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7화

"내가 보기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아."

책장 뒤에서 나온 코지가 한 품 가득 책들을 안고 책상에 내려놓자, 시도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오른쪽에 드리운 책 탑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코지가 엄선한 자료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해. 내 쪽에서도 몇 권 가지고 왔어."

폰의 왼쪽에선 카리타스가 유난히 두꺼운 책 한 권위에 평범한 책 몇 권을 더 쌓아서 들고 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카리타스를 도우려던 폰의 어깨에 코지의 손이 얹혔고 카리타스는 퇴로를 차단하듯 책을 내려놓았다.

결국, 책 사이에 갇힌 꼴이 된 폰은 처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어느 쪽도 비켜줄 것 같지 않자, 탈출은 포기하고 무슨 책부터 볼 거냐고 물었다.

"북부로 가는 길이 중요하니까 지리부터 봐야 하지 않을까?"

코지의 제안에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카리타스의 눈은 벌써 질린 표정으로 앉아있는 폰을 향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리 과목으로 시작해도 괜찮을까…."

"아하…. 그럼 대충 보고 넘어간 다음에 나중에 다시 자세히 보자."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책상에 앉아 종알거리며 책을 읽었다. 빌려온 책이니 낙서를 하면 혼난다고 말하던 거주관의 서가장은 카리타스를 보고는 말꼬리를 자르며 물러났다. 머쓱한 카리타스에게 코지와 폰은 엄지를 치켜 올려 주었다.

"여기서 북부 기사단 본부까지 가는 데 15일이 걸리는데, 그것도 단축된 거라고?"

"그러게, 워프가 없었던 시절엔 30일이나 걸렸다니. 그럼 그 당시 북부 수행은 얼마나 오래 했던 거람?"

"가는 데 한 달, 오는 데 한 달, 수행에 두 달이면…. 넉 달이나 했다는 거네."

폰이 놀라고, 코지가 이어받은 질문에 카리타스가 대답했다. 카리타스가 동상들에 들은 바로는 시간만 오래 걸린 것이 아니라 수행 길에 죽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물론 동상이 덧붙인 말, '나약한 인간들이니 어쩔 수 없었지. 이 몸은 그런 걸 다 견디고 살아 돌아왔다고!'는 생략했다.

코지가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난 이 워프 시스템 자체도 신기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성력은 악마를 퇴치하는 힘인데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정확한 신성력의 정의를 따지면 '신의 뜻을 행하는 데 사용되는 힘'이니까, 신께서 신자들의 수행을 돕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맞기는 하지만 나도 신기하네."

카리타스는 신전에서 배운 지식과 들은 말로 다른 두 사람이 책에서 추출한 지식에 살을 붙였다. 앉은 자리에서 책들을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그것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당 세 권씩 대출할 수 있, 있습니다."

사서를 맡은 사제가 말을 절었고 카리타스는 이제 반응도 없었다. 폰은 '악마 대응 전략집', '북부의 식생활', '무기 보관 및 활용 방법집'을, 코지는 아까 읽던 '북부 지리와 환경', '북부 동식물', '응급상황 대응지침-북부편'을 빌렸다.

이 와중에 카리타스는 거주관 소속이 아니라서 책을 빌릴 수 없었고 본인이 가지고 온 책만 신전으로 다시 가지고 갔다.


코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공책을 빼 들었다.

"맘 같아서는 책을 통째로 필사하고 싶은데 그건 힘들겠지?"

"그러다 손목 다쳐…."

빌려온 책을 머리맡에 쌓아두고 드러누운 폰이 천장을 보며 대답했다. 도서관을 나와서까지 책을 읽으라고 할 생각은 없었던 건지, 필기에 집중하고 싶었던 건지 코지는 폰에게 무어라 말도 없이 손만 부지런하게 놀렸다.

일과가 끝난 시각이라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같이 나직하게 방을 채웠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니 책 읽기에 가장 적절한 계절이지 않냐는 코지의 말에, 폰은 그럼 나도 읽어볼까-라며 '북부의 식생활'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등을 알리는 종소리가 복도에서 울렸고 코지는 책에 펜대를 끼우고 촛불을 껐다.

"어떡하지?"

"왜, 무슨 일 있어?"

"배고파졌어. 북부 음식이래도 맛 묘사가 너무 잘 되어있더라."

"나 참…. 이제 소등해서 자야 할 시간이잖아. 이때 안 자면 너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난다고 죽는소리할 거면서."

정곡을 찔린 폰은 구시렁거리며 책을 덮었고 멧돼지 수육은 꼭 먹어보고 싶다며 요리법을 줄줄 늘어놓았다.

한랭한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향신료가 멧돼지랑 그렇게 궁합이 잘 맞아서 남부 파견단도 멧돼지 수육은 열심히 먹었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는데, 거기에 코지는 '나까지 배고파지니까 그만해!'라며 으르렁거렸다.


세 사람은 며칠 동안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하루는 카리타스 없이 두 사람만 있었는데 이때다 싶었는지 얀이 말을 걸어왔다.

"너희 북부 갈 준비하냐?"

"나는 안 가는데 폰이 갈 거라서 같이 공부하고 있어."

"악마 대응 전략집? 이거 옛날 책인데 용케 찾았네. 구석이 있었을 텐데…. 이거 꽤 유용해."

센이 감탄하자 코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악마들의 형태는 되게 다양해. 물고기 같은 것들한테 다리가 달려서 도마뱀처럼 움직인다거나, 새 같은 놈들이 날아다니면서 공중에서 내리꽂힌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긴 거에 따라서 움직이는 방식도 다양하지. 제대로 된 전술 대형을 이루면서 싸우지는 않지만, 공격에 순서가 있어서 차례대로 처리하는 게 유일한 대응책이야."

"직접 잡아봤어?"

폰의 물음에 얀이 대신 대답했다.

"물고기 비슷한 거나 곤충류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까지는 해봤지. 움직임도 단순하고 신성력도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듣기로는 인간형도 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땐 새처럼 생긴 놈이 가장 강했어."

"그리고…. 신성력을 담은 채로 공격해야지 그놈들이 재생하지 않으니까 그 부분은 조심해야 해. 물론 우리한테 지급되는 무기는 신성력을 많이 충전해둔 걸 테고 우리가 전방에 설 일은 없을 거지만."

"그러고 보니 우린 전투 사제가 아니라 치유 사제로 가겠네."

전투 이야기에 눈을 빛내던 폰이 코지가 덧붙인 말에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얀이 '네가 검을 안 들고 치유만 하면 오히려 손해 아니냐'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고 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치유 사제로 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호신술은 배울 거야. 아까 얀이 말한 것 중에 보충할 게 있는데, 인간형 개체가 악마 중에선 가장 강해. 그건 우리 같은 수습 사제, 아 너넨 아직 아니지, 아무튼 기사도 아닌 애들이 상대할 게 아니야. 괜히 보고 흥분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센의 자세한 설명에 코지와 폰은 고개를 끄덕였고 충실한 학생들의 태도에 센은 조금 쑥스러운 듯 두 사람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이건 좀 잡스러운 얘기긴 한데."

얀은 마침 생각났다며 손뼉을 쳤다. 나머지 세 사람이 저를 쳐다보자 얀은 집중하라는 듯 검지를 치켜들었다.

"북부 기사단 얘기가 몇 개 기억이 났다! 거기 기사단장님 이름이 헤일로거든, 근데 그분 머리카락이 없어서 햇빛 받으면 반짝거리니까 이름 듣고 웃지 마라. 진짜 상처받으셔. 부 기사단장은 베론 님, 이분은 다정다감한 편이니까 편하게 말 걸면 잘 받아주신다? 그 얼굴에 속았다가 훈련 시키실 때 단장님보다 힘들어서 무슨, 이런 이중인격자가 다 있나 했다니까."

이외에도 북부 기사단 단원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던 얀은 갑자기 폰을 바라보며 놀리듯 말했다.

"너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끼니 거르지 마라?"

"허어…. 비위 상할 일 뭐 있다고?"

"보면 알아, 울면서 도망치면 볼만하겠네."

센은 '너네 또 싸우냐?'라며 얀의 옆구리를 찔렀고, 코지도 질린다는 눈으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폰을 바라보았다.

"이건 진짜 농담이었는데, 거기서 끼니 거르면 아무도 안 챙겨줘. 식량이 귀한 곳이라."

머쓱한 표정의 얀에게서 고개를 돌린 센이 목덜미를 한 번 쓸고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이런 건 거기 가면 다 설명해 줄 거라 지금 들을 필요는 없어. 그냥 먼저 갔다 왔으니까 알고 있는 것뿐이야."

그 말을 들은 코지가 폰에게 '거기까지 가서 공부할 자신이 있어?'라고 묻자 폰은 눈을 피했다.

"미안, 그건 나도 장담을 못 하겠네."

어디서부터 대화를 들은 것인지 모를 카리타스가 얀과 센의 뒤에서 나타났다.

"카리! 못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둘이 이것저것 이야기해줘서 듣고 있었어."

폰은 카리타스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코지는 얀과 센의 안색을 살피다가 두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설명했다.

카리타스가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얀은 탈출하고 싶었는지, 폰의 맞은편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별반 다른 바 없는 상황인 센도 평소와는 다르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렇구나…. 유용한 정보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였죠? 주일 의례 때 뵈었던 것 같은데."

대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대신해서 폰이 이름을 알려주었다.

"얀이랑 센이야."

"너…. 너 말을 그렇게 함부로."

"괜찮습니다. 제가 허락했으니까요. 수습 사제 생활은 좀 어떤가요?"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센이 더듬더듬 대답했고 폰은 왜 저렇게까지 둘이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카리타스는 센의 말이 끊기자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그 말이 마법을 푸는 주문이었는지 얀과 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만 가보겠다고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빠르게 사라진 사람들이 앉아있던 자리에 카리타스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일부러 그런 거지?"

코지는 한쪽 입꼬리만 올린 미소를 지으며 카리타스를 바라보았고 카리타스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폰은 얀과 센이 아직 카리타스를 부담스러워하나 보다 정도로만 생각하곤 나중에 카리타스와 친해졌다는 걸 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카리 넌 북부에 가면 뭘 제일 하고 싶어?"

"나는 아직 생각해둔 게 없네. 폰은 음식이 궁금하다고 했지?"

"어제 내 귓가에다가 대고 멧돼지 수육 요리법을 속삭일 정도였어."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아?"

열을 내는 폰을 바라보던 카리타스는 단체 생활이 궁금하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의 말에 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신전에 들어온 뒤로는 쭉 혼자 생활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먹고 자고 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

"여자애들끼리 같이 잘 테니까 너네도 같은 방 쓰려나?"

"우와 그러면 좋겠다."

폰은 눈을 빛냈고 카리타스도 내심 기대가 되는지 웃어 보였다. 갑작스럽게 형성된 따뜻한 분위기에, 코지는 일부러 소리 내어 책을 펼쳤다.

북부에 갈 때 공부가 안될 것 같으면 여기서라도 제대로 알고 가야 한다며 전의를 불태웠고 카리타스가 폰의 의식이 없다고 말하기 전까지 공부는 계속되었다.


"요새 일기 열심히 쓰네?"

"그런가?"

열심히 펜을 놀리던 폰은 일기를 쓰다 말고 공책을 들어 올려보았다. 팔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종잇장이 제법 많았다.

코지는 장난스럽게 내용을 보여달라고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일기 내용을 훑어본 폰이 절대 보여줄 수 없다며 요리조리 피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달밤에 체력만 빼게 되었다. 헉헉 소리가 날 때까지 열정적으로 움직여본 건 오랜만이라며 코지는 감탄했다.

"그렇게까지 보고 싶었어? 별 내용 없는데."

"별거 아니면 왜 그렇게 안 보여주는 거야?"

"…개인 정보니까."

"풉."

폰은 새빨간 얼굴에 공책을 덮고 웅얼거렸고 코지는 소리 내 웃다가 공책을 보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폰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다 꼬맹이. 뭐가 그렇게 재밌냐?"

"렌! 오랜만에요, 감옥 근무 끝났어요?"

"그래그래 이제 신전 쪽에서 근무할 건데 그 전에 대주교님께서 복도 순찰을 한번 부탁하셔서 그것만 하고 올라가려고. 너희 방만 소등이 안 됐는데 웃음소리가 나서 와본 거야."

폰이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살펴보자 다른 방에선 반딧불이만 한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키득거리던 코지는 간신히 진정하고 폰이 손에 들고 있는 공책을 가리켰다.

"죄송해요. 얘가 원래 안 쓰던 일기를 갑자기 열심히 쓰길래 뭘 쓰는지 궁금했어요. 결국, 뺏지는 못했지만."

"호오 그건 나도 내용이 궁금해지는데?"

"안돼요. 개인 정보라니까? 그리고 어른이 쪼잔하게 그런 거 궁금해하는 거 아니에요."

"꼬맹이가 어른이 어쩌고 하니까 되게 웃기네, 이 나이쯤 되면 애들 노는 거 구경하는 게 어른들이랑 말하는 것보다 즐거울 때가 있다고."

장난스럽게 웃던 렌은 그래서 정말로 안 보여주는 거냐며 마지막까지 놀렸고 폰은 절대로 안 보여줄 거라며 작은 소리로 외쳤다.

"근데 너네 빨리 자긴 해야지. 문 닫는다? 좋은 꿈 꾸고."

"렌도 잘 자요. 감옥 탈출 축하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소리 없이 문이 닫히자 코지는 촛불을 껐다. 앞으로 북부 원정 출발일까지 남은 기간은 약 한 달이었고 아직 공부할 거리는 매우 많았다. 폰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지만, 코지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코지는, 카리타스가 북부에 간다는 것을 알기 전부터 폰이 북부행을 결심했다고 말한 게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우유 없이 건조한 빵을 삼킨 것처럼 속이 갑갑한 기분이었는데, 폰이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해서 빵이 두 배로 부푼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런 기분에 불안해져서 평소보다 폰에게 강박적으로 공부를 강요하고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에 뒤척거리기만 할 뿐, 코지는 폰에게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도 안 되는 감정을 털어놓아서 어떻게 폰을 설득시킬 수 있겠나. 폰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코지는 눈을 감았다.


“코지! 일어나. 웬일로 네가 나보다 늦게 일어나냐?”

“어…. 벌써 아침이야?”

“당연하지. 겨울이니까 좀 어둡긴 하지만. 혹시 어디 아파?”

“아, 아냐. 그냥 꿈이 너무 생생해서 놀랐어.”

“무슨 꿈이었길래.”

“내용은 기억이 안 나.”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코지는 전날 책상에 놔둔 안경을 주워다 꼈다. 이불을 갠 폰이 창문을 살짝 열었다가 춥다며 다시 문을 닫았고 코지에게 빗을 건넸다.

그런데 코지는 머리카락이 엉킨 부분 없이 매끄럽게 찰랑거리는데도 빗질을 멈추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가고 나서 심심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폰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그제 서야 잠에서 깬 듯 코지는 눈을 크게 뜨고 폰을 바라보았다. 코지가 빗을 내려놓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자 폰은 안심하며 어제까지 공부하던 공책을 가방에 던져넣었다.

“이것도 챙겼고, 저것도 챙겼고….”

“누가 보면 네가 북부 가는 줄 알겠어.”

“이런 거 꼼꼼하게 챙겨야지, 고마운 줄 알아.”

폰은 코맹맹이 소리로 ‘고마워요~’라고 대답해서 결국 등을 얻어맞았다. 찰진 소리에 열린 문 사이로 센의 놀라는 목소리가 살며시 들어왔다.

“너네 싸워?”

“아니! 그럴 리가. 얘가 또 장난쳐서 그랬어.”

“억울해.”

말과는 다르게 어조에 잔뜩 장난기가 묻어나는 폰의 대답에, 센은 ‘북부 가는 마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라.’라고만 말하고 사라졌다. 폰과 코지가 투덕거리면서 짐을 싸는 동안 바깥에선 북부로 옮길 물자를 마차에 쌓느라 바쁜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사제들은 그동안 직조한 천과 말린 고기, 성수 등을 마차 위의 짐꾼에게 전달했고 북부행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따로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항상 조용했던 거주관의 아침이 소란스러워, 아이들은 북부에 가든, 가지 않든 흥분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줄 맞추지 않고 덩어리째 서서 마차를 배웅했지만, 사제들은 오늘만큼은 그들을 혼내지 않았다.

“다녀올게!”

“잘 다녀와~. 아프지 말고. 뭐, 네가 아플 일은 없겠지만.”

“북부 토끼 한 마리 정도는 잡아 와.”

“더 큰 거 잡아 오면 네 책 하나 줘.”

“아니 어차피 같은 방 쓰는데 굳이 가져야겠어? 멧돼지 잡아 오면 생각해볼게.”

누군가가 마차의 가장 안쪽에 잠들어버린 아이를 보고 놀라 옆자리 아이에게 속삭였다.

“저기, 저 안쪽에 앉은 애, 출발도 전에 자버렸어.”

“쟤는 긴장이 하나도 안 되나 봐.”

“그게 아니라 쟤, 어제 너무 흥분돼서 잠이 안 온다고 밤을 그대로 새서 그래.”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데?”

“네 주머니 하나 빌려 간다~!”

“저건 언제 가져간 거야? 곱게 쓰고 돌려줘!”

“이것저것 담아올게. 기대할 만할 거야.”

“필요 없어!”

소란스러운 와중에 코지는 폰에게 조용히 손만 흔들었다. 이미 전날에 이야기할 건 다 했기도 했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가 심란한 꿈 이야기를 하게 될까 봐 내린 판단이었다.

어제 꾼 꿈을 생각하면 다시금 오싹해졌다. 코지는 양팔을 문지르며 방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석 달은 혼자 있어야 할 방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코지는 깨끗하게 정리된 이부자리 두 개를 바라보다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폈다. 항상 같은 책장에 놓여있던 두 일기장 중 하나는 시도폰이 북부로 갈 때 들고 가는 바람에 코지가 실수로라도 남의 것을 펼쳐보는 일은 없었다.

꿈 내용이 이해되지 않고, 회상하면 음울해지기만 한데도 이것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에 코지는 펜을 들었다.


코지의 꿈

바람이 빼곡한 풀잎을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야에 가득한 것은 내 종아리만치 높게 자란 잔디뿐,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들판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어울릴법하건만, 적막하고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하늘이 되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바람이 분다. 풀잎이 차례로 눕고 그 사이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스친다.

가느다란 풀잎보다 더 얇게 생긴 것들이 바람을 따라 이쪽으로 온다. 아주 빠르게, 점점 그 끝이 갈라지면서 다가오는 것들은 나무의 끄트머리와 닮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다가오는 낌새가 심상치 않아 뒷걸음질 쳤다.

눈치챘다. 그것들은 머리를 치들었다. 그 끄트머리 하나하나가 손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가지 끝이 갈라졌다.

잡히면 안 된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손은 저렇게 빠르게 달려오지도, 날카롭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뒷걸음질 치기를 멈추고 아예 몸을 돌려 달아났다. 바람 소리가 또 귓가를 스친다. 바람이 불어서 저것이 다가올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저것들이 나를 쫓아온 게 먼저였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자, 내 품에 있던 빨간 것들이 흩날리며 바닥으로 사라져갔다. 내가 눈을 뜰 때부터 내 품에 있던 것들. 나는 이것의 정체를 모른다. 장미 꽃잎과 같은,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작고 날카롭게 생긴 조각들이 사라져갔다.

심장이 쥐어짜이듯 아팠다. 전에 찔린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는 듯한 아픔이었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정체도 모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 품 안에 남은 일부라도 남기려고 몸을 더 말았다. 그래도 뛰는 걸 멈추진 못했다.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저것은 피해야 했다.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걷다시피 뛰다 보니 호수가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와 같은 호수에 발은 멈춰버렸고 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하얀 것들이 펄떡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았다.

나보다 호수로 먼저 뛰어든 빨간 조각들이 반대편으로 흐르고 있었다. 따라가자. 호수로 몸을 던지자 마지막으로 품에 남아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래로 가라앉는 몸이어도 고개는 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 아래에서 꽃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그것들이 흐르는 것을 보다가 몸이 떠밀려가며 흐름을 따라갔다. 나도 같이 갈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익숙한 목소리들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들에 온몸에서 힘을 뺐다. 흐름을 타다가 자연스레 눈을 감자 꿈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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