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痛과 鼓動에 대하여

레이아즈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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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허구이며, 사실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자살, 사형, 살인 등 트리거 요소가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 우라바야시 아즈사를 사형에 처한다."

판사봉이 세 번 떨어지는 그 가운데에는 민트색 머리카락의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방청객들은 구경거리가 끝나자마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군댔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든지, 그래도 어린 나이인데 안타깝게 됐다든지, 누군가의 혀를 차는 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작게 하품할 뿐이었다. 눈꼬리에 슬쩍 맺힌 눈물이 떨어질락 말락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는데, 그 작은 체구의 소녀만이 느린 시간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 주위로 딱 반경 1미터. 그 안에서는 시곗바늘도 느긋해질 것만 같았다.

저 멀리에서 둥근 물체가 하나 날아왔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쏜살같이 움직이던 것이 아즈사의 곁으로 올수록 조금, 조금씩 느려져서…

"…악."

마지막 순간에는 그것이 날달걀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무언가를 막아낼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맞고 머리에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노른자를 조금 닦아낼 뿐이었다. 달걀을 던진 남자는 고성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지만 곧 끌려나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메아리처럼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즈사는 모든 것이 꿈 같다고 느꼈다. 현실 도피 같은 건 아니었고 그저 잠이 쏟아졌기 때문에. 그녀가 강제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그 순간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한파가 이주일 내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 그 날만은 유독 그랬다. 기상 캐스터는 이상기후라며 지구 온난화와 그 영향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법정에서 이제 막 나온 아즈사가 그것을 알 리는 만무했다. 그저 언제나처럼, 운 좋은 하루에 불과했다.

홋카이도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그녀는 수감실 하나를 혼자 쓸 수 있었다. 사형수라서 일부러 혼자 가둔건지 방이 어쩌다 하나 남은 건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즈사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잘 맞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건 귀찮을 것이 뻔했다. 애초에 그녀가 남의 신경을 쓴 적이 있기나 하냐만은, 어쨌든 간에 다들 죄를 지은 이들이었다. 아예 껄끄럽지 않을 리가. 죄수복은 그녀의 마른 체형 탓에 통이 남았다. 프릴이 가득한 옷의 그 사부작거리는 감각이 그리웠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바닥에서 냉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사형일까지 펼쳐질 지루한 나날들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꽝이었다. 하루 계획을 쓸까 생각도 해봤지만 실행력이 부족했다. 아즈사는 떨떠름하게 바닥에 누웠다. 천장이 너무 가까웠다. 탁 트인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어, 로즈! 벌써 자는 거예요? 방금 오셨다고 해서 저도 바로 달려왔는데~"

눈을 반쯤 떠서 문을 바라보니 붉은 무언가가 흔들렸다. 그것은, 아니 그 사람은 밝은 목소리로 자꾸만 저를 부르고 있었다. 흥미가 조금 생겼다. 사형수를 반기는 사람이 교도소에 있다면, 그건 필시 아주 미친놈일 테니까. 철창 틈으로 손가락 하나를 삐죽이 내밀었다. 매끈한 천의 감촉이 새삼스러웠다. 사람의 온기를 기대하기라도 한 걸까? 아즈사는 그 끄트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으음, 로즈으… 이건 아직 안 돼요. 당신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처음부터 이러는 건 곤란해요."

"이. 이름을 알려주면 버. 벗겨도 괜찮은 건가…요?"

"듣고 나서 생각해 볼까요?"

"우. 우라바야시 아즈사…요. 그. 그쪽은…요?"

"레이버 페인즈에요. 잘 부탁해요, 로즈."

싱글벙글한 얼굴의 반은 그의 긴 앞머리로 가려져 있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속에 숨긴 것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레이버 페인즈 labor pains는 진통이라는 뜻이었다. 아픈 것을 가라앉혀 멎게 하는 것. 아즈사는 그 의미를 찬찬히 곱씹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고통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날 도우려 이리 온 걸까. 아니면 진통제가 진정으로 필요한 건 저 남자 본인인가.

"그. 그쪽, 아. 아즈사 씨를 왜 찾아왔어…요? 아. 아즈사 씨가 사형수라는 걸 모르는 사.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요? 로즈가 사형수라는 사실이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구. 굳이 가깝게 지내봤자 조.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요. 저는 로즈가 사형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무. 무슨 말이에…요?"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릴게요."

문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레이버가 오른손을 제 가슴에 얹고 꾸벅 인사를 했다. 격식 있어 보이는 모양새였으나 죄인 신세인 저한테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뭐, 나름대로의 절차 같았으니 구태여 말을 얹진 않았지만.

"로즈의 사형 집행인, 레이버 페인즈라고 합니다."

"…!"

웬만한 일에는 잘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상하고 험한 꼴을 많이 봐온 그녀였지만, 지금 이 상황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인이 사형 당일이 아닌데도 사형수에게 와서 친분을 쌓고는 하는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에서도 여러 대책들을 강구하고 있는데 이 자는….

"놀란 것처럼 보이네요, 로즈. 괜찮아요?"

걱정하는 말투. 그러나 살짝 접힌 눈꼬리와 붉게 상기된 뺨을 보면 사실상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뻔했다. 그의 고약한 악취미인지 아니면 사형수를 어떻게든 회개(…) 시켜서 형량을 줄여주려는 계획인지 헷갈렸다. 아즈사는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입에 걸린 은은한 미소가 검었다. 꽤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자 레이버는 끙,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했다. 허리를 한참 숙이고 있었는지 철창 사이로 보이던 얼굴이 쑥 올라갔다. 시야를 한참 올려야 얼굴이 보이는 걸 보니 어림잡아 190은 넘는 것 같았다. 위협적이긴 하네. 저 정도는 돼야 사형 집행인을 하는 거려나. 사형을 집행하는 것에 체구는 별 상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꽤 직업과 잘 어울리는 외형을 하고 있었다.

"무. 무슨 속셈인가…요?"

"일단은 치료 목적, 정도라고 해 둘까요? 저는 사형 집행인이면서 동시에 의사거든요. 로즈가 적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 어차피 죽을 텐데 그게 다 무. 무슨 소용이에…요?"

이번에는 레이버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씩 서로를 무시했으니 비긴 셈이었다. 그는 이곳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피곤할 테니 푹 자두라고 했다. 앞으로 매일 보게 될 테니 궁금증을 한 번에 다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즈사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았고, 또 한편으로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 저 남자를 봐야 한다면 할 말을 아껴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되면 잊어버렸다.


레이버는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일을 받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사형 집행인의 일이 많다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정말 퇴직해야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는 이 일을 할 동안 병원에 나가 진료나 수술을 하지 않았다. 일종의 계약이라고나 할까. 그가 가진 모든 의술을 사형수의 건강에만 사용해야 사형 집행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검찰에서 레이버에게 채운 목줄 같은 것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사람 죽이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사형은 괜히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않고 죄인들의 숨을 앗아갈 수 있는 괜찮은 대안이었다.

그는 박애를 주장하는 연쇄살인범이었다. 모두를 사랑하기에 그들을 죽임으로써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발상은 정말 끔찍이도 새로웠다. 레이버가 그의 병원에서 일으킨 여러 살인들은 그 내용이 터무니없이 잔인해서 관련된 모든 문서가 비공개로 전환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의술 하나만큼은 실력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고, 그 재능을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것이 윗분들의 판단이었다. 사실은 고위 국회의원들과 연줄이 있던 레이버가 형을 피하기 위해 손을 쓴 것이었지만 별 수 있나. 그의 병원은 이와 같은 편의상의 이유로, 높은 사람들을 VIP로 지정하고 특별대우를 해가며 치료를 해주었다. 그 결과가 워낙 만족스러운 데다가 가끔 용돈도 타서 쓰니 그들 입장에서는 레이버가 마냥 이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 걸리는 것은, 그가 매달 죽이는 환자의 수가 너무 많았다. 홍보도 다방면에 잘 되어있어 가난하고 궁핍한 이, 부모를 아끼는 자식, 안타까운 시한부 등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병원을 찾아오는 바람에 희생자의 수가 상당했던 것이었다. 레이버가 직접 운영하는 본점을 제외한 나머지 분점들에서는 실제로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니 의심을 살 일도 적었다. 수술이 잘 된 사례 몇 개만 기사를 내면 사소한 죽음들은 쉽게 가려지고는 했다. 그렇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질 것을 염려한 한 고위공무원이 그에게 사형 집행인으로서 합법적으로 살인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고, 그리하여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형 집행이 벌써 9달 전이었다. 자신이 병원을 하지 않는 동안 고통에 찌든 로즈들이 늘어날 거라며 괴로워하던 레이버에게 아즈사는 꽤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녀가 교도소로 오기 전, 재판을 진행하며 우라바야시 아즈사는 사형일 거라는 여론이 상당하던 그때부터 레이버는 그녀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조사했다. 이름, 우라바야시 아즈사. 나이는 27살. 가명은 포르투나. 대단한 도박꾼에 벌어들인 돈도 많고… 사진을 보니 얼굴도 아름다웠다. 자신의 로즈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부족한 거 하나 없이 인생 재밌게 살았겠네. 그러게 왜 사람을 죽였대. 그것도 세 명이나. 체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다 못해 사형 집행인이 된 레이버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영 이해가 가는 선택은 아니었다.

직접 아즈사를 만나고 오니 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느긋, 아니 무기력했으며 누군가를 쉽게 죽일 수 있는 체구도 아니었고 독기라든지, 악바리라든지 그런 건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도박장에서도 싸움은커녕 몸 사리기에 급급했을 것 같은 사람이 도대체 누굴 죽일 수 있다는 건지. 벽에 걸린 달력에는 푸른 꽃밭 그림과 5월이라고 크게 써진 글씨가 있었다. 지금 11월이 다 끝나가는데 도대체 이 달력은 왜 아직도 봄에 머물러 있지? 레이버는 달력을 대충 잡고 북북 찢어냈다. 덕분에 마감 부분이 잔뜩 이상해 졌지만 알 게 뭐람.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여섯 달 동안 한 번이라도 달력을 넘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즈사의 사형 집행일은 10월 23일…로 되어 있었지만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늦을 게 분명했다. 지금껏 사형수들이 교도소에 들어와 생활한 기간을 살펴보면 평균적으로 3년 정도였으니까. 아마 모범수나 뭐 그런 이유로 아즈사도 최소 2년은 늦춰지겠지. 레이버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녀의 고통은 무엇인지. 로즈들의 고통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은 그의 구원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아파하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삶을 견뎌가고 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그들을 직접 짓밟는 것의 희열은 극히 작은 이유일 뿐이었다.

"아아, 나의 로즈…. 당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이미 충분히 눈이 멀 것처럼 빛나지만, 시들어가는 그 순간조차도 美는 영원하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디 내가 당신의 질긴 악몽을 끊어낼 수 있길 바라요. 아주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아즈사는 점점 교도소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오전에도 텅 비어있고 오후에도 텅 비어있다. 애초에 사형수에게는 할 일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빈 방에서 보냈고, TV를 틀어 이것저것 채널을 돌려 보기도 했지만 딱히 재미는 없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운동시간이 있었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가벼운 산책 정도야 그렇다 해도, 몸을 쓰는 건 귀찮고, 지금은 겨울이라 춥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즈사 본인의 흥미가 충족되냐, 아니냐의 차이를 빼면 둘 다 백수와 다름없는 생활이었으니. 포커 카드 몇 장만 쥐여줘도 좋으련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덜 무료한 시간이 레이버와의 만남이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로즈, 오늘도 자고 있나요?"

"오. 오늘은 별로 자. 잠이 오지 않아…요."

"깨어있는 로즈는 오랜만이라 반갑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언제 깨나, 한참 기다리다가 지쳐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 그쪽이 타이밍을 잘 맞추면 되. 되는 게 아닌가…요?"

"하하,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레이버의 이야기는 단순한 일상보다 살인사건을 모아둔 추리소설에 가까웠다. 그는 대부분 자신이 지어낸 듯 보이는 병원에서의 살인 이야기(아즈사는 그게 시리즈물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고 있다. 워낙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지라.)를 해주었고, 아주 가끔씩은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던 순간의 이야기도 했다. 아즈사는 그가 극심한 죄책감에 스트레스를 얻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속으로 단정지었다. 가끔 자신의 눈치를 보다가 지루한 이야기는 대충 넘기는 것, 교도관 몰래 레몬 사탕을 넣어주는 것, 그 큰 손에 매직으로 낙서를 해서 귀여운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것…. 레이버는 자신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형 집행인이고 아즈사는 사형수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줄 때마다,

"알아요, 로즈. 원한다면 당신의 사형선고일과 집행일도 말할 수 있어요. 나에겐 이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걸요."

라고 답하며 얼굴을 붉혔다. 처음에는 그런 레이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게 됐다. 아즈사는 여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꾹꾹 담아서 레이버가 다음 날 다시 찾아올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했다.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은 점점 옅어지고 내용은 자꾸만 왜곡됐지만, 아예 사라지기 전에는 그에게서 새 이야기를 받을 수 있었다. 레이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이버는 키가 무려 이 미터나 됐다. 처음 봤을 때 백구십 정도로 어림짐작했었는데 그것보다 무려 십 센치는 더 큰 키였다. 그는 장갑 벗기는 것을 싫어했다. 지난 번 그녀의 행동은 그에게 있어 무례였을 테지만 아즈사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이상한 면모가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은 아즈사는 죽을 때까지 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로즈는 아즈사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레이버의 애칭이었다. 아즈사는 저도 모르게 '다행이다.'하고 안도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의미를 가진다는 건 귀찮을 게 당연했다.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것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주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 이곳저곳에 남은 잔흉터까지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팠을까? 궁금해도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진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신도 무언가 중요한 비밀 하나를 말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이버는 아즈사에게 애정을 퍼붓는 것에 비해 궁금증은 별로 없었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아즈사는 피곤한 일을 덜었다고 여겼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도 채 안 남게 되었다.

'내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

차가운 건 역시 별로니까 평소였으면 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겠지만, 최후라는 것은 왜 그리도 무거운지. 아즈사는 맑기만 한 하늘을 유독 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운이 좋으니까 올해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해 줄 거지?'

유독 자신을 편애하던 세상에게 물었다. 이런 시궁창에 처넣을 줄은 몰랐지만 운이 좋다고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결국 죽게 되는 것은 '불운'해서가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아즈사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오후 10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레이버는 항상 늦은 밤에 그녀를 찾아왔다. 진실이 섞여 들어간 거짓을 고하기에 낮은 너무 밝았다. 아즈사는 오늘따라 왜인지 모를 감상에 젖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졸기도 했지만 꿋꿋이 잠을 이겨냈다. 띵띵. 철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그. 그쪽. 아. 아즈사 씨랑 내기하지 아. 않을래…요?"

"내기요? 갑작스럽긴 하지만 뭐, 좋아요. 그게 로즈가 바라는 거라면 저는 뭐든 좋아요."

"고.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라는 것 정도는 그. 그쪽도 알고 있…죠?"

"벌써 그렇게 됐더라고요. 무슨 계획이라도 세웠나요? 아님…"

레이버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랑 같이 있고 싶어요?"

"아. 아즈사 씨는 내기 얘기를 하. 하려고 한 건데…요."

"아, 그렇지. 무슨 내용인지 들을게요."

"크.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지 안 올지 맞추는 내기에…요."

"간단하네요."

레이버는 작게 흠, 소리를 냈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눈은 안 오지 않을까요? 애초에 확률도 낮고, 날씨 예보도 이번주 내내 봄처럼 따뜻할 거라고 했는걸요. 설마 로즈도 눈이 안 온다는 쪽에 거는 건 아니죠? 그럼 조금 재미가 없는데…."

"아. 아즈사 씨는 눈이 무조건 온다 쪽에 거. 걸 거예…요."

레이버의 왼쪽 눈이 한 번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즈사는 아예 함박눈이 올 거라고 덧붙였다.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모양새에 레이버는 그녀에게 구름 모양으로 날씨를 맞추는 능력이라도 있나, 고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의 날씨까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일 정도면 몰라도.

"갬블러들은 원래 다 그런 식인가요?"

"무. 무슨 이야기에…요?"

"확률 낮은 쪽에 거는 걸 즐기는 편인지 궁금해서요."

"아. 아즈사 씨가 질 가능성이 더 크. 크다고 생각해…요?"

아즈사, 아니 포르투나는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보기 드문 함소였다. 레이버의 볼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아즈사는 속으로 루돌프 역할에는 그가 제격일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할 일 없는 교도소에서만 지내니 상상력이 늘어난 탓이었다.

"내기에서 이기면 뭘 대가로 가져가려고요? 살짝 무서운데~"

"그. 그쪽이 가진 비밀 하나를 아. 알려줘…요. 마. 만약에 아즈사 씨가 지게 된다면 그. 그쪽도 원하는 걸 물어봐…요."

"나쁘지 않네요. 저는 로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으니까요."

"그. 그럼 결과는 크리스마스 때 봐…요."

레이버는 아즈사의 독방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을 기대 앉는 것은 둘만의 소소한 의식이 되었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야기 대신 노래는 어때요? 그. 그쪽 노래 잘 부르나…요? 아예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레이버는 목을 가다듬더니 낮고 느리게 음을 골랐다. 한 음정 한 음정, 읊듯이 뱉는 가사는 아주 옛날 음유시인의 유희처럼 고요했다. 잔물결을 일으키는 호수,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버드나무, 피처럼 붉은 장미…. 그대여- 아즈사는 금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의 레이버는 어딘가 미친 사람처럼, 좋은 꿈을 꾸라는 평소의 인사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사랑해요, 나의 로즈. 사랑해요, 이 세상의 아름다운 당신을. 아아, 로즈. 아름다운 장미를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작 당사자는 듣지도 못하는 고백을 외쳤다. 그의 뒤틀린 짝사랑은 언제나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버는 제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로즈에 대한 사랑 때문이리라. 저는 모든 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나 그 감정이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몰랐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크게 울렸다. 그는 충동적으로 아즈사를 세게 껴안고 싶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 또 한 번 반한 것 같았다. 따스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어루어만질 수 있다면 정말이지 모든 행복을 끌어안은 기분일텐데. 아름답다. 매번 색다른 아름다운을 지닌 로즈라니. 축복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그는 염원했다.

레이버는 오늘도 어김없이 집어온 레몬 사탕 하나를 가운 주머니에서 꺼내 병에 던져넣었다. 처음에는 아즈사가 단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관계자실에서 간식으로 구비해 둔 땅콩 카라멜을 줬었지만, 그녀가 유독 반응을 보이는 것은 레몬 사탕임을 알자마자 인터넷에서 해외직구로 좀 값나가는 것을 골랐다. 그리고 아즈사가 먹고 싶을 때 바로 줄 수 있도록 그것을 여러 개 챙겨다니고는 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반복적인 당은 좋지 않을 듯 하여 고민하다가 도로 가져온 지 벌써 이주 째였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큼지막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이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은 허리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지만 몸을 움직일 기분이 아니었다.

'왜 집행일이 미뤄질 낌새가 없지?'

방 안은 그가 손톱으로 소파 손잡이를 딱딱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여 여유를 부리고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아즈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죽여야 될 판이었다. 만개하지 않은 장미를 꺾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신뢰를 얻을 수 있지? 아즈사는 레이버에게 너무 어려웠다. 그 전까지 있었던 다른 로즈들과는 달랐다. 사형수는 기본적으로 다른 수감자들과도 완전히 격리되어 생활하기 때문에 고독과 불안에 찌들어 있었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내몰린 그들은 레이버가 내미는 손에 더 처절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즈사의 경우에는 되려 자신이 손을 잡아달라 간청하는 꼴이었다.

레이버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아래로 내리다가 교정기관장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만성적으로 관절이 좋지 않고, 최근에는 허리 디스크까지 터져 병원의 단골이 된 VIP 손님임과 동시에 이 교도소의 총 책임자이기도 했다. 레이버가 사형 집행인으로 일하게 된 이후 이러저러한 자잘한 부탁들을 자주 들어주고는 했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기관장님. 저 레이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들어온 사형수의 외출 허가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어어, 그래 레이버 자네로군. 지금 있는 사형수 이름이 뭐였지?]

"우라바야시 아즈사입니다."

[우라바야시… 아, 그 도박쟁이였나?]

"네, 맞습니다. 이번주 12월 24일과 25일에 잠시 나갔다 오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아시잖습니까? 교도소라는 곳이 워낙에나 답답하고…"

[그래그래. 자네 원하는 대로 하게. 내가 외출 허가증을 끊어주지. 대신에 이번주 토요일에 오전 진료를 좀 예약해주겠나?]

"바로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레이버는 푸흐흐, 삐져나오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채 얼굴을 가렸다. 벌써부터 기대가 이리 되어 어쩌나. 얼른 로즈에게도 가서 이 사실을 알려줘야지. 좋아하려나. 좋아하지 않으려나. 아즈사가 기뻐해준다면 몇 번이라도 다시 밖에 나가자 할 생각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무얼 가지고 싶어할까? 각종 명품들을 머리에 그렸다. 재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지.

'로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내가 독차지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집행일 연기 쯤이야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레이버는 아즈사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고민 따위는 사치에 불과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로즈를 빨리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삶을 더 늘릴 생각이나 하다니!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도 그 스스로의 욕심에 불과할 뿐이었다. 돌이켜 보니 이기적이기 짝이 없었다. 역시 추하구나, 레이버.

'그나저나 아까 노래 불러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었나. 확실히 평소보다 잠에도 빨리 든 것 같고.'

무심결에 목에 좋은 음식, 잘 때 듣기 좋은 노래 목록, 가사가 부드러운 노래 등등을 찾아보던 레이버는 그대로 소파에서 잠들었다. 삐딱한 자세로 오래 있었던 탓에 아침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도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어깨와 목을 스트레칭하며 이른 새벽 복도를 거닐었다. 아즈사는 아직 자고 있는 것을 10분 전에 한 번, 5분 전에도 한 번 확인했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수감실에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누워서 뒹굴거리거나 잠을 자며 보냈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하루에 한 번 있는 운동 시간에 꼭 밖에 나갔다. 제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심심했던 거겠지.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는 건 괜찮은 유흥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아즈사의 방 앞이었다. 남들보다 다리가 긴 탓에 그의 걸음은 유독 빨랐다.

"로즈으~! 아직도 자고 있나요? 잠꾸러기 같으니라고. 제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아세요?"

"이. 일어났으니까 그. 그만 불러도 돼…요."

"로즈, 제가 좋은 소식을 하나 들고 왔는데 들어보실래요?"

"어. 어차피 곧 있으면 누. 눈이 올 테니까 곧 안 좋아질 걸…요."

그. 그쪽한테는 말이에…요. 하고 작게 덧붙였다. 그걸 나름 신경쓰고 있었구나. 어쩌면 까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즈사에게는 귀여운 면도 있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레이버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사실은 외출증을 끊어왔거든요.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나랑 같이 데이트 안 할래요? 여기 말고 밖에서."

"외. 외출이…요?"

"네. 그래도 로즈는 사형수니까 감시 겸, 해서 저도 따라다닐 거예요."

"음…. 나. 나쁘지는 않네…요."

"그렇죠? 그럼 얼른 나갈까요? 제가 로즈가 좋아할만한 옷도 미리 골라뒀어요."

"버. 벌써요? 아. 아즈사 씨는 일어난 지 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그럼 옷을 넣어줄 테니까 준비하고 절 부르실래요? 아, 옷이 맘에 안 들거나 뭔가 더 꾸미고 싶어도 말씀하세요."

"이. 일단 알겠으니까 오. 옷부터 주세…요."

우라바야시 아즈사가 평소에 입던 옷은 대체적으로 프릴이 많이 달려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로리타 풍의 검은 셔츠와 플로운스 치마 류의 옷이었다. 양말에도 보통 프릴이 있었고 신발은 메리제인. 레이버가 일주일 내내 아즈사의 행적을 추적하며 뒤진 의상 기록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옷을 고르는 일은 직접 했다. 아무래도 로즈가 입을 옷인데 남들이 아무거나 집어준 걸 줄 수는 없으니까. 다만 한 가지 놀랐던 점은 생각보다도 더 그녀의 체구가 작다는 것. 160에 46이라고 의류점 직원에게 말했더니 사이즈를 살짝 수선해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이미 작은 옷이었는데. 레이버는 속으로 그 옷들을 챙기며 있지도 않은 조카에게 선물을 해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즈사가 알았다면 노발대발 했을 일이었다. 그도 아즈사와 어울리도록 괜찮은 정장을 차려입고 평소에 입던 가운도 벗었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고 머리카락도 좀 다듬고 있으니 정말 연인 간의 데이트 같았다.

'뭐, 명분은 감시지만.'

흉한 얼굴도 머리카락으로 완벽하게 가렸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아즈사는 옷을 다 입은 뒤에야 방에 전신거울이 없음을 깨달았다. 옷은 마음에 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프릴. 이 감각이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피어싱이랑… 볼에 항상 그리던 점도 없네. 이왕 외출하는 거 원래 하던 거만큼은 다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앞에 있는 간수에게 레이버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부름에 응했다.

"뭐가 필요하신가요?"

"거. 검은색 구슬 모양 피. 피어싱이랑 도트펜이 있었으면 하는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얼른 구해다 드릴게요."

"지. 지금 없는 거라면 굳이 사거나 하지는 아. 않아도 괜찮아…요."

"없을리가요. 기다리고 있어요, 로즈."

도트펜이 있다고? 싶었지만 그야 워낙 별난 사람이니 나름대로 개연성은 있었다. 애초에 아즈사 자신은 레이버에게 옷 취향도 알려준 적이 없었으나, 그는 결국 딱 맞는 옷을 사온 것처럼.

"자, 이거 맞나요?"

"네, 마. 맞아…요."

아즈사가 마지막 단장을 마무리하자 수감실의 두꺼운 철창이 열렸다. 문득 레이버가 이 교도소에서 정말 아주 높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쳤지만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 그녀였다.

밖으로 나가는 동안은 레이버가 말을 걸어주지 않은 덕에 조용히 갈 수 있었다. 정문과 외정문 사이에 거리가 꽤 있어서 15분쯤 걸으니 비로소 교도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근데 뭐, 별 감흥은 없었다.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뭐 그리 다르겠는가. 아직 시내가 아니라서 더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간에 첫 걸음은 기대 이하였다. 레이버를 뚱하게 바라보니 그가 자동차를 타고 더 이동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눈은…아직이었다.

곧 검은 포르쉐 한 대 다가와 앞에 멈춰섰다.

"짠~ 로즈랑 나간다고 힘 좀 줘봤는데 어때요?"

"비. 비싼 차네…요. 도. 돈 많은가 봐…요?"

"기대해요, 로즈. 오늘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제가 로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해뒀어요."

"…."

"그럼 타실까요?"

한 손을 내밀어 자신은 에스코트하는 그의 모습은 퍽 신사 같았다. 이상한 남자. 첫 만남부터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더 이상한 남자. 사형수라는 이유로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 해준다고? 그럼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모든 사형수들에게도 이랬을까? 기분이 묘했다. 그럼 매번 크리스마스를 함께하는 사람이 달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죽은 사람한테 미련 따위는 없으니까?

아즈사는 덥썩 그의 손을 잡았다. 혼자서도 알아서 잘 탈 수 있었을 테지만 그의 장단에 조금 어울려 주었다.

"그.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 가나…요?"

"사실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다리를 꼰 채 아즈사의 옆에 꼭 붙어 앉아있던 레이버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로즈가 어딜 좋아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큰 백화점에서 평범하게 쇼핑을 하는 걸 좋아하려나, 아니면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차나 한 잔 마시는 걸 좋아하려나. 어디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데려가서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면 좋아하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맛있는 밥이나 한 끼 대접할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는 겨울에 맞지 않게 싱그러웠다.

"결국은 골랐지만요. 아마 좋아할 게 분명하니까 걱정 말아요."

"이. 이래놓고 별로기만 해 봐…요."

"하하하하, 저도 로즈한테 미운털 박히는 건 싫은걸요."

아즈사는 차창에 입김을 호 불었다. 세상이 온통 뿌옇다. 짙은 안개라도 덮인 듯이. 날숨을 한 번 더 불어넣자 그저 새하얗기만 한 것이 눈이 덮인 풍경과 비슷해 보였다. 검지 손가락으로 뽀득뽀득 트리를 그렸다. 뭔가 허전한 듯 하여 산타 모자라도 그릴까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저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주인은 아즈사의 뒤에서 귓가를 간지럽히듯 길고 뜨거운 공기를 뱉었다. 맑아지는가 했던 세상이 다시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은 느릿하게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를. 아직은 꽃잎이 닫혀 있지만 머지않아 아침이슬을 머금고 만개할 그 꽃을 그렸다.

"자. 장갑이 축축해지지 않나…요?"

"그럼 잠시 벗을까요?"

"…그. 그쪽, 장갑 벗는 거 시. 싫어하잖아…요. 돼. 됐어…요."

아즈사는 머리에 힘을 빼고 레이버의 어깨에 기댔다. 등을 얼마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턱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뒤에 딱 붙어 있을 건 뭐람. 순간 그가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갑작스럽게 힘을 뺐으니 그럴만도 했다.

"도.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그럴게요. 좋은 꿈 꿔요, 나의 로즈."

한참 뒤 제 어깨를 치는 손길에 눈을 뜨자 밖은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꽤 오래 잤나 보네. 멀리 왔나?

"내려요, 로즈. 도착했어요."

차에서 내린 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주 거대한 트리와 그보다 더 큰 건물이었다. 외벽은 온통 새까만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철문은 고풍스러운 디자인이었으며 건물의 모든 층은 불이 켜져 있어 반짝거렸다. 바닷가에 있는 절벽 쪽에 위치한 탓에 짭짤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아즈사는 단번에 그것이 일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카지노, 이따미도메痛み止め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 여기를 그쪽이 알고 있는 것도 시. 신기한데…요."

"그거야 이 카지노가 제 소유니까요. 높으신 분들 중에 또 이런 거에 환장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하나 마련했어요. 와본 적 없죠?"

"그. 그쪽이 이 카지노의 주. 주인이라고…요?"

아즈사는 눈을 한 번 크게 떴지만 이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는지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지. 직접 와본 적은 없어…요. 너. 너무 끝자락에 있으니까…요. 호. 혼자 가는 건 번거롭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로즈를 데리고 와 봤어요. 오늘은 일부러 갬블러들한테만 초청장을 보냈으니까 유흥을 즐기러 온 국회의원이라든지 이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즐길만하겠죠? 아무래도 아름다운 로즈가 돈벌레들을 보게 둘 순 없으니까요."

"기. 기대해도 좋은 거 마. 맞아…요?

"당연히. 자, 그럼 로즈. 들어가실까요."

겉으로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아즈사도 꽤 들뜬 상태였다. 오랜만의 도박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자신은 살인자인데다가 돈도 없는데(사실 이 점은 감방에 들어가기 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빚을 잔뜩 지고 있었으니.) 무엇을 걸더라도 사람들이 상대를 해 주기나 할까? 슬롯머신이나 돌리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잠이나 한숨 푹 자는 것이 이득일 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레이버가 품에서 가면을 하나 꺼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흰색의 콜롬비나 가면이었다. 그의 성격상 장미를 하나라도 그려넣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텐데 어떻게 참았을까 싶었다. 레이버 스스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작은 목소리로 '로즈가 너무 눈에 튀지 않았으면 해서요.' 하고 변명했다.

'하긴, 날 데리고 나온 걸 세간에 들키면 이미지가 곤두박질칠게 뻔하니까.'

사실 그걸 걱정한 건 절대로 아니었고, 단순한 레이버의 질투와 소유욕이었다.

동그란 알의 안경을 벗고 가면을 쓰자 건물의 빛이 번져 분위기를 더했다. 찬란한- 마치 꿈만 같은 광경.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신기루에 가까웠다. 아즈사의 고운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이. 이래서는 내 앞에 놓인 카드도 잘 아. 안 보이겠는데…요. 이 가면, 누. 눈 부분에 검은 망사가 덮여 있기까지 해서…요."

"흐음, 그런가요? 제가 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레이버가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저 높이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손을 최대한 뻗으면 닿을까? 한참 멀게만 느껴지는 저 이가 이 손끝에 느껴질까? 레이버의 장갑을 처음 쥐었던 그날처럼 충동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가 팔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그 순간, 바람이 살짝 스쳤다. 아즈사 본인도 몰랐던 바람을 또 한 번 그녀의 행운이 이뤄주었다. 얼핏 스친 찰나에 레이버의 오른쪽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아즈사는 기어코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 반쪽을 가득 덮고 있던 흉터를. 나쁜 짓을 저지른 어린 아이처럼 그녀는 고개를 얼른 내렸다.

"제가 로즈의 눈이 되어 드릴게요. 애초에 저는 도박을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라서 직접 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 그쪽도 안경을 쓰면서 뭘 도.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안경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은 보이니까 괜찮아요.”

"그. 그럼 그렇게 해…요."

카지노 안은 이미 열기가 가득했다. 중심의 거대한 홀에서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주변은 카드 한 장, 패 하나에 거금이 오가고 있었다. 레이버는 그래도 명색이 카지노 오라 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개최하는 환영 인사를 해야 한다며 아즈사에게 칩을 두둑이 쥐여주고 사라졌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교도소의 우라바야시 아즈사는 어떨지 몰라도 도박장의 포르투나는 확실히 강자 축에 속했다. 그녀는 돈을 잃기 위해 거는 것이 아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다니다 문득 반대편에서 손님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레이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도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머리색이 붉은 자가 여럿이었는데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워낙에 장신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가씨, 우리랑 같이 게임 하나 하지 않을래? 한 명 정도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아즈사를 불렀다. 그녀는 레이버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게. 게임 종류는…요?"

"아가씨가 자신 있는 게 있다면 그걸 할까?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혼자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쓰여서 말이야."

"무. 무슨 뜻이…죠?"

"아니 그냥, 어디 귀한 집 자제분이 재미 좀 보러 오셨나 싶어서. 괜히 엄한 놈들한테 걸려서 돈 뜯기는 것보다는 우리랑 연습 삼아 한 번 해보는 게 낫지 않아? 첫 판은 가볍게 가자고."

아즈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가볍게 가자던 그들이 베팅하라고 조언한 액수가 보통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돈 좀 뜯어보겠다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 엄한 짓은 저들이 저지르고 있으면서 친절한 척 이것저것 알려주는 게 가증스러웠다. 레이버가 없다면 카드를 보는 게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눈을 찡그려서 집중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니까 그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 좋아…요. 하. 한 번 해볼까…요, 그럼. 브. 블랙잭으로 해…요."

그 뒤로는 짐작할 수 있다시피 아즈사가 판을 휩쓸었다. 탈탈 털린 것은 상대였고 바득바득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우기며 게임을 질질 끈 결과, 마지막에 가서는 가진 칩을 모두 잃었다.

"기, 기다려 아가씨! 내가 돈을 더 가져올 테니까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판만 하자! 하, 하하하…. 내가 방심했어. 한 판만!"

'하여간 도박 중독자들은 상대할 게 못 된다니까.'

아즈사는 혀를 끌끌 차며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여우 가면의 남자가 벌개진 눈으로 아즈사의 소매 자락을 붙잡았다. 그 힘에 확 끌려간 그녀의 몸이 뒤쪽으로 넘어갔다. 테이블의 모서리가 유독 날카로워 보였다. 가면이 벗겨지며 시야를 가렸다.

'이럴, 리가…'

믿을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다. 어째서? 자신의 넘치는 운이라면 이런 것쯤은 별 일도 아니어야 되는데, 그래야 되는데-

쾅!

테이블이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도박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즈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제 머리를 감싸고 있는 건 누군가의 큼지막한 손이었다. 고개를 돌려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람을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얼굴이 그의 넓은 가슴팍에 파묻혔다. 쉬이- 그런 소리를 내며 머리를 차분히 쓸어내렸다. 쓰담는 손길이 따뜻했다. 온전히 느껴지는 사람의 체온. 그는 병적으로 집착하던 장갑을 끼는 것조차 잊고 흉 가득한 손으로 아즈사의 민트색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레. 레이버…?"

"손님, 이 카지노 안에서 소란은 곤란합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레이버가 한 마디 한 마디 입을 열어 말을 뱉을 때마다 그의 울림이, 짙은 음성이 아즈사의 뼈를 울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머리를 직접 울린다. 정작 저는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진동이 요란하다. 그녀의 머리를 망치가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빠르고 불규칙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점점 박자를 맞추어 괘종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감각이었다. 이건, 심장박동이었다.

"오, 오너. 미안하군. 내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어디 다친 곳은-"

"죄송합니다만 룰 위반입니다. 지금 나가지 않으신다면 경비를 부르겠습니다."

"먼저 가 보지. 오늘 일은 내가 변상할 테니 연락하게."

남자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레이버는 상체를 일으켜 누워있는 테이블의 다리에 기댔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즈사는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울렁이는 속을 달래며 쿵, 쿵, 쿵.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을 조였다 푸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 로즈. 실례가 아니라면 그쪽에 떨어진 가면을 좀 주워주시겠어요?"

레이버에게 부탁을 받은 여자가 흰 가면을 건네주자 레이버는 그것을 든 채로 경비를 불러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품에 있는 아즈사에게 가면을 직접 씌워줬다. 날아간 충격으로 가면의 왼쪽 전체에 금이 갔지만 다행히 실금에 불과해서 깨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상황이 갑작스러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언제나처럼 그녀 주변의 시간은 느렸고, 아즈사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 있었으니까. 저를 놀래킬 작정이었는지 기척을 죽이고 다가오다 황급히 달리는 레이버도 보았다. 손을 수건에 닦고 있었는데 그것을 챙길 정신 따위는 없어 보였다. 행운은 확실히 아즈사의 손을 들어 주었다. 모서리에 닿기 직전에 레이버가 저를 감싸 안고 모든 충격을 대신 받았으니. 그러나 그녀의 혼란은 전혀 다른 곳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나를 걱정했나?'

어째서? 어째서 그의 심장은 그리도 요동쳤나? 나는 한낱 사형수이고 그는 나를 죽일 사람. 나의 사신. 사신은 자신이 거둘 영혼을 동정할 뿐, 염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즈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부러 상대에 대한 불신을 더욱 노출하고, 강하게 경계하며 선을 긋는다. 딱 적의를 사지 않을 정도로만. 영민한 레이버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을 걱정하는가? 자신이 봐온 레이버는 그 누구보다 믿을 만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많은 이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기에 각각의 개인에게 향하는 애정은 완벽히 그들 자신만의 것일 수 없다. 애정함에 따라 들여야 하는 대가가 너무 많으니까. 근데, 저런 행동은 마치-

'나만을 향한 감정 같잖아.'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귀찮기 이전에 너무 위험하다.

그녀는 그 무엇에도 보답하지 않을 테니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레이버는 아즈사를 데리고 한적한 발코니로 향했다.

‘등이 쑤신 걸 보니 멍이 확실히 들겠네.’

작게 끙, 소리를 냈지만 아즈사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다쳤다는 핑계로 응석을 부릴 참이었는데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차마 말을 걸기 힘들었다. 기껏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초대했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 기분이 상했나. 어딜 부딪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완전히 실패, 말 그대로 망해버렸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인가.

“로. 로즈라는 호칭은 모두에게 고. 공평하게 적용되는 건가…요?”

“…? 질투나요?”

“지. 질투는 무슨…. 그. 그냥 궁금한 것 뿐이에…요.”

“빈말이라도 해주시지. 매정하기도 하셔라.”

아즈사의 손을 붙잡아 제 뺨에 부비는 모습이 마치 큰 개를 닮았다. 일부러 평소보다 아양을 부리는 까닭은 아까의 일 때문이었다. 반응을 좀 더 살피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즈사의 얼굴에는 한 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 다른 사람들이 로즈면 그. 그쪽은 뭐에…요?”

“…네?”

순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의외의 질문이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 역시도 이 질문을 고려해본 적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버는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그에게 있어 레이버 페인즈, 스스로는 오점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 오직 아름다운 로즈들로만 가득한 이 창세에서 그 혼자만이 피어남을 거부했다. 꽃잎이 어지러이 흩날려 그 짙은 향이 머리를 아프게 할 즈음에도 그는 호흡을 낭비할 뿐. 차라리 비료라도 될 수 있었더라면 나았으련만 빨아먹을 영양분조차 하나도 없는 본인의 한심함에 매번 한탄했다. 레이버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뿌리가 뽑히거나 줄기가 꺾여 침음하는 이들에게 작은 안식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버는 아즈사의 질문에 쉽게 답했다. 고민까지 할 만큼 가치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전 아무것도 아니죠. 무슨 의미로 물어보신 건지 조금 헷갈리네요.”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즈사의 눈썹이 어정쩡하게 올라갔다. 어떤 부분이 납득이 되지 않은 걸까. 아마 오늘 아즈사의 저 표정은 레이버에게 있어 두고두고 난제가 될 터였다. 그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로즈마리는 어때요?”

“…?”

“로즈라는 호칭을 독차지하지 못해서 서운한 거잖아요. 그럼 로즈마리라고 불러줄게요. 다른 로즈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니까요.”

“트. 특별하다는 말은 벼.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데…요.”

“음, 그럼 뭐라고 할까요?”

얼굴을 훅 들이밀어 가면 너머의 그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이제 보니 반절에 금이 간 게 마치 자신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기를 닮았다 하는 건, 다이아가 모조품을 닮았다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지만 속으로 진득하게 차오르는 고양감에 입을 다셨다. 다시 새 것으로 끼고 있었던 장갑을 이로 물어 쭉 당겼다. 한 번 맛본 온기를 이제는 잊을 수 없게 되어버려서 맨살에 닿지 않으면 부족했다. 매끄럽고 새하얀 그 살결 위에 덮은 작은 솜털까지 하나하나 느긋하게 훑어내려 가면서….

“로ㅈ,”

“누. 눈이 오네…요.”

레이버가 무언가를 말하려 운을 뗐지만 아즈사가 의도치 않게 말을 끊었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아즈사의 뺨 위에 눈꽃이 하나, 둘 내려앉았다. 여태껏 자신은 그녀를 내려보고 있느라 몰랐었는데 아즈사는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어서 먼저 알게 된 모양이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내기는, 진 셈이었다.

“그러게요.”

잠시 말이 없었다. 아즈사도 당장 내기의 승패를 따질 마음은 없어 보였다.

“나의 로즈마리,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레이버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다른 쪽은 허리 뒤로 숨긴 채였다.

“춤이라도 한 곡 출래요? 마침 지금 왈츠가 나올 차례인데.”

“아. 아즈사 씨가 춤을 배워본 적이 있다고 생각해…요?”

“리드를 잘하는 파트너를 만나면 더 빨리 익힐 수 있지 않겠어요?”

“바. 발을 밟아도 난 몰라…요.”

굳이 홀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작은 발코니에서도 음악은 충만했고, 리듬은 넘쳤으며, 실내의 화려한 샹들리에만큼 반짝이는 달빛이 있었으니까. 하얀 연기가 입에서 흘렀다. 한 줌의 숨에도 여린 눈송이는 녹아버렸다. 어쩌면 둘의 열기가 그만큼 뜨거웠기 때문이리라. 아즈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상황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맞을까? 이 달콤하고 울렁이는 파동의 끝에 당신이 닿아 있을까?

‘추운 걸 싫어한다던 당신의 손은 이토록 따뜻하구나.’

추한 흉터가 그대로 아즈사의 피부에 닿는다. 죄악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고결했다. 춤을 잘 추지 못한다 한 말은 사실이었는지 아즈사는 계속 고개를 숙여 제 발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스텝을 밟는다기보다는 추적을 피하는 것에 가까운 그 몸동작마저 아름다웠음에 레이버는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끔,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운 광경을 응시하고 있자면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속에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지금처럼.

“로즈마리.”

“부. 부르지 마세…요. 지. 지금 아즈사 씨 되게 저. 정신 없는 상태거든…요.”

“나의 로즈마리.”

“아, 지. 진짜 왜 자꾸…!”

“키스해도 되나요?”

짜증이 잔뜩 묻어난 얼굴이 그 말을 듣자마자 쩌적, 금이 간다. 한 번도 밟힌 적 없던 레이버의 구두에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아즈사는 두어 번, 가만 선 채로 눈을 끔뻑이더니 레이버의 손을 놓았다. 레이버가 무언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창백히 질려가고 있을 때 대답이 들려왔다.

“그. 그딴 걸 허락하겠냐고…요.”

“…어쩌면 허락해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 분위기 좋은 순간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레이버는 일부러 농담조로 대꾸했다. 원래도 저는 가벼운 이미지니까 이런 것쯤은 빈말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겠지. 그래야 할 텐데.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설마 첫키스라 싫은 건 아니죠? 따위의 말을 던지던 그는 아즈사가 매섭게 째려보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눈이 내리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레이버는 한참 뒤, 다시 장갑을 끼며 침묵을 깼다.

“비밀은 나중에 가서 좀 더 조용한 곳에서 말해드릴테니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거 어때요?”

레이버는 떨어졌던 아즈사의 손을 다시 움켜잡고 제 오른 얼굴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어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던 머리카락을 치워내기 시작했다. 가려져있던 상처가 드러났다. 나의 신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 반응이 궁금하다. 과연 아즈사는 어떤 얼굴로 뭐라고 말할까? 당연하게도 끔찍해할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가슴 한 쪽에서는 오만하게도 그녀가 이해해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었다.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어내려주면서. 나의 이런 모습이 추하지 않다고….

“궁금하지 않았어요? 뭐, 아예 티도 안 난 건 아니었겠지만요.”

“아. 아팠겠네…요. 지. 지금은 괜찮아…요?”

‘아, 이게 아닌데. 걱정해 줄 줄은 몰랐는데.’

“……오래된 일이니까요. 이제 와서 더 아플 게 남았을 리가요.”

‘젠장. 반응은 개뿔. 뭘 기대한 거냐, 레이버. 이래서는….’

소리없이 아즈사의 손이 레이버의 손 안에서 빠져나갔다. 식어버린 온기는 몸을 데워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돌아갈 정신이 있었던 이들은 어느새 없고, 술에 진탕 취해 널브러진 이들만 남은 와중에 카지노의 불이 꺼졌다. 어둠이 깔리고 달만 무르익어갈 무렵에 아즈사가 먼저 들어가자는 말을 꺼냈다. 레이버는 안경 없는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곁에서 에스코트할 뿐이었다. 무릇 모든 파티가 그러하듯이 어딘가 공허하고 허망한 엔딩이었다.


어김없이 햇살이 눈에 들었지만 낯선 천장이었다. 매일 보던 회색 콘크리트가 아니라 때가 하나도 안 탄 흰색 벽지. 몸을 움직이니 무게감 있는 이불이 다리에 감겼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오늘이 크리스마스구나. 어제 카지노에 있다가 자정이 한참 넘은 새벽에서야 호텔 룸으로 들어왔었지.

‘여긴 그럼 교도소가 아니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전에는 매일을 방에만 콕 박혀 살아도 답답하다는 생각을 안 했었는데 남에 의해 가둬지는 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일찍 일어나 무엇하리.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의지도 없는 아즈사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대로 다시 잠에 들 생각이었다. 누군가 도어락을 자연스럽게 누르고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로즈마리는 여기서도 잠꾸러기네요~”

“그. 그러는 레이버 씨는 여기서도 저를 깨우고…요.”

“그렇지만 오전 시간을 다 날리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요?”

“저. 저는 오후만 살아도 충분히 사. 삶이 긴 것 같은데…요.”

방금 깨서 목소리가 잠긴 탓에 평소보다 톤이 낮았다. 그에 비해 레이버는 벌써부터 풀착장이었다. 어째 볼 때마다 흐트러져있는 법이 없었다. 아즈사는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조금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이 숨어 들어갔다.

“겨울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 아즈사의 모습을 보며 레이버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가져온 비닐봉투를 열었다. 한참을 부시럭대더니 물 트는 소리도 들리고, 냉장고 여는 소리도 들리고, 콧노래도…. 눈만 빼꼼 꺼내 뭐하나 봤더니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즈사 자신은 도박을 하느라 워낙 정신이 없어서 술을 마실 틈도 없었지만 레이버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꽤 들이킨 줄로 알고 있는데, 저 사람은 숙취도 없나. 간 기능이 대단하네. 아즈사는 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아침은 가볍게 베이컨에 계란 그리고 토스트 정도면 괜찮나요? 커피도 내릴까 하는데 어떤 걸 좋아해요? 라떼도 있고 에스프레소…아메리카노도 당연히 있고요.”

“가. 가능하면 단 걸로…요.”

“그럼 아예 카라멜 마끼아또 같은 걸로 할까요?”

“그. 그냥 라떼면 충분해…요.”

평소와 다름없는 레이버의 호의가 오늘따라 조금 거북했다. 아, 그 정도는 아니던가? 그래, 부담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당연하게 여겼던 그의 태도에서 무언가 읽힐까봐 불안했다. 작은 감정도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기에는 이미 키스해도 되냐는 소리도 들어버렸지만. 과연 저 사람은 진짜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 단어의 무게가 남들에게보다 무겁게 적용되고 있는 거라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기대하지 말아주기를 바랐다. 아즈사는 레이버처럼 박애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남을 사랑해본 경험조차 없었다. 레이버에게 사랑이 호흡만큼 당연하고 쉬운 거라면, 아즈사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녀에게 애정의 대상은 오직 아즈사 그녀 자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사랑에 대한 로망이 하나도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할 순 없었다. 어릴 적 언젠가 보았던 순정만화. 그 안의 주인공들이 노래하던 사랑은 얼마나 이상적이었던가. 그렇지만 지금 아즈사의 레이버의 관계는 로맨틱과 거리가 멀었다. 확실히.

“로즈마리, 일어나요. 아침은 먹어야 힘이 나죠. 크리스마스인 건 알고 있죠? 다시 돌아가기 전에 오늘을 즐겨야죠.”

“이. 일어났어…요.”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가득했다. 사람을 마주보고 아침을 함께 먹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어떤 대화를 해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곱씹어보면 평소의 대화도 레이버가 이끌어갔으니 이제와서 먼저 대화 소재를 찾는 건 멍청한 짓이리라. 아즈사가 말을 더듬게 된 것도 부족한 사회성 탓이었으니까.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레이버를 아주 멀리로 밀어내고 싶었다.

“저… 로즈마리, 어제의 일은 말이에요-”

아…. 속이 좋지 않았다. 레이버가 하는 말의 내용은 어젯밤의 말실수를 사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벌써 여섯 번째. 그런 것들은 아무튼 간에 좋았다. 그런데도 속이 너무 울렁거려 삼킨 것들을 전부 게워낼 것만 같았다. 급하게 라떼를 들이키다가 그만 사레가 들렸다. 아즈사가 어두운 낯으로 이야기를 듣다가 기침을 해대니 눈이 휘둥그레진 레이버가 급하게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 손길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려 피해버렸다. 레이버의 손이 멈추고 말이 급격히 사라졌다. 다 아즈사가 자초한 일이었다. 방 안 가득, 공기보다 빽빽하게 어색하고 떨떠름한 분위기가 담겼다. 그 높은 밀도를 감당하지 못한 아즈사가 먼저 욕실로 도망쳤다.

어제의 대화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이버는 그 스스로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너무 당연시하고 있다. 그런 남자가 무슨 사랑을 해? 말도 안 되는 모순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아니 그 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순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선택이 아닌 본능.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기혐오가 너무 강한 사람은 견디다 못해 타인에게 그 혐오를 떠넘기게 되어있다. 그런데 레이버의 경우는 달랐다. 욕조에 물이 점점 들어차 상체까지도 거의 가릴 즈음, 아즈사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레이버가 스스로를 극도로 혐오하는 바람에 나머지 사람들에게 느끼는 무감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둘째, 레이버가 모두를 너무 사랑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적으로 작아져 그것을 혐오로 착각한다.

전자인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레이버가 자신에게 느끼는 ‘특별한’ 사랑은 그냥 적당한 호감 정도일 테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치만 만약에…그가 후자의 이유로 스스로에게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나는 레이버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어지럽고, 복잡하다. 머리를 쓰지 않은 지 벌써 10년이 가까이 되어가니 이 정도로도 쉽게 과부하가 온다. 그래, 차라리 쉽게 생각하자. 이러나저러나 지금의 레이버는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그러니 내가 사랑을 알려주어 그를 평범한 사람처럼 바꾸자. 그의 정신이 멀쩡해지면 그도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무렵에 난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춰야지. 안 그랬다간 슬슬 짜증이 나 버릴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물속에 머리를 넣는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이미 레이버는 나가고 없었다. 방 안에 화한 박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향수라기보다는 파스에 가까운 향이었다. 캐롤을 작게 흥얼거렸다. 어제 카지노에서 들렸던 재즈풍 왈츠. 가사는 모르는 데다가 아는 멜로디도 한정적이라 계속 같은 부분만 불렀지만 그 안에 두 사람의 어설픈 스텝이 박제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자체는 생각보다 잔잔하게 흘러갔다. 이브가 너무 정신 없었는지 아즈사는 온종일 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레이버 역시 급하게 병원에 일이 생겨 아즈사의 밥을 제때 챙겨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일은 아즈사가 점심을 다 차린 레이버에게 평소에는 밥을 잘 챙겨 먹냐고 질문한 것과,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냐고(레이버가 이 질문에 크게 당황하는 바람에 자칫 오해가 생길 뻔 했으나 금방 풀렸다.) 물은 것이 다였다.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야 레이버의 일이 마무리되었고, 그는 서둘러 아즈사에게 갔다. 볼록한 이불 덩어리가 규칙적으로 색색거리는 걸 보니 아마 잠이 든 것 같았다. 디저트를 들고 왔는데요~ 하고 작게 속삭였지만 반응은 없었다. 깨우기는 좀 그래서 그냥 레이버도 그녀 옆에 누워버렸다. 이불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데다가 아즈사에게 닿을까 몸도 잔뜩 웅크려서 누가 봐도 불편한 모양새였지만 그마저도 떨리는지 볼이 붉었다. 혹여나 자신이 잠에 들어 다음날 깬 아즈사를 놀래킬까 걱정했는데 다 쓸데없는 일이었다. 이 상태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 1시간 정도만 더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아즈사가 부시럭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레이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레. 레이버 씨?”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 일어나서 사실 깨어있다고 말할 타이밍은 놓친 지 오래.

“어. 언제 와서 잠든 거람. 펴. 편하게 자기 침대 놓고 부. 불편한 자세로 말이에…요.”

이불을 빼내려는 듯 낑낑거리더니 이내 포기하고는 남은 이불을 전부 제 몸 위에 던져버렸다. 덮어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정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체온이 남아있어 아무래도 좋았다. 아즈사는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그 옆에 누웠다.

“이. 있죠, 그쪽이 자니까 말해주는 건데 아. 아즈사 씨는 그쪽 좀 싫어…요.”

충격을, 좀 크게 받아서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킬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 아즈사 씨를 죽일 거잖아…요. 그. 그리고 심지어 그걸 바라고 있잖아. 처. 처음에는 레이버 씨가 죄책감에 미쳐서 이. 이상해져 버린 줄 알았어…요. 그. 근데 옛날에 말해주던 병원의 사. 살인사건 이야기들, 다 레이버 씨 이야기…죠? 그. 그러면 사람 죽이는 데에 거리낌도 없을 거 아니에…요. 그. 근데 왜….”

아즈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가. 워낙 무료하게 살아가는 그녀였기에 삶에 큰 미련이 없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럼 자신을 밀어내던 까닭도 저런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조금 안타깝지만, 아즈사의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레이버는 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레. 레이버 씨는 아즈사 씨를 사. 사랑하고 있는 걸까…요? 사. 사형 집행자가 사형수를?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레. 레이버 씨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잖아…요. 처. 처음에는 아즈사 씨도 그.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 그런데 자꾸 아. 아즈사 씨를 걱정하고, 로. 로즈마리라고 특별한 호칭을 붙이고, 다.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안 그러면서 왜 나. 나 볼 때만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요? 자. 자꾸 의식하게 되잖아…요. 아. 아즈사 씨는 다. 다른 사람한테 사랑을 나눠줄 생각이 없다고…요. 나. 나는 나 하나 사랑하는 걸로도 추. 충분히 바쁜 사람인데.”

어? 지금 로즈마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레이버로써는,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일상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아즈사에게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거리낌이 없었다. 특별취급하고 있는 건, 그녀가 이번 사형수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을 텐데. 어쩌다가 아즈사가 저런 생각을 하게 됐지? 지금이라도 일어나 정정해야 겠다. 모든 건 그녀만의 착각이라고.

그러나 착각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레이버의 심장은 미친 듯이 아려왔다. 그는 자는 척을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제 가슴께를 꽉 붙잡았다. 아즈사는 레이버가 잠결에 움직였다고 여긴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레이버의 얼굴에 있던 홍조는 사라지고, 피부는 핏빛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 장갑 벗기는 걸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왜 아. 아즈사 씨 하나 구하겠다고 맨손으로 뛰어와…요? 아. 앞머리도 그래. 휴. 흉터 보여주는 것도 시. 싫어하잖아…요. 그. 그렇게 꽁꽁 숨기는 거 조. 좋아하면서, 왜 자꾸 아. 아즈사 씨한테만 괜찮은 거냐고…요. 나. 나 오기 전에 있었던 사형수 모. 모두에게도 이렇게 했어…요? 차. 차라리 그랬다고 하면 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 아즈사 씨가 아무리 눈치가 어. 없어도 이 정도는 누구나 알아…요. 아. 아즈사 씨가 레이버 씨의 유. 유일한 로즈마리였을 거라는 거.”

호흡하는 게 버거울 정도로 숨이 가빠왔다. 나, 나는. 난… 난 당신을-

지금까지는 고려해 본 적도 없었던 만큼 거대한 사랑이 레이버를 덮쳤다. 모르는 척, 못 본 척 하고 외면한 만큼 몸집이 커져서 그를 질식시킨다. 로즈들의 아픔을 끝내줄 때 느낀 흥분과는 전혀 다르다. 해방이 아닌 속박. 끔찍하게 외면하고 싶은 와중에도 알고 싶은 것이 생긴다. 내가 로즈마리를 사랑하는지는 차마 대답할 수 없으면서,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 물어보고 싶어.

“레. 레이버 씨는 자고 있으니까 대답해주지 않겠지…요. 그. 그럼 다른 얘기를 할게…요. 아. 아즈사 씨도 그래서 나. 나름대로 고민을 했어…요. 그. 그거 알아…요? 사.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해야 다.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요. 그. 그러니까 지금의 레이버 씨는… 와. 완전히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날 사랑하나요? 로즈마리, 날 사랑해? 레이버 페인즈의 자기애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에요. 제발, 로즈마리.

“그. 그래서 그쪽한테 레이버 씨를 사.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려고…요. 그. 그리고 레이버 씨가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있을 무렵이면 아. 아즈사 씨는 죽어 있겠…죠. 사. 살아가면서 의미 있는 짓을 해. 해 본 경험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쪽이라도 사. 사람 만들고 가려고…요. 나쁘지는 않잖아…요?”

답이 없는 레이버 탓에 조용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아즈사를 품에 가두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그녀를 부서질 만큼 꽉 껴안고, 의사와는 상관없이 키스하고, 여린 입안에 상처를 내고 싶었다. 제 흔적을 어디에라도 남겨 세상 모두가 탐할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갈증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불안감이 추악한 이기심으로 들끓었다. 그는 장갑이 구겨지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오른 주먹을 세게 쥐었다.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 나는 로즈마리를 최우선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녀가 힘들고 아파하는 게 싫어서 안식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

레이버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아즈사의 옷깃을 잡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떠나지 말라고?

고민하는 사이에 아즈사는 그것을 잠꼬대라고 생각했는지, 레이버의 머리를 토닥였다. 동정심이였을까, 아니면 애정이었을까.

“아. 악몽이라도 꾸나…요, 레. 레이버 씨?”

몸이 떨리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장갑을 끼고 있어 망정이지, 아즈사가 핏줄 선 그의 손을 보았다면 깨어있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 고민은 내가 하는데 그쪽이 힘들 게 뭐가 있다고…. 자. 잠이나 자…요. 오늘은 아직 크. 크리스마스니까…요.”

레이버는 그날 밤 아즈사의 옆에 누워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사형 집행일이 미뤄졌다는 공지는 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그들은 이미 교도소에 도착해 있었다. 애석하게도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 레이버의 갈비뼈 근처가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즈사가 레이버의 이야기를 듣던 둘의 만남시간은 아즈사가 레이버의 사랑을 교정시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최대한 쉽게 진행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자세한 이론이나 개념을 설명하는 게 힘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퀴즈 형식이었고 레이버에게 주는 영향은…거의 없어 보였다.

“자아… 그. 그럼 레이버 씨, 이 세상에서 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죠?”

“나의 로즈마리?”

“레. 레이버 씨라고 대답해야…죠.”

아즈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바라는 답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틀렸을 때의 반응에 맛이 들려서 일부러 오답을 말하고는 했다. 레이버는 싱글벙글 마냥 웃었다. 아즈사는 크리스마스 이후로 자기를 사랑하냐는 등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아. 아즈사 씨가 강도짓을 하러 레이버 씨 집에 쳐들어갔다고 가. 가정해봐…요. 그. 그런데 레. 레이버 씨가 신고하면 아. 아즈사 씨는 전재산을 몰수당한 채로 가. 감옥에 갇혀…요. 레. 레이버 씨는 뭘 해야 할까…요?”

“로즈마리를 죽여야죠.”

“그. 그러니까 도대체 결론이 왜 그렇게 나. 나는 거냐고…요. 펴. 평범하게 경찰에 시. 신고하라고…요.”

“그러면 로즈마리가 고통에 시달리게 되잖아요?”

“그. 그게 아니라고…요!!”

농담조로 뱉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아즈사의 말을 엿듣고 나서부터는 그녀를 죽이겠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게 된 탓이었다. 그 뒤로도 아즈사는 자꾸만 자기를 예시로 문제를 냈고, 견딜 수 없어진 레이버는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로즈마리, 내기에서 이겨놓고 제 비밀은 안 물어봐요?”

“무.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꼭 비밀 말해주고 싶은 사람마냥. 아즈사가 덧붙였다.

“그으런 건 아니지만요~”

“뭐, 어. 어차피 곧 죽을테니까 지금 무. 물어볼게…요. 괘. 괜히 질질 끌다가 못 물어보고 끄. 끝날라.'”

“앗,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요.”

“그. 그래…요? 그럼 나. 나중에 하…죠, 뭐.”

“네?”

“마. 마음의 준비 안 됐다면서…요?”

“그래도 그냥 이렇게 안 해요? 제 말을 언제부터 이렇게 잘 들었다고….”

“사.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 이상해 진다잖아…요.”

“어어….”

“그. 그럼 아. 아즈사 씨도 슬슬 잘게…요.”

얼빠진 표정으로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자기가 아는 아즈사는 궁금한 걸 아껴둘 사람이 아니었다. 아예…나한테 관심이 없나? 물어볼 걸 찾는 게 어려울 만큼? 너무 황당한 나머지 심란한 마음도 싹 가셨다.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한 와중 전화가 울렸다. 저번에 외출을 도와준 교정기관장이었다.

“기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버, 그- 일전에 말했던 사형수 말일세.]

“우라바야시 아즈사 말씀이십니까?”

[어어, 그래. 이름이 영 안 외워지는군. 아무튼 간에 그 사형수의 사형일이 앞당겨졌네.]

“…네?”

[그게, 피해자 유족들 중에 좀 이름 있는 기자가 있었던 모양인데… 억울하다고 기사를 썼나 보더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전에 자네랑 사형수가 크리스마스에 나갔다 온 사실을 꼬투리 잡았나 봐. 사형수의 호화로운 교도소 생활이니 뭐니… 아무튼 그 기사가 SNS에서 확 퍼지면서 국민청원이 생겼다고 하더군. 사형수의 죽음을 앞당기라는…. 어차피 죽을 텐데 말이야.]

“그럼 언제입니까?”

[어- 원래 10월 23일이었지? 7월 23일이 새로 잡힌 사형 집행일일세. 딱 3개월 당겨졌구만. 아무튼 간에 자네도 알아두게. 사형수한테는 알아서 잘 전달하고. 그나저나 이번주가 병원 정산일이었나?]

“…예.”

[스읍… 요즘 잘 된다는 기업이 하나 있는데 자네 투자할 생각 있나 해서. 내가 돈이 궁한 건 아니고. 자네도 그, 알잖나? 이번에 환경부장관인가가 지원한다고 하면서 환경친화적 기업으로 홍보한다던데….]

“네, 그럼 4억 엔 정도. 투자하는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자네는 말이 빨라서 좋아. 나중에 한 번 밥이나 먹지.]

“네, 이만 끊겠습니다.”

레이버는 뒷걸음질치다가 벽에 등이 닿자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7월 23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아즈사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대략 2일이 지나서였다. 레이버가 직접 전해준 것은 아니고 한 간수가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아즈사는 쯧, 혀를 찼다. 삶에 미련은 없지만 아직 레이버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다 알려주지 못했는데. 진도를 더 빨리 빼야겠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펼쳐 날짜를 셌다.

“…로오즈마아리~!”

“레. 레이버- 그. 그쪽 뭐에…요?”

어느 날인가 아즈사는 레이버의 목소리를 듣고 문 쪽으로 가다가 훅 풍기는 술냄새에 코를 살짝 막았다.

“수.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저. 전에 카지노에서도 숙취 없었던 사. 사람이.”

“조금? 약간 취할 정도로만 마셨어요. 몸 못 가누고 이런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요? 레이버 씨는 사형 집행인이니까 모. 못 듣진 않았을 것 같긴 하네…요.”

“로즈마리의 사형일이 앞당겨졌다는 얘기요?”

“그. 그거…요.”

“들었어요~ 그나저나 괜찮아요, 나의 로즈마리?”

레이버가 철장 틈으로 그 긴 손가락을 뻗었다. 아즈사는 그것을 잡고는 어쩐지 아기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다시 놓았다.

“괘.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 있겠어…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업보 같아요? 억울하지도 않고?”

“그. 그런 건 딱히 아니고…요. 사. 사람을 죽인 적도 어. 없고…. 그. 그냥 어차피 죽을 거 좀 더 일찍 죽는다고 뭐 다. 달라질 게 있나 싶어서…요.”

“안 죽였다고요?”

“아. 아즈사 씨가 귀찮게 누. 누굴 죽이겠어…요?”

“그럼 왜 사람들은 로즈마리가 사람을 셋이나 죽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가. 간단하게 말하면 아. 아즈사 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판을 짠 거예…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다 말하기에는 그녀의 나태함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억울해한다고 뭐가 바뀌나.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살 운명이었다면 행운이 일찍이 그녀를 감옥 밖으로 꺼내주었을 것이라는 걸. 그냥 이건, 운도 어쩔 수 없는 정해진 길이다. 발버둥 칠 생각도 없거니와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다.

“…로즈마리만 원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당신 대신 감옥에 집어넣어 줄 수 있어요.”

“돼. 됐어…요. 뭘 또 그. 그렇게까지…. 그. 그나저나 지금이 3월 말이니까 이. 이제 한 4달 남았네…요. 아. 아직 레이버 씨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는 바. 반도 안 끝났는데. 더 빠. 빠르게 진행할 테니까 협조해…요.”

“나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뭐. 뭐가…요?”

“로즈마리보다 나를 더 아끼게 된 것 같다고요. 이제 더이상 로즈마리를 죽여야겠다는 압박감도 없고, 당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지. 진심이에…요? 또 거. 거짓말 하는 거…죠.”

“아니, 진짜에요.”

푸흐흐, 부서지는 웃음이 왜 저렇게 쓸쓸하지. 아즈사는 조금 불안해졌다.

“즈.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요?”

“음, 있죠- 저 이제 이 일 그만둘까 봐요. 사람 죽이는 일에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로즈마리도 제 손으로 꺾고 싶지 않아졌어요.”

“……호.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퀴. 퀴즈 하나 나가…요. 누. 누군가가 레이버 씨한테 자. 자기를 죽여달라고 말했어…요. 그렇지만 이 일은 레. 레이버 씨의 인생에 아주 큰 트라우마를 남기게 될 거예…요. 이때 레이버 씨는 무. 무슨 대답을 할 건가…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레이버가 등을 기대 앉는 바람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드디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어 무언가 혼란스러워진 것일까? 아즈사는 어찌 됐든 이 일이 그에게 좋은 영향이 있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불안정해 보이는 건 아마 오랫동안 해온 일을 그만둔다는 사실 때문 아닐까?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 언제 일을 그만두나…요?”

“맘 같아서는 최대한 미루면서 로즈마리랑 같이 있고 싶지만,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절차가 복잡해서요. 적어도 5월에는 떠나야 해요.”

“아. 아직 시간 많네…요, 뭐.”

“최소한 첫 벚꽃은 같이 봐야죠~ 로즈마리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구. 궁금한 건 있는데.”

“어, 드디어 비밀을 물어보려고요?”

“그. 그걸로 물어보려고 한 건 다. 다른 질문인데…요. 이. 이번에는 그냥 대답해 주면 안 되나?”

“곤란한데요…. 그 대신 로즈마리도 제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건 어때요?”

“어, 어려운 거면 관둘게…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괜찮은 것 같으면 질문해요.”

여우 같으니라고. 아즈사는 철창 너머를 째려보았지만 오늘따라 레이버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허사였다. 아무리 이상한 걸 시켜봤자 독방 안에서일 테니 보는 것도 레이버 혼자일 터. 어려운 건 아니라고 했던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 얼굴의 흉은 무슨 일로 생겼어…요?”

“아~ 이거요? 어릴 때 트럭에 치여서 갈렸어요.”

“….”

그게, 끝? 뭔가 추가적인 설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즈사는 벙찐 채 입만 뻐끔거렸다.

“얼마나 자세히라고는 안 말했잖아요?”

“사. 사기꾼…!”

“하하하!”

분해서 씩씩거렸지만 레이버는 계속 웃을 뿐이었다. 아즈사가 화를 내면 낼수록 레이버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화내는 모습이 그렇게 우습나? 전에 한 번 레이버한테 물은 적 있었지만 그때도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무리 키가 작다고 해도 애 취급은 딱 질색-

“그럼 이제 제 소원 들어줄 차례죠?”

“마. 말해봐…요.”

“저번에는 거절했지만 오늘은 키스해줘요.”

“…네?”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마주본 레이버의 눈이 유독 서글펐다. 왠지 거절할 수 없었다. 죽는 건 아즈사인데, 레이버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잔뜩 붉어져서는 키스해달라 외치는 게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서.

아즈사는 대답 없이 철창 너머로 손을 뻗었다. 레이버의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다. 레이버는 그녀가 허락하자마자 얇은 허리를 붙잡고 철창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른 한 손은 머리를 받쳐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은 채 거칠게 혀를 탐했다. 첫키스는 달콤할 줄 알았는데. 가슴이 콩닥거리고 서로 눈도 못 뜨고 입술 닿는 것만으로 화들짝 놀라고. 아이스크림을 먹듯 살짝 핥아도 봤다가 조금 막혀오는 숨에 뒤로 조금 물러나기도 하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왜 처음으로 당신이 우는 걸 보게 된 것 같지.’

정작 당사자는 눈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아즈사의 숨이 한 톨이라도 빠져나갈까 그녀를 꽉 쥐는 데 급급했다. 철창에 상체가 눌려 답답한 나머지 그를 조금 밀어냈다. 숨을 크게 들이키려는데 놔주질 않았다. 입천장을 몇 번 쓸어내리다가 고른 치열을 훑었다.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볼 안쪽 살을 톡톡 치고 도망갔다. 혀 아래를 크게 휘젓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즈사는 레이버의 오른팔을 잡아 몸을 지탱했다. 무엇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호흡만을 바랐다. 차마 움직이지 못한 채 통제권을 빼앗긴 혀에는 뜨거운 살덩이만 닿아오던 와중, 유독 단단한 금속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멈추겠다는 생각에 그것을 혀와 이로 꾹 잡아 눌렀다.

“…!”

당황한 레이버는 혀가 잡힌 채 입을 뗐다. 아즈사도 그 모습을 보며 누르고 있던 것을 놓았다.

“미리 말하지 못했는데, 혀에 피어싱이 있어요. 불편했나요? 피어싱 빼고 다시 해줄까요?”

눈꼬리를 곱게 마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 능글맞은 얼굴에 아즈사는 큰 한숨을 뱉었다. 이. 이리 와…요. 레이버는 입맞춤을 이어가려 입을 벌리고 고개를 기울였으나 이내 자신의 머리가 작은 품에 안기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열심히 숨기려 했지만 결국 레이버가 진정 필요로 하던 건 결국 고작 이런 거였다. 눈치도 없으면서 이런 건 금방 아네요.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불공평해요, 로즈마리. 그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아. 아즈사 씨는 이 세상에서 모두를 제외한 나 하. 하나만 사랑해…요. 아. 아마 그쪽은 아즈사 씨를 펴.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우.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세계가 다. 달라…요.”

술이 다 깨버린 레이버는 갈구하듯 아즈사를 제 팔로 감싸 안았다. 그 손길이 아까와는 달리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약간 간지러울 정도였다. 아즈사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가만 그의 손가락을, 뺨을,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비. 비밀, 지. 지금 물어볼게…요.”

“나의 로즈마리,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아. 아즈사 씨를 사랑하고 있…죠?”

“이미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 로즈마리의 악취미일까요~…”

“어. 얼마나…요? 사.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그러니까, 음….”

숙고하여 말을 고르는 레이버의 진지한 모습은 유달리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날 열심히 가르친 로즈마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우리가 서로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고 했지만-”

레이버의 귀가 새빨갛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경건하게 고한다.

“내 세계는 로즈마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당신으로 가득해요.”

아즈사의 얼굴도, 일순 새빨개졌다.

그녀 스스로조차 알아채지 못한 사랑의 색깔이었다.


일을 그만둔다는 건 사실이에요. 레이버는 부연 없이 그렇게 전했다.

그는 사실 아즈사에게 큰 비밀을 또 하나 숨기고 있었다. 이번 퇴사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은, 다름 아닌 레이버 그 스스로였다. 그는 점점 고갈되는 정신력과 빈도가 잦아진 갈비뼈 부근의 고통 탓에 미쳐갔다.

더이상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미없게 되었다는 것도, 아즈사보다 그 스스로를 더 아끼게 되었다는 것도 전부 거짓이었다. 그는 여전히 삐뚤어진 사상의 박애주의자였으며, 그의 본질과 신념은 그 속에 시커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아즈사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감없는 진실이었다. 이는 그에게 있어 큰 변수였다. 레이버가 그의 오랜 철칙을 따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아즈사가 계속 살았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의 고통을 묵인해야만 했다. 이기심. 이기심! 레이버는 자신에게 아즈사를 해방시킬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크나큰 환멸에 빠졌다.

아즈사를 바라보며 행복할 때마다 그의 모순은 점점 아가리를 벌렸다. 그녀를 간절히 살리고 싶음과 동시에 간절히 죽이고 싶었다. 잠에 들면 죄책감이 덮인 악몽에 시달렸다. 인수인계를 하는 와중에도 제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로즈마리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면 목을 비틀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그가 저 대신 아즈사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여기며 고개를 몇 번이고 숙여 감사해했다. 레이버 페인즈, 그는 더이상 죽음이 해방인지 벌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군가를 죽이는 목적이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분노의 표출이었던가.

아즈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받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 두려워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마저도 부족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냈다. 자기혐오는 끝을 달렸다. 아즈사를 사랑하는 것조차 죄로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은, 아즈사와 키스하던 그날에-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레이버는 유서를 쓸 작정으로 노트를 펼쳤다. 그러다 갑자기 쓰던 것을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번에는 차라리 제 욕망을 써버리자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이기적인 욕구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다 몹시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한 장을 넘겼다. 차라리 아즈사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작정이었다. 새로 펼친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제가 하고 있는 짓이 다 머저리 같아졌기 때문이다. 죽으면 죽는 거지. 마지막으로 글을 쓸 여유를 챙긴다는 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즈사에게 마지막 인사는 제 입으로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녀가 저를 사랑하든 아니든 어쨌거나 나름대로 제 죽음에 책임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고 나를 까맣게 잊는 게 최고겠지만…. 그는 몰려오는 서운함에 제가 드디어 미쳤나보다 싶어 스스로 뺨을 한 대 쳤다.

그렇게 혼자 울다 웃다 이상한 짓거리는 다 하다 보니 언제부터 켜져 있었는지 모를 TV 소리가 귀에 닿았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이 도르륵 돌아갔다.

-올봄 유독 남쪽 지방에 벚꽃 개화 소식이 빠른데요. 첫 벚꽃이 드디어 홋카이도에서 피어났습니다. 이는 작년보다 일주일 이른 시기입니다. 그럴만도 한 게 4월 날씨치고는 너무 따뜻하죠. 오늘 도쿄도 기상 관측 사상 4월에 가장 높은 기온은 기록했습니다. 내일은 전국에 봄비 소식이 있겠는데요. 내일 오전에 비가 전국에 오겠지만 오후에는 모두 그치겠습니다.

아아, 벚꽃이구나. 첫 벚꽃이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벌써 이렇게 됐다.

‘첫 벚꽃은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레이버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즈마리, 나의 로즈마리.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 신발 끄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즈사의 독방 앞이었다. 레이버는 곧바로 열쇠를 끼워 철문을 열었다. 아즈사를 깨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그저 그녀의 침대 옆에 가만히 기대어 앉았다. 뉴스에서는 첫 벚꽃이 홋카이도에서 피었다고 하긴 했으나 교도소 안에는 벚나무가 몇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교도관들의 심신을 위한 것이라 그 근처에 있을 뿐, 이쪽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창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던 레이버는 버석거리는 입술을 떼어 작게 목소리를 냈다.

“…나의 로즈마리, 그래도 우리 같이 벚꽃 본 거예요? 대충 넘어가 줄 수 있죠?”

눈 한 번 느리게 끔뻑이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슬슬 갈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내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열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스스로 원하는 선택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 안 넘어가 줄 건데…요.”

“!”

곤히 잠든 것 같았던 아즈사가 벽을 보고 있던 몸을 돌렸다. 레이버는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금새 몸을 다 일으킨 그녀는 침대에 다리를 걸치고 앉았다. 답지 않게 곧은 자세였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레이버를 본 아즈사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이. 이리로 와서 다시 앉아…요.”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새하얬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지? 그는 멍해진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아즈사의 말에 따랐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즈사의 얼굴을 보니 상태가 적잖게 별로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빛이 스쳤지만 침구를 꾹 쥐더니 다시 냉정한 분위기가 되었다.

“바, 방금 그건 무슨 마.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요즘 일이 너무 힘들어서 추태를 보였나 봐요, 로즈마리. 내가 잠을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또 거. 거짓말…. 지금 레이버 씨 소.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보고나 마. 말해…요.”

그 말에 레이버는 얼른 제 손을 마주잡았다. 어떻게든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거. 거짓말 한 건데. 진짜로 찌.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죠?”

낭패다. 미처 장갑을 끼지 못한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으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 그러니까요-”

“워. 원래는 이렇게 철창 안으로까지 안 들어오잖아…요.”

“그건,”

“버. 벚꽃 보러 가는 것도. 차. 차라리 아즈사 씨랑 또 외출을 했으면 몰라, 이.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사. 사람 아니잖아…요.”

이제는 진짜로 손도 떨리고 있었다. 레이버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의 추궁에 능숙한 그였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눈을 맞추는 것조차 힘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왜…왜 마. 마지막인 것처럼 구. 굴어…요?”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즈사 역시 애가 타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10시 즈음에 이른 잠에 들었으나 악몽을 꾼 탓에 누운 채로 놀란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레이버가 장미덩쿨을 스스로 목에 감싸 그 삐죽한 가시에 찔려 죽는 꿈이었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저도 모르는 사이 죽음이 두려워 이런 꿈을 꾸나 생각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소름이 몸에 오소소 돋았다.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자는 척을 하자, 한참 뒤 낮은 음성이 울렸다.

“…나의 로즈마리, 그래도 우리 같이 벚꽃 본 거예요? 대충 넘어가 줄 수 있죠?”

그 말을 듣자마자 아즈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꾼 꿈이 예지몽이었음을. 그러나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레이버를 몰아세웠으나…추측이 확신이 될 뿐이었다. 도통 대답을 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를 앞에 앉혀둔 채 그녀는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걸 알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계속 남이나 죽이며 살지 왜 갑자기 스스로를 죽이려 하는 건가.

레이버가 살살 아즈사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조. 좋아…요. 그럼 대. 대답하지 마…요. 그래도 이. 이건 아니잖아…요. 버. 벚꽃을 같이 보기는 개뿔. 부. 분홍색 하나도 없는데…요.”

“…! 그러면 잠깐 나갔다 올까요, 로즈마리? 제가 벚나무 있는 곳을 알아요.”

“그. 그래…요.”

레이버는 조금 숨통이 트였는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아즈사는 그의 뒷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듣지 못했으니 그가 대답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들었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가 아즈사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로즈마리? 지금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볼 처지가 아닐텐데. 레이버에게 괜히 심란함을 추가로 얹어주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오히려 그 뒤로 더 안절부절 못해하는 걸 보니 상책은 아니었나 보다.

벚나무에 도착한 레이버가 여기에요. 하고 말하더니 꽃이 가장 많이 핀 가지를 하나 꺾어 제게 건내었다. 봄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아즈사는 여전히 이 대책없는 남자에 대한 고민에 푹 빠져 있었다.

“로즈마리, 혹시 화났어요?”

“조. 조금은…요.”

“제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요?”

“….”

처음에는 사실대 모든 걸 말해달라 할 참이었다. 왜 죽으려고 마음 먹었냐고. 괜찮아졌다고 했던 것도 거짓이었냐고.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왜 먼저 떠나려고 했냐고. 도대체 어떤 부분을 견딜 수 없었던 거냐고. 도대체 왜. 왜. 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즈사, 그녀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버리고 죽어버리게 될 참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의 선택에 왈가왈부 참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몰랐다. 아즈사는 레이버가 제게 했던 고백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재생했다. 그를 기다리던 많은 밤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고 싶은 말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레. 레이버 씨.”

“네, 나의 로즈마리.”

“주. 죽지 말아…요. 죽지 말고 아. 아즈사 씨랑 같이 살아…요.”

“!”

레이버가 기침을 크게 했다. 사레가 들린 모양이었다. 교도관들을 다 깨울 수는 없던 터라 입을 막고 끅끅거리는 것이 퍽 안쓰러웠다. 아즈사는 작은 손으로 그의 넓은 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갔다.

“어.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마…요. 그쪽도 아. 아즈사 한테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아. 않았으니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레이버가 기침을 참느라 잔뜩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제 얼굴이 보이지 않겠지.

“그. 그래도…아. 아즈사 씨도 이 정도 부탁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왜냐하면……아. 아즈사 씨가 레이버 씨를 내 세상에 드. 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니까…요.

“콜록…네?”

“두. 두 번은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됐고, 자-”

아즈사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흉 많은 맨손이 닿으니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죽음까지 결심하며 겪어온 그 거대한 고통들을. 차마 나한테는 털어놓지 못했을 그 혼자만의 오랜 고뇌들을. 연심戀心을 절명絶命으로밖에 갚을 줄 모르는 뒤틀린 삶을. 그녀는 그 모든 게 제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아주 큰 숨을 들이켰다. 다른 이와 세계를 공유한다는 건 이토록 버거우면서도 이토록 벅찬 일이다.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렸다. 경비의 교대 시간인지 외정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버의 큰 보폭을 맞추다 아즈사가 몇 번 넘어질 뻔 하자, 그는 그녀를 안아들고 또 달렸다. 가슴에서 쿵쿵쿵. 언젠가 들었던 그 박동이 울렸다. 춘화가 흐드러지게 날렸다. 아즈사는 어린 날의 봤던 만화를 떠올렸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너른 들판을 뛰놀며, 또 구르며, 둘이서만 아주 즐거워보였던 그 장면이 스쳐갔다. 레이버의 붉은 뺨을 보았다. 달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도 제 심장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세상사 뭐 별거 있나. 모든 걸 품을 수 없다면 가장 좋아하는 것만 골라 담으면 되는데.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아, 얼마만에 이렇게 웃어보던가. 온몸에 전율이 흘러 짜릿했다.

“레. 레이버 씨!”

“듣고 있어요, 로즈마리.”

“아. 아즈사 씨가 크. 큰 마음 먹고 도박을 하려고 해…요!”

“뭔데요? 아, 기대된다.”

“아즈사 씨의 이. 인생 전부를 레. 레이버 씨한테 걸게…요. 그러니까 시. 실망시키지 말아…요! 지. 지는 도박은 딱 질색이니까!”

레이버도 크게 웃는다. 매번 가면에 가면을 덮어 씌우던 남자가 고개를 젓혀 킬킬대더니 이내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대답은 들은 셈 치기로 했다. 걱정은 별로 되지 않았다. 이런 걸 두고 사랑이라 이르나 보다. 아즈사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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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만 외롭게 울어대는 주인 없는 방에 한 점 바람이 든다. 책상에 있던 낡은 노트가 팔랑팔랑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그러다 우연히 글자가 적히다 만 페이지에서 멈춘다. 볼펜이 잘 나오지 않았는지 드문드문 힘을 주어 눌러 쓴 부분이 눈에 띈다.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의 무게. 산소는 쇳덩어리가 되어 나의 폐를 갈기갈기 찢어 놓곤 해요. 난 지금껏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핑계로 쉬운 길을 택했는데, 이제는 그대가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요. 삶은 모든 고통을 지고 나아가야 하는 가시밭길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로즈마리가 살아있으면 좋겠어요. 죽지 말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 세상에서 불행해줘요. 그게 그대가 그토록 찾으라고 말하던 나의 행복이자, 사랑ㅇ

-고통과 고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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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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