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서머타임 레코드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미친 짓을 하는 뱀에게 붙어있는 게 싫어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비척비척 걷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해있었다. 뱀은 아주 자연스럽게 잠금을 풀고는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애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은 열어놓고. 나 자신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문이 닫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 안쪽은 실로 거대한 방이었다. 이 층 전체를 방 하나로 만들었는지 다른 벽이나 문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거대한 컴퓨터와 각종 기기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 면의 벽에는 수십 개의 모니터가 박혀 이 건물 곳곳의 모습과 각종 그래프를 보여주고 있었고, 바닥에는 저 모니터들을 제어하는 거로 추정되는 무수한 본체와 키보드, 그리고 타카네씨가 들어있던 수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방의 끝에서 끝까지, 바닥에서 천장까지 곳곳에 자리매김한 기계들의 행렬. SF 영화에서나 볼 듯한 풍경에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옆에서 뱀이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뱀은 날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중앙에 있는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나 같은 건 이제 신경 써서 막을 필요까진 없다는 건가.

고개를 들어 중앙의 가장 큰 모니터를 바라봤다. 거기엔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메카쿠시단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키도, 세토, 카노, 마리, 모모, 타카네씨, 신타로씨, 히비야에 코노하씨까지. 나를 구하러 모두 다 여기에 와주었구나. 따뜻한 우유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따갑기도 했다. 모두가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도망칠까

문은 열려있고, 모니터로 애들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다. 며칠 무리를 한 탓에 힘이 좀 없긴 하지만 다리는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뱀의 붉은 시선은 나에게 꽂혀있었다. 도망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몸을 굳게 만들어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게 고작이었다.

한편으로는 도망쳐도 소용없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엔 건물 곳곳을 보여주는 모니터와 뱀이 고용한 사람들이 있다. 뱀이 모니터를 보고 우리 위치를 고용인들에게 알려주면 우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설사 키도의 능력을 이용해서 운 좋게 여기서 벗어났다고 해도 뱀의 입김은 널리 퍼져있는 데에 반해 우린 이 도시 외에는 갈 데가 없다. 즉, 우린 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

"젠장..."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뿐.

아냐, 아냐. 침착하자.

이런 부정적인 사고는 좋지 않아.

백화점 때도 죽을 거라고 비관적이긴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잖아.

괜찮아. 분명 어떻게든 될 거야.

난 혼자가 아니야.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며 나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왔군."

귀에 꽂혀 드는 뱀의 말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메카쿠시단이 내 눈앞에 있다.

"얘들아!"

나를 발견하자마자 모두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달려왔다. 걱정했다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나를 안아주는 아이들의 온기는 아플 정도로 따스했다.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다시 애들을 만나서인지, 이 이후에 벌어질 일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이 애들과 헤어지는 것은 싫었다. 특히 잔인한 방법으로, 강제적으로 헤어지는 것은 더더욱. 나는 모두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손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렸지만 두 눈만은 또렷하게 목표를 째려보았다. 그와 같은 붉은 눈으로.

"자, 모든 배우가 왔으니 이제 슬슬 막을 올려보도록 할까."

뱀은 고고하게 다리를 꼬며 즐겁게 말했다. 능력을 써서 더 생생히 「즐거움」을 봐서 그런가,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우린 막 따위 올릴 생각 전혀 없어."

"일단 저 수염 아저씨 한 대 때리고 퇴장해볼까?"

"히요리! 히요리는 어디 있는 거야!"

"시끄럽군."

탕-

무미건조한 총소리가 우리들의 귀를 할퀴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기세등등했던 우리들의 기세가 단숨에 수그러지며 모두 입을 닫았다. 총소리의 영향으로 윙윙- 울려대는 귀울림은 내 비명을 대신 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그럼 우선 서막부터."

말과 동시에 뱀의 등 뒤에 있던 가장 큰 모니터의 불이 켜지더니 거기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하지만 개성 있는 그림체로 만들어진 단편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실제 인물이 주인공인. 모니터 안에는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쓰고 하얀 백의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뱀의, 아니 타테야마 선생님 모습 그대로인 사내가. 옆에서 키도와 세토가 작게 아빠라고 중얼거렸다. 그 그림만 있을 뿐, 더빙도 BGM도 없는 고요의 영상에 뱀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처럼 얹혔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말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 여름날 함께 흙에 파묻혀 죽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 혼자 아지랑이 데이즈라는 세계 안에 들어가고 남편 혼자만 살아남은 거지만 말이지. 혼자 남은 남자는 간절히 바랐다. 다시 한번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그 바람에 「소원을 들어주는 뱀」은 그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지."

뱀의 말에 맞춰 시시각각 화면이 바뀌었다. 타테야마 선생님과 그 아내분이 죽는 장면에선 옆에 있던 키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부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키워주신 부모님이 죽은 장면이니... 떨리고 있는 키도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다시 뱀을 노려봤다. 이 이야기의 핵심이 선생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내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친 숙나 그는 가볍게 콧방귀를 끼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뱀」이 바로 나다."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리며 뱀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눈이 맑아지는 뱀」의 능력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라니... 나나 다른 애들의 능력과는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뱀은 서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계속 혀를 놀렸다.

"그렇지만 이 남자의 소원은 너무 시시했다. 8월 15일 날 죽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소원이니까. 그러던 차에, 아니 그 훨씬 전에 더 재미있는 소원이 내게 들려왔지."

말과 함께 뱀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우리와 단 한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서. 항상 멍한 코노하씨마저 불안감을 느꼈는지 앞에 나아가 우리를 지키듯이 섰다. 우리를 등지고 서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붉은 눈에 들어오는 지키겠단 각오와 듬직한 등이 그의 비장한 표정을 연상케 해주었다.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코노하씨 어깨 너머에 보이는 뱀의 미소가 내게 심어준 불안감이 더 컸다. 그 미소를 유지한 채 뱀은 코노하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 어어?!"

─선생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수한 검은 선 같은 것이 코노하씨를 삼켜버렸다.

"코노하!!!"

놀라서 튀어 나가려는 타카네씨를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위험하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위험해! 상황 파악을 위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자 시체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선생님이 보였다. 어느새 원래의 갈색으로 돌아온 눈은 동공이 열린 채 그냥 얼굴에 박혀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내가 능력 사용 중임에도 그 어떠한 감정도, 상태도 보이지 않았다. 호흡도, 심장 박동도, 생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무(無)의 상태. 그 말은 즉──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아아, 역시 이 몸이 좋다니까. 이런 금속 나부랭이도 필요 없고 말이지."

하얀 머리가 아닌 검은 머리, 멍한 분홍빛 눈이 아닌 형형한 금안, 느릿느릿하고 느긋한 말투가 아닌 빠르고 비꼬는 말투. 색 반전을 해놓은 것 같은 외견만큼이나 알맹이도 우리가 알던 코노하씨와 정반대가 되어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카노에게 들은 바로는 우리가 가진 능력, 즉 뱀은 우리의 목숨을 대신해주고 있다고 했다. 검은 선들을 내뿜은 직후 선생님이 시체로 변한 것으로 보아 아까의 그 검은 선은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눈이 맑아지는 뱀」일 거다. 말투랑 행동거지를 보아 틀림없다. 뱀이 이동할 수 있다니... 젠장, 그럼 우리가 아는 코노하씨는 어떻게 된 거야! 코노하씨가 된 뱀은 들고 있던 총을 보란 듯이 몇 번 흔들고는 옆으로 던져버렸다. 낙하한 총은 바닥에 부딪힌 후 빙그르르 돌더니 얼마 못 가 마찰력에 의해 회전이 멈추었다. 저 뱀의 미친 짓도 저리 쉽게 멈춰질 수 있는 거였다면 좋았을 텐데.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보자고. 내가 발견한 그 재미있는 소원이 누구의 소원인지 아나? 바로... 당신의 소원입니다, 여왕."

"히이이...!"

뱀이 무릎을 꿇고 마리의 손을 잡았다. 마리는 우리 뒤에 있었는데 어느 틈에! 놀라서 몸이 뻣뻣하게 굳은 우리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마리 바로 옆에 있던 소년이었다.

"마리에게 손대지마십쇼."

세토는 차갑게 뱀의 손을 쳐내고는 마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에겐 항상 둥글게 휘어졌던 눈이 매섭게 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뱀은 그마저도 우스운지 한 번 웃고는 몸을 일으켜 세토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스파크가 튈 것 같은 분위기에 마른 침을 억지로 삼켜 보냈다.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다.

"훔치는 아이, 너에겐 감사하고 있다. 네가 여왕을 숲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여왕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라는 소원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

"우으...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전 그런 소원 바란 적 없는데... 친구들은 모두 내 곁에 있고..."

"아뇨! 여왕은 계속 바랐습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여왕? 이 일은! 이 세계는! 전부 당신의 소원 때문에 만들어진 거란 걸!"

"─아니, 마리가 아니라 당신 때문이겠지."

나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이 이상 떠드는 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마리 때문이라고? 웃기지 마. 타카네씨와 코노하씨, 히비야를 상대로 비윤리적인 실험을 한 것도, 아야노 선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카노를 협박하며 이용한 것도, 날 납치한 것도, 이 미친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도 바로 당신이잖아!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른다. 누군가 내 앞에서 난리를 피는 것 마냥.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머리는 차분하게 돌아갔다. 일단 말을 꺼낸 이상 논리적으로 내 말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 근거들이 맞든 틀리든 뱀은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고 그건 곧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래 정보. 정보가 더 필요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가 되어줄 정보가.

"아까 당신이 말했었지. 선생님의 소원은 8월 15일 날 죽기만 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런데 넌 굳이 10마리의 뱀을 모아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 아지랑이 데이즈와 이 세계를 통합시킨다는 극히 귀찮은 방법을 선택했어. 그 이유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방법과 마리의 소원은 그 어떠한 연결점이 없는 것 같은데?"

"「루프」를 눈치채서 똑똑한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군. 좋아, 그럼 힌트를 주도록 하지. 소원이 이루어지면 뱀인 내 정신은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소원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해. 내 존재의의니까 말이지. 자,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 정답은─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신타로씨였다. 그래도 나와 생각한 것과 똑같았다. 아까 뱀과 둘이 이야기를 했을 때 루프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었으니까. 이 대답은 뱀이 10마리의 뱀들을 모아 새로운 괴물을 만든다는 극히 귀찮은 방법을 선택한 이유도 된다. 그런 방법을 써야만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의 세계를 반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신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 대답이 정답이 맞았는지 뱀은 손가락을 튕기며 정답이라고 말했다.

이해는 했다.

누구나 살고자 하는 욕망은 있으니까.

하지만 인정할 순 없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상처받고, 얼마나 많이 희생당한 걸까.

뿌득 이가 갈리고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뱀의 사고가 너무 불합리적이여서,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없는 무력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심하게 뒤틀린 이 뫼비우스의 띠를 어떻게 끊어 내야 하는 걸까. 내가,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충격적인 사실에 뇌가 마비되어 사고는 잘 굴러가지 않았다. 이런 나와 달리 신타로씨는 어떨까? 뱀의 질문을 바로 맞추기도 했고, 백화점에서의 활약도 신타로씨가 주역이었다. 게다가 모모 말로는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하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시선을 돌려 신타로씨를 보았다.

─순간 숨이 멈추었다. 신타로씨의 눈이 붉었기 때문이다. 붉은색으로 변한 신타로씨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 허나 그 무언가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능력을 쓴 내게 보이는 것은 「놀라움」과 「혼란」, 그리고 「이해」. 대체 무엇을 이해한 것일까. 신타로씨의 「이해」는 내가 뱀이 굳이 귀찮은 방법을 사용한 이유를 이해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파악한 순간 왜인인지는 모르지만 이 뫼비우스의 띠를 잘라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진짜 아무 이유 없이. 신타로씨의 눈이 왜 붉은지, 원래 오래전에 능력을 얻었는데 모모처럼 자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인지 의문점이 퐁퐁 솟아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것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그것도 눈이 맑아지는 뱀조차 모르는 뱀이 있다. 마치 손안에 히든카드가 들어온 기분에 속이 울렁거리며 눈의 온도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난 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여왕의 소원과 능력 이용해 몇 번이고 세상을 되돌렸다.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재미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계속하다 보니 질리기 시작하더군. 그럴 때 네가 나타난 거다."

「꿰뚫어 보는 아이」라며 뱀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 생각한 순간─

"어?"

─내 몸은 날아올랐다.

"시라키!!"

"이치카!!"

내 온몸에 덮쳐오는 부유감에 두 눈을 껌벅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그저 멍하게 있으니 멀어지는 메카쿠시단의 모습과 날 부르는 목소리, 바뀌는 내 주변의 풍경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이 감각과 기분은 그날,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마구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였던 그 사랑의 눈은 지금 나에게 향해있는 노란 눈보다 악질적이진 않았지만.

쿵- 소리와 함께 뒤통수와 등에 큰 고통이 가해지더니 이내 바닥으로 추락해 이마를 박았다. 아프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슴과 배도 곧바로 바닥에 부딪힌 탓인 듯 했다. 순간적으로 들이마신 공기를 토해내고는 기침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멀리서 애들과 뱀이 뭐라 말하는 것 같지만 앞뒤로 부딪힌 탓에 머리가 윙윙 울려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뻗어있을 순 없다. 부르르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넣고 바닥을 밀었다. 관절 하나하나가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아파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고 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누구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큰 손이 우악스럽게 내 고개를 젖히게 했다. 엉망인 꼴로 붉은 토끼 눈을 하는 내 모습이 노란 눈에 비쳐 보였다.

"11번째의 뱀 「눈을 꿰뚫어 보는 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원래 없던 뱀인데 말이야. 그래도 나름 뱀은 뱀이라고 여왕 곁에 오기는 했다만."

지긋이 날 노려보는 뱀의 눈이 오히려 날 꿰뚫는 것만 같아 시선을 피했다. 이리저리 돌린 시야에는 곳곳에 널브러진 메카쿠시단의 모습이 보였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온갖 욕설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눈에 부릅떠 힘을 주고 다시 뱀을 노려보자 뱀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코노하씨의 몸이 아닌 말 그대로 진짜 뱀이. 붉은 눈에 검은 비늘, 날름거리는 혀. 능력 사용 중이긴 했지만 설마 진짜 뱀의 모습을 꿰뚫어 볼 줄 몰라 그만 몸을 흠칫 떨며 놀라버렸지만, 타이밍 좋게 뱀이 내게서 손을 떼고 뒤돌아 일어섰기 때문에 그런 날 보지 못했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드디어 10마리의 뱀이 모였다는 거니까!"

뱀은 크게 외치며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쭉 훑어보았다. 검게 변한 코노하씨의 얼굴은 광기 어린 웃음을 지었고, 그 몸속의 검은 뱀 역시 기쁜 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몸속의 뱀의 모습까지 보이는 걸까. 내 능력이 투시이긴 하다만 사람을 투시했을 때 몸속 장기가 아닌 능력자의 뱀이 보이다니.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그런 걸까?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눈의 온도는 능력은 얻게 된 이래로 가장 뜨거웠다. 대체 뭘까, 내 능력은. 알면 알수록 내 능력의 한계를 가늠할 수가 없다. 어째서? 어째서 내 능력만?

"비록 아지랑이 데이즈를 창조했던 원래의 10마리의 뱀은 아니긴 하지만 「눈을 돌보는 뱀」의 자리는 「눈을 꿰뚫어 보는 뱀」이 메꿔줄 것이다. 이로써 새로운 괴물을 만들 수 있어! 그래. 당신이 새로운 괴물이 되는 겁니다, 여왕!"

하? 상념에 빠지려던 내 정신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뭔가 이야기가 맞아들지 않는다.

"윽... 새로운 괴물을 만들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아빠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한 핑계였던 거잖아?!"

내 의문은 카노가 대신 질문해주었다. 10마리의 뱀으로 새로운 괴물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모두를 지키고 싶어 하는 아야노 선배의 자살을 유도해서 선생님의 소원을 이룰 수 없단 핑계로 세상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함정이었을 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로운 괴물을 만들겠다니 대체...

"아까 말했잖아. 루프를 반복하는 것도 이젠 질린다고. 그래서 그냥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 세계를 만들 생각이다."

" 소원이 이뤄지지 않는 세계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니, 가능하다. 네 녀석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여왕의 소원만 있으면 말이지. 오늘이 며칠인지는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슬쩍 휴대폰을 꺼냈다. 8월 16일 8시 38분이 액정 위에 올라와 있었다.

"...8월 16일."

"그래, 8월 16일이지. 15일이 아닌! 전(前) 주인의 명령은 「8월 15일에 죽은 자를 아지랑이 데이즈에 데려와라」라는 거였다. 그러니 너희가 오늘 죽게 되면 아지랑이 데이즈가 아닌 사후세계인가 뭔가에 가버리겠지! 자, 그럼 오늘 너흴 죽이고 뱀을 꺼내 여왕을 새로운 괴물로 만들어 이 세계와 아지랑이 데이즈를 합쳐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너희를 사랑하는 여왕은 사후세계로 가버린 너희를 평생 만날 수 없게 되겠지. 그럼에도 여왕은 계속 바랄 거다! 너희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여왕은 스스로 너흴 만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버린 꼴이 되지. 그 세상에서 나는 여왕의 소원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미친놈."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럼 대체 아야노 선배의 죽음은 뭐란 말인가! 아야노 선배는 모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 뱀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 새로운 괴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다 헛수고가 돼버린 거야? 나 때문에? 결국 내가 아야노 선배의 죽음을 수포로 만든 셈이다. 뱀의 계획대로 멋들어지게.

젠장.

최악이다.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까지 암담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아주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아야노 선배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든다든지 우리 모두의 목숨을 저딴 뱀 새끼 맘대로 가지고 놀게 만들 생각 따윈 전혀 눈곱만큼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내가 가진 능력이, 11번째인지 눈을 꿰뚫어 보는 인지 뭔지 하는 뱀 하나 때문에! 두 손으로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귀를 막았다. 『좋아, 하지만 살고 싶다는 것도, 그렇게 되겠다는 것도 전부 네 선택이란 것을 잊지 마라.』라는 그 여자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린 내가 했던 짧은 판단 때문에 나와 소중한 사람들이 저딴 싸이코 뱀을 위해 희생되는 거라니...!

젠장!

젠장!!

젠장!!!

입안에 맴도는 욕지거리가 튀어 나갈까 봐 입을 닫자 뿌드득 이가 갈렸다. 그 소리에 뱀이 목을 꺾어 내게 눈길을 던졌다.

"11번째의 뱀의 존재를 처음 눈치챘을 때, 물론 놀라기야 했지만 네 놈의 뱀으로 「눈을 돌보는 뱀」의 자리를 메꿀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메꾸기에는 뱀의 힘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하더군."

그 여자의 목소리 위에 뱀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뭐, 막 태어난 새끼 뱀의 힘이야 그 정도인 게 당연했겠지. 그래서 난 네 녀석의 담임을 맡아 루프를 반복시키는 내내 지켜보면서 네 뱀이 다 크길 기다렸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이지도 않았었다고."

제발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시끄럽다. 듣기 싫다. 아예 머리 전체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스르르 내려와 온갖 빛을 가려주었다.

이 상황 전부 다 그냥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눈뜨면 다 없어지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참 가혹하게도 이건 전부 다 현실임을 알고 있다. 요동치는 감정에 동요한 내 두 눈이 여태껏 없었던 온도로 타오르고 있으니까. 생생한 그 뜨거움이 현실 도피하려는 날 억지로 현실로 끌어다 놓고 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웅크린 내 몸이 보인다.

끔찍하디끔찍한 이 현실.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다.

아야노 선배,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야노 선배의 죽음이...

아아... 저는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요.

알려주세요, 네?

신님! 제발!

"루프를 반복하면 할수록 쑥쑥 잘도 크더군. 그리고 이전 루프 때 드디어 네 뱀이 여왕뱀에게 반응했다! 드디어 여왕에게 합쳐질 수 있는 성체가 된 거지!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이 순간을 기다린 건 너뿐만이 아니야.』

갑자기 한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고 청아한 목소리, 그렇지만 강직한 말투.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이리저리 시선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조그맣게 똬리를 튼 붉은 눈의 검은 뱀이.

『안녕, 드디어 눈치채주었네. 기뻐. 나 그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것보다 정신 차려. 겁먹지 마. 자책하지도 마. 네 탓이 아니야. 그리고 이 사태는 네가 해결할 수 있는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해결할 수 있다니? 난 겨우 두려움에 떨고 있을 소녀에 불과한걸.

『그래도 이 현실을 바꾸고 싶다고 바랐잖아. 그 마음이면 충분해. 그 마음 덕분에 내가 태어났고, 지금의 네가 된 거니까. 거기다 너는 「그가 능력자라는 것」을 눈치챘는걸.』

「그」? 혹시 신타로씨?

뱀은 대답 대신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선 멀거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는지 확인하려 숙였던 고개를 들자 검은 뱀의 모습은 멀어지고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찡그렸던 눈을 다시 크게 뜨고 뱀이 본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붉은 눈을 한 채 집중하고 있는 신타로씨가 눈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얀 뱀도.

하얀색?

능력의 힘을 유지한 채로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여전히 뭐라 떠들고 있는 눈이 맑아지는 뱀을 포함해서 신타로씨를 제외한 메카쿠시단 전원이 가진 뱀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아니.

아니다. 한 명.

한 명의 뱀의 색깔은 다르다.

내 시선이 그 한 명에게 멈추었다.

"마리..."

바닥에 주저앉은 마리의 몸속,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고고한 자태와 어쩐지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는 뱀이 이렇게 외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검은색이 아닌,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의 비늘을 지닌 자신이 바로 여왕 뱀이라고. 머릿속의 톱니바퀴 하나가 어설프게 맞물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명. 설명이 필요하다.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면 내 뱀이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 했다. 내 의도완 상관없이 내 고개는 천장을 향했고, 그와 동시에 발바닥 아래의 감촉이 사라졌다. 대신 목에 심한 압박이 가해졌다.

"컥!"

목에 걸린 말이 이상한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점점 더 세지는 압박에 기도는 점점 막혀왔고 눈앞이 탁해졌다. 그럼에도 귀는 멀쩡한지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어 왔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볼까! 그동안 너는 못 죽였으니 특별히 오늘은 제일 먼저 죽여주도록 하지."

그딴 특별 난 필요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켁켁 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뱀의 손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와 신타로씨를 들고도 멀쩡히 달리던 코노하씨의 몸이니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이러다간 진짜 죽는다.

"상당히 괴로워 보이는군. 뭐, 네 녀석 덕분에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거니까 금방 끝내주도록 하─윽?!"

갑자기 목에 있던 큰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 손 덕분에 공중에 떠 있던 나는 당연하게도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멋지게 착지할 만큼의 반사신경이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생존 본능대로 어설프게 팔로 머리를 감쌌다. 점점 떨어지는 시야의 끄트머리에 검은 천과 녹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쿵- 제법 큰 소리에도 불구하고 목을 제외한 몸 어느 곳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따스한 온기가 등 전체에서 느껴졌다.

"콜록! 콜록!"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곧바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숨. 숨을 쉬어야 한다. 산소가 절박하다. 평소라면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숨 못 쉬었던 시간을 메꾸려는 건지 기침은 쉬이 멈춰주지 않았다. 콜록, 콜록. 계속되는 기침에 목은 당연하고 폐까지 아파져 오는 것만 같다. 고통스러워 눈물을 찔끔 흘리자 누군가가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크고 따스한 손. 이 느낌 어디선가...

"시라키쨩, 괜찮아? 정신 차려!"

"어이, 시라키 괜찮아? 숨 쉴 수 있겠어?"

날 향해 오는 다정한 목소리들. 굽었던 등을 피고 고개를 들자 「걱정」으로 가득한 카노와 키도가 보였다. 날 구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줬구나. 울컥 올라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고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괜찮아. 그보다 눈이 맑아지는 뱀은? 또 죽이려 할 텐데."

"일단 우리들은 눈가리기를 해서 괜찮다. 다른 녀석들은 일단 아쉬운 대로 기기 사이사이에 숨어있고."

"사실 우리가 시라키쨩을 구하는 동안 저 뱀을 돌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카노는 말끝을 흐리면서 뒤로 시선을 던졌다. 굳이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아도 뒤에 올 말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마리의 상태가 이상해.」

마리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어느새 끝부분이 검게 변한 머리카락은 역정을 내는 파도처럼 구불거리고 있었다. 마리의 옆머리가 움직인다는 건 스쳐 가듯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카락 전체가 움직이는 것은 지금 처음 보았다. 그리고 마리의 분홍빛 눈이 새빨갛게 변한 것도. 내가 죽을 뻔한 것을 보고 동요한 마리의 마음에 여왕 뱀이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의 감정과 상태는 내가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게 뒤섞여있었다.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내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마리의 주변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시간이 좀 더 있다면...

"여왕 뱀이 힘을 조금이라도 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여왕 뱀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서 내가 움찔거리자 카노와 키도가 왜 그러냐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몸이 조금 떨려오는데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여태껏 볼 적 없는 선명하고도 강렬한 붉은 눈빛과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그 눈이 스르르 반쯤 닫히자 마리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왜?

『여왕뱀에게 네 마음이 닿은 모양이야.』

내 뱀이 팔을 타고 내려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이거론 부족해. 「여왕뱀」이 아니라 「여왕」에게 마음이 닿아야 하니까. 그걸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야.』

「그녀」가 누군데?

『너의 히어로.』

나의 히어로, 라면─

"─아야노 선배."

"시라키쨩?"

"왜 그러십니까, 여왕. 힘이 약해지셨군요. 칫... 아까 그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눈이 맑아지는 뱀은 한 바퀴 돌며 연구실 전체를 살펴보았다. 그에 우리 셋 다 입을 다물었는데 키도의 능력 덕분인지 우리의 위치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뱀은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뱀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릴 죽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다른 애들은 괜찮을까... 능력을 써서 연구실 전체를 살펴보니 중앙 모니터 뒤에는 모모와 히비야가, 구석 메인 컴퓨터 뒤에 세토와 타카네씨가 숨어있었다. 다행히 모모는 능력을 잘 제어하고 있는 건지 눈이 붉지 않았다. 다행히 다른 애들도 아직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뱀이 마음만 먹으면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문제일 터. 일단 여왕뱀의 힘을 누그러트린 것은 좋으나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은 아까와 마찬가지다. 굳이 내가 죽을 필요까진 없다. 저 뱀의 말로 미루어 짐작할 때 이전까지의 루프는 나를 제외한 메카쿠시단 전체가 죽어서 이루어진 것 같으니.

서둘러야 한다. 안 그러면 다음에야말로 진짜 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하다. 내 곁에 든든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런지 아까 혼자서 침착해야 한다고 되뇌길 때보다 더 차분하다. 카노와 키도를 보니 날 향한 걱정이 깃들긴 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눈빛이 보였다. 아, 괜찮다. 이 애들과 함께라면 잘 할 수 있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자 머릿속에서 혼잡하게 뒤엉켰던 생각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 비록 짐작과 가설로 범벅되긴 했지만 말이다. 초조해하지 말고 그 짐작을 하나씩 확인해보자.

"카노, 아야노 선배도 뱀을 얻은 거 맞지? 혹시 그 뱀하고 능력이 뭔지 알아?"

"응? 알긴 알아. 「눈을 돌보는 뱀」이고 능력이 아마... 자신의 기억이랑 감정을 공유하는 거였나?"

자신의 기억이랑 감정을 전달하는 거라... 그건 갑자기 왜 묻냐는 카노의 말에 대충 대답을 해주며 눈으로 신타로씨를 찾았다. 락커 옆과 모니터 뒤의 사각지대에서 몸을 숨긴 채 신타로씨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타로씨 몸속의 하얀 뱀은 신타로씨와 마주하고 있었다. 혹시 나처럼 자신의 뱀과 대화를 하는 건가? 신타로씨의 능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있다. 일단 저 뱀이 우리들과는 다른 뱀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 점」도 우리들과 달랐으면 좋겠는데... 내 바람이 허무맹랑한 망상인지 사실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래도 만약 내 바람이 사실이라면...

"그것보다 시라키, 일어날 수 있겠나?"

"어? 아 응."

키도의 말에 스스로 일어나려 무릎을 세웠지만, 어제 삔 발목 때문에 잠깐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런 날 카노가 잽싸게 잡아 세워주었다. 아예 팔을 두르고 부축하려 하기에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몰리다 보니 발목이나 목의 통증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카노에게서 떨어진 후 두 개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어찌어찌 중심을 잡고 섰다. 발목과 목이 움직일 때마다 아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얼른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일단 다 같이 상의를 하는 게 좋겠어."

"그렇군. 둘 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키도는 후드를 더욱더 깊게 눌러쓰며 눈을 붉게 빛냈다. 후드 속에서 흔들리는 눈빛과 예리한 턱선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도 눈을 붉게 빛내자 두려움에 바짝 굳어져 있는 카노의 얼굴이 보였다. 내 모습도 필시 저 둘과 다를 바가 없겠지. 그래도 이렇게 있을 순 없다. 저 둘도 나와 똑같은 마음일 거다. 크게 숨을 내쉬며 아까 한 생각들을 회상했다. 허무맹랑한 망상이면 어떠겠는가.. 그 아무리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우린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키도의 곁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시라키?"

"미안, 키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잠깐만 따로 행동할게."

"그건 위험해, 시라키쨩! 만약 저 뱀에게 또 걸리기라도 하면─!"

소리를 높여 날 카노의 입을 검지 손가락으로 막았다.

"괜찮아. 절대로 안 들킬게. 약속해."

"...확인하고 싶다는게 뭐지?"

"사실 내게 작전이 하나 있어. 아니, 작전이라고 해야 할까 허무맹랑하고 순 지레짐작밖에 없기는 한데..."

"그 짐작을 확인하러 가겠다는 거야?"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노와 키도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허공을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나를 향한 둘의 눈은 아까의 흔들림은 멈춰있었다.

"알겠다. 네가 그렇겠다면 어쩔 수 없지."

"고마워. 그럼 일단 너희 둘은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 그러고 나서 세토에게 능력을 써서 내 마음을 읽으라고 전해줘. 너희가 바로 작전을 알 수 있게.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알겠어. 그럼... 부디 조심해, 시라키쨩."

"응."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는 둘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고선 나도 발걸음을 떼었다. 한 두세 발짝 걸었을까, 갑자기 뭔가가 발에 채 시선을 내리자 총이 보였다. 아까 뱀이 코노하씨로 옮겨가면서 그냥 휙 던져버렸던 바로 그 총. 은색의 몸체가 곳곳의 기계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조심히 그것을 집어 들고선 다시 앞으로 발을 뻗었다. 지금의 난 걸어야만 한다. 허무맹랑하고 순 지레짐작밖에 없는 작전이 통할지 확인하기 위해서. 금속 표면의 냉기가 손을 타고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11번째의 뱀, 「눈을 꿰뚫어 보는 뱀」

통칭 여왕뱀, 「눈을 합치는 뱀」

아무도 몰랐던 뱀, 「눈에 새기는 뱀」

우리를 몰살시키고 비극으로 몰아가려는 「눈이 맑아지는 뱀」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카드는 전부 모였구나. 너를 제외하고.』

「그러네요. 이번에는 제대로 확실히 모였어요.」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무섭지 않으냐?』

「후후 괜찮아요, 저 애들이니까. 분명 이번에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원망하진 않느냐?』

「네? 왜 원망하겠어요. 당신 덕분에 모두랑 만날 수 있었는걸요.」

『이 비극의 시작은 바로 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한 짓이기는 하다만 난 너의 죽음을 수포로 만들었어. 「다음 기회」마저도 없앴단 말이다.』

「당신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바랐을 뿐이에요. 그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 죽음은 제가 결정한걸요. 헤헤. 저는 머리가 나빠서 이런 것밖에 생각 못 해요. 하지만 저 아이는 달라요. 저 아이라면 모두의 길라잡이가 돼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그 소년이 여기에 온다는 것도 믿고 있는 거로군. 어찌 그렇게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는 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고.』

「그건... 음... 계속 믿어왔으니까요. 헤헤 대답이 좀 이상하려나요?」

『...그런가. 그럼 나도 믿어보도록 하지.』

「앗, 드디어 긍정적인 말씀을 해주셨네요! 늘 부정적이셨는데.」

『시, 시끄럽다! 나는 그저 내 뱀들을 믿을 뿐이지 저 녀석들을 믿는 게 아니란 말이다!』

「후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아... 됐다. 그 녀석 말고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군.』

「아하하... 아, 저 이제 슬슬 가볼게요.」

『그래. 어서 썩 가버리거라. 다음에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후후 그럼 전 이만...」

『...부디...』


어떤 기계의 본체와 TV만 한 모니터 사이, 그 조그마한 공간에서 나와 신타로씨가 은밀히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신타로씨에게 가까이 갔을 때, 신타로씨는 이미 자신의 뱀과 이야기를 다 마친 것이었는지 본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왔네.'하고 한 마디만 짤막하게 내뱉으셨다. 마치 내가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럼 같이 최선책을 생각해보자는 신타로씨의 말로 시작한 토의 아닌 토의는 2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 허무맹랑한 망상과 지레짐작은 맞았다. 스스로도 그게 맞았다는 것에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신타로씨가 내 짐작에 살을 붙여 완성한 작전이었다. 매우 담담하게,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신타로씨의 어조와 아주 반대될 정도로 그 작전은 충격적이었다.

"...미쳤어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안 미쳤어. 아주 정상이야."

"거짓말...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막 내뱉을 수 있어요? 그건 미친 짓이라구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들 하잖아. 저 녀석의 미친 짓을 막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너도 알잖아?"

대답은 안 하고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신타로씨의 말이 맞다. 나도 알고 있다. 그 작전을 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 아까 내 나름대로 작전을 구상할 때부터 떠오른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젠장! 그 외의 수가 생각나지 않아!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손 하나가 턱 하니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만 살짝 올리자 신타로씨의 입까지만 보였다.

"난 괜찮아."

높낮이가 없는 평이한 어조로 신타로씨가 말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신타로씨가 입을 오물거렸지만 난 말 없이 신타로씨의 빈손에 그것을 쥐여 드렸다. 신타로씨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상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뭔 말을 하든 신타로씨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뻔히 보였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훤히.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아, 나야말로 뒤를 부탁할게."

신타로씨는 설핏 웃으시며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그걸 잠시 내려다보다가 눈에 힘을 주고 모두가 있는 곳을 보았다.

...다 들었어?

마음속으로 그렇게 묻자, 세토는 이쪽을 보고 「네」라는 입 모양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토는 내 부탁대로 능력을 계속 쓰고 있었던 거다. 이로써 내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시작돼서 신타로씨의 미친 짓으로 완성된 작전이 메카쿠시단 전체가 다 알게 되었다.

세팅은 끝났다.

실행만 남았을 뿐.

"이치카."

"네?"

"그... 고맙다."

막 일어서서 가려는데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신타로씨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타로씨는 이런 내 반응이 좀 당황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어서 가봐."

"...네."

나는 신타로씨를 뒤로 하고 모두가 있는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로 작전이 시작하고, 그 작전에 나와 메카쿠시단 모두가 휘말린다고 생각하니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하지만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마음 굳게 먹자. 눈의 온도로 뜨겁게 유지한 채, 쭉 나열되어있는 기계들을 손으로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뱀과 신타로씨의 모습을 반복해서 살펴보니 이제 곧 시작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언제까지 숨바꼭질할 심산인 거냐.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너희의 소중하디 소중한 친구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탕-

무미건조한 총소리가 연구실 안에 울려 퍼졌다. 벌써 올해 세 번째 듣는 소리지만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부르르 몸을 떨다 빳빳이 고개를 들어 모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자, 다들 똑똑히 들었지?

신호야.

작전을 시작하자.

"네네! 원하시는 대로 슈퍼 프리티 전뇌걸 에네쨩 등장입니다!"

중앙 모니터에 푸른색의 0과 1이 가득 차오르더니 활기차고 발랄한에네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 난 표정이었으면서 에네가 되자마자 바로 하이텐션이라니... 나중에 이불킥을 할 타카네씨의 모습이 떠올라서 작게 웃고 말았다. 그래, 계속 이 페이스로 가자. 기계의 행렬 뒤에서 조심조심 걸음을 재촉했다.

"호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나오라고 해서 나온 것뿐이거든요! 그것보다 얼른 가짜씨를 돌려주세요!"

"돌려줄 리가 없지. 이건 이제 내 몸이다."

"아아! 가짜씨! 가짜씨, 들리시나요. 응답해라, NO.9 대원!"

"소용없다. 아무리 소리를 높여봤자 「눈을 깨우는 뱀」에겐 닿지 않아. 정말이지 너희는 참 어리석군."

낮게 비웃는 소리를 뒤로하고 작은 모니터와 계기판 사이로 들어갔다. 키도와 카노, 모모와 히비야, 세토와 타카네씨까지 모두 거기에 모여있었다.

"시라키! 어디 다친 곳은 없슴까?"

"없어. 그보다 모두 이런 이상한 작전에 참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모두를, 특히 모모를 바라보며 말하자 모모는 내 손을 잡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이치카쨩이랑 오빠가 많이 생각해서 내린 작전이잖아? 무엇보다 오빠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나도 괜찮아!"

모모는 주문처럼 「괜찮아, 괜찮아」를 중얼거리며 내 손등을 쓸었다.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아니 메카쿠시단 전체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렸다. 순간 숙연해진 분위기에 모모의 손을 꽉 쥐었다. 놀라서 동그랗게 뜨인 모모의 눈동자에 미약하게 웃고 있는 내가 비춰 보였다.

"응. 괜찮아, 할 수 있어."

이어진 손과 손을 통해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이 온기를 좀 더 오랫동안 느끼고 싶다. 모두와 좀 더 오랫동안 함께이고 싶다. 성공시키겠다는 다짐이 더욱더 단단해졌다.

"히비야, 내가 물건을 하나 줄 테니까 네 능력으로 이걸 봐줘. 모모는 아까처럼 히비야가 능력을 쓰는 것을 도와주고, 키도는 모모의 능력을 최대한 억제해줘."

"응, 알겠어!"

"아아, 걱정 마라."

"그런데 그 물건이 뭔데?"

히비야의 질문에 나는 한쪽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아까 신타로씨와 물물교환해서 얻은 물건을 건넸다. 자신의 작은 손 위에 올려진 물건을 보고 히비야는 알겠다는 듯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얀색의 이어폰. 신타로씨가 에네의 말을 듣기 위해 귀에 끼던 바로 그 이어폰이다. 에네의 말은 지금 이 실험실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지만 아마 신타로씨에겐 들리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착잡해졌다.

"신타로씨의 물건이야. 이걸 네 능력으로 봐서 「신타로씨가 아지랑이 데이즈 안에 있는지」를 봐줘."

히비야의 눈을 응시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짓까지 해가며 실행하는 작전이다.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


"이치카."

"네?"

"그... 고맙다."

"그냥...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어서 가봐."

"...네."

신타로는 자신에게 눈인사를 한 뒤 점점 멀어지는 이치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리본 없이, 검푸른 머리카락이 이치카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신타로는 시선을 내려 제 손에 쥐어진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까 이치카에게 괜찮다고 담담하게 말했던 주제에 막상 총과 마주하게 되니 무서움이 신타로를 덮쳤다. ...그 녀석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왜 그러지? 역시 무섭나?』

신타로는 뭔가가 목에 둘리는 느낌이 든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았을 뿐이다. 그 「뭔가」는 실재하지 않으니까. 살짝 움직여진 붉은 눈에는 마찬가지로 붉은 눈을 가진 하얀 뱀이 들어왔다. 「눈에 새겨진 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 밝힌 하얀 뱀이 말이다.

『아까 말했잖아. 넌 언제 죽어도 아지랑이 데이즈에 간다고. 그것이 여왕이 내게 주신 특권이다.』

"알아.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은 없어."

『그 말은 즉, 죽지 않겠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신타로는 총구를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총을 든 손은 내리지 않았다. 아까 이치카는 자신에게 이것을 건네기 전까지 수도 없이 고민하고, 망설였다. 아마 신타로 본인보다 이치카가 더 이 상황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신타로가 죽는 상황을.

철컥. 신타로는 총이 장전되는 소리를 멀거니 들었다. 이 총을 건네줄 때 이치카의 손은 미세하지만,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이치카의 두려움은 필시 한 번 죽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아니면 수없이 많은 루프 속에서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도 모른다. 신타로의 눈에 보이는, 그 수없이 많은 루프 속의 기억 중에 그녀는 매번 울고, 절규하고, 절망했다. 루프를 할 때마다 매번 끝까지 남아 메카쿠시단 전원이 죽는 모습을 이치카는 지켜봐야만 했다. 「눈을 돌보는 뱀」을 대신할 「눈을 꿰뚫어 보는 뱀」을 지녔단 이유만으로 죽지도 못한 채. 루프 끝자락의 이치카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더 괴로웠다.

그 정도인데도 이치카는 절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서 더욱더 발버둥 쳤다. 발버둥 치며 신타로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하고, 조금이라도 앞을 향해 달라고 외쳤다.

그 외침을 듣고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절규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타로는 방아쇠 위에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언제까지 숨바꼭질할 심산인 거냐.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너희의 소중하디 소중한 친구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그래, 그놈의 숨바꼭질 지금 끝내주지. 이 지긋지긋한 루프도 함께.

탕-

소름 끼치는 총소리가 신타로의 목을 꿰뚫었다.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입을 보며 신타로는 '아아, 이게 그 입이구나' 따위를 생각했다. 곧이어 그 커다란 입이 신타로를 삼키고선 사라졌다. 신타로가 있던 자리엔 그의 붉은 저지를 대신하듯 붉은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어서 와, 신타로. 기다리고 있었어.」

붉은 머플러의 소녀는 붉은 저지의 소년을 향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보여. 붉은 저지의 아저씨랑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수없이 많은 전봇대... 나와 히요리가 있었던, 「아지랑이 데이즈」가 맞아."

히비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히비야의 붉은 눈이 꽂힌 곳은 모모의 손 위, 바로 신타로씨의 이어폰이었기에 모두가 숨을 들이마셨다. 스스로 총을 쏴서 죽었을 신타로씨의 물건을 보고 무언가가 보인다면 그것은 곧, 신타로씨가 살아있다는 의미니까. 모모는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안심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초조했던 마음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살아계시는구나. 신타로씨의 말이 맞았다. 현재의 여왕에게서 만들어진 「눈에 새겨진 뱀」의 소유자인 자신은 날짜와 상관없이 아지랑이 데이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이. 그 말만 아니었더라면 실행하지 않았을 작전이었다.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살아남으면 저 미친 뱀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앗, 누군가가 왔어. 저 사람은... 아."

"누구인데?"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을 때 한번 봤던 사람이야. 붉은 머플러에 검은 교복을 입은 여자인데..."

"누나네요!"

"응, 언니가 틀림없군."

세토와 키도는 기쁜 티를 숨기지 않고 살짝 웃었다. 카노에게서 아야노 선배가 아지랑이 데이즈 안에 있단 얘길 들었어도 막상 진짜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이 난 모양이다. 그에 비해 카노는─

"누나..."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만 웃고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다기보단 어떤 표정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아마 아야노 누나가 죽은 이후 자신이 한 일들에 죄책감을 느껴서 저러는 거겠지. 걱정스러운 맘에 어깨에 손을 올리니 카노는 깜짝 놀라다가 나를 보고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뭐라 한마디 하려 입을 열었지만 내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꺄아아?! 뭐 하시는 건가요! 자신의 컴퓨터를 부수다니! 주인님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네요!"

"알 까보냐. 이번 계획에 이 고물 덩어리들은 더 필요 없어. 시끄러운 전자 계집은 더더욱 필요 없고."

"저, 전자 계집이라니!"

능력을 써서 계기판 너머를 바라보니 비교적 작은 모니터 속에서는 화가 나서 울긋불긋한 에네와 그 옆에는 산산이 부서진 모니터 파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주먹을 쥐고 서 있는 뱀이 보였다. 직접 주먹을 내다 꽂아 박살 낸 모양인데 피 한 방울 없이 멀쩡해 보였다. 젠장, 괴물이냐고. 하긴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새삼 코노하씨의 몸을 적으로 돌린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남겨진 우리들은 신타로씨와 아야노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최대한 위험은 감수하고 싶어서 첫 타자는 죽지 않는 에네로 정했던 건데...

"꺄아아!! 그만! 그만 하세요!"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차례대로 쓰러지는, 아니 부서져 가는 모니터를 보면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저 모니터가 다 부서져 버려서 갈 데가 없어진 에네가 타카네씨로 돌아온 후에도 키도의 능력이 있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만...

"아니, 버티기 힘들려나."

뱀을 유심히 바라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흘러넘쳤던 여유가 줄어들고 조금씩 짜증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는 건가. 에네의 도발이 조금 자극적이었던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에네를 내보내지 말 걸 그랬나... 나 혼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뱀에게 들킬 것을 고려해서 단번에 모두와 떨어질 수 있는 타카네씨한테 부탁했던 건데. 아무래도 프로그램이다 보니 한계 지점이 명확했다. 방해전파가 없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아니, 이건 신타로씨와 함께 세운 작전이다.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최선책이었을 터. 내 집중을 파괴하듯 별안간 큰 소리가 나더니 그 직후 옆에 있던 타카네씨의 몸이 움직였다.

"푸핫! 저 녀석 대체 뭐야?! 저게 하루카라니 말도 안 돼!"

타카네씨가 고개가 번쩍 듦과 동시에 숨과 함께 말을 뱉어져 나왔다. 이런 생각하는 거 좀 미안하지만, 꼭 시체가 살아나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건 그렇고 결국 이 방의 모든 모니터가 부서지고 말았구나. 계기판 너머의 풍경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키도의 능력으로 좀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들키면 어떡하지... 키도의 능력엔 범위 제한이 있는데, 키도 혼자 다 커버하기엔 현재 우리 인원수가 너무 많다. 실제로 지금도 꽤 부담일 거다.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애써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하루카가 아니래두?"

"하루카였잖아! 키만 크고 둔감하고 멍청한 녀석이었는데..."

타카네씨는 차마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타카네씨 안을 가득 채운 「그리움」과 「슬픔」에 보는 내가 더 괴로워졌다. 분명 자신이 알던 사람의 몸인데 그 안에는 완전 다른 타인이 있는 거니까...

"누가 더 나타났어."

돌연 끼어든 히비야의 말에 모두의 집중이 히비야에게로 쏠렸다. 너무 집중한 탓에 그게 느껴지지 않는지 히비야는 몇 초간 지긋이 이어폰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일단 남자고, 병원복을 입은 채 침대 위에 앉아있어. 음... 앉아있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키는 신타로 아저씨보다 크려나? 근데 좀 허약하게 생겼어. 머리는 검고─"

"눈물점! 눈물점은 있어?!"

타카네씨가 다급하게 히비야 어깨를 붙잡고 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히비야는 '흐갹?!'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앞뒤로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서둘러 모모가 타카네씨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카네씨는 화들짝 놀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서는 미안하다고 중얼거리셨다. 워낙 작은 소리라 히비야는 못 들었던 모양이지만. 팽글팽글 머리를 짚는 히비야의 눈에선 이젠 붉은색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으윽... 뭐 하는 거야, 아줌마!"

"아줌마 아니라니까!"

"네 얘기 아니야, 모모."

히비야한테 얼마나 아줌마 소리를 들었길래 아줌마란 단어에 즉각 반응해버리는 거야...

"사람이 겨우겨우 집중해서 한참 보고 있는데!"

"윽! 미, 미안하다니까! 그보다 눈물점 있었어, 없었어?!"

미안함에 수그러든 것도 잠시, 엄청난 기세로 다시 다가오는 타카네씨의 모습에 히비야가 겁에 질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타카네씨, 고등학생인 저라도 그렇게 다가오면 겁먹을 거예요.

"이, 있었어! 그게 왜!"

"하루카!"

히비야의 말을 듣자마자 타카네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털썩 주저앉으셨다. 놀란 마음에 서둘러 곁에 가보니 타카네씨의 어깨가 미약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울고, 있다. 왜? 궁금증은 미뤄두고 일단 타카네씨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에 슬슬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하루카... 다행이다. 거기 있었구나..."

"어이 아줌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루카라니 대체 누구야?"

"하루카군은 타카네쨩의 친구, 뭐, 정확히는 그 이상의 사람이긴 한데 아무튼 코노하군의 본명이야."

"하지만 에네, 아니 지금은 타카네인가. 아무튼 타카네가 말하는 하루카는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는 모양이군."

"어라? 코노하씨랑 하루카씨는 동일 인물 아님까?"

"아니야..! 하루카는... 하루카는 코노하가 아니야! 처음 봤을 때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그렇지만 코노하군은 하루카군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싶다」고 바라서 생긴 몸이잖아?"

"에... 저기 지금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코노하씨는 하루카씨의 몸인데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고, 정작 하루카씨 본인은 아지랑이 데이즈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타카네씨?"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모모 말을 밀어내며 그렇게 말하자 타카네씨는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아는 「코노하」씨는 대체 누구인 건가요?"

눈물을 닦던 타카네씨의 팔이 멈추었다. 우리들의 입 또한 멈추었다. 그때 다시 한번 굉음이 들리며 우리를 가려주던 주변 기기들이 전부 부서져 버렸고, 주변이 밝아졌다. 인공의 빛이 쏟아지는 쪽에서는 검은 코노하씨가 삐딱하게 서서 우릴 비웃고 있었다.

놀라서 뜨거워진 눈으로 검은 뱀의 모습이 들어왔다. 눈이 맑아지는 뱀의 모습이. 그리고 그 안쪽에 또 다른 뱀의 모습까지. 반쯤 감겨있는 붉은 색의 멍한 눈을 보고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 뱀이 코노하씨구나, 라고.


「어라. 안녕, 신타로.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하루카 선배.」

신타로는 까딱 묵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에게 나름 예의상 본래 안 하던 존댓말을 하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카는 신타로에게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면서도, 안타깝고 덧없는 그 미소를. 신타로의 눈에 계속 새겨져 있었을 터인 그 미소가 어째서인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꿈결처럼.

「좋은 얼굴을 하게 되었네. 잘 지냈어?」

「네에... 뭐...」

계속 방안에 틀어 박혀 있다가 이상한 녀석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소동에 쉴 새 없이 휘말린 끝에 스스로 경동맥에 총을 쏜 것도 잘 지냈다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뒤에 말은 싹 다 잘라버린 채 신타로는 애꿎은 목만 만져대었다. 신타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강 눈치챈 아야노가 그의 뒤에서 남몰래 웃음소리를 흘리자 신타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빙그레 웃던 하루카는 돌연 분위기를 바꾸고선 조심히 물었다.

「그럼... 저쪽의 『나』는 잘 지내고 있었어?」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의 이상도 제대로 이뤄주려 했었고...」

검게 변한, 눈이 맑아지는 뱀에게 장악당해 버린 코노하를 떠올려버려서 뒷말이 흐려지긴 했지만 하루카는 이미 다 알고 있는지 '그렇구나'라고 조용히 말할 뿐이었다.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하루카는 자신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조금만 힘을 주면 빠질 것만 얇디얇은 링거줄. 하지만 하루카는 뽑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같이 안 갈 겁니까?」

「응. 어차피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까.」

어차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 시간을 저쪽에 나에게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끝낼 기회를.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하루카는 멋대로 자신의 몸을 바꾸고 가져가 버린 주제에 다른 뱀에게 몸을 뺏겨 친구들을 죽게 한 저쪽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그제야 자신의 이상이 진실로 이뤄지리라.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 녀석은...」

신타로는 채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신타로의 붉은 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눈물이 맺혔고, 그 눈물 속에 지난 루프에서 봐왔던 코노하의 모습이 있었다. 멍하고 둔하지만 순수하고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주었던 녀석. 하루카가 돌아오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친구라 불러주었던 코노하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신타로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그런 신타로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쪽의 자신이 부럽다고. 그러다 똑똑히 자신에게로 향하는 신타로와 아야노의 눈을 보고는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눈물로 글썽거리고 있긴 하지만 또렷한 그 눈에는 하루카를 되돌리겠다는 각오가 어려있었다. 아아, 나도 사랑받고 있구나. 하루카의 눈꼬리가 절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 인제 그만 가봐야지?」

「아아.. 그렇네요.」

신타로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고 눈을 크게 떴다. 깨끗해진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하루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하루카씨!」

붉은색의 히어로들은 손을 흔들며 하루카에게서 멀어져갔다. 하루카는 그 붉은 색이 안 보일 때까지 계속, 그 둘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럼 부탁할게, 우리의 히어로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나, 꼬맹이들? 그럼 이제 내 차례겠군."

빨간색과 푸른색의 전선이 힘없이 늘어진 어떤 기계 파편을 들고 뱀은 유유자적하게 말했다. 이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넘쳐흐르는 자신감이네. 혀를 차며 인상을 썼지만 그래도 시선은 뱀에게서 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노하씨에게서 떼지 않은 거지만.

아무래도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하루카씨의 정신은 아지랑이 데이즈에 있고, 텅 비어버린 하루카씨의 몸은 코노하씨, 그러니까 멍한 붉은 눈을 반쯤 뜨고 있는 뱀이 차지하고 있던 것 같다. 어떠한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봤자 그걸 알 턱이 없고, 알아봤자 별 소용없다. 중요한 것은 저 안에 코노하씨가 있다는 것. 비록 지금은 눈이 맑아지는 뱀이 몸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전에는 본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해도 코노하씨가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다시 코노하씨가 몸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그건 힘들 거라고 생각해. 눈을 깨우는 뱀은 눈이 맑아지는 뱀보다 힘이 약하거든.』

어깨와 목을 타고 내 뱀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코노하씨의 힘이 약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마음속으로 묻자 뱀은 시선을 코노하씨에게로 던졌다. 뱀에게 대답을 재촉하기도 전에 눈이 맑아지는 뱀이 들고 있던 기계 파편을 우리에게 던졌다. 공기를 가를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에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맞진 않았지만 새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굳은 표정으로 다른 애들을 바라보니 모두 다 나와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흩어져!"

살기 위해 발악하는 것. 좀만 더 버티면 신타로씨하고 아야노 선배가 올 거다. 그러면 이 일이 끝날 거다. 그때까지 우리는 모두 살아야만 한다. 처절하게라도 물고 늘어지며 목숨을 이어나가 이 이야기의 끝을 모두와 함께 맞이해야만 한다. 한 명이라도 죽으면 의미가 없다.

가장 이상적인 해피엔딩을 보기 위해 모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을 뻗었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꿀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왕뱀의 힘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직 안 돼. 조금이면 돼. 조금만 더 기다려줘! 눈이 맑아지는 뱀은 이런 우리의 발악을 감상하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짜증 날 정도의 여유다. 그 여유 덕분에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 생각에 작게 실소를 흘릴 무렵, 그제야 내 뱀이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우리 뱀들의 힘의 원천은 바로 「소원」이야. 그래서 보통은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러니까 소원이 없어지면 뱀 자체의 힘은 소원을 가진 이의 것이 돼서 사라져버려. 아까 「눈이 맑아지는 뱀」이 말했었지? 소원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정신은 사라진다고.』

응. 그렇지만 코노하씨의 정신은 하루카씨의 몸에 남아있었잖아.

『네가 코노하라 칭하는 「눈을 깨우는 뱀」은 소원을 애매하게 이뤄주었기 때문에 정신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주인의 몸이 텅 비어있으니까 그 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뿐, 뱀 자체의 힘은 강력하다고 하기엔 어려워. 그에 비해 「눈이 맑아지는 뱀」은 소원을 조금도 이뤄주지 않았어. 그래서 힘이 더 세. 원래부터 좀 이질적인 뱀이었기도 하고─위험해!』

뱀의 말에 잽싸게 상체를 숙였다. 기계 파편은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내 뱀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저게 내 머리에 박혔겠지... 잠시 달리던 걸 멈추고 눈이 맑아지는 뱀을 바라보니 새로운 기계 파편을 제자리에서 던졌다가 받으면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한 번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쳐보라는 듯이. 저 의도에 따라주긴 싫은데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아... 그래도 첫 타자는 나로 확실히 정한 것 같다. 지금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걸 달리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이상 다른 애들은 비교적 안전할 거란 얘기가 된다. 내가 살기만 한다면, 내가 시간을 끌기만 한다면. 나는 힘차게 대지를 찼다.

있지,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

넌 어떻게 정신이 남아있는 거야? 너의 힘을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보면 내 소원은 이뤄진 것 같은데?

『아직 다 이뤄진 게 아니거든. 너와 「어머니」의, 아니 모두의 소원이 남아있어. 그런데 음...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

뭔데?

『나, 말 잘했어? 조리 있게 잘 말했으려나... 네가 말하는 걸 흉내 내봤는데...』

어린 애 같은 말에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내 뱀은 원래 없던 뱀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내 뱀은 뱀 중에 가장 어린 건가. 어린데도 열심히 내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애쓰고 있구나. 지금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응. 나 열심히 했어. 그래서 지금 기뻐. 너와 드디어 얘기할 수 있어서,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순간을 계속 계속 기다려왔어.』

칭찬받은 어린 애처럼 방방 기뻐하는 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나도 모르게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지금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데. 어느새 옆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그 사실을 퍼뜩 깨닫게 해주었다.

"뭐가 우스워서 웃고 있는 거지?"

약간 허리를 숙여서 날 지긋이 바라보는 뱀의 금안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급작스레 몰려온 두려움에 달리던 다리는 당연히 멈추었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버렸다. 도망, 도망쳐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멈춰버린 다리는 바닥에 붙은 채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박제처럼 굳은 몸에서 유일하게 눈만이 제 기능을 발휘해주어 뱀에게서는 「의아함」이 보였고, 그 안쪽에 뱀인 코노하씨가 보였다.

"결국 정신을 놔버린 건가? 그 정도로 약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만 역시 애는 애군."

뱀은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또 목을 조르는 건가 싶어 목을 감싸며 뱀을 노려본 채 두세 발짝 물러나자 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킥킥 웃었다. 정신을 놔버린 건 솔직히 내가 아니라 저쪽 같다. 아무튼 어찌하면 좋을까. 지금의 난 당장이라도 저 뱀의 손에 죽을 수 있다. 도망칠까? 아니, 그건 오히려 뱀을 자극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 건...

능력을 써서 뱀 뒤에 있는 마리를 보았다. 마리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짧아진 채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까 내가 죽을 뻔한 걸 봐서 그런 걸까. 만약 내가 지금 진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진짜 뱀의 계획대로 될 것 같다. 폭풍전야 같은 느낌. 초점을 마리에서 눈앞의 뱀에게로 맞추자 몸속에 있는 코노하씨가 나도 모르게 눈에 들어왔다. 코노하씨의 멍한 눈은 앞을 향해 있었다. 바로 나에게로.

"...코노하씨, 제 말 들리세요?"

"뭐야, 역시 정신을 놓은 거냐? 시답지 않은 친구 놀이는 이제 그만하지 그래."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러던가 말던가. 마음속으로 나도 뱀을 한 번 비웃어주고 계속 입을 놀렸다. 코노하씨에게 내 말을 닿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코노하씨가 저기에 있으니까.

"코노하씨, 부탁이에요.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이 녀석을 막아주세요."

"아까 전자 계집한테도 말했을 텐데? 무슨 말을 하든 이 녀석한테는 닿지 않─"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코노하씨!"

갑자기 오른쪽에서 세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와 뱀이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니 세토 역시 멈춰선 채 꿋꿋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붉디붉은 눈으로. 세토의 능력은 「눈을 훔치는 능력」, 즉─

「쉽게 말하자면 제가 본 대상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임다. 독심술 같은 거죠.」

─불현듯 세토가 나에게 자신의 능력을 설명하던 때가 떠올랐다.

"네, 할 수 있고 말고요! 힘내는 검다!"

세토에겐 들리는 거다. 코노하씨의 목소리가. 그리고 코노하씨가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그걸 깨달은 순간 옆에 있던 인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인기척의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굳이 눈을 돌릴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던 뱀이 세토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 바로 내 눈에 들어왔으니까.

"세토!!!"

"네 녀석은 정말 말이 많군. 천하의 내가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야!"

"커흑..!"

"이제 그만해!!!!!"

그 순간, 마리의 절규 소리와 함께 몸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갔다.

『어어어?? 큰일 났다, 여왕이 화났어.』

내 뱀은 엄청나게 당황했는지 안절부절해하며 말했다. 그보다 이거 지금 「화났다」라는 말로 간단히 끝낼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멍청한 얼굴로 공중에 떠오르는 마리 주위로 우리의 뱀들이 모여드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뱀이 우리의 목숨 대신이라더니 가슴 쪽이 너무나도 헛헛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아직 안 갈 거니까. 나는 어머니의 뱀이지 여왕의 뱀은 아니라서 여왕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지 않거든. 거기다 뱀의 힘은 소원의 크기에 비례해. 내가 이뤄주고 싶은 소원은 「이 루프를 끊고 싶다」는 것. 그러니까 지금의 난 어리다고 해도 어떤 뱀 못지않게 강해!』

뱀은 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며 그렇게 말했다. 아아, 그래서 내 능력이 다른 애들보다 유난히 힘과 활용성이 뛰어났던 거구나. 그걸 깨닫고 나자 그제야 손 아래에서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심장 소리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모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마리!!!"

다급한 마음 그대로 나는 급하게 바닥을 박차고 마리에게로 뛰어갔다. 현기증에 세상이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번에 삔 발목이 다시 시큰거리며 아파져 오는 것만 같고, 아까 졸린 목을 또 누가 잡은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게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세토의 가쁜 숨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건드린다. 금방이라도 넘어져서 토를 할 것만 같다.

그래도 말해야만 한다는 걸 나는 안다. 내 심장이 아직 뛰고 있고,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상 내가, 아니 우리가 원하는 엔딩을 만들기 위해서.

"마리! 우린 헤어지지 않았어! 지금 너와 함께 있잖아!"

목소리 끝이 심하게 갈라질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닿았을까? 내 목소리가? 여왕 뱀에게 밖에 닿지 않았던 내 마음이 마리에게 닿았을까? 불안한 마음에 조심히 고개를 들어 마리를 봤다. 더는 평소의 예뻤던 분홍색이 아닌 마리의 눈을 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가 지금 어떤 기분과 상태인지, 여왕뱀은 어떤지도.

넋을 놓고 그냥 마리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키도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시라키 말대로야, 마리. 우리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섭섭하게 멋대로 헤어졌다는 결론 내지 마~"

"봐, 마리쨩! 넌 지금 혼자가 아닌걸."

"그래, 다들 여기 있잖아. 뭐, 난 지금 에네 모습이 아니라서 너에겐 낯설 수도 있지만."

"쓸데없는 한마디가 많네, 양 갈래 아줌마."

"아, 아줌마?! 이 건방진 애송이가─"

"─나도..."

별안간 뒤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엄청난 기침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느린 말투와 목소리는─

"나도, 여기에 있어... 나도 너희랑 같이 있고 싶어... 그... 친구, 니까..."

외견은 여전히 검정투성이였지만 눈만은 분홍색 빛으로 또렷하게 빛내며 코노하씨가 말했다. 눈을 깜박이자 다시 금안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눈물이 핑 돌았다. 한순간뿐이라고 해도 눈이 맑아지는 뱀도, 여왕의 명령도 이겨내고 코노하씨가 말한 거니까. 자신의 본능보다 친구를 우선시해서.

"...큭! 이 「눈을 깨우는 뱀」 따위가!

"콜록! 콜록! 하아... 보십쇼, 마리. 무서워할 필요 없슴다."

"...정말?"

"─아아, 정말이고 말고."

어떤 기계의 본체와 지금은 부서져 버린 TV만 했던 모니터 사이, 그 조그마한 공간에서 두 인영이 나왔다. 붉은색이 아주 아주 인상적인 한 소년과 소녀가. 코노하씨의 말에 핑 돌았던 눈물이 기어코 볼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와 반대로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면 위로 올라갔다.

"정말이지... 왜 이제 와요."

"미안해, 이치카쨩. 그리고 다른 애들도."

여전히 붉은 머플러를 하고 계신 아야노 선배는 내 추억 속에서 흐릿해져 버렸던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에 나도 눈꼬리를 휘어 보이며 마주 웃어보았다. 아야노 선배가 내게 빨간 머리끈을 주었던 그때처럼.

"...뭐냐. 왜 네 녀석이 「눈을 돌보는 아이」와 같이 나타나는 거지?"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는 끝이야. 마리, 그동안 혼자 아주 슬프고 괴로웠지? 이젠 괜찮아. 우리들이 있으니까."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어느새 아야노 선배와 신타로씨의 눈동자는 붉디붉은 색으로 바뀌어있었다. 히어로의 색인 붉은 색으로.

「붉은 색은 히어로의 색이니까!」

아아, 정말 그렇네요. 아야노 선배.

"너에게 전부 전해줄게, 마리.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마리의 붉은 눈과 아야노 선배의 붉은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신타로씨는 그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까 신타로씨와 작전을 짰을 때 신타로씨는 내게 말했다. 자신의 능력은 「눈에 새겨지는 능력」이라 모든 루프에서의 일을 기억한다고. 그리고 아야노 선배의 능력은 「눈을 돌보는 능력」, 즉 기억이나 감정을 전해주는 능력이니까 두 사람의 능력으로 마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면 이 루프를 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달라고. 그동안 루프를 끊지 못한 이유는 신타로씨가 아야노 선배를 데리고 돌아오기 전에 세계가 리셋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랬기에 나와 우리들은 안간힘을 쓰면서까지 도망쳤던 것이다.

저 눈 맞춤을 통해 얼마나 많은 비극이 전해지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의 노력이 얼마나 좌절되었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다만, 돌아와 준 뱀 덕분에 다시 붉어진 눈으로 보게 된 세 사람은 무척이나 괴롭고 슬퍼 보여서 우리가 그동안 어떤 일을 겪어왔던 것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나는..."

별안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하얀 빛이 갑자기 쏟아져 눈이 부셨던 거지만 어쨌든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이어져 있는 전봇대의 향연, 붉고 파란 각종 표지판, 그리고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 그 하늘을 어릴 적 8월 15일에 봤던 그때의 하늘과 몹시 흡사해 보였다. 아아, 그렇구나. 이곳은─

"─아지랑이 데이즈."

"이게 대체 무슨... 네 녀석들! 대체 무슨 일을 한 거냐!"

"그저 뒤틀려있던 뫼비우스의 띠를 바로 했을 뿐이야."

내가 담담히 말하자 뱀은 죽일 듯이 나를 노려봤다. 얼마든지 노려보라고. 그렇게 봐봤자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몸의 떨림도, 나를 옥죄던 공포도, 목과 발목의 통증도 이젠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그때처럼, 마치 다쳤던 순간 자체를 도려낸 듯이 온몸이 멀쩡했다. 지지 않고 뱀의 시선을 맞받아쳐 주고 있는데 갑자기 뱀의 시선이 내 왼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메두사, 마리가 냉정한 얼굴을 한 채 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 떠올랐어. 그동안 있었던 일도, 네가 이루어주려던 소원도. 그러니까 모두 오늘로 끝이야."

"웃기지 마! 내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이제 그만하도록 해, 파트너."

"선생님?"

타테야마 선생님은 우리를 보시고는 한 번씩 웃으셨다.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듯한 선생님다운 웃음에는 이제 더는 여한이 없다는 후련함이 드러나 있었다.

"말도 안 돼. 네 녀석이 왜 여기에!"

"뭐,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마리가 나도 데리고 와준 모양이야. 하하, 이게 내가 그토록 연구했던 「여왕」의 힘이라는 건가? 아무튼 뭐... 그동안 고마웠다. 내 소원은 이제 이루어졌어."

선생님은 태연자약하게 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어이없단 표정을 짓는 뱀을 뒤로 한 채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다. 우리가 모두 선생님을 부르며 바라보자 선생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우리의 시선 하나하나 정성껏 맞추셨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선생님의 또렷한 갈색 눈이 열 마디 말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아야노 선배를 빤히 바라본 뒤에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을 스쳐 지나가셨다. 선생님의 발길의 끝에는 아야노 선배와 똑 닮으신 백의의 여성분이 서 계셨다. 아야노 선배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엄마라고 중얼거렸고, 그 소리에 선생님 책상 위에 늘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두 분은 사진 속처럼 무척이나 다정한 모습으로 서서 다시 다가오지 않으시고 그저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시기만 했다. 지켜봐 주고 있을 테니 이 뒤는 너희가 마무리 지으라는 것처럼.

"하... 말도 안 돼! 내가 겨우 이딴 꼬맹이들 따위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다니!"

"그럼 어서 내 몸을 돌려주겠어?"

등 뒤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복 차림에 헝클어진 흑발, 눈물점을 지닌 그 남자는 순해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뱀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루카!"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 그만 단념하도록 해."

"싫어... 싫다고! 사라지고 싶지 않단 말이다!!! 소원을... 제발 누군가 소원을!!!"

『흉하네.』

툭 내뱉은 내 뱀의 말에 말없이 동조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겁에 질려 바닥을 기며 소원을 갈구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흉한 모습이었다. 특히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 덕분에 뱀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나에게는 더더욱.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나도 십분 공감한다. 허나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들의 죽음 따위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웃었던 사내가 정작 자기 자신의 죽음에 벌벌 떨고 있다니 웃을 수 없는 개그로밖에 보이진 않는다. 설마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을 줄이야. 흔들리는 금안에 비친 차가운 내 모습을 보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원이라면 여기 있잖아. 또 다른 「나」의 소원이."

하루카씨가 허리를 숙여 뱀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뱀과 우리 사이에 코노하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흔들거리고 있긴 했지만 분명 우리가 아는 그 코노하씨가 맞았다. 코노하씨가 느릿하게 감겨있던 눈을 뜨고, 그 특유의 분홍빛을 드러냈다. 그러고선 하루카씨를 한 번, 히비야를 포함한 우리들을 한 번, 마지막으로 뱀의 금안을 차례차례로 바라보았다. 뱀의 눈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코노하씨의 소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코노하씨의 눈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 눈은 내 뱀이 드디어 소원을 이뤄줄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고 말했을 때의 눈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그 아이... 히요리를 구하고 싶어. 약속, 했으니까."

"하? 그딴 소원은!?"

갑자기 뱀의 모습이 크게 일렁거리더니 뱀의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코노하씨와 하루카씨를 바라보니 기분 탓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아지랑이처럼 흐릿해 보였던 두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안돼... 이럴 순 없어! 목숨 대신이라니! 싫다고!!!"

뱀의 발악이 쩌렁쩌렁하게 아지랑이 데이즈 안에 울려 퍼졌다. 흉하고 듣기 싫은 소리에 귀를 막아버리자 뱀의 몸은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한 곳에 몰려지더니 하나의 구(球)로 변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 아래 바닥에 어린 소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오르자 히비야가 달려가 무릎을 꿇고 히요리라고 외쳤다. 저 아이가 바로 히비야가 구하려 하던 히요리... 보자마자 8월 13일 편의점 알바를 할 때 내게 길을 물어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스쳐 지나갔던 인연의 끈이 이리도 질긴 것임을 깨달았다.

검은 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이즈를 방출하며 그 소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소녀의 몸이 바닥에서 벗어나 우리의 앞에 똑바로 섰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눈꺼풀이 걷히자 붉은빛이 드러났다.

"히요리!!! 으흑... 다행이다. 히요리!"

"머, 뭐야 히비야. 눈물 콧물 범벅이잖아! 더러워. 기분 나빠. 당장 안 떨어져?"

히요리 말대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히비야가 히요리를 껴안자 히요리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전력으로 구해주려 한 사람이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싫어할 리가 없지. 아니, 그걸 넘어 저 아이는 히비야를... 여전히 펑펑 울며 히요리의 이름을 불러대는 히비야를 히요리가 어쩔 수 없단 한숨을 쉬고는 살며시 토닥거려주었다. 어느새 눈물이 살짝 고인 히요리의 눈은 검은색에 지나지 않았다. 붉은 기따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맑아지는 뱀이 들어준 소원은「히요리를 구하고 싶어.」니까. 저 아이가 산 것으로 소원은 이미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다른 애들처럼 능력 같은 것은 없어. ...아마도.』

아마도라니?

『으음... 솔직히 눈이 맑아지는 뱀은 이질적인 뱀이기도 하고, 나는 혼자 덩그러니 생긴 뱀이라 다른 뱀에 대해 잘 몰라. 미안해.』

아냐.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었잖아.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오로지 내 뱀에게만 닿았을 내 말에 뱀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밝은 웃음이 내 귀를 간질이다가 소리가 점점 작아져만 갔다.

아... 그렇구나. 이제 이걸로 내 소원이 완전히 이뤄졌으니까 너도...

『...응. 하지만 슬퍼하진 말아줘. 이렇게 너와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니까. 너의 눈이 나의 눈이 되고,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는 거야. 지금까지와 똑같아.』

아주 작은 목소리를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말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작별 인사를 하자.』

...응. 아주 잠깐뿐인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 그리고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안녕.

뱀처럼 애써 담담한 척 작별 인사를 고했건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그래도 목소리 대신 울리는 심장 소리와 뜨거운 눈의 온도가 그 존재가 분명 내 안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조용히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마 신타로씨도 나와 같은 상황인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그리고 그건 아마─

"하루카... 이제 기뻐..?"

─「눈을 깨우는 뱀」인 코노하씨도 마찬가지. 코노하씨의 몸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반투명한 상태로 흔들흔들 흔들렸다. 그에 반해 좀 더 또렷해진 듯한 하루카씨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코노하씨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찬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쭉 훑어본 후에야 하루카씨는 입을 열었다.

"있지, 코노하. 확실히 난 강하고 튼튼한 몸을 원하긴 했었어. 병약한 몸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를 위태로운 운명이었으니까. 언제나 이 몸을 원망했었지."

"그래서 나 하루카 소원대로, 튼튼한 몸을 만들었는데 왜... 받아주지 않은 거야?"

"왜냐하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죽는 순간에서야 깨달았거든."

"진짜 원하는 것?"

고개를 갸웃거리는 코노하씨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루카씨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 닿은 사람은 바로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루카씨를 노려보고 있는 타카네씨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그냥... 그냥 건강한 몸이야. 게임 캐릭터처럼 멋지고,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가진 「코노하」의 몸이 아니라 타카네랑 소중한 사람들과 계속 오래오래 지낼 수 있는 건강한 「하루카」의 몸을 원해."

"하루카..."

"미안해, 타카네. 내가 잠깐 고집부린 것 때문에 슬프게 해버려서. 그래도 이제부턴 같이 있을 테니까 괜찮아. 그렇지, 코노하?"

하루카씨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코노하씨를 바라보았다. 그에 코노하씨의 잔잔하게 미소가 번져나갔다. 항상 멍한 표정뿐이었던 코노하씨의 첫 미소에 내 두 눈은 절로 커졌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천진난만하고 티 없이 밝은 그 미소는 너무나 덧없고 아련해서 가슴이 아려왔다.

"응!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루어줄게, 하루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코노하씨가 하얀빛으로 변해버리더니 순식간에 하루카씨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양과 검정이 섞이어 회색이 되듯 코노하씨를 받아들인 하루카씨의 머리카락 색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머리카락 길이도 조금 길어졌고, 눈물점 대신 코노하씨 얼굴에 있던 문양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하루카씨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완전히 코노하씨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하루카」 자신을 유지하되 「코노하」를 받아들인 것이다.

잘됐네요, 코노하씨. 새로운 하루카씨의 모습과 그제야 울며 하루카씨를 안는 타카네씨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아..."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눈을 뜨자 푸르디푸른 하늘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아몽중으로 마구 달려만 왔더니 지쳐버렸다. 그래도 이걸로 해피엔딩이니까 후련한 마음이 더 크다. 한 바퀴 돌며 쭉 둘러보니 곳곳에서 눈물의 재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히요리와 히비야, 옆에서 둘을 달래며 눈물을 훌쩍이는 모모.

아야노 선배 옆에 옹기종기 모인 키도, 세토, 카노.

그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타테야마 선생님 부부.

우는 타카네씨를 달래는 하루카씨, 그 둘 대화를 나누는 신타로씨.

자신과 닮은 하얀 긴 머리의 여성과 마주 보고 있는 마리.

하양과 검정, 빨강과 파랑밖에 없는 이 단조로운 세계에서 그들의 모습은 스케치북에 찍힌 알록달록한 물감 같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드디어 해냈는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홱 뒤돌았다. 거기에는 그날, 그때, 그곳의 잊을 수 없는 그녀가 기묘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기쁘면서도, 믿을 수 없고, 허탈하면서, 후련해 보였다.

『드디어 끝났어.』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긴 머리, 뱀 비늘 같은 것이 나 있는 얼굴, 강렬한 붉은 눈. 다시 봐도, 몇 번을 봐도 내 기억 속의 그녀가 맞았다. 그래도 그땐 좀 컸던 것 같았는데 나보다도 체구가 작은 그녀를 내가 입도 뻥긋 못한 채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짧게 내뱉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수고했네.』

찌르르. 환희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단 한 마디에 그동안 했던 모든 일에 대한 위로와 보상을 받은 것만 같았다. 뭐라 이룰 수 없는 감동이 벅차올라 난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왜지? 왜 갑자기 내가 이러는 거지? 어째서? 이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뿐이다.

그러자 그녀가 다가와 나를 조심스레 안고서 토닥여주었다. 따스하고 자상한 손길에 더욱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 그래... 울지 말아라.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치카."

그녀 뒤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에 번뜩 눈이 뜨였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 일어서더니 두세 발짝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시선을 그냥 그대로 한 점에 붙박인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 말고, 절대로 잊을 수도 없고, 잊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빠..."

"...많이 컸구나, 이치카."

살짝 눈물이 고인 눈동자로 지긋이 날 내려다보며 아빠는 서글프게 웃으셨다. 나는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아빠에게 다가갔다.

"정말... 많이 컸어. 이렇게까지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뭐가요?"

"...내 멋대로 살아달라고 한 것."

아. 혹시 내가 15일 날 부모님 묘지에 갔을 때 했던 혼잣말을 들으셨던 걸까? '나는 아빠한테 딱히 고맙지 않아요. 나만 두고, 아니 나만 보냈으니까.'라는 그 말을. 아빠는 날 볼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셨다. 그 모습에 되레 웃음이 났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어린 여자애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 웃기지 않을 리가.

그래, 아빠도 무서웠던 거다. 이 험한 세상을 나 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자신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살짝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아빠를 안자 아빠가 나를 마주 안아주셨다. 머리 위에서 아빠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어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른들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고, 낯선 이들과 만남과 계속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두렵기만 하다. 조금만 쉬어가고 싶은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우리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절대 적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불안하고, 두렵고, 쉬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고, 흘러가는 시간 따라 우린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는 걸. 온갖 마음을 품에 안고 나아가 행복을 발견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미래니까 말이다.

그 모든 순간과 감정들을 품고 우리는 서투르게나마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살짝 떨어지고는 어릴 적 아빠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의, 아니 그 이상의 미소를 지으며 밝게 말했다.

"그럼 아빠, 안녕히 계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내게 아빠는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던 멋진 미소를 지으시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뒤를 돌자 메카쿠시단 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맞다."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앞을 향해 뻗으려던 발을 멈추고 그녀를 찾았다. 다행히 그녀는 아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갑자기 내가 저를 찾을 줄은 몰랐는지 냉철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실례만 아니라면 당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

크게 뜨였던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조금 울 것만 같은 눈동자는 날카롭게만 보였던 첫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오랜만에 말하는 단어인지 그녀가 신중하게 제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 안엔 그리움과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아자미.』

"아자미... 예쁜 이름이네요. 그럼 전 이만."

아자미. 「엉겅퀴」란 의미를 지닌 그 이름 석 자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하양과 검정, 빨강과 파랑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나란히 서 있는 모두의 모습이 상당히 눈에 띄여 보였다. 알록달록한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었다.

자, 눈물의 재회는 여기까지다.

새로운 미래를 모두와 맞이하러 가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모두가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파동이 퍼져나갔고, 모두의 웃는 얼굴이 더욱더 생생하게 보였다. 드디어 모두의 곁에 도착한 순간,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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