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9화

오랜만에 거주관 감(한 번 올렸는데 지워졌어!)

다음 날 아침, 시도폰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그는 선물상자의 개수를 세어보더니 빠진 게 없다며 한 손에 네 개씩, 총 여덟 개를 들었고, 기겁한 프라이에가 그중 세 개를, 두코가 두 개를 빼앗아 들었다. 뒤에서 이디스는 아침부터 무슨 일정이 있으시길래 단장님이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시냐고 솔라에게 물었다.

“거주관에서 오토 대주교님과 친우 분들을 만나고 그곳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솔라님, 그런데 실례지만 잠을 못 주무셨나요? 피곤해 보이셔서요.”

“괜찮습니다.”

솔라는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밝힐 생각도 없었고, 시도폰과의 대련을 탓할 생각도 없었으니 짧게 대답했다. 선물을 뺏어 든 두 사람이 시도폰에게 이걸 어떻게 다 들고 갈 생각을 했냐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무겁지 않네!”

“당연히 저희에겐 무겁지 않죠! 근데 바람이라도 불어서, 뭐야 왜 날 봐, 아무튼 그런 일이 생겨서 상자가 누군가에게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두코가 불쑥, 묵직한 상자를 시도폰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확실히 훈련된 기사들이야 이런 것들을 여덟 개나 들어도 괜찮겠지만, 남부 사제들이 상자를 피한다거나 맞고도 멀쩡하긴 힘들 것 같았다. 생각이 짧았다고 대답한 시도폰은 두 사람에게 함께 거주관에 가달라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고맙지만 수레까지는 필요 없네, 걸어서 가도 충분해.”

시도폰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물렸다. 상자를 들고 거주관으로 향하면서, 전날 밤에 프라이에가 크로마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는 두코는 아닌 척, 프라이에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른 것 없는 맹한 얼굴에 두코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도폰을 따랐다. 그때 갑자기 한 사제가 복도를 뛰어왔고, 그를 피하려던 프라이에가 살짝 두코와 부딪혔다.

‘부딪혔다’라고 해도 어깨 아래가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이었는데 프라이에는 지나치게 당황해하며 자신에게 사과하는 사제도 무시하고 얼어붙었다. 두코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말을 더듬으며 괜찮다고 대답한 프라이에의 얼굴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사제는 일단 프라이에가 괜찮다고 하니 자리를 떴고, 시도폰도 놀라서 돌아봤던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크로마 이 녀석, 말했구나!’

프라이에는 은근슬쩍 두코에게서 멀어진 채 걸어갔고, 그런 어색한 모습에 두코도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거주관으로 향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 즘, 시도폰이 정적을 깼다.

“오는 길에 둘 다 너무 조용하던데 거주관에 오랜만에 와서 그래? 나도 오토 대주교님 만날 생각하니까 좀 어색하긴 해.”

분위기를 풀고자 두코도 동조했다.

“대주교님은 규칙과 체벌을 엄격하게 적용하던 분이셨으니, 단장껜 힘든 상대긴 하죠.”

“맞아 많이 혼나긴 했어. 얀이랑 싸워서 혼날 때도 있었고, 몰래 밖에 나갔다가 온 걸 들켜서 그렇게 될 때도 있었지. 그래도 밥은 꼬박꼬박 주셨어.”

“사실 저도 여기가 너무 갑갑해서 가끔 나갔다가 올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 자네가 혼나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큼큼, 다 안 들키는 방법이 있죠. 혹시 개구멍이라고 아십니까?”

음흉한 미소를 지은 두코가 시도폰의 귀에 속삭였고, 시도폰은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그걸 열심히 들었다. 기사단장이 거주관의 개구멍에 대해 들으면서 고개까지 끄덕이며 듣고 있는 걸 보다 못한 프라이에가 ‘저기 오토 대주교님이 기다리고 계신 거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신을 차린 시도폰이 정면을 보았고, 정말로 오토 대주교가 자신을 보며 인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시도폰이 거주관을 떠났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이들과 주교님께 드리려고 들고 왔습니다. 소소한 성의지만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이곳을 잊지 않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흠, 매년 연말에 익명으로 선물을 보내시던 게 단장님이셨군요.”

대주교는 두코와 프라이에, 시도폰이 들고 있는 상자를 쭉 훑으며 말했다.

“…그걸 알고 계셨군요.”

“상자가 매년 여덟 개였으니까요. 올해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오토 대주교의 말대로 시도폰은 기사단에 입단하고 나서 제 월급에서 얼마씩 떼어내 남부의 거주관으로 선물을 보냈다. 1구역에서 3구역 아이들에게 각각 한 상자씩, 4, 5구역 아이들은 가장 인원수가 많으니 두 상자씩을 주었고, 마지막 하나는 오토 대주교를 비롯한 거주관 관리자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에게 제가 감사 인사를 대신 들었습니다. 이번엔 모처럼 오셨으니 직접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들어주시지요.”

“그다지 큰 걸 준 것도 아닌걸요. 하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하니 잠깐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라는 듯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의 사제들이 상자들을 받아서 갔고, 세 사람은 대주교를 따라 거주관을 둘러보았다. 물론 익숙한 길이라 안내는 필요 없었지만, 아이들에겐 낯선 이들이었으니 대주교가 함께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시도폰을 알아보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단, 단장님!”

개중에 말괄량이처럼 보이는 아이가 튀어나와 일행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오토 대주교는 아이를 꾸짖지 않았기에 시도폰은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창을 한 번만 잡아봐도 될까요?”

“이 녀석! 아직 검도 제대로 안 잡아본 녀석이 잘못하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대주교의 호통에 아이가 움찔거리자, 시도폰은 다칠 리 없다고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창을 잡는 것 자체는 누구나 가능하지만 휘두를 수 있는 건 저뿐이니까요. 그런데….”

시도폰의 허리까지 오는 아이에게 창은 너무 무거울 게 뻔했다. 잠깐 고민한 시도폰은 제 키만 한 창을 등에서 끌러내었고 아이에게 완전히 넘겨주진 않되 만질 수 있게 창의 몸체 부분을 내밀었다. 아이는 새로운 생물을 본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창을 만져보았다.

“금속…인데 따뜻해요.”

“몸에 오래 대고 있어서 그런가?”

프라이에가 끼어들었다.

“단장님의 신성력 속성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자주 신성력을 깃들여서 사용하셨으니 무기에도 옮은 것이겠지요.”

“겨울에 특히 좋을 거 같네요!”

아이의 천진한 대답에 시도폰이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명식 때 보았던 엄숙한 모습과 다른 시도폰의 반응에 다른 아이들도 조금씩 그에게 다가왔다. ‘저도 만져볼래요.’,‘다른 기사님들은 어떤 무기를 쓰시나요?’,‘악마는 정말 다쳐도 끊임없이 재생하나요?’ 등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세 사람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복도에 꼼짝없이 갇혔다.

어느새 멀리 빠져있던 오토 대주교는 질문세례가 끝나고 나서야 다가와서 마저 안내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건 말리지 않아 주시네요.”

조금 지친 시도폰이 한탄하듯 말하자 대주교는 아이들이 기뻐하는데 어떻게 도중에 끊을 수 있겠냐고 허허 웃었다. 그럼 이제 반가운 얼굴을 보러 가자며 대주교는 도서실로 향했다. 거기엔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고 있는 코지와 문학 작품을 읽어주고 있는 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보더니 가르치고 있던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와서는 뭔가 망설이듯 입을 열지 못했고, 이유를 눈치챈 시도폰은 오토 대주교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대주교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제야 코지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임명식은 잘 봤어. 뒤의 연회까지는 바빠서 보지 못 했지만.”

“임명식이라도 봐줘서 고맙지. 바쁜 거 아니까 괜찮아. 솔직히 내가 춤추는 건 안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시도폰의 대답에 마찬가지로 연회는 참석하지 못했던 센이 그렇게 춤에 재능이 없었냐고 놀랐고, 두코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단장을 두둔했다. 프라이에는 코지에게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오느냐고 물었다.

“흐음… 단장님보다는 글 읽는 데 좀 더 열정적인 거 같긴 해. 요즘은 글 읽는 게 그렇게 싫지 않으려나?”

“아니, 지금도 싫어. 옛날엔 그냥 경전만 읽으면 됐는데 이젠 공문도 읽고 처리해야 해.”

옛 친구를 만나 편해진 시도폰이 징징거리자, 코지는 익숙한 듯 그를 받아주었다. 센은 거주관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고, 프라이에는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그것만 보러 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세쿠리스 건은 잘 해결됐다고 들었어. 다행이다.”

‘세쿠리스’라는 이름에 코지와 센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가 돌아왔다. 코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끔찍한 인간이었다고 말했고, 센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인간이 그런 짓을 하다가 퇴출되는 바람에 문서실 일이 늘어났다고.”

“문서실에도 근무하고 있었구나. 근데 사건이 일어난 거 재작년 아냐? 왜 아직 인원이 충원이 안 됐대?”

프라이에의 질문에 센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얀이 세쿠리스가 하던 일을 물려받게 되었다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 내내 문서실에 처박혀있어. 다른 사람들은 세쿠리스가 그래도 일은 잘했다고 이야기하던데, 내 생각은 달라. 올리비아한테 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시켜서 자기 일을 대신하게 했겠지.”

“얀은 농작물 담당이었다고 들었는데 그새 일이 바뀌었나.”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 많기도 하니까. 나도 요새 그 애를 낮에 본 적이 없어.”

센은 시도폰의 말에 대답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도폰은 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카리타스가 어제 얀을 예시로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혼자 소름이 돋았다. 이어서 코지가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했다.

“참, 나 저 일 이후로 올리비아한테 제대로 사과받았다고 이야기했나?”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시도폰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니! 들어본 적 없는데? 왜 말 안 했어, 그리고 올리비아가 이 일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그야 올리비아를 조종하던 사제가 세쿠리스였으니까.”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시도폰이 그놈이 그놈이었냐며 길길이 날뛰려다가, 이미 해결된 일이니 그렇게 화내지 말라는 코지의 말에 겨우 진정했다.

“카리타스가 이야기 안 했나 보네.”

평소에 온갖 이야기는 다 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안 했냐는 눈으로 코지가 바라보자 시도폰이 턱을 매만졌다.

“그때 한참 아… 뭐 때문에 정신없을 때였거든, 그래서 말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아르카눔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시도폰이 정신을 차리고 얼버무렸다. 센이 뭐 때문이냐고 묻자 두코가 보안이라고 대답하며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들과 한창 수다를 떨다가 적당히 이야기를 다 나누고 나서, 세 사람은 대주교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셨군요. 옛 친우분들과는 잘 이야기하셨습니까?”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시도폰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자 대주교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부대장들은 적당히 시도폰이 앉은 소파 뒤에 자리를 잡고 섰고, 시도폰은 달콤한 차를 마시며 대주교와 대화했다. 사실 시도폰은 여전히 이 사람이 불편했는데, 이는 시도폰이 규율을 많이 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 물론 그것도 불편한 이유에 포함되긴 했다.

“참… 고민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말씀을 드리는 게 맞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거의 한숨처럼 들리는 대주교의 말에 시도폰이 허리를 바짝 세웠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는지….”

대주교는 그렇게 말을 시작하고도 여전히 그 말을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성녀님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십시오.”

시도폰은 머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의 두 사람도 적잖이 놀랐는지 동그란 눈으로 대주교를 바라보았고,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대주교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북부와 남부가 오래전부터 은근한 대립 관계에 있는 건 알고 계셨겠지요. 헤일로 전 기사단장께서 교황 성하를 견제하는 동시에 협력했던 것도 들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성하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단장님과 함께 북부 수행을 했던 그 성녀님입니다.”

“…그 사람은 저희를 괴롭히거나 견제할 사람이 아닙니다.”

힘겹게 시도폰이 입을 뗐다. 오토 대주교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단장님, 그분은 이미 성하의 가르침을 대부분 흡수하셨습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요. 이미 사람을 다루는 방법과 교회의 업무에 대해서는 성하와 다른 게 없으십니다.”

하지만 시도폰은 카리타스가 교황의 눈을 피해 몰래 북부를 도왔던 것도 알고 있었기에 대주교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이렇게 무작정 부정해봤자 의미가 없겠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있었던 자잘한 일들을 모아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어제 두 분을 보면서 이걸 말씀드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뿐입니다.”

본격적으로 카리타스가 오토 대주교에게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던 건, 아마 시도폰이 독방에 갇혔던 그 사건 때부터였을 것이다. 시도폰은 그게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반응에 대주교는 시도폰이 자신의 말을 납득했다고 생각했는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저는 권력 싸움이라고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끼어들 만한 배짱도 없거니와, 저를 지지할 만한 세력가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당신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가 말씀드린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밝은 미소를 지은 오토 대주교는 아까의 말괄량이와 비슷했던 시도폰이 지금처럼 훌륭하게 자라주어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시도폰은 거주관 덕분이라고 답하며 기억 한구석에서 스멀거리는 독방의 어둠을 무시했다.

대주교와의 대담이 끝나고, 세 사람은 기사단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두코는 대주교님이 그래도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프라이에는 맞장구쳤고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쉬겠네. 두 사람도 수고 많았어.”

“옙. 쉬십시오.”

시도폰이 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솔라가 방에 있었고, 그는 시도폰에게 거주관은 잘 다녀오셨느냐 물었다. 그렇노라고 대답한 시도폰이 침대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솔라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몸을 돌려 시도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시도폰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 없었다고 답했다. 그러다 또 생각이 바뀌었는지, 시도폰은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라면 이해할 수 있을… 자네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솔라의 눈동자가 빛났다는 것을, 시도폰은 몰랐다.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세. 그냥 어렸을 적의… 5구역에서의 일이 자꾸 생각나서 그게 마음에 걸렸네.”

거주관에서 가장 신성력이 낮은 아이들이 배정받는 5구역은 시도폰이 각성하기 전이나 후나 비슷했다. 높이가 달랐던 의자는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고, 한쪽 구석이 깨진 창문엔 천이 덧대어져 있을 뿐, 다른 유리로 교체되거나 하지 않았다. 오토 대주교가 5구역을 빠르게 지나쳤지만, 거기서 몇 년을 보냈던 시도폰의 눈엔 그런 것들이 너무도 잘 보였기에 그는 그곳을 지나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시도폰은 미간을 짚었다.

“두코나 프라이에에겐 말할 수 없었네. 그 두 사람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앞 구역에 배정받았으니까. 나는 그곳의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매년 선물을 보냈어. 하지만 일 년에 고작 한 번뿐이었으니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일시적인 도움이라고 해도 없는 것보단 당연히 낫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솔라는 보호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살았기에 시도폰을 만났고, 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솔직히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시설인데 버려진 아이들은 많아서, 아이들은 남을 돕기보다는 자기 몫을 챙기느라 바빴고 사제들도 그들을 타이르기보다는 체벌로 다스리는 경우가 많았다. 시도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5구역도 그런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집행자께서도 이런 걸 신경 쓰시다니. 그곳 출신인 게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시도폰과 공감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솔라는 내심 들떴지만, 티 낼만 한 일은 아니니 그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확실히… 다른 구역에서 자랐다면 같은 거주관 출신이라고 해도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요.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너무 옛날 일이 되어버렸고, 당신께선 이미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시니까요.”

“그렇네. 내가 고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신성력이 적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5구역에, 그 낡은 시설에 들어가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운데, 난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네. 그 애들을 다 북부 기사단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말이야.”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다. 그도 알았고, 솔라도 알았다. 하지만 그 말에 약간의 기원이 섞여 있다는 것도 두 사람은 눈치채고 있었다. 시도폰은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는 피곤하니 일찍 자고 싶다고 말했고, 솔라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잠깐이나마 시도폰과 자신을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반성했다.

결이 비슷한 슬픈 기억 때문에, 자신이 보호소를 외면하는 동안 시도폰은 5구역 아이들을 돕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두코가 갑자기 튀어나온 솔라에게 단장님은 주무시냐고 물었다.

“네, 오늘은 조금 피곤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자네는 괜찮나? 어제 단장님과 밤에 대련하고 있었잖나.”

“단장께서 목검을 사용하기도 하셨고, 대련도 길지 않아서인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용건이 있으십니까?”

시도폰이 자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두코가 비키지 않자, 솔라가 물었다.

“급한 용건이 아니라서 내일 말해도 괜찮네.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부르려고 했어. 음… 자네가 이리 오게. 평소엔 빠졌지만, 지금은 단장님도 주무시니까 내가 최고 권력자라네.”

한 손에 책을 든 솔라가 두코에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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