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하나]꿈을 보는 아이
아이라 X 하나리 첫 대면 이야기
* 해당 글은 '앙상블 스타즈!!'의 캐릭터 '시라토리 아이라'와 2차 창작 드림주 캐릭터인 '쿠로카와 하나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드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 혹은 '시라토리 아이라' 드림 연성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해당 글을 읽는 걸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해당 원작에 대한 스포일러와 개변한 서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원작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 작중 아이라와 하나리의 나이는 만 13~14세로 중학교 2학년입니다.
공백 미포함 8,043자
"흐아, 긴장돼!"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꾹 감았다. 여름인데도 손끝이 차가웠다. 손을 주물러 적당히 풀고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모니터에는 콘서트 티켓팅 대기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여름 페스티벌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아이돌이 총집합하는 꿈의 콘서트. 모처럼 학생회 일도, 경음부 연습도 없는 날짜에 겹쳤다. 마치 신이 콘서트를 가라며 등을 떠밀어준 것 같은 타이밍. 여기에 가기 위해 눈물과 함께 굿즈도 몇 개 보내면서까지 돈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정작 티켓팅을 실패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만전을 가하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PC방까지 왔단 말이야!
어떻게든 진정해보려고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이라도 빠른 컴퓨터를 쓰려고 게임석을 선택했더니 안내받은 곳은 웬 옷장 같은 곳이었다. 한 사람만 딱 들어갈 만큼 폐쇄적인 공간은 안정감을 주긴커녕 답답하기만 했다. 긴장에 목이 바짝 타서 드링크 바에서 딸기 우유도 가져왔지만, 결국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갈까 봐 거의 마시지도 못했다. 그냥 마음이라도 편하게 집에서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럴 순 없다. 차마 친구들한테 아이돌 오타쿠인 걸 드러낼 순 없어서 용병도 없이 나 혼자 강행 돌파해야 하는걸. 긴 한숨을 토해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자 하나는 참 폭신했다. 숨덕의 길이란 참 힘들구나. 외로움이 고개를 들 때면 스마트폰을 켰다. 습관적으로 SNS에 들어가자 긴장과 열정이 넘치는 타임라인이 나를 덮쳤다.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글들 속에서도 유독 한 닉네임에 눈길이 갔다.
[Love : 티켓팅까지 얼마 안 남았어! 너무 긴장돼! (ᗒᗣᗕ)՞]
내가 쓴 글인 줄 알았네. 피식 흘러나온 웃음과 함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딸기우유로 짧게 목을 축이고 가볍게 터치 화면을 두드렸다.
[Flower : 나도 너무 긴장해서 큰일이야! 손 떨려ㅋㅋㅋ큐ㅠㅠㅠ 러브 군 추천대로 PC방까지 왔으니 잘 되면 좋을 텐데!]
[Love : 앗, 정말로 PC방 갔구나? 집컴보다 그게 나으니까 분명 잘 될 거야! 힘내자아 ٩(ˊ〇ˋ*)و]
[Flower : 고마워! 우리 둘 다 티켓팅 성공하길! (*>∀<)爻(>∀<*)]
"우리 꼭 라이브 보자, 러브 군."
스마트폰에 하이 파이브를 하는 시늉을 하고, 스마트폰도 마저 예매 화면으로 바꿨다. 러브 군이 말했던 대로 모니터에는 브라우저 몇 개를 더 띄워놓고 서버 시간을 확인했다. 혼자 발 동동 굴린 탓인지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빨리 정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 5분만 시간을 더 줬으면 하는 마음이 반.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는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버 시간 잘 확인하기, 오류 떠도 당황하지 말기, 새로고침 하지 말고 무조건 기다리기, 빈 좌석은 보라색으로 통칭 포도알, 결제는 웬만하면 무통장입금... 인터넷에서 봤던 티켓팅 팁들을 중얼거리며 마우스를 꽉 잡았다.
"제발, 제발... 하느님, 부처님, 아이돌의 신님!"
아는 신, 있지도 않은 신을 다 모아 기도했다. 빨갛게 변한 서버 시간, 삑삑 울리는 카운트다운, 날 기다리는 3개의 창과 스마트폰. 침을 한 번 삼킴과 동시에 결전의 때가 왔다.
"가자!"
제발! 제발! 오른손으로 빠르게 브라우저 3개의 버튼을 따닥 클릭하고, 왼손으로는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그러자 꿈에도 그리던 좌석 선택 화면 대신 대기 순서만 연달아 떴다. 세 자릿수부터 다섯 자릿수까지.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동공이 다 흔들렸다. 이 사람들을 내가 뚫을 수 있을까?
"아냐, 괜찮아... 이 정도면 선방했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제일 대기 번호가 낮은 브라우저 창을 노려봤다. 곧이어 좌석 선택으로 바뀌고 잠깐의 틈도 없이 마우스를 마구 연타했다. 조금 욕심을 부려 스탠딩석을 클릭했더니 그 구역은 이미 보라색 하나 없이 하얀 상태였다.
"알겠어요! 욕심 버릴게요! 착하게 살게요!"
다른 구역을 다시 선택하는 몇 초가 너무 아까웠다. 무대 옆 좌석으로 가니 그쪽도 포도알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그리고 빠르게! 저 안에 내 자리가 있다고 믿으면서! 눈동자와 커서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좌석을 선택하고 차근차근 결제 단계까지 진행했다. 오류 메시지 하나 없이 생각보다 깔끔하게 예매가 끝났다.
"...됐나?"
아니, 사망 플래그 같은 말 하지 말자! 확인은 우선 나중에 하기로 하고 스마트폰으로 또 예매를 진행했다. 확인하느라 예매 놓치는 거보다는 뭐 하나라도 더 잡아두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불과 3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혼자 억겁의 시간을 느끼며 싸움을 계속했다.
"해냈다! 신님 감사합니다!"
좁은 방안에서 혼자 콩콩 뛰고 있으니 바로 옆좌석에서 시끄럽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벽 때문에 서로 보이지도 않는데 두 손으로 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의자에 뛰어들었다. 반동으로 의자가 뱅글뱅글 돌고, 손가락 사이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성공했다, 성공했어! 거기다 두 자리나!"
설마 꿈인가 싶어 다시 한번 모니터를 봤다. R석 중앙쯤에 하나, S석 좌측에 하나. 처음에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스마트폰이 오류로 튕겼을 때는 머리가 새하얘졌지만... 잠깐의 시련이었을 뿐, 아이돌의 신님은 날 버리지 않았다. 결제 완료까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절반 넘게 남아있던 딸기 우유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니까 싸구려일 게 뻔한데도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뒤늦게 허기가 올라왔다. 편하게 의자에 기댄 채 PC방 음식 메뉴를 구경하면서 스마트폰으로는 SNS를 들어갔다. 타임라인은 그야말로 희비 교차의 현장이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다들 울고 있다는 거 정도. 이 치열한 싸움에서 난 이긴 거구나. 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그 분위기에 탑승했다.
[Flower : 티켓팅 성공! 아쉽게도 스탱딩은 놓쳤지만... 그래도 신님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우리 애들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요!]
[Love : 제발 취소 표! 취소 표 떠라아! 취소 표 뜰 때까지 집 안 갈 거야!]
"어라?"
러브 군 실패했구나. 타임라인을 위로 올리며 몇 번 새로고침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취소표를 구하지 못한 것인지 계속 우는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신나서 흔들던 다리가 천천히 멈추었다. 의자에 기대어 눕자 의자가 삐그덕거리며 울었다. 표를 2개나 잡은 건 좋지만 사실 하나는 슬슬 취소할 생각이었다. 숨덕이라 이런 아이돌 취미에 어울려줄 친구도 없고, 양도는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되었으니까. 그래도... 슬쩍 러브 군의 계정에 들어가 보니 어느새 메인 게시물에 양도 구하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져 메뉴를 고르던 손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 콘서트는 상반기를 마무리한다는 취지에 맞게 신인부터 인기 아이돌까지 여러 아이돌이 출연한다. 아이돌이 많다는 건 그보다 몇 배로 많은 팬이 다 모여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경쟁률도 특히 치열했던 거고. 나중에 따로 편집해서 TV 방영도 한다고 했으니 표를 구하는 건 나 같은 아이돌 팬들. 거기다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얻은 것이니 웬만해선 표를 놓지 않을 거다. 그 말은 즉 취소표가 거의 없다는 것. 암표는 존재하겠지만 팬 의식이 뛰어난 러브 군은 그런 건 죽어도 사지 않을 거다. 아마 양도 글도 크게 기대하고 올린 건 아닐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일 게 분명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R석 하나, S석 하나. 몇 번이나 확인한 좌석은 변동이 없었다. 언제 취소해도 괜찮다는 듯 취소 버튼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양도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상에서의 돈거래는 언제나 떨리는 것이었고, 혹시나 생길 문제를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자연스럽게 커서가 취소 버튼을 향해 미끄러졌다. 마우스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 끝은 파르르 떨렸다. Love라는 네 글자가 눈앞에 어른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너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애초에 티켓팅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사실 처음에만 해도 아이돌은 싫었다. 언니랑 멀어진 계기였으니까. 그게 대체 뭐길래 언니는 그렇게 눈을 빛내다가 아이돌이 되어버린 걸까. 그게 대체 뭐길래 아이돌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온갖 관심과 기대를 받게 되는 걸까. 답답함과 호기심에 이끌려서 어렸던 나는 인터넷 세상을 헤매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아이돌과 그보다 더 많은 팬이 존재했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반짝임은 좋기보다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결국 나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지나가는 아무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건 뭐냐고, 뭐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냐고.
그때 대답을 준 게 러브 군이었다. 제각기 갈 길 바쁜 사람들 틈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아이돌의 Love한 부분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노래, 가사, 안무, 라이브, 그 외 활동들까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순히 뉴비니까 신나서 알려준 것 같지만, 그 친절은 내겐 무척 기꺼운 것이었다. 그제야 언니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고, 나도 그걸 좋아하게 되면서 행복해졌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를 얻게 되었다. 날 누군가의 동생으로 보지 않고 그냥 'Flower' 라는 이름으로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얘기해주는 친구를. 이번 티켓팅도 러브 군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가고 러브 군이 못 가는 게 말이 될까. 심지어 나보다도 더 아이돌을 좋아하는 애인데...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스마트폰을 잡자 손이 제자리를 잡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고민은 길었지만 보내는 메시지는 짧고 간결했다.
[Flower : 러브 군, 나 사실 좌석 하나 남는데 양도받을래?]
"이 정도면 되나?"
콘서트 준비물을 꽉꽉 채워 넣은 메신저백을 어깨에 걸친 채, 전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하얀색 무지 티셔츠는 청치마 안에 적당히 집어넣어 볼륨감을 살리고, 약간 비칠 정도로 얇은 카디건은 연노랑 빛을 띠어 색감을 더해주었다. 신발은 하얀 발목 운동화를 준비해두었다. 몇 번이나 만진 머리도 괜히 손으로 더 빗어 내리며 내 모습을 살폈다. 콘서트는 무조건 편한 복장이 최고라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주 멀리서라도 아이돌을 직접 보는 것이니 신경을 안 쓸래도 안 쓰일 수가 없다.
"그리고 러브 군도 만나기로 했으니까...."
러브 군과 알고 지낸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가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나는 이제야 오프라인 행사도 다니기 시작한 참이고, 러브 군도 누구랑 다니기보다는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았다. 같은 콘서트라고 해도 좌석 거리가 워낙 멀어서 원래라면 따로 갔을 거다. 원래였다면 말이다. 앞머리를 살살 빗어 내리며 티켓팅 당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Love : 양도해줘서 정말 고마워어 (*ˊᗜˋ*)/ᵗᑋᵃᐢᵏ ᵞᵒᵘ*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거든ㅠㅠ]
[Flower : 아냐, 항상 러브 군은 항상 날 도와줬잖아. 이번엔 내가 도움이 되어서 기뻐!]
[Flower : 그런데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
[Love : 응응, 뭔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들어줄게!]
[Flower : 나 콘서트에 직접 가는 게 처음이라 너무 걱정돼...ㅠㅠ 러브 군이랑 만나서 같이 들어가면 되게 든든할 것 같은데 안 될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직접 티켓팅해서 가는 콘서트가 처음인 거지만. 언니가 하는 라이브는 여러 번 간 적 있다. 그래도 그건 이번에 갈 콘서트만큼의 규모도 아니었고, 가족이라 따로 안내까지 받았었다. 이번은 아예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해야 하니 문제지. 거기에 러브 군이 함께 해준다면 무척 든든할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같이 아이돌 이야기도 하면 즐거울 거고.
"...솔직히 말하면 러브 군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본심은 이거다. 거절하려고 몇 번 말을 돌리던 러브 군도 결국 이 말에는 승복했다. 사실 자신도 내가 궁금하긴 했다면서. 나랑 똑같구나 싶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아이일까?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나와 동갑인 남자애라는 것밖에는 없다. 남자니까 나보다 키가 클까? 아니면 엇비슷하거나 작을까? 인상은 말투처럼 귀여울까? 의외로 카리스마가 있을지도? 여러 망상이 가지를 뻗고 나가자 고개를 저어 흩트렸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게 얼마나 상처 주는 것인지 무엇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괜히 기대를 부풀리지 말자. 명심하자. 누가 나오든 러브 군은 러브 군일 뿐이라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절대 티 내지 말자. 양 볼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두드리며 거울 속 나와 눈싸움했다. 언니와 닮은 눈매 속엔 언니와 달리 푸른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후 거울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뛰쳐나와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었다. 힘찬 인사말에도 텅 빈 집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Flower : 러브 군 어디야? 나 방금 굿즈 사고 나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ㅠㅠ!]
[Love : 나도 그 근처에 있어! 단풍나무? 그 아래에 있는데 혹시 보여어? 나 흰 반팔에 베이지색 조끼 입고 있어!]
"나무?"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가로수용인지, 벤치용인지 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긴 했다. 그 아래에는 나처럼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부터 벌써 굿즈를 교환하는 사람들도 꽤 모여 있었다. 저 안에 러브 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콘서트장엔 남자 팬보다 여자 팬의 수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니 아마 지금 이곳에 내 또래에 남자애가 있다면 그게 바로 러브 군일 거다. 그래도 혹시나 놓칠까 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러브 군을 찾았다.
"아."
그 아이를 발견한 순간, 마법처럼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도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예뻤다. 그게 그 아이의 첫인상이었다. 연한 금발 머리카락은 은은한 달빛을 닮아있었다. 그토록 센 바람이 불었는데도 직모인지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는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유독 앞머리 몇 갈래만 길게 눈보다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눈꼬리는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지만, 밝게 상기된 표정 덕분에 앳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났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고, 그 안에 자리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밝게 세상을 담았다. 주변에 있는 여자 팬들보다 키는 크지만, 꽤 말랐고 인상도 귀여워서 일순 여자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래도 헐렁하게 입은 옷으로도 보이는 체격은 확실히 남자아이였다.
뭐야. 엄청 귀여워. 나보고는 자기 모습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엄청나게 당부해놓고는. 솔직히 말해 나랑 같이 관객석에 있기보다는 스테이지 위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아이돌한테만 반응하던 내 심장이 뛰는 게 드디어 기다리던 인터넷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를 정도다. 차마 바로 다가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주변을 더 둘러보아도 나무 아래에 있는 남자아이는 저 아이뿐이었다. 이상하다. 매일 같이 인터넷에서 대화하던 아이인지 막상 마주하려니 왠지 말 걸기가 힘들다. 알고 지낸 지 2년이나 되었으면서 새삼스레 낯을 가리며 그 아이를 흘끔거렸다. 저 아이도 혼혈인 걸까? 주변 친구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인상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닌지 주변 팬들도 몰래 그 아이를 훔쳐보고 있었다. 보기만 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아이가 누가 말을 걸 틈도 주지 않으려 스마트폰만 보며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아. 그렇구나. 어쩌면 너도 나처럼 주변의 기대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돌 언니와 같을 것을 기대받고, 너는 그 혼혈 같은 외모에 어울릴 것을 기대받으면서. 사람들은 참 바보 같다. 조금만 생각해도 나랑 언니는 자매라 해도 전혀 다른 사람이고, 너는 혼혈이라 해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양손으로 뺨을 찰싹거리며 정신을 붙잡았다. 나오기 전에 분명 명심했잖아. 누가 나오든 러브 군은 러브 군일 뿐이라고. 얼마나 예쁘든, 혼혈이든 상관없이 저 아이는 내 친구야. 멋대로 저 아이에게 내 상상을 대입하지 마.
"좋아!"
주먹을 꽉 쥐어 스스로 각오를 불어넣고 총총거리며 러브 군 뒤로 다가갔다. 가시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다시 보니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친구한테 하듯이 평범하고 발랄하게 말을 걸었다.
"혹시 러브 군?"
내 목소리에 얼마나 놀란 건지 러브 군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러브 군은 홱 몸을 틀었다. 키 차이가 있어서 지그시 올려다보니 러브 군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우와. 가까이에서 보니 더 예뻐. 잠시만,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 교실에서 아이돌 얘기가 나와도 팬 아닌 척 가만히 버텼던 경험을 살려 침착하게 내가 Flower라고 밝혔다. 러브 군은 대답을 해주거나 웃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덩달아 입을 닫았다. 겨우 입꼬리만 올린 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고민했는데 이 아이가 러브 군이 아니라거나... 그러면 정말 쪽팔려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부탁이야!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줘! 간절히 빌면서 대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기울였더니 그 아이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 으응. 내가 러브야아..."
길게 늘어진 말꼬리에는 긴장이 투명하게 서려 있었다. 그제야 정말로 나랑 똑같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있지, 나도 엄청나게 긴장했어. 인터넷 친구를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네가 어떤 아이일지 정말 궁금했어. 반대로 날 보고 실망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어. 내가 네 기대와 다를까 봐. 또, 혹시나 날 보고 바로 그 아이돌 히나리의 동생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길 빌기도 했어. 내 소중한 친구가 나에게서 언니만 볼까 두려워서. 그래도 말이야, 나는... 하고 싶은 온갖 말들이 입 안에 굴러다녔지만, 꾹 참고 가장 먼저 말해야 할 말부터 꺼냈다.
"드디어 직접 만났네!"
기뻐, 널 만나서. 네가 내 생각보다 예쁜 아이여서도, 낯선 콘서트장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내 친한 친구와 만나게 되어서 기뻐. 이 마음을 목소리에 싣고, 표정에 담았다. 잘 전해졌을까. 그런 걱정은 러브 군이 사르르 웃는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무척이나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러게. 플라워 쨩, 만나서 반가워어!"
"우와아, 항상 SNS에서만 얘기하다가 직접 보니 엄청 신기해! 내 인터넷 친구는 AI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었구나."
"아하하. 뭐야, 그게~ 그보다 아직 시간도 남았는데 같이 밥부터 먹지 않을래? 콘서트는 체력이라구?"
"좋아. 아, 러브 군도 굿즈 샀다 그랬지? 혹시 트레카도 샀어?"
"당연하지! 콘서트 전에 트레카 깡은 안 하면 섭섭한걸!"
"나도, 나도 샀어! 같이 까보자! 이번에 슬로건도 엄청 예쁘게 나와서 눈물 날 것 같아. 이게 내 손에 있다니..."
"그래서 내가 콘서트 오는 게 제일이라고 그랬잖아아. 무대는 더 굉장하니까 벌써 울면 곤란하다구?"
언제 낯가렸다는 듯이 우리는 30cm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인터넷에서 평소 했던 것처럼.
돌아가는 지하철 안. 좌석이 가득 찼지만 생각보다 조용했다. 철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소리와 짐 같은 걸 부스럭거리는 소리 정도만 존재할 뿐이었다. 창 너머로는 어둑어둑해진 하늘과 이 시간까지 환하게 켜진 불빛들로 가득했다. 적막하다 못해 쓸쓸하게까지 느껴질 공간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눌러야만 했다. 콘서트가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귀가 윙윙 울려댔다. 마지막 단체 곡의 하이라이트는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 중이었다.
"...있지, 러브 군."
"응."
"나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아..."
"꿈만 같았지이..."
의미불명의 말을 흘려도 러브 군은 다 안다는 듯 받아주었다. 그야 그렇겠지. 함께 그 순간에 있었으니. 최고였다. 내 짧은 어휘로는 그것밖에 말할 수 없다. 몇 번이나 영상으로 본 무대인데, 심지어 그렇게 멀리 있었는데도 아이돌들이 자아내는 무대는 환상적이었다. 겹치는 화음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각 아이돌만이 가진 색채도 다양하고 화려했다. 우리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무대에 휩쓸려 가는 것밖에 없었다. 소리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팬 라이트를 흔들었다. 연달아 이어진 무대에 체력은 바닥이 났지만, 목이 쉬라고 외쳐야만 했다. 그 무대를 보고 있다고, 사랑한다고. 저 멀리 있는 아이돌들을 향해.
꿈 같은 시간이 끝나고 남는 건 너덜너덜해진 육신이었다. 콘서트장을 막 빠져나왔을 때는 흥분해서 이것저것 얘기하기도 했지만, 지하철에 엉덩이를 붙이니 뒤늦은 피로가 쭉 몰려왔다. 당연하겠지. 그렇게 뛰고 움직였으니... 내일 일어날 때면 온 근육이 비명 지를 게 뻔했다. 목은 이미 쉬어버렸다. 칼칼해진 목에 이온 음료를 들이부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길 정말 잘했다고.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아니, 몇 번이든 볼 수 있어! 온몸이 부서져도 보고 싶어!"
"나도! 표만 있다면 당장 내일 있을 콘서트도 갈 수 있어!"
"다음 콘서트도 꼭 가야지!"
"응! 다음에도 꼭!"
잠시만, 다음에도? 그 순간 짜기라도 한 것처럼 러브 군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가방을 꼭 끌어안아 얼굴을 살짝 가려버렸다. 표정은 감추고 진심 한 자락만 흘려보냈다.
"...저기, 다음에도 같이 볼래?"
"응? 아. 응! 좋아! 오늘 같이 봐서 너무 즐거웠어어."
"티켓팅의 신이 허락만 한다면..."
"거기선 둘 다 성공할 거라고 말해줘!"
콩트 같은 대화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응. 다음에 또 만나자. 인터넷에서든, 현실에서든. 콘서트는 끝났지만 꿈 같은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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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터... 1, 2회차 엔딩 스포
명령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선택지를 주는 태도. 그는 언제나 선택지가 주어지면 621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라, 전적인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어쩌면 월터,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이 그의 사명을 막아서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621, 그는 월터의 마지막 부탁과 상반되는 선택지를 골랐다. 코랄과 루비콘의 해방,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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