

‘이제 그 아이는 온전히 나의 것이란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그래,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끔찍한 감사에 비명을 지르고 그 광경에서 떨어져나왔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다른 장면들과는 다르게 이 순간만은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는 게 화가 났다.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이 운명에 저항할 수 없다고 놀리기라도 하는 건지.

“하….”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다행히 폰이 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폰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미래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어차피 교황과 신의 뜻대로 될 테니까. 내가 먼 훗날의 일을 걱정하고 대비한다 한들, 바뀔 수 있는 게 있을 거라는 믿음 따윈 없었고 당연히 바뀔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들을 신경 써야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일단 지금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없었다.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폰이 뛰어들지 않게 잘 붙잡고 있는 수밖엔.

“열심히 할게. 너만… 날 놓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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