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디세이브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거짓말하는 건 특기야."
"난 꿰뚫어 보는 게 특기야."
"그래도, 본심은 좀 서툴러서 말이야."
"괜찮아, 나도 그래. 남의 본심은 꿰뚫어 보는 주제에 정작 내 본심에는 숨기지."
"이상하네, 언제나 진짜 이야기가, 가장 거짓말 같아."
"자, 그럼 들려줘. 너의 거짓말 같은 진짜 이야기를."
"...미안, 잠시만. 와야 할 사람이 더 있어."
"와야 할 사람?"
"아, 드디어 온 모양이네. 자, 둘 다 인사해."
"너는..."
“…안녕하세요, 여동생 친구분.”
밤하늘은 여전히 칠흑같이 검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휑한 하늘에 초승달 하나만이 고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길 양옆에 규칙적으로 세워진 가로등들이 초승달보다 더 강한 빛을 내뿜으며 우리들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 빛에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우리는 두 그림자를 뒤로 한 채 꾸준히 걸어가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지트를 나온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시한 이야기라도 하나 어때?」라며 시작한 카노의 이야기는 어느새 절정을 지나 결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지랑이처럼 열기를 품은 채 일렁거리는 그런 이야기를.
이야기는 우리에게 깃든 능력, 즉 뱀의 주인인 「괴물」부터 시작하였다. 가족이 생기고, 홀로 남겨지는 게 두려웠던 괴물은 뱀의 힘을 모아 끝나지 않은 세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날 내가 갔었던 「아지랑이 데이즈」. 그러나 무언가가 어긋나 그 괴물 혼자 아지랑이 데이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비극은 8월 15일에 죽은 사람들을 끌어와 일부 사람에게 뱀의 능력과 함께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게 바로 붉은 눈을 가진 우리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중 하나인 카노, 키도, 세토는 괴물에 대해 연구하는 타테야마가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바로 아야노 선배와 현재 내 담임 선생님인 타테야마 켄지로 선생님 댁에. 타테야마 선생님은 이전에는 에노모토 타카네였던 에네와 코코노세 하루카였던 코노하의 선생님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 가족은, 그 선생과 제자는, 그 선후배들은 모두 행복하게 지냈다.
행복은 비극을 낳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 어느 날 불행이 그 사람들을 덮쳤다. 서로 깊이 사랑한 부부는 사망하였고, 살아남은 것은 남편뿐이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이라는 불행을 품고. 선생님은 바랐다. 다시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소원을. 그러나 의도와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10마리의 뱀을 전부 모아서 새로운 괴물을 만든 후, 괴물의 힘으로 끝나지 않는 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합치는 것. 그것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그 뱀의 목표라고 한다.
뱀은 선생님의 육체를 차지해 여러 실험을 했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이 아끼던 제자들까지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그 결과, 내가 아는 에네와 코노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걸 아야노 선배가, 행복을 지키고 싶은 히어로가 잠자코 봤을 리가 없었다.
10마리 뱀을 모으는 게 목표라면, 다 모으지 못하게 막으면 돼. 아마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아야노 선배는 뱀 한 마리만이라도 끝나지 않는 세계에서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 뛰어내렸다. 8월 15일, 어느 무더운 여름날. 파란 하늘을 향해 뛰어내린 붉은 머플러의 소녀는 붉은 눈을 품게 되었다.
카노는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봤고, 때로는 협력했으며, 그 마지막에 협박을 당했다. 돕지 않으면 다른 녀석들을 죽이겠다. 명료하고도 묵직한 협박에 그 여름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카노는 그 뱀을 도왔다. 경찰의 눈을 피한다는 그 메카쿠시단마저도 속이면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전부 충격적이라서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니... 그동안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들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믿기지 않았다.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카노가 말하는 것들이 전부 사실임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뜨거워진 내 두 눈이 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내내 카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때를 지켜보듯 먼 곳을 멍하니 응시하기도 했고,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특히 아야노선배가 자살하고 그 시체를 연기했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내 일도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고 생각했는데... 카노는 그때 어땠을까. 누나 대신 학교에 갔을 때, 사랑하는 누나가 자살했을 때, 그 누나의 시체를 연기했을 때, 그 후 모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두의 원수인 뱀의 일을 도와야 했을 때... 나는 그때의 카노의 기분을 감히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 얘기하다 보니 벌써 다 왔네."
카노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거대한 수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몸을 웅크린 채 둥실둥실 떠 있는 검은 양 갈래 머리의 소녀, 즉 에노모토 타카네가 있었다. 저게 에네의 원래 몸... 낯선 느낌이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양 갈래에 체구가 작다는 것 외에는 에네와의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슬쩍 카노 핸드폰 안에 있는 에네를 보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놀람」, 그리고 「기쁨」. 만약 에네가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심장 속도가 상당히 빨랐을 것 같다.
...그동안 능력을 사람한테는 별로 세게 안 써서 몰랐는데 프로그램이라도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면 이 능력 쓸 수 있구나. 집중만 잘하면 주변 건물, 물건 투시 안 하고 한 사람의 감정, 상태만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다. 이래저래 알게 되는 게 많은 밤이다.
카노는 자신의 핸드폰을 수조 옆 컴퓨터에 연결하고는 그럼 천천히 나오라며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혼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준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에노모토씨가 알몸이니까 일부러 피해 주는 걸까? 어느 쪽이든 상대를 배려한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수조 속 에노모토 타카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에네를 잠시 바라보다가 카노를 따라 나갔다. 나도 에네, 아니 에노모토씨가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 싶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맞이한 하늘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렇지만 아까와 달리 몇몇 별들이 미약하게나마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 시라키쨩."
"응?"
"이제 얘기해주지 않을래? 네가 어떻게 누나를 알고 있는지."
"아."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느라 말해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야노 선배의 이야기를 해준다는 빌미로 겨우 따라온 거였는데.
"그렇지만 별 내용은 없어. 그냥 우연히 만났다는 게 전부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말해봐. 언제 누나를 만났어? 어떻게 만났어? 누나는 네가 능력자라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하나하나 다 말해줄 테니 일단 진정해. 너 아야노 선배 일이라면 흥분하는구나?"
내 말에 카노는 정곡이 찔렸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항상 놀리며 실실 웃는 모습만 보다가 이런 표정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다. 살짝 웃은 후 무의식적으로 반 묶음 한 붉은 머리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 보니 이 헤어스타일을 유지한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간다.
"...아야노선배의 말버릇이 뭔지 너도 알지? 「붉은색은 히어로의 색이야.」라는 말."
"당연히 알지. 우리 때문에 하고 다닌 말이니까. 그 붉은 머플러도..."
"내가 하는 이 머리끈 말이야. 이거 사실 아야노선배가 준 거야."
"...누나가?"
"응. 너한테는 붉은색이 잘 어울릴 거라면서. 아까 아야노 선배는 내가 능력자라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물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주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역시 히어로한테는 못 숨긴다 이건가?"
조금 분위기가 딱딱한 것 같아 나답지 않게 농담을 던져보았는데 카노는 별 반응 없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날 응시할 뿐이었다. 덕분에 약간 뻘쭘해지긴 했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야노 선배와 처음 만난 건... 3년 전, 내가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였어."
천천히 입을 열며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하나둘 총총히 박힌 별들은 그날 내리던 눈들을 연상시키게 했다.
"그땐 겨울이었어. 입학하기 전에 이곳으로 막 이사를 왔을 때였거든. 집 정리도 거의 다 끝내고 밖에 나오니까 눈이 오더라. 무척이나 추웠는데도 왠지 집에 있긴 싫어서 목적지도 없이 그저 돌아다니고 있었어."
"그거 왠지 세토같네."
"세토?"
"방랑벽이 있거든. 하던 얘기 계속해."
"아, 응. 아무튼 그냥 길이나 익힐 겸 발 가는 대로 막 걷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머플러를 한 소녀, 그러니까 아야노 선배가 몇 걸음 앞에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더라고 별 생각 없이 그 뒤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넘어졌어. 아야노 선배가."
"..하?"
카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꽤 황당한 첫 만남이니까.
"그때 소리가 정말 굉장했지... 아마 눈이 녹아 얼음이 된 부분을 밟았던 모양이야. 덕분에 넘어져서 들고 있던 짐이 다 흩어져버려서 내가 도와줬었어. 그 후 아야노선배한테 고맙단 인사 듣고 난 다시 제 갈 길 갔지."
"...그게 다야?"
"응. 이게 다야. 이게 첫 만남."
"뭐랄까, 누나답다고 해야 하나, 좀 맥빠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첫 만남이긴 하지만 일단 더 들어봐. 그게 끝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그리 긴 만남을 가졌던 것도 아니지만. 뒷짐을 지고서 카노를 두고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3년 전, 겨우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만은 붉은 색처럼 강렬했던 사람. 옛 기억의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회상하는 기분이 상당히 이상했다. 혹시 당신은 나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던 그때에도 뱀에 관한 일로 혼자 고민하고 있던 건가요?
"...그 후 다시 만난 것은 중학교 입학식 때였어."
닿지 않을 질문을 하는 대신 발을 앞으로 뻗으며 아야노 선배와의 재회 이야기의 운을 띄었다.
"어라? 안녕! 또 보네!"
"...안녕하세요?"
입학식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는 길. 교문까지 이어져 있는 벚나무 뒤에서 붉은 머플러를 한 소녀가 나와 인사를 건넸다.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것을 보면 우리 학교 학생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나와 같은 신입생이라고 하기엔 교복이 너무나 딱 맞고 여러 번 입은 흔적이 보였다. 혹시 선배인 걸까? 나보다 한두 살 연상 같아 보이기는 한다. 아니, 그 전에 왜 나에게 아는 체를 하는 걸까? 분명 여기엔 날 알고 있을 사람이 없을 텐데? 일부러 날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곳으로 온 건데?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그 소녀는 너무 태연하게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 와서 아는 사람이랑 착각했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전혀 다른 말이 소녀 입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우리 학교 학생인 줄은 몰랐어! 아, 신입생이구나?"
"네, 신입생이긴 한데... 절 아세요?"
"에? 기억 안 나? 왜 예전에 오르막길에서 넘어졌었는데 네가 날 도와줬었잖아."
오르막길? 넘어졌는데 도와줘? 내가? 말을 듣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최근에 누굴 도와준 기억은 딱히 없다. 애초에 누가 내 앞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던가... 내가 계속 기억하지 못하고 끙끙거리자 소녀는 눈 오는 날이었다며 말을 보탰다.
"아."
"기억났어?"
맞아, 기억났다. 이삿짐 정리를 다 끝내고, 기분전환도 하고 길 좀 익힐 겸 막 걷고 있을 때 오르막길에서 넘어졌던 그 사람이다. 그때 소리가 정말 굉장했었지... 쾅 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듣고 있던 각종 짐이 쏟아지는 소리까지 더해져 상당히 커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놀란 기분 추스르기도 전에 굴러 내려오는 각종 양파, 사과, 당근 등을 반사적으로 줍느라고 정신이 없기도 했었다. 어찌어찌 다 주워 갖다주니 찧은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던 모습이 이제야 똑똑히 떠오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그것도 같은 학교, 거기다 선배... 내 첫인상이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 소개가 늦었네! 난 3학년 타테야마 아야노야. 너는?"
"...신입생인 시라키 이치카입니다."
"응응! 이치카쨩이구나. 예쁜 이름이네!"
소녀는, 아니 타테야마씨는 그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초면인데 바로 이름부터 부르다니, 못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선배인지라 내색은 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하며 마주 웃었다. 문득 커갈수록 이런 가식 연기력이 늘어간다는 것이 씁쓸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타테야마씨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속수무책으로 타테야마씨가 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잠... 타, 타테야마씨?!"
"타테야마씨말고, 아야노 선배라고 불러줘! 신입생이니까 아직 학교 지리 모르지? 내가 안내해줄게!"
"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난 히어로니까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을 뿐이거든!"
절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이거든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사이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해쳐 벚꽃이 만발한 교정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꽃샘추위가 완전히 사라진 4월, 분홍빛 환하게 웃으며 앞서 걷는 아야노 선배의 붉은 머플러처럼 내 가슴에 달린 입학 축하 꽃이 흔들렸다.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재회.
이것이 내 중학교 생활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도 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타지인 데다가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아야노 선배처럼 친근한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안면을 튼 아야노 선배와는 나이 차도 있고, 교실도 좀 떨어진 편이라 별 접점이 없겠지 싶었는데...
"끄응... 어렵네..."
"어?"
"응? 아, 이치카쨩 안녕~"
설마 접점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입학한 지 한 달밖에 안 지난 시점에. 선생님이 시키신 일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던 중, 홀로 불 켜진 일반 교실을 호기심에 들여다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바로 교무실에 갈 것이지 난 왜 굳이 이 교실을 들여다본 걸까. 뒤늦게 후회해봤자 눈 마주친 게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아야노 선배의 모습에 들키지 않게 짧게 한숨을 쉰 후 조심스레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저 사람이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3학년 선배이기도 하고 왠지 조금 거북하다.
"안녕하세요.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서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거 때문에..."
"이건... 시험지?"
"오늘 쪽지 시험을 봤는데 최하점을 못 넘겨서... 그래서 오답 노트를 하고 있었어."
아야노 선배는 부끄럽다는 듯 느리게 말하면서도 에헤헤 하고 멋쩍게 웃었다. 내려다본 회색 시험지에는 빨간 색연필로 56이라고 진하게 쓰여 있었다. 3학년 학기 초부터 이렇게 되다니... 이 사람 입시는 괜찮을까? 혹시 진로가 대학 진학 쪽이 아닌가? 궁금증은 일단 넣어두고 의례적인 말을 던졌다.
"그렇지만 학교가 끝난 지 벌써 1시간이 되어가고 있어요. 슬슬 집에 돌아가시는 게."
"수학 선생님이 검사받고 집에 가라고 하셨거든. 좀 엄격하신 분이라서. 아, 그래도 어찌어찌 다 했어!"
끝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아야노 선배는 당당하게 오답 노트를 내 코앞으로 내밀었다.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가까이서 본 선배의 오답 노트는 샤프 자국과 지우개 가루들로 여러 번 썼다 지웠다 한 흔적이 선명했다. 난 아직 1학년이라 3학년 수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얼마나 노력해서 만든 오답 노트인지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노트 너머의 아야노 선배는 무척이나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능력이 발동되어 버렸어!
어차피 노트 때문에 아야노 선배는 못 봤을 테지만 놀란 마음에 홱 돌아서 버렸다. 뒤에서 아야노 선배가 영문을 모르는 모습이 복도 쪽 창문에 비쳤다.
"저기, 이치─"
"마침 잘됐네요. 저도 교무실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실래요?"
"응? 아, 그러자! 잠시만 기다려, 가방 챙기고 올 테니까!"
뒤돌아선 채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눈을 감았다. 심호흡해서 놀란 심장을 겨우 안정시키고 능력을 푸는 데에 집중했다. 놀란 기분이 사라짐과 동시에 눈의 열기 또한 사라졌고, 다시 눈을 뜨자 창문에 검푸른 색의 내 눈과 마주쳤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어찌어찌 무마시키고 같이 교무실에 들어간 우리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선생님께 각각 제출할 것들을 건넸다. 아야노 선배 쪽에서 수학 선생님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다행히 오답 노트를 다시 해오란 얘긴 아니었는지 아야노 선배는 가방만 들고 교무실에서 나갔다. 나도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한 뒤 아야노 선배 뒤를 쫓아 교무실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넘어가기 시작한 햇빛으로 길어진 그림자 끝에 아야노 선배가 웃으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치카쨩은 이 시간까지 뭐 하고 있었어? 혹시 부 활동?"
"아니요, 따로 하는 건 없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반장이 되어서 선생님 일 도와드리느라 시간이 이렇게..."
"와~ 반장이라니 대단하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다들 하기 귀찮아해서 제가 되었던 것뿐이고..."
"아냐, 그래도 대단한걸! 반장은 반을 이끌어가는 존재잖아? 뭐랄까, 히어로같네!"
"히어로요?"
"응! 봐, 나도 히어로야! 붉은색은 히어로의 색이니까!"
히어로라니...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어이없어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모르고 아야노 선배는 정말 어린 애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정말로 가식 하나 없이 순수하게. 그 미소가 나에게는 너무 눈부시게 보였다.
"후후, 그거 뭔가 멋지네요."
그래서 나도 오랜만에 순수하게 웃어보았다. 솔직하게 말해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야노 선배가 나를 가식없이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새 도시에 와서, 새 학교에 입학해서, 새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나는 계속 마음의 벽을 쌓아둔 채 사람을 대했다. 그 누구에게도 이 「붉은 눈」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또, 배신당할까 두려워 그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까 내가 몹시 싫어하는 이 「붉은 눈」으로 본 이 사람의 모습은 거짓도, 가식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가식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와아."
"왜 그러세요?"
"앗. 으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 그렇지! 잠깐만..."
아야노 선배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가방에서 나온 것은 학교 근처 팬시점에서 샀는지 예쁘게 포장돼있는 붉은 머리끈이었다.
"이거 이치카쨩한테 줄게."
"네? 그거 아야노 선배가 쓰려고 산 거 아닌가요?"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서 나도 모르게 산 거야. 난 머리도 잘 안 묶는데... 헤헤 괜찮다면 이치카쨩이 써주지 않을래?"
"아뇨, 전..."
"혹시 붉은색 싫어해?"
서둘러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싫어한다는 말이 그냥 튀어 나갈 뻔 했기 때문이다. 그날 튀어 올랐던 피의 색깔도, 날 괴물처럼 만드는 눈의 색깔도 붉은색인데 어떻게 붉은색을 좋아할 수 있겠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그저 시선만 피하고 있을 때 아야노 선배는 내 손을 잡고 억지로 머리끈을 쥐여주었다.
"서, 선배?"
"받아줘! 이치카쨩은 분명 붉은색이 잘 어울릴 거야."
"아니, 저기 잠깐만요!"
아야노 선배는 내 말에도 그저 싱긋 웃으며 총총 걸어 나갔다. 펄럭거리는 선배의 붉은 머플러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내 손 위의 머리끈을 보았다. 피처럼, 내 눈처럼 선명한 빨간색.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색. 그렇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고 머리끈을 꺼냈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붉은색만 담긴 개성 없는 긴 머리끈으로 내 머리카락을 반으로 묶었다. 고무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끈이었기에 길게 남아버린 부분은 예쁘게 리본을 묶어주었다. 그리고 곧장 아야노 선배의 앞으로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
"...어때요? 어울리나요?"
"응! 정말 잘 어울려, 이치카쨩!"
우리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듯 마주 보고 웃었다. 피처럼, 내 눈처럼 선명한 빨간색.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색. 그렇지만 절반 정도는 마음을 내주어도 괜찮겠지. 어차피 내게서 뗄 수 없는 색이니까 절반 정도는 허락해줘도 괜찮을 거야. 그런 식으로 멋대로 자기 합리화시키고는 아야노 선배와 노을 진 길을 걸었다. 미약한 꽃향기가 나는 봄바람이 선배의 붉은 머플러와 내 붉은 리본을 매만지며 날아갔다.
이런 식으로 나는 종종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야노 선배와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아야노 선배가 남자친구와 함께 교실에 있길래 그때부터 아는 체도 안 하고 눈치껏 빠져서 만나는 일이 적어지긴 했지만. 대신 핸드폰 번호를 교환해서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다. 딱히 많은 얘기를 했던 것은 아니다. 자주 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야 나에게는 내 생활이, 아야노 선배에게는 아야노 선배의 생활이 있으니까. 그냥 각자의 생활을 하다 문득 생각나면 말을 걸었던 것뿐. 일부러 약속을 잡아 만나거나 한 적도 없다. 덕분에 그 이상 가까워진 일도, 멀어진 일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문자가 완전히 끊겼다. 중학교 2학년 때의 8월 13일, 오랜만에 아야노 선배와 만난 후부터.
알바를 하기 위해 한 편의점에서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간이 꽤 늦어져서 거리에는 귀가 시간을 알리는 팬저 마스트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아이들은 웃으며 각자의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뛰어나온 놀이터에는 아야노 선배가 있었다. 졸업한 지 1년이나 지났을 텐데 아야노 선배는 검은색 미들롱 헤어도, 붉은색 머플러도, 심지어 교복까지도 중학교 때와 변하지 않은 채 그네에 앉아있었다. 딱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표정. 아야노 선배와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절대 아니지만, 선배의 저런 어두운 표정은 처음 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난 어느새 선배의 앞에 서 있었다.
"...아야노 선배?"
"아, 이치카쨩이구나. 오랜만이네."
날 보고 아야노 선배는 설핏 웃었다. 그 웃음은 아야노 선배와 처음 만났던 때의 웃음도, 입학식 때의 웃음도, 머리끈을 받았을 때의 웃음도 아니었다. 억지로 지어 보이는 가짜 웃음. 아, 이 사람 정말 거짓말에 서툴구나. 그걸 알아채고서 난 바로 옆 그네에 앉았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무슨 일 있나요?"
"으응, 그냥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저라도 괜찮다면 말해주세요.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그런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내가 선배가 무언가라도 말하길 재촉했지만, 선배는 또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할 생각이 전혀 없구나. 안타깝게도 나에겐 상대방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캐내는 취미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야노 선배다.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연 상대인 아야노 선배란 말이다. 나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안타까운 마음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신발코로 흙을 팠다. 갑자기 내려앉은 침묵이 너무나도 아프다.
"...있지, 이치카쨩."
"네?"
"만약에... 만약에 이치카쨩의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네가 그 사람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다면 할 거니? 그 방법이 너무 무모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해도."
"네? 갑자기 그건 왜..."
"에헤헤, 그냥 묻는 거야. 이치카쨩은 그럴 때 어떻게 할 거야?"
"그야..."
"그때 뭐라고 대답했어?"
"대답 못 했어."
"뭐?"
"그런 질문에 섣불리 대답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딱 봐도 그게 아야노 선배의 상황인데."
그렇다. 그때 난 대답을 회피했었다. 내 대답에 따라 아야노 선배의 행동이 좌지우지될지도 모르니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이리저리 시선만 굴리는 내게 아야노 선배는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서 미안하다며 살짝 웃고는 집에 돌아가 버렸다. 그때에도 난 아야노 선배를 잡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답도 못 한 내가 선배를 잡아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해를 등지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유독 고독해 보였던 게 아직도 선하다.
나는 그때 뭐라도 대답했어야 했을까?
그래야 했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
내 대답으로 아야노 선배가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저기, 가르쳐주세요. 아야노 선배.
「타테야마 아야노」라고 새겨진 비석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조용히 물었다.
"아마 누나는... 네가 어떤 대답을 했어도 죽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뛰어내렸으니까..."
카노는 말하는 것조차 괴로워 보이더니 이내 비석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울 때 후드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제 표정을 가리기 위해 카노의 눈은 어느새 다시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눈에는 투명한 눈물방울이 그대로 보였지만.
"왜... 왜 죽어버린 거야, 누나..!"
카노는 아야노 선배가 죽었을 때가 떠올랐던 것인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숙어진 고개가, 들썩거리는 어깨가, 구부려진 등이 그를 한없이 작아 보이게 했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그럴 만도 하잖아. 난 아직 어리다고. 고 1밖에 안 된단 말이야. 어릴 적 예상치 못했던 사촌 오빠의 배신과 아버지의 죽음, 갑작스레 생겨나 버린 능력 등으로 생긴 내 상처조차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 그런데 거기다 아야노 선배는 2년 전에 죽었고, 담임이신 타테야마 선생님은 「눈이 맑아지는 뱀」 때문에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니...
버겁다.
믿을 수 없어.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걸까.
도망치고 싶어.
그렇지만 딱 한 가지. 딱 한 가지 알고 있는 게 있다. 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울고 있는 카노를 안았다.
"...시, 라키쨩?"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라서 잠시 울음을 멈춘 카노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딱 한 가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보다도, 메카쿠시단 그 누구보다도 카노가 제일 맘고생이 심했다는 것. 내가 이 이야기를 버겁게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카노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카노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야노 선배의 작전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상처 내면서까지 열심히 해왔다. 혼자서, 정말 열심히 해왔다.
나에게는 그런 카노를 구해줄 힘이 없다. 난 아야노 선배 같은 히어로가 아니다. 그저 아야노 선배처럼 히어로가 되고 싶지만 자기 일로도 허덕대는 반쪽짜리 히어로.
하지만.
이런 나라도 카노의 본 모습을 보고, 숨겨왔던 얘기를 듣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카노의, 아니 메카쿠시단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
난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힘들어도, 버거워도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친구들이 있으니까. 반쪽짜리면 어떻고, 거짓말쟁이면 어떠하겠는가. 그 하나하나가 모여 큰 힘이 될 거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구나... 수고했어. 정말 수고 많았어. 이젠 괜찮아. 괜찮아..."
카노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려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게 카노의 마음을 울린 것인지 카노는 아예 날 끌어안고 아이처럼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이번엔 내가 놀라버렸지만 이내 나도 카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어렸을 적, 정말 힘들었을 때 아빠 몰래 숨죽여 울던 그때처럼. 그렇게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애처럼 울었다. 그동안의 상처를 전부 털어내려 듯이.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듯, 이 눈물이 마른 후엔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창피한 모습 보여서 미안."
"아니, 나야말로... 아아... 이 무슨 추태..."
"아하하, 둘 다 좀 운 것 가지고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세요! 울 수도 있는검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깐 정말 놀랐다구요? 카노가 안 돌아왔다길래 찾으러 다녔는데 누나 무덤 앞에서 둘이 껴안고 울고 있어서."
"윽... 알겠으니까 그 얘긴 제발 그만해, 세토."
"...이하동문이야."
카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드를 뒤집어썼다. 부모님 묘소에서 울다가 카노와 키도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부끄러웠다. 그에 세토는 또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또 아까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우리 둘이 아야노 선배 무덤 앞에서 한창 실컷 웃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세토가 우릴 보고 뛰어왔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우리 둘을 보고 '둘 다 여기 있던 검까!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 엑?! 우는검까?'라고 말하던 세토의 모습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엄청 당황한 데다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땐 워낙 감정이 격렬하게 치솟아있던 때라 우리들 모습이 어떨지 상상도 못 하고 곧바로 세토에게 달려들어 이래저래 떠들었다. 솔직히 떠든 건 카노뿐이고, 나는 옆에서 계속 훌쩍거렸을 뿐이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쪽팔린다. 어쨌든 그에 더 당황한 세토는 어버버 거리다가 일단 울음을 그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둘을 동시에 안고 토닥거려주었다. 진정하라며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 따스해서 나도, 카노도 동시에 눈물이 멈췄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참 신기했다. 역시 세토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건가. 1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그렇게 따지면 카노도 나보다 연상인데. 1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어쨌든 그렇게 세토를 만나서, 우리 둘 다 눈물을 그치고, 사이좋게 아지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현 상황이다. 어느새 달은 많이 기울어져 건물들 사이에 쏙하고 들어가 있었다.
"그런 일은 없슴다. 괜찮아요."
"응?"
갑자기 나온 세토의 말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옆에서 카노가 눈에 띌 정도로 움찔거렸다. 나는 그런 카노의 모습과 세토의 눈을 번갈아 바라본 후에야 겨우 상황이 이해되었다. 세토가 능력으로 카노의 속마음을 읽고 그에 대답해준 것이구나. 아까 카노가 울며 세토에게 이래저래 떠들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말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 세토 눈은 능력 사용 중이라 붉은색인 말씀.
"아, 아직 능력 사용하고 있었어? 뭔가 읽히는 게 오랜만이라 부끄러운데."
"네에?! 조금 전에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았슴까!"
"끄아아! 조금 전 이야기는 이제 됐으니까... 그보다 그 이야기 정말 다른 애들 앞에서 하지 마."
"하하하, 안 함다! 남자끼리의 비밀이라는 걸로!"
"난 여자인데? 그럼 난 말해도 돼?"
"앗, 안돼, 안돼! 말하면 나도 시라키쨩 운 거 다 말해버릴 테니까!"
"미안해, 절대 말 안 할게. 서로 평생 비밀인 걸로 하자."
"응, 그러자."
마치 콩트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우리 둘의 모습에 세토는 또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인지 나도 그만 작게 웃고 말았다. 아아, 정말이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해버렸다. 오늘 애처럼 운 것도 그렇고, 어제 초면인 히비야를 전력으로 쫓았던 것도 그렇고, 그저께 모모 매니저의 전화를 받은 것도 그렇고... 아니, 어쩌면 이게 진정한 나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가식과 위선으로 벽을 치고 혼자 웅크려있던 내가 인제야 벽을 깨고 나온 건인지도 모른다. 나... 의외로 이상한 성격이었구나.
"이상하지 않슴다. 오히려 그게 더 보기 좋아요."
"에, 능력 아직 안 풀었어?! 내 목소리도 들리는 거야?"
"당연함다.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걸요."
"아아... 카노가 아까 이런 기분이었구나... 확실히 좀 부끄럽네."
"그거 시라키쨩이 말할 대사는 아니라구? 난 그 후로 계속 속인 모습으로 살아왔었는데 그걸 꿰뚫어 봤잖아. 꼭 벌거벗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그거는 항상 속이고 다닌 카노가 나쁜검다."
"맞아. 나랑 세토가 능력 안 썼다면 계속 말 안 했을 거잖아?"
"윽! 그, 그건..."
"아하하. 뭐, 괜찮슴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면 됐죠!"
카노는 부루퉁하게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슬쩍 눈에서 힘을 빼도 카노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눈의 색깔도 붉은색이 아닌 원래의 연갈색 그대로였다. 아야노 선배의 죽음 이후 항상 붉었던 눈이 이제야 제 색깔을 되찾게 된 것이다. 정말 잘됐다.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하며 계속 걸어가던 와중 자판기 앞에서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우리말고 또 다른 사람이 돌아다니는 줄 알고 조금 신기했지만, 그 사람의 실루엣을 보고 금세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담한 체구에 긴 트윈테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런 실루엣을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다. 엄밀히 따지면 그 사람과 나는 초면이란 게 아이러니하지만.
"윽... 또 성가신 사람이..."
카노의 말에 그 사람도 우리를 눈치챘는지 우리 쪽으로 총총 걸어왔다. 아까 봤을 때만 해도 나체였는데 어디서 입고 온 것인지 그 사람은 약간 헐렁한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은 누구임까?"
"...에네."
"지금은 에노모토 타카네씨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의 설명에 세토는 사고가 굳은 듯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2차원인 에네와 3차원인 에노모토 타카네씨를 동일 인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좀 있겠지. 나야 아까 실컷 설명을 들었으니 이해한다 쳐도 세토는 울던 우리를 달래느라 설명조차 제대로 못 들었으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솔직히 설명을 들은 나도 막상 에노모토씨와 직면하게 되니 조금 묘한 기분이다.
"네에?! 에네는 좀 더 이렇게... 작고 아담했던 듯한..."
"누가 작고 아담하다고? 누가."
에노모토씨는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로 세토를 잔뜩 노려봤다. 세토는 그 눈빛에 완전히 기가 눌렸는지 '히익! 아, 아니 그게...'라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기에 바빴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른스럽다고 느낀 세토가 이러니 조금 웃겼다. 역시 얘도 아직 어리구나 싶다. 아니면 타카네씨가 더 연상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야노 선배의 선배니까 나하고는 3살 차이인가. 으음, 조금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러니까... 에노모토씨?"
"몸은 괜찮아. 그것보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뭔가 불편하다고."
"그럼 타카네씨라고 부르는 편이 좋아?"
카노의 질문에 에노모토씨는 꼭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2년 동안 에네로 불리다가 다시 원래 이름으로 불리려니 불편한 모양이다.
"으... 번거로우니까 아무래도 좋아."
"음~ 타카네씨는 누나가 부르던 호칭이니까 그럼 나답게 타카네쨩으로~"
"내가 연상인데..."
"그럼 제가 타카네씨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타카네씨?"
에노모토씨, 아니 타카네씨는 뭔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보다 너 발목 괜찮아? 아까 다쳤었잖아."
"아, 이거 말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만은 않아요."
"발목? 엣! 시라키쨩 왼 발목 왜 그래?"
카노는 그제야 부은 내 발목을 보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히비야와 코노하씨를 만났을 때 카노는 없었지... 다시 살펴보니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키도가 치료해줬을 때의 붓기 그대로였다. 하긴 다 낫지도 않은 주제에 밤새 걸어 다녔으니... 지금까지 카노의 이야기를 듣느라 신경을 안 써서 몰랐는데 다시금 상처를 인식하게 되니 시큰거리며 아팠다.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니 많이 아프지는 않지만.
"도망가는 히비야를 쫓아가다가... 아, 그러고 보니 히비야는 어떻게 하고 나온 거야, 세토?"
"별문제 없이 곤히 자는 것 같길래 살짝 빠져나왔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라키한테 좀 봐달라고 하려 했는데 안보이지 뭠까! 카노 방에도 누군가 있던 흔적은 있는데, 없고... 그래서 찾으러 나왔던 검다. 그보다 발목 괜찮은검까?"
"괜찮아. 심하게 삔 것도 아닌걸. 그보다 얼른 돌아가자. 모두에게 해야 할 말이 잔뜩 쌓여있잖아?"
'그치?'라고 말하며 카노와 타카네씨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둘은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러네. 나도 그 녀석한테 해야 할 말이 잔뜩 있고."
"그동안 신타로군에게 주인님거리며 실컷 괴롭혔던 「에네」가 자신이라는 거 잘 말할 수 있겠어?"
카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카네씨는 머리를 감싸며 웅크려 앉고는 죽고 싶단 말을 마구 남발해대었다. 아무래도 크리티컬 히트였던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평소랑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는 해도 후배한테 주인님거리며 놀렸더라면 저렇게 행동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 기억 자체를 스스로 말소시켜버리고, 그 후배랑 연을 끊을지도... 더군다나 타카네씨는 「에네」때의 모습과 큰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밝히는 것은 힘들겠지.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안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타카네씨, 힘내세요. 증언이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뭐어... 나도 그 녀석한테 사과해야겠지."
"뭐야? 너 그 녀석이 신경 쓰여?"
카노는 멋쩍게 볼을 긁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 아야노 선배로 변해 신타로씨를 멘붕에 빠뜨렸던 모습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잠깐 알았던 나도 그때 그렇게 충격을 받았었는데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신타로씨는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문득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던 신타로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정신없어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뛰쳐 나와버렸네. 아지트에 돌아가면 나도 같이 사과할까...
"음~ 그 녀석 바보도 아니고, 제대로 사정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질질 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괜찮을 거야. 애초에 나쁜 사람도 아닌걸. 신타로씨도 너도."
"자, 잠깐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슴다.."
갑자기 끼어든 세토의 말에 나와 카노, 타카네씨는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모두에게 다 말해주기로 했고, 아지트에 돌아가면 대 설명회가 벌어질 테니 굳이 지금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눈빛으로 대강 의견을 모은 후 세토에게 말했더니 시원스럽게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꽤 답답할 텐데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줘서 좋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맙단 뜻을 전했다.
"이해가 안 간다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
이 말을 한 사람은 세토도, 타카네씨도, 나도 아닌 모든 일의 전말을 다 알고 있던 카노였다. 갑자기 날아온 말에 세 사람 모두 카노에게 시선이 쏠렸다. 지금까지 실컷 다 설명해놓고 대체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일까. 여기서 유일하게 카노의 설명을 빠짐없이 들은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기는 해도 이해 안 가는 부분은 없었다. 그만큼 카노의 설명은 제법 체계적이고 깔끔했었고, 그 설명 덕분에 지금까지 엉성하게 얽혀있던 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무릎까지 쳤다. 그런데 지금 와서 대체 무슨 말을... 자신의 말만큼이나 갑자기 몰린 우리 셋의 눈빛에 카노는 잠깐 당황하다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게... 누나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능력, 그러니까 뱀은 10마리 있다고 했어. 키도가 가진 「눈을 가리는 뱀」, 세토가 가진 「눈을 훔치는 뱀」, 내가 가진 「눈을 속이는 뱀」, 키사라기쨩이 가진 「눈을 빼앗는 뱀」, 에네인 타카네쨩이 가진 「눈을 뜨는 뱀」, 코노하인 하루카가 가진 「눈을 깨우는 뱀」..."
"잠깐, 그럼 역시 그 가짜씨, 코노하는 하루가였던 거야?! 그런데 왜 나를 기억 못하는 건데!"
"자자, 진정하심쇼. 아직 카노 얘기가 안 끝났슴다. 그리고 타카네씨도 에네 때랑 모습이 아주 다르니까 못 알아볼 만도... 앗, 죄송함다!"
타카네씨는 세토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째려보았고, 그에 세토는 개처럼 깨깽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카노의 얘기가 안 끝났다는 부분은 인정하셨는지 한숨과 함께 머리를 한 번 쓸고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카노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어어... 그럼 계속해서 오늘, 아니 이젠 어제라 하는 게 맞겠지. 암튼 어제 히비야군이 얻게 된 「눈을 집중시키는 뱀」,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누나가 가진 게 「눈을 돌보는 뱀」, 아빠가 얻게 돼버린 그 나쁜 놈이 「눈이 맑아지는 뱀」이고, 마지막으로 마리가 가지고 있는 통칭 여왕뱀, 「눈을 합치는 뱀」. 이렇게 총 10마리야. 그런데..."
카노는 거기서 말을 끊고 크게 숨을 들이셨다. 자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카노의 시선은 밤하늘을 헤매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로. 왜 나를?
"누나가 그 자식의 조사 보고서에서 알아낸 그 10마리의 뱀 중에서... 네가 가진 「눈을 꿰뚫어 보는 뱀」은 없었어, 시라키쨩."
"...뭐?"
카노의 말과 시선이 날카롭게 나에게로 꽂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눈이 맑아지는 뱀」의 정보니까 틀림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럼 내 능력은 대체 뭔데."
"응. 나도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거야. 11번째 뱀이라니... 지금껏 그 녀석의 일을 도왔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
말을 하다 말고 카노는 입과 눈을 크게 벌린 채 나를 보았다. 아니, 날 보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내 뒤쪽─
"뭐, 뭐야?!"
어느새 내 뒤에 선 회색 봉고차에서 나온 두 명의 남자가 나오더니 나를 덮쳤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피하지도 못하고 두 팔을 그대로 제압당해버렸다. 뒤늦게 발버둥을 쳐보지만, 상대는 성인 남자, 그것도 두 명. 능력 외엔 평범한 16살 여고생인 나에겐 그걸 떨쳐낼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시라키!"
"이, 이 사람들 뭐야!"
"젠장! 그 「뱀」이 보낸 건가! 시라키쨩을 놔줘!!!"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탓에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나를 구하려 다가오는 세토, 타카네씨, 그리고 카노의 모습만은 똑똑히 보였다.
도와줘─!
미처 소리로 내뱉지 못하고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가장 내 가까이에 있었던 카노가 내 손을 잡으려 손을 뻗어왔다. 그때와는 다르다. 배신당한 채, 도움받지 못하고 떨어졌던 그때와는.
하지만─
"어이, 너희들! 차 안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이 녀석들 막아!"
"아, 알겠어!"
"윽! 어린 주제에 왜 이렇게 힘이 세?"
"대충 상대하고 돌아와! 의뢰받은 건 이 여자애뿐이야!"
─손과 손은 닿지 못했다. 또 그때처럼, 내 손은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대신 나에게 고정된 세 개의 시선만이 강하게 뇌리에 닿았다. 나는 이대로 또 혼자가 되는 걸까.
"이거 놔요! 놓으란 말이야!!!"
젖먹던 힘까지 끌어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내 맹세컨대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발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날 봐주는 저 아이들의 곁이.
"얘는 또 왜 이래?! 할 수 없지!"
하지만 그 노력은 너무나 허무하게 포르말린의 향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코와 입을 통해 강렬하게 밀려오는 포르말린에 내 의식은 힘없이 밀려 버렸다. 좁아지는 시야에도 나는 끝까지 카노, 세토, 타카네씨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것도 잠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끝으로 시야가 완전히 블랙 아웃이 되었다.
카노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치카에게 뻗던 손도 힘없이 떨어져 바닥을 짚었다. 아까 괴한에게 맞은 복부보다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카노를 더 아프게 했다. 지키지 못했다. 또 누나 때처럼 지키지 못했다. 그 생각만이 카노의 뇌 속을 채워 어지럽혔다.
"...노 ...카노!"
"시라키쨩..."
"야!!!"
"우와앗?! 까, 깜짝 놀랐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야, 타카네쨩!"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뭘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야!"
타카네는 짐짓 허리에 손을 얹고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 날카롭게 만들며 카노를 째려봤다. 무서운 눈매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 그리고 센 기에 눌려 카노는 위축되고 말았다.
"딱히 멍하게 있었던 건..."
"하아? 너 말이야. 지금 자신의 얼굴을 좀 보고 그런 말을 하지 그래?"
"자자, 둘 다 진정하십쇼! 카노도 놀란 건 이해함다만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안됨다!"
카노와 타카네 사이의 스파크가 튈 듯한 공기를 뚫고 세토가 끼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호탕하게 말한다고 생각하던 카노는 불쑥 눈앞에 나타난 손에 놀라 몸을 들썩였다. 손의 행방을 찾아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세토가 초록색 후드 아래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카노는 잠시 머뭇거리다 세토의 손을 맞잡았다. 세토의 온기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구임까? 갑자기 시라키를 데려가 버리다니."
"아마 아빠한테 씐 뱀이 보낸 사람들일 거야. 그거 외엔 딱히 짐작 가는 데가 없어."
"그 수염 영감... 만나면 여동생 친구분, 아니 이치카 몫까지 냅다 갈겨주겠어!"
타카네는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쳤다. 팡 하고 꽤 큰 소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타카네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토는 그에 기가 죽은 듯 힘없이 웃었지만 카노의 눈에는 그게 믿음직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서? 수염 영감은 어디에 있는 건데?"
"네가 있던 건물 자체가 그 뱀의 실험실이야. 하지만 방이 너무 많아서 어떤 방에 시라키가 가게 될 건지는..."
"짐작도 안되는검까?"
"...응. 비슷한 방이 너무 많아서."
카노는 실험실의 여러 방을 쭉 떠올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건물 자체의 구조는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자신이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이치카가 어느 방에 갈 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가서 아무 방이나 쑤시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까의 그 괴한들과 같은 용병들이 실험실에는 몇 명이고 있을 터였다. 무턱대고 갔다간 아까와 같은 꼴밖에 나지 않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카노는 아까 차인 복부를 매만졌다.
"으음... 그럼 어쩔 수 없네. 세토 너 힘 좋지?"
"네? 네, 뭐... 힘이라면 나름 자신 있슴다만."
"좋아. 그럼 나 좀 업어줘."
"네?! 어디 아픈검까?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는... 으앗!"
타카네는 세토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이더니 이내 다짜고짜 세토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세토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서둘러 팔을 등으로 돌려 타카네의 몸을 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뭐라 한마디 하려던 세토는 고개를 돌린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 자신을 째려보던 타카네의 눈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동조차 하나 없었다. 작게나마 들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시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어벙하게 바라보던 카노는 주머니 속의 진동에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냈다. 폴더를 열어젖히자 조그마한 액정 속에 더 조그마한 파란색 소녀가 아까의 타카네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카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네쨩?! 왜 거기 있는 거야? 기껏 몸 찾아줬더니!"
"어쩔 수 없잖아요! 긴급 사태라구요? 여동생 친구분이 끌려갔다구요?"
"뭐, 뭠까?! 이 사람 진짜에네였던 검까?"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요? 개구리씨, 제 몸 잘 부탁드릴게요! 그것보다 여우눈씨! 얼른 절 메일을 통해 여동생 친구분에게 보내주세요!"
카노가 말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리는 사이에네는 멋대로 새 메일을 띄우고, 그 좁은 메시지 칸에 우겨 들어갔다. 에네가 완전히 쏙 들어간 후에도 멍하게 있던 카노는 곧이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소리치는 에네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해요! 빨리 보내달라니까요? 자자, 빨리 메시지 쓰고 절 보내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어차피 그 상태로 가봤자 시라키를 구할 수도 없잖아! 네 몸은 어쩌고!"
"아! 정말이지! 시끄럽게 쫑알쫑알 굴지 마세요! 그리고 구할 수 없긴요! 제가 여동생 친구분 핸드폰에 가 있으면 위치추적이라던가 할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 여동생 친구분이 낯선 곳에서 혼자 눈떴을 때 얼마나 무서워할지..."
에네는 타카네에서 에네가 되기 직전, 부서지는 인공 마을에 혼자 있었던 기억을 떠올려내고 우울해졌다. 타카네는 그때 헤드폰에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겁을 먹고 덜덜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똑 부러져 보이긴 하지만 아직 어린 만큼 낯선 곳에서 무서워할 게 분명하다고 에네는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한 것처럼. 카노는 급격히 내려간 에네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몇 글자를 마저 입력하고는 웃는 모습으로 「속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잘 다녀와, NO.6 에네 단원!"
"...라저!"
경례 자세를 취한 에네는 모습을 확인한 후 카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바로 뜬 전송 완료 표시에 카노는 능력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카노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위치추적 같은 건 할 수 없다는 걸. 비윤리적인 실험을 하는 만큼 그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므로 그곳에 방해전파가 날아다닌다. 즉, 메일이나 인터넷 등은 메인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기기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카노가 에네를 보낸 것은 그 녀석들이 아직 실험실에 도착 못했을 거란 추측과 적어도 이치카의 곁에 누군가라도 있는 게 좋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지..."
그 뒤부터는 너무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이치카가 납치되었으니 구하러 가야 한다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에게 그 뱀에게서 이치카를 구할 힘이 있나? 카노는 그 자문(自問)에 대답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NO」라는 대답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오늘날까지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멋대로에네를 데리고 나와 타카네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준 것? 시라키와 밤거리를 걸으며 지금까지 있던 일을 전부 다 말해버린 것? 아니면 그 뱀의 일을 도운 것?
그것은 카노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돕지 않으면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시라키가 납치당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자 카노는 머리가 아팠다. 자신은 단지 누나를 대신해서 모두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 오히려 모두를 죽이는 결과를 낳았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카노가 깊은 낭패에 빠지려던 무렵, 세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노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카노, 괜찮슴까? 안색이 좋지 않슴다."
"그게... 일이 너무 어렵게 돌아간다 싶어서."
"괜찮슴다! 에네씨도 시라키에게 가주었고, 무엇보다 모두가 있지 않슴까! 자, 일단 어서 돌아가요!"
세토의 씩씩한 목소리에 카노는 몸을 돌렸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의 빛을 받으며 타카네를 업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세토의 모습은 믿음직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인지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정말 나 혼자 고민했던 게 바보 같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카노는 약하게 웃었다. 그래, 모두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모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실마리조차 없지만 모두와 함께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카노는 이 근거 없는 예감을 그냥 믿기로 했다.
"그래, 얼른 가자. 해줄 말도 많고 서두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
세토 쪽으로 발을 뻗던 카노는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를 보고 멈추어 섰다. 허리를 숙여 그 무언가를 제대로 확인한 순간 카노의 눈은 커졌다.
"음? 왜 그럼까, 카노?"
"...있다."
"네?"
"실마리."
카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붉은 끈을 주어 세토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아까까지 이치카가 하고 있던 붉은 끈이라는 것 정도는 세토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까 몸부림을 치다 리본이 풀려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실마리라는 의미가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토에게 카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세토! 그 히비야군 아지트에 있는 거 맞지?"
"네? 네, 맞슴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서 제 방에 눕혀놨슴다."
"그럼 됐어. 어서 가자!"
"넵!"
카노는 붉은 끈을 손에 놓지 않은 채, 세토는 업힌 타카네의 몸을 바로 업은 채 함께 아지트로 뛰어갔다. 어느새 떠오른 아침 해가 그 둘을 찬란하게 비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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