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퍼플웨이
총 11개의 포스트
약 2100자 전쟁은 반드시 상흔을 남긴다. A는 어두운 낯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신전 근처는 전투의 흔적으로 황폐해 있었다. 벽면 여기저기 남은 무기의 잔흔이, 움푹 패이고 그을린 대지가, 그 위에 흩어진 시신의 무리를 그는 보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그는 손을 모으고 하일리아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전의 부흥
약 4000자 죄罪를 비추는 눈. 안광을 번쩍이는 눈. 낱낱이 파헤쳐, 그 내면까지 들여다볼 것 같은 눈들이 소녀를 바라본다. 반들거리는 렌즈 너머로 그것들이 그를 직시하고 있다. 검고 어둑한 거울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겁에 질린 눈동자와 눈을 마주한다. 차가운 시선이 T의 전신에 닿는다. 온몸이 붙들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어디서 쏘아 보내는
약 5900자 썸띵은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만을 염원하며 오랜 시간 세계를 떠돌았다. 그건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낯설지도 않았다. 그가 그저 가만히 세계를 관조하는 동안, 인간들은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문명이 만들어 낸 관습은 현대에 이르러 낡아빠진 구습으로 남기도 했고, 혁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속에 썸띵은
약 3000자 최악의 하루. M은 맨발로 횡단보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비에 젖어 어물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기껏 빗물을 닦아낸 보람도 없이 장대비가 속옷째 흠뻑 적시고, 뒤이어 옆에서 경적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코앞에 정차한 차를 원망스레 째려본 그가 찰박거리는 바닥을 딛으며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굽이 부러진 구두가 손끝에서 달
약 3000자 겨울날의 기울어진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했다. 눈은 점차 녹고 있었지만,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푸른 눈에는 아무런 감상도 비치지 않았다. 바깥엔 새해를 맞은 사람들이 저마다 들뜬 얼굴로 눈 쌓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집 안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고요했다. 그 나직한 정적의 순간에도 동생 A는 부산스레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약 6000자 한참 인터넷에 이런 밈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규칙을 깨도 되는 때가 언젠지 알아?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쫓아갈 때다!’ A는 실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둔 채 공항 한가운데를 전력 질주했다. 젠장, 늦으면 조지 삔다! 그의 손에는 부적이 들려 있었다. 커다란 손에 비해 앙증맞은 부적이 애처롭게 찌그러졌다.
약 3700자 "적어요. 개 같았다고." "아, 예…. 개 같았다….“ 기자는 반쯤 자포자기한 채 수첩에 그의 대답을 받아 적었다. 작은 수첩 위에 '개 같다'는 답변만 세 번째였다. 매번 당황하는 것도 기력을 소모하는 일인지라, 이제 그는 추가 질문으로 유의미한 답을 얻어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사각사각 성의 없이 끄적이는 펜 끝에 은은한 무
약 4800자 기억나?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 매화 꽃잎이 눈발에 섞여 날리던 날. 드러난 살결마다 칼바람에 에일 것 같던 날. 디디고 선 곳을 모조리 무너트릴 것처럼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어. 네 손끝에 모여든 겨울바람이 칼날을 이루고, 그 검 끝이 나를 겨누었지. 애처로운 낯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어. 나는 목청껏 외쳤어. “울지 마! 이
약 3000자 꿈을 꿨다. 나는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중력을 감각했다. 그것은 하강인 동시에 상승이었고,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과도 같았다. 이 추락에 끝은 있는가? 아무래도 좋았다. 꿈이라면 깰 테고 생시라면 채 인지하기도 전에
약 3600자 자신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어떤 마법사는 최초의 영화로부터 태어났고, 어떤 금서는 괴담으로부터 태어났고, 어떤 방문자는 유구한 신화로부터 태어났죠. 그렇다면 저의 기원은 어디일까요? 어머니께서는 유독 반짝이는 일곱 신성을 따다 일곱의 화신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인간으로, 이종족으로, 한 권의 책으로, 고립된 이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