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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봄의 목전에서

봄/비/초목 키워드 | 마기카로기아 | 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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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 매화 꽃잎이 눈발에 섞여 날리던 날. 드러난 살결마다 칼바람에 에일 것 같던 날. 디디고 선 곳을 모조리 무너트릴 것처럼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어. 네 손끝에 모여든 겨울바람이 칼날을 이루고, 그 검 끝이 나를 겨누었지. 애처로운 낯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어. 나는 목청껏 외쳤어. “울지 마! 이런 순간에 정을 붙이지 마! 넌 너무 다정해!”

어때. 너는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어?

네가 그랬잖아. 천변만화하는 사계, 끝없이 순환하는 계절이라지만 그 끝은 필시 겨울이라고. 누구나 종국엔 겨울로 되돌아온다고. 만물이 얼어붙는 계절이야말로 모든 생의 종착점이며, 오로지 그것만이 네가 믿는 영원의 형태라고…….

창밖을 봐, 지화야. 비가 내리고 있어. 봄기운을 한껏 머금은 비가. 더 이상 바깥엔 눈이 내리지 않아. 창틀엔 서리가 끼지 않고, 벌거벗은 나뭇가지 위로 새 생명이 내려앉아. 초목은 늘 소리 없이 움트기 시작해. 싱그러운 녹음, 얼어붙었던 만물이 되살아나는 계절. 마침내 봄이 와.

그러니 나아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세 갈래로 갈라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진 아무도 모르지만, 넌 결코 혼자가 아닐 거야. 그 애는 언제고 널 향해 손을 뻗고 있었거든. 그날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제까지고 소중한 이에게 영원을 맹세하기 위해서.

자, 이제 맹세하자. 어떤 역경에도 꺾이지 않을 단 하나의 맹세를.

1.

 

어떤 존재가 곁에 머물렀다 부드러운 향취를 남기며 사라진다. 가끔은 메울 수 없는 공백을 느끼기도 하지만, 더 이상 공허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떠올리자면 가슴 속에 뭉근한 온기가 머물렀다 사라진다. 그것은 사계를 돌아 마침내 피어난 봄. 그래, 봄의 온기일 것이다.

그날로부터 두 달. 그 사이 지화는 직장을 옮겼다. 자그마치 10년을 일한 곳이었다. 그를 고용한 건 중견기업의 회장이었는데, 일곱 살 난 딸아이가 납치된 뒤로 과보호가 심해져 아예 전담 경호원을 두었다. 그게 연지화였다.

아직도 제 앞에서 투덜대는 아가씨의 모습이 선연했다. 아가씨란 지화가 모시는 이를 뜻했다. 더 이상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훌쩍 커 버린 여인. “아, 이렇게 갑자기 관두기예요?“ 잔뜩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사뭇 밝았다.

“죄송합니다.“ 지화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그렇듯 사무적이기 그지없는 담백한 태도로.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지. 무슨 휴가를 그렇게 오래 가나, 그 사이에 나더러 칼 맞고 죽으라고 그러나.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요!”

“그것도 죄송….”

“사과하지 마요.”

단호한 음성이 말허리를 잘랐다. 머리가 크고부터 줄곧 심지가 굳었던 아가씨는 때때로 제 나이보다 여남은 살은 더 성숙한 여인처럼 굴곤 했는데, 그날도 설늙어 보일 정도로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죠? 약속했던 이틀에 더해서 사흘이나 쉬었던 때. 그 무렵부터, 다시 돌아온 지화 씨 표정이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거든요.”

“그랬습니까.”

머쓱하게 목뒤를 매만지며 고개를 숙이자 아가씨가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10년 동안 다름이 없었다. 어떤 것은 10년이 지나도 강산은커녕 웃음소리마저 변치 않는다. 마치 10년 만에 재회한 제 친구가 제 기억 속의 모습에서 한 치의 변함도 없었듯이.

거기까지 사고가 닿는 순간, 지화는 저도 모르게 제 삶의 모든 면면에서 한 사람을 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뻔뻔하게도.

“저한테 지화 씨는 이모나 다름없어요. 설령 지화 씨가 절 조카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아가씨….” 채 대꾸하기도 전에 아가씨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대신 연락은 꾸준히 해 줘야 해요?”

“…네. 그럴게요.”

그날을 끝으로 지화는 사표를 냈다. 더는 눈이 내리지 않기 시작할 즈음. 봄바람이 세상의 모든 얼어붙은 것들을 녹이기 시작하는 늦겨울, 혹은 초봄의 날에.

2.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완연한 봄날. 지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주문을 마쳤다. 직원은 이제 뭘 묻지도 않았다. 음료가 주문과 동시에 카운터 앞에 놓였다.

‘매일 같이 오긴 했지….’ 지화는 묘한 표정으로 음료가 든 종이 캐리어를 들고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푸른 여명이 사위를 밝혔다. 기온은 제법 쌀쌀했지만 머리 위에서는 여전히 봄임을 증명하듯 흰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쏴아아, 하고 불어온 바람이 발치에 카펫처럼 고여 있던 벚꽃잎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저만치 주차된 검은 벤에서 언제나처럼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작은 한숨과 동시에 입가에 슬그머니 웃음꽃이 피기를 잠시, 발걸음이 사뭇 빨라졌다.

“시큐를 새로 구할까? 요즘 스토커가 너무 늘어서….”

두 달 전. 아직 봄이라 부르기엔 쌀쌀한 시기에, 달리아는 그 말로 대뜸 서두를 열었다. 여차하면 동화든 전이든 해서 모습을 숨기면 그만인 네가 스토커라니.

지화는 곰곰이 지난 기억을 곱씹었다.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라면 불온한 기척에 예민한 법이다. 그런 지화가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여태 함께 있을 때 그런 기척을 느낀 적은 없었다.

“글쎄, 내가 아는 대로면 없었는데.”

“꼭 줄줄이 미행해야 스토커인 줄 알아? 물밑에서 내 신상 캐려고 아등바등하는 악성 팬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그리고, 요즘 파파라치들도 무서워. 너 기계치지? 망원 카메라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

우다다 쏟아내는 말을 끝으로 지긋한 시선이 달리아의 낯에 머물다가 비스듬히 비껴갔다. 화려한 인상의 얼굴이 또 뜻 모르게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그건…, 큰일이네. 듣고 보니까.”

“그렇지?”

“그런데 아마 경호 인력을 싹 바꿔도 못 고칠걸. 파파라치 같은 건.”

“됐고!”

‘내가 또 눈치 없이 군 걸까….’ 지화는 곁눈질로 그를 살피며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잖아. 그 좋은 카메라로 몇십 미터 밖에서 찍어대는 걸 무슨 수로 잡으려고. 의문은 조용히 삼켰다.

그 뒤에도 불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온갖 사례를 들어가면서 달리아는 새 경호원을 구해야만 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지화는 묵묵히 듣다가, 불쑥 답을 내놓으려 입을 열었다가, 핀잔과 함께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거라도 있어?” 십 분은 더 지났을 때에야 지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제야 달리아는 고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앞으로 내뱉을 한마디가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왜…) 고함치듯 말했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내 옆이어도 되잖아!”

“…어?”

“우리 소속사로 들어오란 말이야! 너… 너어!”

달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씩씩 흐트러진 숨을 뱉어냈다. 대단히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정말로 왜…).

“넌 내 옆이 싫어?!”

“아니.”

너무 극단적이지 않아? 왜 사고가 그렇게까지 흐르는 거야……. 사실이 아닌 말을 정정하는 건 또 귀신같이 빨라서, ‘싫냐’는 말이 끝나자마자 부정의 말이 잘 학습된 AI처럼 튀어나왔다.

달리아는 말문이 막혔는지 매서운 눈매로 이쪽을 쏘아보았다. 잠깐의 정적. 오히려 이쪽은 기쁜데……. 그렇게 간단한 물음이라면 그렇게 지난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고 지화는 작은 불만을 삼켰다. 습관처럼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곁에 종일 붙어 있는 자신을 상상하자 왠지 기분이 들뜨는 것만 같았으므로. 그 사이 달리아는 화난 기색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진짜로 네 곁에서 일해도 괜찮아?”

내뱉은 말이 제가 느끼기에도 한없이 수동적이었다. 하, 갑갑하다는 듯 터져 나온 한숨을 끝으로 또 잠시 정적이었다가, 달리아가 저보다 작은 손으로 제 손을 덥석 쥐어 당겼다. 오른손. 그가 직접 손목에 묶어 준 손수건이 검은 코트 자락 너머로 빼꼼히 드러났다. 처음 매어준 날 이후로 지화는 매일 같이 오른 손목에 손수건을 매었다.

“안 괜찮으면 내가 널 붙들고 이러고 있었겠어? 이 바보….”

“…….”

마침내 확답받은 뒤에야 지화는 냉랭한 낯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남몰래 곱씹은 진심이 속절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럼 아침마다 커피 사줄 수 있겠다.”

“내가 고용주인데 네가 왜 사줘?”

“네가 좋아하니까….”

다시, 정적. 이번엔 조금 전과는 다른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그건 이맘때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과도 닮아 있었다. 겨울을 녹이며 불어오는, 풀 내음이 섞인 싱그러운 바람.

“…사 오는 건 상관없는데, 네가 마실 것도 사 오는 거 아니면 안 마실 거야.”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끝으로 달리아는 몸을 휙 돌렸다. 부드러운 옆선이 시야 끝에 머물렀다. 사락사락 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영원히 눈부시게 피어 있을 것만 같은 늦여름의 장미. 역경을 딛고 떠오른 태양. 고요한 눈길로 지화는 가만히 그를 눈에 담았다. 경외감을 숨길 수조차 없는 눈동자로.

그날 이후 지화는 달리아와 또 다른 맹세를 나눴다. 역경에도 지지 않는 한 송이의 맹세를. 영원은 믿지 않지만, 세계의 인과가 허락하는 한 반드시 서로의 곁을 지키겠노라고.

연지화는 달리아 리벳을 지킬 것이고 달리아 리벳 또한 연지화를 지킬 것이니, 이것은 필시 학원 기사단으로부터 이어진 궤적일 것이다. 한 사람분의 공백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나아가기를 택했다.

“뭐 해? 빨리 와!”

저만치서 늦여름이 차체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채 소리치자, 겨울은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언젠가처럼 벚나무에서 꽃잎이 살랑대며 휘날린다.

꽃은 언제나처럼 낙화하되 마냥 슬프지 않다.

사계의 다정함을 머금은 바람이 부드럽게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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