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3화

이주민 도착

1501년 5월 20일 밤

“단장님, 주무십니까?”

솔라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렸다. 시도폰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깨어있다고 답했다.

“성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응?”

시도폰은 벌써 아침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지만, 여전히 방은 어두웠다. 자기 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아직 밤인데 왜 찾아온 거지?’

“이, 일단 숙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리게.”

허겁지겁 머리카락을 묶으며 시도폰이 외치자, 솔라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당장 전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이미 모셔왔습니다.”

“어디로?”

“문 앞이야. 얼른 열어줄래?”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시도폰이 촛불도 켜지 못하고 방문을 슬쩍 열었다.

카리타스는 솔라에게 물러가 보라는 듯 눈짓하고 살짝 열린 문을 잡았다. 깜짝 놀란 시도폰이 무의식적으로 문을 당기자 카리타스가 다시 힘주어 문을 열었다.

“닫지 말고. 급하게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온 거야.”

“미안한데 나 지금 잠옷이라, 옷만 갈아입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

“…괜찮아. 신경 안 써.”

그렇게 말하며 카리타스는 아예 시도폰의 방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시도폰은 카리타스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얌전해졌다.

“예언이 떨어졌어. 당장 북부로, 아니 경계로 돌아가 줘.”

“경계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말해줄 수 있어?”

카리타스의 말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시도폰이 물었다.

“악마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칠 거야. 자연스럽게 경계 근처를 떠돌던 악마가 아니라 누군가가 소환한 악마라서… 지금 거길 지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아니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말을 흐리며 끝맺은 카리타스가 시도폰의 불안한 시선을 피했다. 급한 마음에 시도폰은 무심코 카리타스의 손을 잡았다.

“그럼, 언제 그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있어?”

“미안, 그런 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으셨어. 그러니 최대한 빨리 출발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남은 행사는 이쪽에서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당장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가.”

“알겠어. 기사들한텐 내가 전달할게. 아, 미안, 놔줄게.”

잡을 때처럼 빠르게 카리타스의 손을 놓아준 시도폰이 기사들에게 당장 짐을 챙기라고 명령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은 가타부타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 카리타스는 시도폰을 배웅하며 말했다.

“가는 길엔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그런 걸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빨리 가는 것만 생각해.”

말고삐를 쥔 시도폰은 기사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밤인데도 그들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고, 시도폰도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축성을 걸어줬구나. 고마워, 이만 가볼게.”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도 이야기를 듣고 기사단을 배웅했고, 시도폰과 기사들은 곧장 북쪽으로 내달렸다.

시도폰은 첫 게이트를 마주치자마자 기사들에게 몇 개를 바로 뛰어넘겠다고 말했고, 말리는 이는 없었다.

‘프라이에는 지금 북부 주민들 문제 때문에 원래 본부에 있을 테니까 나보다 일찍 도착하겠지만, 당장 프라이에한테 연락할 수단이 없어. 아페 저하가 만약 예언을 똑같이 들으셨다면 그쪽에도 연락하셨을 텐데.’

제발 프라이에와 이디스를 불러 함께 대비하길 바란 시도폰이 열심히 북쪽으로 달리는 동안 두코는 아페와 대책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페가 예지몽을 꾼 다음 날(22일), 두코는 프라이에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아페에게 이야기했다. 아페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본부까지 가는 것만 해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나요?”

“아, 서신을 직접 보낸 게 아니라서 그것보단 빠를 겁니다. 얼마 전에 완성된 전송기가 배치되었다고 하니 아마 2일 만에 서신의 내용은 도착할 겁니다. 여기에 프라이에가 언제까지 올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가능하면 이민자들이 오기 전에 도착하셨으면 좋겠는데요….”

아페의 걱정에 두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아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길한 예언이고 마침 집행자께서도 안 계시니 불안해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걱정이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걱정만으로 머리를 채우진 마세요.”

“휴, 알겠어요. 부족하다던 재료는 다음 주에나 온다고 했죠? 이민자들이 도착하는 다음 날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해서 하루 정도는 당겨질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럼 다행이죠. 그런데, 크로마는 어디 갔나요?”

크로마도 부관으로서의 일이 있었으니 늘상 두코의 옆에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는 늘 두코의 사무실에 있었던 그가 보이지 않자, 아페가 의아해했다.

“요새를 점검하라고 보냈습니다. 인원은 혹시 몰라 평소의 두 배 정도로 데려가라고 했고요.”

“그렇군요. 이주민이 오기 전까지 저는 그럼 오염되었던 지역을 둘러볼게요.”

“감사합니다. 오염에 닿지 않게 주의하시고요.”

정화된 지역을 꾸미고자 시작했던 조경은 어느새 그 땅의 오염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심은 꽃이 잘 자라나면 해당 구역은 제대로 정화가 된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린다든가 하면 아직 깊은 곳에 오염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아페는 후자인 구역을 찾아 돌아다녔고, 그렇게 정화를 다시 끝냈을 무렵 플뢰르가 그를 찾아왔다.

“저하, 정화가 끝났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네. 혹시 몰라서 정화가 덜 되었던 구역을 전부 다시 정화했으니까 살펴주세요.”

“그걸 전부 혼자 하셨단 말입니까?”

플뢰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신성력을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일반인이긴 했지만, 신성력이 많이 들어간다는 건 기사들을 통해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페는 조금 피곤한 얼굴이 되어있을 뿐 움직이거나 말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지쳐 보이지 않았다.

“다섯 구역은 되셨을 텐데요…. 괜찮으십니까?”

그의 걱정에 아페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고,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서요.”

아페는 오염이 악마들에게 무슨 힘을 줄까 두려워서 강박적으로 정화했을 뿐이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플뢰르는 어떤 꽃을 심으면 좋을지 물었다.

“제가 꽃 종류를 잘 아는 건 아니어서, 혹시 추천할 만한 게 있나요?”

“집행자께선 히아신스를 많이 심으셨죠. 그래서 지금도 히아신스는 모종을 많이 사둔 편이고요.”

바로 그걸로 하자고 하려던 아페는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성녀님께 드리는 꽃다발에서도 히아신스는 빠지지 않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그게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알고 보니 성녀께서 히아신스를 좋아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

“두 분께서 옛날부터 친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친우를 기억하기 위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꽃을 키운다는 거 로맨틱하지 않나요? 역시 꽃은 그 물성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엉뚱한 결론에 아페는 살짝 웃었다. 건조한 웃음이었지만 플뢰르는 어느새 꽃을 찬양하느라 아페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고 심을 꽃은 플뢰르가 알아서 정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아페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도 있었구나.”

만개한 히아신스의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정원 한구석에 피어있는 히아신스를 누군가 자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지금 꽃을 자르고 계신 건가요?”

손에 막 자른 꽃대를 든 인부가 뒤돌아 아페에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아, 이 꽃은 새 꽃대가 막 나오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미 다 핀 꽃대를 잘라주어야 새 꽃대로 양분이 많이 가니까요. 만개해서 향은 좋습니다. 드릴까요?”

오해한 것이 민망했던 아페는 꽃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왔다. 하필이면 카리타스의 머리색과 비슷한 자줏빛에 미묘한 기분으로 꽃을 화병에 꽂아둔 아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예언을 들었으니 그 사람도 분명히 이걸 알고 있겠지. 집행자도 이미 이쪽으로 오고 계실 거고….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래는 바꿀 수 있어.’

속으로 그렇게 되뇐 아페는 꿈속에서 들렸던 익숙한 목소리를 잊으려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가오지 말라던 목소리를, 얼마 뒤 사라져 영영 듣지 못하게 된 목소리를.

양손을 모아쥔 아페가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기도할 때, 시도폰은 막 중부 지역에 도착한 상태였다.

 


“갑자기 경계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네, 자세한 이유는 적혀있지 않지만, 경계 쪽이 다시 불안해진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저랑 이디스를 같이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요.”

프라이에는 베론에게 본부를 맡긴다고 말하며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왔다.

밖에선 이디스가 이미 말 위에 올라탄 채 기다리고 있었고, 몇몇 기사들과 함께 두 사람은 위쪽으로 향했다. 한참 말을 몰던 이디스는 프라이에에게 언제 본부가 철수할 수 있는지 물었다.

“북부에 남겠다는 이들이 전부 설득될 때까지 남아있어야 한다고 하긴 하더라고. 여기 살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순 없잖아, 불량배도 아니고.”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전 여전히 여기에 기사들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전력이 분리되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응하는 게 늦잖아요.”

어깨를 으쓱인 프라이에가 답했다.

“네 말도 맞아. 나도 여기 굳이 우리가 상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본부가 아니라 훈련시설로 바꾸는 것도 고려 중이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이번에 돌아가서 논의하는 것도 좋겠지.”

두 사람은 애써 경계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대화를 피했다. 두코가 이렇게 급한 연락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일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라이에는 어느새 말이 없어진 이디스를 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두코가 있는 새 본부까지는 일주일이 걸렸던 거로 기억하는데 기사들끼리 가면 반 정도로 단축할 수 있겠지. 그 전에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게 프라이에와 시도폰이 시작의 땅으로 향하는 동안 이주민들이 도착했다.

두코는 아직 두 사람이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막사를 나서자마자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기다린 아페와 크로마에게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악마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는 도구가 부족해서 오늘 모든 인원을 처리하긴 힘들 것 같지만. 최대한 빨리해서 결백한 사람들을 미리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하니까요.”

이미 본부 입구에선 이주민들과 그들을 인솔한 기사, 담당 사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관이 먼저 나서서 두코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부단장님. 저희 쪽에서 보낸 서류는 잘 도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디로 이들을 보내면 되는지 가르쳐주시기만 하면 신속히 일을 끝내겠습니다.”

사무관은 일을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타고나길 귀족으로, 이런 빈민들과 엮일 일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민정책 쪽 부서에 배치가 되면서 말단이라는 이유로 이주민들을 직접 제망까지 인솔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빈민들과 한 달 가까이 함께 생활해야 했다.

그가 웃으며 두코에게 말을 건넨 건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은 결과였다. 하지만 두코는 단호하게 그의 기대를 깨버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사무관님. 하지만 바로 들여보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사무관은 바로 정색하려던 걸 꾹 참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남부 쪽에서 신원확인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입주에 앞서 저희 쪽에서 검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관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말했다.

“어떤 검사를 하려고 하십니까?”

아페가 대답했다.

“마기 측정을 해볼 생각입니다. 경계가 악마와 가까우니 그들을 불러내는 악마 숭배자들을 막는 게 목적이라서요.”

그의 손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있었다. 기사는 그것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관은 기사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당황하며 언성을 높였다.

“제가 방금 남부에서 이미 이들의 신원확인이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이동하는 동안 소란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염려하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무관은 기사에게 동조하라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도 돕겠다며 나서서, 두코가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안심한 두코는 시선을 옮겨 사무관에게 말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두코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이 나서서 이주민들을 몇 명씩 모이게 하였고 한 명씩 검사하기 시작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