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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

릭셀 / 키워드 [새벽]

These tears by Andy Grammer ♬

https://www.youtube.com/watch?v=c3qO96QK3QE

These tears mean I'm lettin' you go

I'm learnin' how to be alone

I'm broken, but give it time

I'm gon' be alright

새벽이다.

가만히 눈을 떠 옆에 잠든 상대를 확인한 릭이 막힌 호흡을 천천히 풀어냈다. 어슴푸레 비치는 창문 밖 일출이 제 눈을 찌른 모양이었다. 원래 아침 일찍 깨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빠르다. 이유를 모르지 않았기에 그가 진정할 겸 러셀을 바라봤다.

“으음……,”

제 시선을 느낀 걸까. 곤히 잠들어있던 러셀이 작게 뒤척이며 릭에게 다가왔다. 그 덕에 리시어스는 애써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곤 천천히 러셀을 도닥거려줘야 했다. 다시 그의 숨이 깊어질 때까지, 그는 가만히 누운 채 러셀의 얼굴을 실컷 감상했다.

자신에 비해 아침잠이 많은 제 사랑은 항상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을 제게 보여주곤 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하여간 악몽은 아닌 저 편안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있던 걱정이 다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엔 제게 툴툴대거나 쭈뼛거리기 바쁘지만—물론 릭은 그런 러셀의 행동도 좋아한다. 그는 솔직한 모습이야말로 러셀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제 곁을 지키는 러셀은 자신이 새로 찾은 이정표였다. 자신이 어디로 헤매게 되든, 릭은 러셀이 있다면 언제나 이 안온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잠시 지난날을 곱씹던 릭이 결국 러셀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인기척이 감겨서인지 러셀이 살짝 찡그리며 부스스 눈을 떴다.

“릭…?”

“아, 미안. 깼어?”

“응….”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음에 답하며 제 품에서 꼬물거리는 게 제법 귀엽다. 릭은 말랑한 제 파트너의 뺨을 더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달콤한 잠결 투정을 받아주었다.

“오늘 휴가인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러게. 자동으로 눈이 뜨이더라고.”

“…아저씨, …… 같아….”

우물거리는 와중에 할 말은 다 한다. 그의 말대로 오늘 쉬는 사람이 먼저 일어나서 있으니 러셀이 물어볼 법도 했다. 릭은 그 공격에 굳이 트집 잡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그런 아저씨와 놀아나고 있는 러셀이 아닌가. 그의 마음에만 든다면 더한 거라도 뭐가 대수인가 싶다.

“더 자, 여보.”

“음….”

아직 러셀의 출근까지는 한참 남았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주문을 걸듯 릭이 속삭였다. 러셀은 다정한 한 마디에 겨우 대답하더니 금세 다시 잠들었다. 그런 러셀이 너무 춥지 않도록 충분한 체온을 이불에 남긴 릭이 서서히 먼저 자리를 떴다. 늘 의도치 않게 괴롭히고 있는 연하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근사한 아침식사를 선물할 심산이었다.

그 다음엔, 계획했던 대로 미뤄뒀던 할일을 해야겠지.

러셀에겐 이미 오늘 뭘 할지 얘기해두었다. 그는 제 루틴에 대해 듣곤 잠시 망설이더니, 곧 자신이 도와줄 건 없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척 보기에도 제 마음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잡아먹었더랬다. 순순한 러셀과 키스했는데 거기서 멈췄을 리는 당연히 없고. 정신 없이 뒹굴고 나니 러셀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그래도 만족한 눈치여서 한시름 덜었다—.

그러니까 지금 러셀이 피곤해하는 데엔 제 책임도 반쯤 있는 셈이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린다면 혹시나 어제의 일로 뒤늦게 타박을 들을지 모르니, 한 발짝 먼저 알뜰하게 챙겨 어제의 충동을 만회해볼 작정이다.

가볍게 앞치마를 두른 릭의 손이 분주해졌다. 잠시 후 냉장고에서 원하는 재료를 찾은 그가 웃었다.

오늘 첫 끼는 제 사랑이 좋아하는 특식이다.


1년에 두 번. 리시어스 딜런은 다락방 청소를 한다.

사실, 대개 넓은 집에서 다락방이란 케케묵은 먼지의 보금자리다. 한껏 바랜 사진이나 금간 액자, 갈라지기 시작한 가죽 표지의 졸업앨범 따위가 굴러다니기 일쑤고, 그마저도 규칙 없이 널브러져 있는 곳.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넉넉한 집에 사는 사람은 다락방에 잘 들르지 않는다. 만약 집에 아이나 강아지라도 있다면 이곳이 제법 낭만적인 숨바꼭질 장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사는 남성에게 생활반경 바깥은 흡사 미지의 영역이었다. 잘꾸며진 손님방에도 사람이 자주 안 들어오는 마당에, 꼭대기 구석을 차지한 잉여 공간이라면 당연히 홀대받을 수밖에 없다.

리시어스의 다락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보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청소 주기다. 릭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반 년마다 반드시 다락방을 치웠다. 그때마다 집에 있던 물건이 올라오기도 했고, 다락방에 잠들었던 추억이 내려가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늘 제자리였다. 분류별로 차곡차곡 쌓인 상자는 정리가 몸에 밴 주인의 손을 탄 채로 리시어스와는 사뭇 다른 시간을 살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가을. 간만에 꼭대기 계단을 닦고 문을 열자 봄에 가둬뒀던 공기가 릭을 반겼다. 그는 가지고 올라온 슬리퍼를 앞에 놓고서 천천히 걸어가 도로 문을 닫았다. 눈에 보이지 않던 티끌이 거스러미처럼 손끝에 달라붙었다.

불을 켜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집은 현대식 옥상 가옥이었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다락방처럼 아담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의 릭의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층고가 낮았다. 특히 비스듬히 깎인 벽은 릭이 허리를 숙여야 겨우 움직일 만한 높이. 이 공간에 듬성듬성 놓인 상자와 가구를 응시하던 릭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니 또 생각나네 싶은 표정이었다. 자신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장대나, 도통 사용하지 않게 된 의자, 한때 필요했던 휠체어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거실에서 쫓겨난 스탠드 시계는 이제 배터리가 다 됐는지 엉뚱한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꽃가루가 제법 쌓였지만 그외엔 가지런히 주인을 기다렸는지 다들 멀쩡했다.

“이거 참.”

이 일이 반가워질 줄이야. 폐에 뭉근하게 파고드는 먼지를 손으로 날리며 릭이 창문부터 열었다. 오래된 냄새가 빠져나가고 나니 다락방이 한결 선선해졌다. 그의 손엔 어느새 청소기가 들려있었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쓰레받이와 빗자루를 썼지. 4년 전 자신이 저지른 바보짓이 떠올라 웃음을 삼킨 그가 손잡이를 방아쇠 당기듯 눌러 잡았다.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금세 모였다.

러스가 퇴근하기까진 아직 한참 남았다. 그래도 너무 미적거리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 일찍 시작하는 편이 낫다. 팔을 걷어올린 릭이 가볍게 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해볼까.”

첫째. 주변 바닥에 수북한 먼지를 가볍게 쓸어낸다. 아직 물걸레를 쓸 필욘 없다. 어차피 짐을 꺼내고 버리는 과정에서 다시 어질러질 테니까. 일종의 준비 작업인 셈이다.

둘째. 왼쪽 선반부터 하나씩 상자를 꺼내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다. 과거를 찬찬히 열고, 이제는 덜어도 될 추억이 있는지 살피는 시간이다. 실상 이게 제일 오래 걸린다. 여기엔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고 아직 자신은 그 후회를 온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넓디넓은 집에서 여즉 다락방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곳은 거대한 타임캡슐처럼,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혀 때때로 리시어스를 누군가의 남편이었던 시절로 되돌리는 곳이었다.

올해 다락방에선 꽤 많은 물건이 사라졌다. 여전히 제 기억에 남아있지만 이젠 세상에 없거나 다른 이의 손을 타는 중고가 되어있겠지.

그래도 이젠 비교적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 변화의 일등공신이 누구인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셋째. 차곡차곡 겹쳐놓은 추억 틈에 미처 넣지 못했던 걸 뭘 더 담을지 가늠하는 순서다. 가령 손때가 묻어 줄곧 부엌에서 써온 그라인더와, 직접 만들었지만 더는 쓰기 어려운 러그 같은 것. 그는 러그를 돌돌 말아 비닐로 감싼 후 벽 한쪽에 비스듬히 세웠고, 커피잔만 담겨있던 상자에 그라인더를 조심히 넣었다. 이 녀석들도 언젠가는 버리는 날이 오겠지. 우선은 다락 안 구름에 갇힌 물방울처럼 간직해두련다.

넷째. 짐을 다 정리했다면 다락방을 치운다. 펜트하우스 전체를 매번 청소할 수 없으니 사용인을 고용한 그이지만, 여기만큼은 언제나 릭이 손수 쓸고 닦았다. 이건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과 같았다. 다음 봄이 오기까지 아프고도 예쁜 기억과 무사히 이별하기 위해서.

다락방 청소를 마치니 어느새 오후였다. 러셀을 출근시키고 적당히 쉬다가 시작한 일이라 슬슬 그럴 시간이긴 했다. 옷에 붙은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더러워진 슬리퍼도 집어넣은 릭이 다시 다락방 출입문을 열었다. 손잡이도 닦아두어서 이번엔 손이 말끔했다.

반나절 만에 깨끗해진 다락방을 보며 릭이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으레 해왔던 독백을 남겼다.

“사샤.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늘 여기선 목이 멘다. 하지만 릭은 괘념치 않고 다음 마디를 뱉었다.

“무엇보다 처음은 좋은 소식부터 전해야겠지. …이제 널 여보라곤 부르지 못할 것 같아. 내가 너랑 헤어지고 나서, 정말 사랑하는 녀석이 생겨버렸거든.”

떠날 때 네가 날 많이 걱정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오늘은 여기 오르는 게 그리 힘들지 않더라. 아침에도 그 애랑 같이 있다가 왔거든. 날 생각하는 얼굴을 떠올리자니 의외로 일이 수월하게 끝났고. 난 여태 시간이 해결해준 줄 알았는데, 사실 요새 2년은 걔가 있어서 괜찮아졌던 걸지도 모르겠어.

한결 덜어낸 목소리로 릭이 빙긋 웃었다.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고해만 메아리칠 뿐이다.

어차피 이 말은 그녀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안다. 다락방 청소처럼, 이 혼잣말은 어디에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이 억지로 만든 대나무숲이었다. 여기서 다 쏟아야 두 계절을 버틸 수 있었으니까.

“너와 헤어진 이후가 행복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일에 치여가며 버티긴 했지만, 지난 몇 년이 좋은 기억이라곤 못 해.

“그래도 지금은… 내가 죽을 즈음엔, 널 먼저 보내고 나서도 내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이대로 그 애와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말이지.”

돌이켜보면 러셀을 만날 때 자신은 한참 방황 중이었다.

허술했고 서툴었다. 흥미 본위로 손댄 주제에 많은 상처를 줬고 선도 먼저 넘었다. 심지어 시원하게 놓아주지도 못했다.

그걸 전부 받아들이고 이 관계를 단단히 꿰맨 건 러셀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여린, 하지만 결코 약하진 않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기어이 사랑하게 만드는 고얀 녀석.

보고 있자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리시어스는 지고 사는 성격이 못 되었고, 그건 제가 마음에 품은 상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그는 이미 다정해지는 법을 온 생에 걸쳐 터득해왔다. 정에 약한 러스에게 제 마음을 쏟아붓는 건 어려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이만 갈게.”

슬슬 저녁이라서. 그가 올 시각이야.

넌 기다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안심이다. 작게 주억거린 릭이, 작년보다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문을 닫으며 인사했다.

“안녕.”

I'm gon' be al—, I'm gon' be al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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