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의 다이어리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이는 풍경은 정말 가관이었다. 벽에는 위태하게 매달려있는 부서진 모니터, 바닥에는 각종 기기의 파편들. 그 사이 사이에 우리들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마치 길고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은 멍했고 몸 전체에 부유감이 일었다. 그 느낌을 곱씹으며 느리게 눈을 껌벅이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모두를 찾았다. 다들 하나같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눈으로 고개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도 필시 저런 모습이겠지.
각자 한 명씩 눈을 다 마주친 후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렸다. 난장판이 된 실험실 안이 순식간에 우리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각자의 모습이 웃겨서 웃는 건지, 아니면 드디어 모든 일이 끝나고 모두와 만나서 웃는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한참을 자지러지게 웃은 후에야 겨우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아지트로 돌아갈까."
키도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단장다운 모습이었다. 난장판이 된 실험실은 그저 무시해버리고, 카노가 타테야마 선생님으로 「속여」 고용된 사람들을 전부 물러나게 만든 후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처음 메카쿠시단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 함께 백화점 계단을 내려갔었지. 그때보다 사람이 훨씬 더 늘어났지만. 그게 겨우 이틀 전의 일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한참 전의 일인 것만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요 사흘간의 일 전부 믿기지 않는다. 전부 꿈인 것만 같다. 나와 같은 능력자를 만나서, 유원지에서 놀기도 하고, 카노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납치를 당하고, 죽을 뻔도 하고, 아지랑이 데이즈에까지 가서 아빠와 그녀, 아자미를 만나고 돌아오다니. 이게 불과 삼일간의 일이 맞는 걸까. 너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이 여름날을 반복했으니 몇 년, 아니 몇백 년의 일인지도 모른다..
아지트로 돌아가는 내내 이상하게도 다들 한마디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나처럼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 아지트에 돌아간 우리는 새삼스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돌아온 단원과 모습이 달라진 단원, 그리고 새로 들어올 단원이 있다면서. 카노가 장난스레 윙크하자 그 당사자들인 아야노 선배와 타카네씨, 하루카씨 그리고 히요리는 약간 쑥스러워했다. 그 모습이 내겐 어찌나 웃기던지. 능력을 써서 본 카노의 진짜 모습은 훌쩍훌쩍 울고 있었으니 말이다. 눈을 딱 마주친 순간 아직도 능력 쓰는 거냐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니 카노도 날 따라 못 본 체해달라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에 별말 안 하고 순순히 모른 척해주었다. 아마 카노 본인의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서일 테니까.
메카쿠시단의 자기소개는 역시 평범하진 않았다. 이름과 나이, 거기에 능력과 능력을 얻게 된 경위까지 단원 넘버 순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고, 모두 한마디, 한마디 귀 기울여 들었다. 모두 하나같이 끔찍한 이야기였지만 다들 그런 일이 있었지 같은 담담한 태도였다. 드디어 10번째인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런 담담한 태도로 막힘없이 술술 잘 말했기에. 날 멀어 떨어뜨린 에이토 오빠도 더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내 선택적 함묵적이 드디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 「눈이 맑아지는 뱀」에게 씐 히요리가 걱정이 되어 내가 능력을 써서 살펴보았다. 히요리의 안에는 확실하게 그 뱀 녀석이 있었지만, 눈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꼭 그대로 박제된 것만 같았다. 세토까지 능력을 써서 코노하씨한테 그랬던 것처럼 몇 마디 말을 붙여보았지만 세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뱀의 자아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거라는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뱀이 저 두 눈을 뜨면 히요리의 눈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내 의견을 반영하여 이번 방학 동안만이라도 내가 틈틈이 히요리의 상태를 봐주기로 했다. 생판 모르던 남이 여자아이의 몸속을 투시한다는 것이 미안해져서 히요리에게 사과를 했더니 히요리는 콧방귀를 흥 뀌더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사과하지 말라고 말했다. ...당찬 애다.
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날 나와 세토는 알바를 못 갔다. 솔직히 그때 알바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 뒤늦게 부랴부랴 각자의 점장님에게 못 간다는 전화를 하고 엄청나게 혼났다. 미리 말 안 하고 당일날, 그것도 몇 시간 전에 갑자기 펑크를 냈으니... 그 온화하던 점장님이 화를 내시니 정말 무서워서 나도 움츠러들고 말았다. 다행히 방학을 맞아 온 조카가 있어서 펑크는 메워진 모양이다.
그 후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야노 선배의 말로는 그 후 하나둘 픽픽 쓰러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것은 원래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었던 사람들뿐. 뭐, 그야 다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나와 카노, 세토, 타카네씨는 15일 밤을 아예 샜으니...
그때의 꿈에 또 엄마가 나오셨다. 나와 같은 검푸른 머리에 흰색 드레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늘 쓸쓸하고 서글펐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날따라 유난히 온화하고 생기있어 보이는 엄마는 또 입을 여셨다.
「이치카」
그때 난 처음으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척이나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셨다.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정말로 고마워.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건강하고 너답게 살아 가주렴. 엄마가 언제까지나 너의 곁에서 널 도와주며 힘이 되어줄게.」
엄마는 처음으로 밝게 웃으셨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반한 이유는 바로 미소가 예뻐서라고 하셨는데. 일어난 후에도 엄마의 미소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대었다. 꿈속에서나마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아 기뻐서 살짝 웃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왜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내 뱀의 목소리와 좀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내 뱀이 아니라 내 목소리와 비슷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8월 13, 14, 15, 16일 동안 있었던 일이다. 이제야 오늘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네. 4일 치 일기를 몰아서 쓰다 보니 손가락이 아프다. 엄지와 검지 사이, 펜이 닿는 부분은 아예 빨갛게 변해버렸다.
8월 17일. 오늘은 메카쿠시단이 매우 바쁜 날이다. 타테야마 선생님의 사망 신고도 해야 하고, 눈이 맑아지는 뱀의 실험실도 처리해야 하고, 아야노 선배나 하루카씨, 타카네씨는 사망한 거로 되어있으니까 그것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히요리는 사망은커녕 실종 신고도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사망 신고 같은 경우에는 오늘 새벽에 키도와 타카네씨, 정확하게는에네가 어떻게 한 모양이다. 자세한 건 말 안 해주었지만 아마 키도가 눈 가리기를 한 채에네를 데리고 공공기관에 잠입해 정보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
...엄연한 범죄행위네. 물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을 계속 죽은 사람으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위험하지 않았냐고 묻자 키도는 잠시 생각하다 지금까지 들킨 적이 없었으니 괜찮을 거라 답했다. 그러고 보니 메카쿠시단은 경찰의 눈을 피해 이것저것 한다고 그랬던가. 새삼 메카쿠시단이 어떤 단체인지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실제로도, 서류상으로도 살아있는 아야노 선배가 오늘 타테야마 선생님의 사망신고를 하러 가기로 했다. 정보는 조작했어도 사람들의 기억까지 조작한 것은 아니기에 아직은 위험하다며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아야노 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아빠의 사망신고만큼은 장녀인 자신이 하고 싶다고 말했기에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아마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사망 신고를 한 뒤 뱀이 남긴 돈으로 업체를 불러 뱀의 실험실을 치우게 하고, 실험실과 타테야마가(家)가 살던 집까지 팔아버리기로 했다. 이 또한 아야노 선배의 결정이었다. 타테야마가의 집까지 팔아버리겠단 말에 모두가 놀라며 말렸지만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 집은 더는 아야노 선배가 알던 그 집이 아닐 테니까. 집의 모습은 예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부모님이 없고 심지어 동생들마저 오랜 시간 떠나있었던 그 집에서 이젠 예전과 같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아빠가 죽은 후 큰아버지 댁에 입양되면서 내 짐을 그쪽으로 옮기기 위해 집에 돌아갔을 때 나는 큰 공허함을 느꼈었다. 분명 내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고 일어나서 생활하던 그 집인데 아빠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집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모습은 그대로니까 자꾸 추억이 생각나서 짐 옮기는 것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뛰쳐나왔었다. 아마 아야노 선배도 그런 상황을 두려워해 피하는 거겠지...
그 집을 파는 대신 아지트가 있는 건물을 통째로 사들이기로 했다. 지금의 아지트는 1층까지 밖에 없었는데 앞으로 아야노 선배도 같이 살아야 하고, 여름방학 동안 히비야와 히요리가 머물 곳도 필요하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은 다름 아닌 키도였다. 기쁨이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나던 키도가 아직도 생각난다. 들뜬 표정을 가라앉힐 생각도 못 한 채 키도는 나에게 나도 어차피 혼자 살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해왔다. 그에 나는─』
[다음은 ○○역, ○○역입니다.]
기차 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이치카는 거침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어느새 자연과 건물이 적절히 섞여 있는 도시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치카는 잠시 꺼내놓았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방에 집어넣으며 빠진 것이 없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넣어야 할 물건이 일기장 하나만 남았을 때, 이치카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펜을 놀렸다.
『그에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하루카씨와 타카네씨와 마찬가지로 나에겐 따로 가족이 있었고, 현재 사는 집은 큰아버지 부부의 명의로 되어있어 나 혼자 정할 수 없었다. 사실 키도와 아야노 선배가 오늘 건물 매매에 같이 가자고도 권했지만 그건 확실히 거절했다. 심지어 염치 불고하고 알바까지 빠졌다. 어딜 갈 생각이냐는 단원들의 말에 웃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꼭 하야만 할, 개인 임무가 있어.」
그래, 꼭 해야만 한다. 더는 그 여름에 얽매이지 않고 진짜로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이치카는 마침표를 찍고선 두꺼운 일기장을 소리 나게 덮고 크로스백 속에 넣었다. 점점 속도가 느려져 가는 기차 안에서 조금 휘청거리며 일어난 이치카가 기차역에 내리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이치카예요. 방금 역에 도착했어요... 네. 그럼 이따 뵐게요."
이치카는 사람들 사이로 사뿐사뿐 발을 내뻗었다. 아직도 더위를 머금고 있지만, 한결 시원해진 바람이 이치카의 검푸른 머리카락과 옷을 흔들며 지나갔다.
건물 밖 화단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아직 8월이라 덥긴 하지만 새벽에 비가 내린 덕에 더위가 한풀 꺾여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조금 우울했던 기분을 덜어주었다. 멀리서 어제 이곳에 왔을 것이 분명한 적란운이 쾌청한 하늘 위에 떡하니 걸려있었다.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이온 음료를 홀짝거렸다. 그리 덥지도 않은데도 무척이나 목이 탄다.
아아, 기어코 오다니 나도 참... 새해 때 한 번 얼굴 비친 후론 안 왔으니 약 8개월만인가. 정말 오랜만이네. 눈을 감았다가 뜨고 친부모님과 양부모님이 만든 기업의 본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내가 있던 건물에서 신축과 리모델링을 계속한 결과, 현재 내가 사는 도시에 있던 백화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용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새삼 이 기업을 운영하고 계신 부모님이 존경스러워졌다.
부모님과는 방금 대화를 마치고 나온 참이다. 어머니에게만 연락을 드렸었는데 막상 이사장실로 들어가니 아버지도 계셔서 깜짝 놀랐다.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드신 아버지. 아버지의 위에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봤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빠가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딱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형제로 이어진 두 사람은 제법 닮아있었다. 어머니가 타주신 차를 마시며 정말 오랜만에 가족답게, 일반 가족과는 조금 거리가 있겠지만 대화를 나누었다. 주 주제는 내가 현재 사는 곳에서 나와 친구들과 같은 건물에 함께 살아도 되냐는 거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되진 않았다. 그야 갑자기 친구들과 동거를 하겠다 했으니 반대하실 수밖에. 거기에 남자도 있으니. 어머니, 아버지는 혹시나 내가 나쁜 친구들을 사귄 것은 아닐까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보셨지만 내가 열심히 설득하자 그 눈초리는 풀려갔다. 그래도 역시 허락은 하실 수 없다고 하셨지만, 마지막에 두 분이 하신 말에 나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많이 밝아졌구나, 이치카. 좋은 친구들을 사귄 것 같네.」
「그렇지만 왠지 네가 점점 우리에게 멀어지는 것 같구나. 예전부터 우리와 거리를 두긴 했지만 이젠 완전히 독립해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너도 어엿한 우리 딸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두 분은 살짝 웃으시며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다. 결국은 허락하실 것을 나는 안다. 두 분은 나에게 무르시니까. 그건 친아빠를 잃은 이 아이를 우리가 잘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누가 우리 아빠의 형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오랜만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며 먼저 집에 가 있으라 했지만, 나는 건물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지금 부모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오려면 아직 멀었나 싶어 후드를 뒤집어쓰고 능력을 써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건물 속에서는 컴퓨터 작업을 하는 사람, 뭔갈 들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 잠시 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쭉 살펴보던 내 시선이 한 사람에게 멈추었다.
8개월 만의 재회. 솔직히 8개월 전에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거의 눈을 마주친 적이 없으니 실질적으로 얼굴 안 본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래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주 어엿한 사원이 되어있는 게 조금 낯설었지만 찬찬히 보면 아직도 그때의 얼굴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앞에 있던 사람에게 꾸벅 묵례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한숨에 남은 음료를 다 마시고 캔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캔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청량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나도 가볼까."
전쟁 아닌 전쟁이다.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 나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동문 너머로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고 있는 그 사람, 6년 전 날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린 에이토 오빠가 보였다.
"오랜만이야, 에이토 오빠."
내 눈과 에이토 오빠의 시선이 얽히고, 내 목소리 위에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겹치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후텁지근하기만 했던 공기가 한층 무겁고 날카롭게 바뀌었다. 자동문이 건물 안과 밖을 자비 없이 갈라놓자 나와 에이토 오빠만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곳에 고립된 것만 같았다. 그런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우린 그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눈치 게임 하는 것도 아닌데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에이토 오빠 눈 위에는 내 모습이, 내 눈 위에는 에이토 오빠의 모습이 비쳤다.
정말로 오랜만에 본 에이토 오빠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친근했다. 키도, 체격도, 분위기도 5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다. 부모님에게서 에이토 오빠가 우리 기업의 사원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막상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진갈색의 차분한 머리와 얼굴에서는 그때, 에이토 오빠가 중학생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특히 저 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저 눈은 아주 그대로였다.
"...네가 왜 여기에."
"...하."
실소가 흘러나왔다. 만나고 처음 하는 소리가 저거라니.
"시라키가의 딸이 시라키가에 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여지껏 연락 없이 온 적 없었잖아."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온 거야.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회사에 찾아갈 정도로 예의 없이 자란 기억은 없거든."
에이토 오빠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부모님이 자신에게 아무 말 없던 것에 속으로 원망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 결국 지금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신의 행태 때문에 부모님이 말 안 했다고 생각할 테지. 내가 일부러 부모님께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다. 에이토 오빠는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굳이 반듯한 넥타이를 매만지고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갈 때 본 넥타이는 괜히 만진 탓에 비뚤어져 버렸다.
"어디 가?"
"일하러."
"나한테서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에이토 오빠의 발걸음이 한순간 멈칫했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뒷모습임에도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뭐, 아무렴 어때. 애초에 발길 한번 묶으려고 한 말이고 저 사람이 기분이 어떻든 내가 크게 신경 쓸 바 아니잖아. 나는 발을 크게 뻗었다. 성큼성큼 걸어갈 때마다 내 눈의 온도는 점차 높아져 갔다.
"내가 아직도 「괴물」로 보여?"
붉은 눈. 내가 정말로 싫어했던 이 눈으로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눈으로 이 사람을 꼿꼿이 바라보는 건, 아니 그날 이후로 이렇게 직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다는 듯 조용해졌다.
"허..."
이 능력을 얻게 된 이후 처음으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경멸과 혐오로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어른이라고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날 밀어 떨어뜨리고는 웃었던 주제에.
어이가 없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내가 고작 이런 사람을 무서워하며 피했던 거란 말인가.
그런 눈 하지 마.
기분 나빠.
역겨워.
내가 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혐오의 말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양 목 언저리에서 꾸물거린다.
"왜... 그랬어?"
실제로 튀어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두려움과 죄책감밖에 없던 그의 눈에 놀람이 퍼져나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놀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나는. 들어서 뭘 하려고. 듣는다고 해서 그때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이 사람은 변명을 늘어놓을 게 뻔하잖아. 대체 왜─
"그땐..."
에이토 오빠가 느리게 입을 뗐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건만 말할 각오를 굳힌 눈을 하고 있었다.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때 그건... 사고였어. 악의가 있었던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우발적으로 그만..."
"...사고?"
"중2 때 내 성적은 진짜 말도 안 되게 떨어졌었어. 지금 생각해도 사상 최악의 점수였지. 나는 장차 시라키가를 이끌어야 하는 후계자인데 이딴 점수라니... 처음으로 내게 호통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
"...그래서? 그래서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든 4살 아래의 동생을 옥상에서 민 거야? 반 1등 했다며, 아빠가 칭찬해주시겠다며 웃고 있던 여자아이를?"
"...난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게다가... 옥상 난간이 그렇게 간단히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 그랬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에이토 오빠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냉소가 지어졌다. 아마 저 말이 사실일 것이다. 내 두 눈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요새는 묻지마 살인이 있기도 하고, 진짜 별의별 동기로 살인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에이토 오빠의 동기 또한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거기다 그때 당시 에이토 오빠는 내가 그랬듯이 진짜 온실 속의 화초이자 착한 아들의 표본이었다. 안 그래도 정서가 불안정한 중2 때 부모님께 처음 혼났으니 충격이 클 만도 하지. 거기다 욱해서 민 것 정도로 사람이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머리로는 이해한다. 머리로만.
"나도 알아.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그날 바닥에 추락한 너를 보고 번쩍 정신이 들었어. 미쳤구나. 내가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 뭔가를 해야 하는데 뭘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전화를 했던 거야."
"전화? 누구한테?"
"...작은 아버지에게."
"아빠?!"
전화를 했었다고? 아빠한테? 그런 얘긴 들은 적도 없는데? 얼굴 위의 냉소는 어느새 사라졌었다.
"내가 떨어졌다고 아빠한테 말했었어?"
에이토 오빠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내 입에서 새어 나갔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신 거였어. 과격 운전은 절대 하지 않으시던 아빠가 갑자기 차량 전복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평소 차분하신 아빠가 흥분해서 차량을 전복시킬 정도의 난폭한 운전을 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란 걸. 그리고 아빠가 그러실 이유에는 나밖에 없지. 딱 하나밖에 없는 딸인 나. 에이토 오빠의 전화를 받고 내가 걱정되어서 아빠는 앞뒤 안 가리고 엑셀을 밟으시다가 돌아가신 거였어.
"나도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되실 줄은 몰랐어! 고의가 아니었다고! 난... 난 그냥..."
"됐어. 그만 말해."
"네 그 붉은 눈을 볼 때마다 피가 튀어 오르던 너와 그 때문에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가 생각나서 차마 볼 수가 없었어... 난..."
"그만 말하라니까!"
"미안─"
"─사과하지 마!!! 그딴 사과 한마디로 무마시키려 하지 마! 사과해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잖아! 내 눈도, 아빠의 죽음도! 그리고 뭐? 제정신이 아니었어?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결국 오빠는 하나도 반성 안 하고 있는 거잖아!"
아, 이런. 너무 흥분해버렸다. 공격적인 말들이 여과 없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 날카롭게 오빠를 찔러댄다. 안돼. 기다려. 멈춰. 이러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이런 폭력적인 말을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사과 한마디로 끝낼 생각 마! 난 절대 오빠 용서할 생각 따윈 없─"
"─이치카 아가씨?"
팔을 잡으며 날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딱 보니 카노가 붉은 눈을 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내가 더위를 먹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었다. 정말, 진짜, 엄청나게 놀라버려서 말도 못 하고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카노는 살짝 윙크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쉿 소리를 했다. 자신에게 맞기고 조용히 있으라는 뜻? 능력을 풀자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건장한 성인 남자가 보였다. 아, 과연. 이렇게 속이고 있었구나.
"그만하시고 이만 가시죠."
"아, 네. 알겠어요. 미안해, 에이토 오빠 그만 흥분해버렸네."
"...아니. 괜찮아. 그보다 못 보던 사람 같은데?"
에이토 오빠는 의심의 눈초리로 카노를 쳐다보았다. 하여간 직장인 아니랄까 봐 눈치도 빨라. 잠깐 능력을 쓰고 카노를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회사 사람인 줄 알고 이 모습으로 속인 건데 못 보던 사람이라고 하니 당황할 수밖에. 그렇다고에이토 오빠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고... 뭘 자신한테 맡기라는 거야. 어설프잖아, 카노. 아까 엄청 자신만만했는데 좀 쪽팔리겠다. 속으로 작게 키득 이며 표정을 바로 했다. 기껏 도와주려 한 건데 수포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야 당연히 못 보던 사람이겠지. 날 여기까지 데려다준 운전 기사분이시니까."
"운전기사? 부모님께서 부르셨어?"
"응. 항상 본가로만 왔지 역에서 바로 회사로 오는 건 처음이라 길을 잘 몰랐거든. 알다시피 내가 여기 오랜만에 오잖아. 아, 시간 끌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요."
"네, 그럼..."
에이토 오빠에게 까딱 고개를 숙인 카노는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데려온 운전기사라는 설정이니 앞서서 길을 안내하는 척하려는 거구나. 의도는 눈치챘지만, 곧바로 따라가지 않고, 에이토 오빠 바로 코앞에 섰다. 내가 에이토 오빠 쪽으로 손을 뻗자 오빠는 깜짝 놀라며 반 발짝 물러서려 했다. 하여간에... 날 뭐로 보는거야. 역시 아직도 무서워하고 있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담히 넥타이를 매만져주었다.
"넥타이. 삐뚤어졌었어."
"어? 어... 고, 마워?"
"그리고 이건 선물. 생일 축하해, 에이토 오빠."
멍청한 표정으로 내가 손에 쥐여준 것을 꽉 잡고 있는 에이토 오빠가 너무 웃겨서 피식 웃음을 새어 나왔다. 아, 진짜... 내가 겨우 저런 사람 무섭다고 피해 다녔던 건가. 지금 생각하니 너무 분하네.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 카노 옆에 서서 등을 돌린 채 손을 두어 번 흔들어주었다. 아직도 멍청하게 내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을 에이토 오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이좋게 주차장으로 온 우리들은 사람들 시선을 피해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제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노는 후드를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이야~ 한순간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분명히 이 회사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쨌든 나이스 서포트였어, 시라키쨩."
"뭘, 그 정도 가지고. 오히려 이 회사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그 사람은 계속 에이토 오빠랑 마주칠 테니까."
"...그 에이토 오빠라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지? 그... 8월 15일 날 시라키쨩을..."
"응. 나 밀어 떨어뜨렸던 사람이야."
조심조심 말하는 카노의 말을 낚아채서 내가 대신 이어주었다. 그러자 카노는 아까 내가 그랬듯이 놀라서 눈만 껌벅였다. 후후, 이상한 표정.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러게.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에이토 오빠란 말조차도 말하기 힘들어했었는데... 그런데 막상 이렇게 저 사람과 직면하고 나니까 뭐랄까, 무서워하며 피했던 게 바보 같아졌어."
"잘됐네, 시라키쨩."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어? 기차표 비쌌을 텐데?"
"비쌌지~ 덕분에 내 용돈이 거의 바닥나 버렸어...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키도한테 돈 받을 걸 그랬네. 키도가 아무래도 네가 걱정된다고 따라가 보라고 해서 온 거거든."
"본심은?"
"...제가 신경 쓰여서 따라온 겁니다."
능력을 쓰고 협박하듯이 노려보자 카노는 상사한테 지적받은 신입처럼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웃기던지. 나는 참지 못하고 푸흐흐 웃고 말았다. 카노는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멋쩍게 뺨을 긁적거렸다.
"약간 스토커가 생긴 기분이네."
"스토커라니... 나라도 상처받는다구?"
"후후, 미안해. 그리고 아깐 고마워. 안 그래도 너무 흥분해버렸다고 생각한 참이거든."
"뭘 그 정도로. 그런데 아까 그 사람한테 줬던 선물은 뭐야?"
"탄산 단팥죽이랑 농후한 다시마 맛국물·남자의 간식."
"엑."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정도 심술은 괜찮잖아?"
'그치?'라며 동의를 구하자 카노는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렸고 나도 카노를 따라 웃어버렸다. 우리 둘의 웃음소리가 주차장 한쪽에서 알게 모르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잠시 웃다가 같이 에이토 오빠의 미각에 명복을 빌어준 후, 사이좋게 천천히 거닐었다. 우리 둘 사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태양 빛은 아직도 뜨겁고,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매미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 와중에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들뜨고 만다. 기분을 감추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카노가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요?"
약간 농담조로 편의점에서 처음 카노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을 하니 카노는 풋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미안해요. 그게 기분이 좋아 보이네, 라고 생각해서."
"후후, 기분 좋긴 해. 이걸로 진짜 모든 게 마무리된 것 같아서 후련해서 그런가. 아, 그렇지만 너희랑 같이 사는 건 부모님께 반대당했어. 한번 생각해보시겠다고는 했지만."
"그야 딸을 외지에 둔 부모님으로서는 그게 당연한 반응이시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쩔 거야? 난 부모님과 저녁 먹기로 해서 하룻밤 자고 내일 돌아가게 될 것 같아."
"에엣?! 그럼 나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
"응. 나 때문에 온 거니까 돌아갈 기차비는 대줄게. 부모님께 생활비 받고 알바도 해서 제법 여유 있어."
"으음~ 귀가 솔깃한 제안이긴 하지만 괜찮아! 나도 돈 정도는 있다구?"
"용돈 거의 바닥나버렸다며?"
"나라도 비상금은 있답니다~"
자신만만하게 손으로 브이를 그리던 카노는 이내 검지를 입 쪽으로 가져다 대며 키도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덧붙였다. 순순히 그렇겠노라고 하긴 했지만 어째 나와 카노 둘의 비밀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아야노 선배 무덤 앞에서 펑펑 울었던 거나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카노가 혼자 훌쩍이고 있었던 거나. 가만 생각해보니 거의 카노 쪽의 비밀이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카노는 급히 다음 기차 시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도 대도시라 기차가 자주 있긴 하지만, 우리가 타고 온 기차가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남은 모양이었다. 조금 곤란해하는 카노의 얼굴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둘만의 비밀 하나쯤, 더 늘려도 상관없겠다고.
"있지, 카노."
"응? 왜 그래, 시라키쨩?"
"한가하면 나랑 어울려줄래? 여기 온 김에 노트북도 사고 싶고, 나도 그냥 본가에 가서 부모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건 싫으니까."
"그럼 나야 좋지! 그건 그렇고 그거 혹시 데이트 신청이야, 이치카쨩?"
"..."
나와 카노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뭐라 할 타이밍을 놓쳐서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무심코 능력을 써버리니 당황한 표정으로 한껏 붉어져선 당황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노가 보였다. 좀 귀엽네. ...응? 방금 나 뭐라 했니?
"...미안, 방금 거 취소."
"카노 너... 아직 능력에서 못 벗어나는구나."
"그야 몇 년 동안 항시 쓰고 있었으니까. 그것보다... 아아-!!! 아까 건 실수니까 잊어줘!"
카노는 오른손을 마구 휘저어대며 왼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붉은 기색이 엿보여서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평소의, 즉 「속일 때의」 카노라면 저런 대사를 날려도 능글스럽게 넘겨버렸을 텐데 저렇게까지 속이지 못하고 있다니... 카노가 아직도 완전히 자신의 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괜찮다.
뜨겁기만 한여름 날씨에서 서서히 선선한 가을 날씨로 변하듯이 카노도, 우리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바뀌게 될 테니까. 이제 우리에겐 시간은 많다. 조급해할 필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부끄러워할 필요 역시.
나는 두 눈을 붉게 한 채 카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끌러내렷다. 붉어진 얼굴과 달리 머리칼과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역시 지금은 속이고 있지 않네. 다행이다. 그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는 거야. 나 역시 능력을 풀고 내 본연의 눈동자로 카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어서 가자, 슈우야."
"읏!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다니 놀랐잖아!"
아, 실수. 카노 눈 대신 얼굴이 더 빨개져 버렸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먼저 이름 부른 건 네 쪽이잖아. 아까 「이치카쨩」이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치카 아가씨라고 불러서 그런가, 그만."
"신타로씨랑도 이런 식으로 서로 편하게 부르기로 했었어."
"...신타로군이랑도?"
"응. 왜 네가 모모 모습으로 속인 채 한밤중에 아지트에 왔던 날 있었잖아. 그때 이야기하다가 신타로씨가 실수로 이치카라고 했었거든. 그래서 나도 그냥 신타로씨라고─슈우야?"
"아, 미안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가자."
카노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딱 봐도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능력으로 갑자기 모습을 바꿨다는 게 그 증거잖아. 찬찬히 방금 대화를 되짚어 보지만 딱히 카노 기분이 상할 만한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대체 뭐지? 뭐 때문에 저러는 거지? 혹시 지금 감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다시 눈을 붉게 물들였다.
─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매미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하며 더위를 머금은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따라 나뭇잎들이 쏴아 소리를 냈고, 내 머리카락과 카노 머리카락, 내 옷자락과 카노 옷자락 또한 휘날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카노의 모습에는 믿을 수 없는 감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놀란 심장이 매미 소리에 맞추어 쿵쿵 뛰었다.
"어라? 이치카쨩, 왜 그래?"
"어? 아, 아니 아무것도. 그냥... 그, 아까 에이토 오빠한테 부모님이 운전기사를 불렀다고 거짓말했었잖아. 에이토 오빠가 부모님께 확인 전화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만약 그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부모님한테는 딱히 둘러댈 말도 없고."
"으응. 그러니까 에이토 오빠한테 아까 만난 일은 비밀이라고 못 박아두려고. 그럼 못 물어보겠지."
서둘러 능력을 풀고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에이토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애써 평정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당황하고 있어서 문자를 치는데 손이 약간 떨렸다. 카노에게 말한 대로 아까 만난 일은 비밀이라는 짤막한 내용만 보내고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아직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아까 카노에게 보인 감정은 「질투」였다. 아니, 질투라니 왜? 다른 감정들도 많은데 왜 하필 질투인 거지? 혹시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다시 능력을 쓰고 몰래 카노를 흘낏 보았다. 솔직히 질투는 처음 보는 감정이라서 잘못 봤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건만 아까랑 전혀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애써 억누르고 있지만, 속이 약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 처음 보는 감정이었지만 이건 분명 질투였다. 그 외 다른 것이라고 하기에는 적절치가 않다.
그렇지만 질투라니. 대체 왜 어디서 질투를 느낀 거지? 아까 대화는 분명─
"아."
신타로씨랑 먼저 서로 이름 부르기로 한데다가 자기 자신과 그 과정이 비슷해서 질투한 건가? 그렇다면 카노는 설마 나를─
─갑자기 훅 더워졌다. 열을 한가득 머금은 피가 빨라진 심장 박동에 따라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다시 발걸음을 멈춘 나를 카노가 또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도저히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카노와 마주치는 순간 아지랑이가 돼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표정 관리는 특기라고 할 만큼 자신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만 특기도 뭣도 아니었다. 주변으로부터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랑 한 번 못해본 소녀 한 명이 처음 느낀 제 감정을 어찌할 줄 몰라 서 있을 뿐이었다.
진정해.
진정해!
마음속으로 이 말을 속사포로 외쳐대었다. 내 습관인 자기 암시. 평소에 이러면 쉬이 진정되곤 했었는데 제발 이번에도 돼라. 제발!
"...이치카쨩?"
"아, 미안해. 여기 오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을 더듬고 있었어. 가만 보자. 백화점이 이쪽이었나?"
카노가 시선에서 도망쳐서 앞서 걸어 나가 버렸다. 어떻게든 얼버무려버렸지만, 자기암시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아직도 심장은 뛰고 카노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이 상태였다간 카노의 의심을 더 사고 만다. 어떻게든 진정해야만 해!
자자, 침착해져라. 시라키 이치카. 그냥 착각일 수도 있잖아. 질투는 처음 보는 감정이기도 하고, 질투라는 게 꼭 이성 간의 사랑을 전제로 생기는 감정은 아닐 거잖아? 그... 친구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을 거야. 예를 들어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다른 친구랑 더 친해 보이는 모습을 봤다든가. 그렇지? 자, 그러니까 어서 진정해. 너답지 않게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지금까지 고백받은 적도 몇 번 있었잖아? 그때마다 늘 침착했으면서, 게다가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설마."
"이치카쨩!"
카노가 날 부르며 내 손목을 잡아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빨라졌던 모양인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카노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해져서 시선을 피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괜찮아?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 혹시 아까 그 사람 만났던 거 때문에 그래?"
"어? 아, 아니. 그냥... 미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걸~ 덥지 않아? 카페라도 갈래?"
"...응."
카노는 내 대답에 싱긋 웃고는 내 손목을 끌며 천천히 근처에 있는 무난한 카페로 걸어갔다. 잡혀있는 손목이 너무나도 뜨거웠지만, 뭐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카노가 이끄는 대로 그냥 걸어가기만 했다. 생각하는 걸 그만하기로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상한 수렁을 스스로 파서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으으... 내가 이런 생각 했다는 거 카노에겐 절대 비밀이다. 아무리 둘만의 비밀을 늘린다고 해도 이런 거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페에 들어가서 뭐 좀 마시고 나면 진정되겠지? 그 후에 이 상황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 스쳐 지나가며 본 가게의 유리창에는 귀가 새빨개진 내가 비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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