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동 펜트하우스
릭셀 / 키워드 [전환점]
103동 펜트하우스의 주인은 이웃 사이에서 꽤 유명인사다.
16구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헤드헌터 소속에, 근사한 외모와 여유로운 태도까지. 때때로 마주치면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않는 사람으로… 요즘 그가 사는 꼭대기층에 자주 들르는 남자가 한 명 있다는 근황도 주민 사이에선 알음알음 꽤 퍼져 있었다.
이 아파트의 오랜 입주인인 그레이엄은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늘 함께 다니던 아내가 있었다는 걸 아직 기억했다. 사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딜런 씨가 유명해진 데에는 사샤 양의 영향이 컸다.
그러니까… 가끔 아침 일찍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고, 야무지게 장바구니를 매고서 귀가하는 사람이었다. 짧은 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순한 인상이었지만 시장에서 우연히 본 그녀의 흥정은 제법 고집 있고 씩씩해서 젋은 사람이 저러기 쉽지 않은데,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을 그레이엄 씨라고 꼬박꼬박 부르며 사온 과일을 하나씩 건네주던 사샤 양의 음성이 얼마나 나긋했는지. 손수 장을 보러 다니는 부지런함을 칭찬하자 사샤 양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남편 자랑을 했더랬다. 중간중간 우리 딜런 씨라고 부르는 호칭에 그레이엄은 겨우 그가 딜런임을 알았다.
다음에 꼭 같이 인사드릴게요. 이 사람이 원체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전혀 그래보이지 않는 인상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샤의 말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중에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는데… 그레이엄은 단언컨대 그녀의 남편이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남자라는 걸 상상도 한 적이 없었지만, 그순간 두 사람이 왜 결혼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딜런 씨는, 적어도 사샤 양 앞에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남편이었다. 이웃과 단란한 인사를 나눌 줄 알고, 그와중에도 살뜰하게 아내를 챙기는, 세상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할 남자.
그랬는데.
사샤 양은 5년 전쯤 돌연 사라져버렸다.
마음 쓰였던 그레이엄이 용기를 내어 딜런 씨에게 사샤의 행방을 물은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침묵 뿐. 그리고 그 시기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던 그녀는 사샤 양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이리라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철옹성 같던 사람에게서 그런 표정이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당시 이웃 중에는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그들 부부의 변화에 자극적인 염문설을 제기했다. 대부분은 두 사람이 이혼했다든가, 사샤가 야반도주를 했다거나, 딜런이 일방적으로 쫓아냈다는 식의 얼토당토 않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샤가 돌연 종적을 감춰버렸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유를 모르는 그레이엄은 그들의 억지 주장에 이렇다 할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딜런은 그런 얘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종잡을 수 없게 두문불출했다. 그렇게 발 없는 소문은 당사자의 해명 없이 떠돌다가 겨우 사샤의 부재를 받아들인 듯 잠잠해졌다.
이후, 어느덧 벌써 5년.
아는 얼굴이 여럿 떠나고, 대신 멋 모르는 청년들이 다시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와전된 이야기가 살을 붙여 기정사실화될 즈음.
어느 청년이 당당하게 펜트하우스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는 딱 그레이엄의 아들뻘로,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가 고운 얼굴이었다. 낯선 사람이길래 어디 손님인가 했는데 그가 누른 게 하필 45층 버튼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레이엄은 남자가 방문 층수를 착각한 줄로만 알았다. 103동 주민이 다들 알다시피 꼭대기층에 있는 집은 단 하나. 그런데 거기에 난데없이 딜런 씨 외의 사람이라니. 아마 43층의 20대 청년 맥과 아는 사이이지 않을까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딜런 씨는 그 집에 살면서도 도통 출퇴근 외에 불필요한 외출을 하는 법이 없었고, 그마저도 상당히 불규칙했다—추측건대 약속을 포함해 밖에서 봐야 할 일을 한 번에 처리하고 오는 듯했다. 아니면 다른 거처가 더 있거나—. 더군다나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온 적은… 적어도 그레이엄이 본 바론 없었다. 기껏 해야 문앞에 두고 가는 택배와 배달이 전부였지.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저 사람에게 층수를 착각한 것 같다고 알려줘야 할까? 딜런 씨가 집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만약 없다면 애꿎은 곳에서 헤맬 저 청년이 조금 안쓰러워질 것 같았다.
다행히 그녀의 오해는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풀렸다.
“저기…,”
“제 손님이 맞아요, 마담. 오랜만에 뵙네요.”
딜런 씨였다. 간만에 본 그는 가끔 마주치던 모습 그대로 가볍게 인사하곤 자연스레 청년의 곁으로 갔다. 잠시 회상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5년이 지나도 여전히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청년과 딜런 씨가 함께 있는 모습을 응시한 그레이엄은, 그제야 제 실수를 인지했다. 방금 딜런 씨가 분명 제 손님이 맞다고 했지. 하마터면 오지랖을 부려 완전히 잘못 알려줄 뻔했다.
민망함을 숨기며 뒤늦게 그에게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다가온 딜런 씨를 당연한 사람처럼 보곤, 잠시 그레이엄을 살피는가 싶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둘 사이에 말을 걸 생각은 없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잠깐 정적이 감돌던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그레이엄의 집인 14층에서 멈췄다. 이제 내려도 좋다는 저 신호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를 창피함과 불편함이 그레이엄을 재촉해서, 그녀는 평소보다 급히 문틈을 빠져나갔다. 당연히 문 열리기 무섭게 도망치듯 내리는 그레이엄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
라고, 조심스럽게 따라오던 인사말을 들으며.
그레이엄은 그가 참 예의바른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게 103동 펜트하우스의 새 주인이 될, 러셀군과의 첫 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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