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종
우주/별/공허 키워드 | 순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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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나는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중력을 감각했다. 그것은 하강인 동시에 상승이었고,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과도 같았다. 이 추락에 끝은 있는가? 아무래도 좋았다. 꿈이라면 깰 테고 생시라면 채 인지하기도 전에 죽을 테니까. 체념이 빠른 것이야말로 나의 장기였다.
세상 만물 어떤 것도 영속하지 않는다. 그 말을 증명하듯 나는 퉁, 하고 작은 저항감과 함께 어딘가로 튕겨 나갔다.
그곳에 있는 것은 우주였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공허 속에 무수히 많은 별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마치 내 몸이 거대한 천체 속에 융해된 듯했다.
나는 경이에 무릎 꿇는 심정으로 그 광경을 속절없이 지켜보았다. 이렇게 많은 빛 속에 나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광활한 우주 속, 눈부신 빛의 군집에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다만 나였다.
그 꿈은 무력감마저 생경해서 나는 일어난 뒤에도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점차 오감이 현실로 돌아오자 요란스러운 매미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날도 나는 하는 일 없이 풀밭에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저물녘임에도 공기가 유독 후덥지근했다. 나는 한참 더운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며 여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저기서 온갖 생명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아우성치고 있었다. 불쾌하진 않았다. 이곳에 있으면 저들조차 내게 간섭하지 않는다. 어떤 이도 함부로 삶을 채근하지 않는다.
“이러고 있으면 좋아?”
평화를 깬 것은 B였다. 어느샌가 다가온 B가 시야 한쪽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누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눈빛이 호기심에 빛났다. 긴 머리칼이 자꾸만 얼굴 위로 쏟아져서, 나는 무심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천체 관측.”
“아직 해도 덜 졌는데.”
나는 실없이 웃고는 B를 끌어당겨 풀밭에 뉘었다. ‘으악!’ 하는 비명을 끝으로 잠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가 그를 돌아봤을 땐 그도 저물어 가는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지.”
“응.”
B와의 대화는 언제나 짧았다. 그럼에도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그가 내게 언제나 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B는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서 홀로 누워있는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그는 구태여 묻는 일이 없었다. 그의 무관심은 차갑지만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어딜 가나 서로와 마주쳤다. 우연은 겹겹이 쌓여 필연을 이루고,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어느샌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게 제법 기묘하게 느껴졌으나 싫은 건 아니었다.
하늘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노을이 물러가고 어슴푸레한 어둠이 밀려오는 모습을 B와 나는 고요히 지켜보았다.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자연이 내는 온갖 백색 소음이 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마침내 하늘이 깜깜해지자 머리 위로 별이 총총히 수 놓였다. 어떤 별은 점점이 그려진 은하수 안을 휘돌고, 어떤 별은 저마다 제자리에서 빼곡히 빛났다. 꿈이 아니어도 경이는 쉽게도 손안에 쥐이는구나, 하고 감탄하다가 나는 다시금 내가 꾼 꿈을 떠올렸다. 복기하자니 여전히 생시처럼 생경했으므로 나는 무심코 B에게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꿈을 꿨어.”
대뜸 적막을 깨자 곁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쪽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무슨 꿈?”
“어딘가로 계속해서 떨어졌어. 한없이 추락해서 이대로 죽겠다 싶었을 때, 갑자기 어딘가로 튕겨 나갔어. 그리고….”
“네가, 천체 한가운데에 있었어?”
B가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나는 소스라쳐 그를 돌아보았는데, 그도 조금 놀란 기색인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나도 같은 꿈을 꿨거든.”
조곤조곤 특유의 낮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B는 자신의 꿈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B의 꿈속에서 그는 우주를 부유하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부표도 없이 떠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존재가 천체 속에 완전히 융해된 것처럼 느껴질 즈음 그는 문득 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무의식의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무심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인간은 고독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는 존재이며, 존재와 존재가 닿기를 바라는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그의 대상이 나라는 것은 무척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 소망대로 내가 B의 우주에 당도했을 때,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저 그만이 나를 직시한 채로 목청껏 나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내가 황홀한 듯 눈앞의 풍경에 넋을 놓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무심한 성정인 그가 나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단순히 나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등 뒤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고 했다. 거대한 아가리에서 침을 뚝뚝 흘리고, 무척 탐욕스러운 것을 발견한 듯 빨간 짐승의 눈깔을 형형히 빛내면서. 무수히 많은 촉수의 끄트머리에 저마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었고, 괴물은 그것을 금방이라도 나를 꿰뚫을 기세로 겨누었다.
괴물은 B의 부름조차 듣지 못한 듯 내게 빠르게 접근했다. ‘안 돼, 안 돼…!’ B는 패닉에 차 나를 향해 무중력 속을 다급히 헤엄쳤으나 채 말릴 새도 없이 칼날이 내 몸을 갈가리 찢었다. 나는 단숨에 절명했다. 곧 그것은 넝마가 된 나를 통째로 삼키고, 그리고…….
내 모습을 본뜬 채 지구로 향했다고 했다.
그날 이후의 기억은 내게 없다.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적의 기억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B 또한 온데간데없다. 어쩌다 가끔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날 바라보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그날, 숭덩숭덩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홀로 굴러다니는 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B는 내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
오직 그것만을 의문한 채로, 내 의식은 거기서 영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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