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Resetting……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이번에도 또 실패인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하지만 보이는 건 검정, 검정, 검정.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나는 붕 떠 있었다.

뭐지? 여긴 어디지? 분명 세계가 부서지고 있었는데?

『지금 부서진 세계가 처음부터 재조립되고 있다. 여긴 그 틈새의 공간이지.』

틈새의 공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러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여전히 검정, 검정, 검정. 대체 이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붕 뜬 느낌이 낯선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찾으러 갈 수도 없다. 그렇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이 사람은─

『이런 곳에서 다시 너와 만나게 된다니 우연이군. 다시 만난 것은 기쁘지만 이번에도 또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네.』

─당신은 제게 능력을 주신 그때의 그분이시죠? 제 목소리 제대로 들리시나요? 묻고 싶은 것은 정말로 많지만,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딱 한 가지만 묻도록 할게요. 「유감」이라는 것은 그... 모두가 죽고 마리가 시간을 되돌린 사건을 말하는 건가요?

『...역시 넌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래, 맞다. 너라면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막을 수 있다니... 제가요?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 뱀에 대한 것도, 마리에 대한 것도, 심지어 내 능력에 관한 것까지 그 어느 것도! 그런 제가 어떻게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거죠? 저는 그때─!

카노를 시작으로 한 명씩 차례차례 그 뱀의 총을 막고 죽어갔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쓰러지는 친구들의 머리에서 스프레이처럼 사방으로 튀는 붉디붉은 선혈, 거기서 나는 비릿한 철의 냄새. 조금 전의 일이라 너무도 생생히 떠올라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같이 서서 나 역시 총에 맞고 공포에 떨었다. 기껏 마음을 열고 친해진 친구들이었는데... 그날 그때와 같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죄책감 때문에 아예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때 조그마한 손과 목소리가 나에게 닿았다.

『다 안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라.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다 내 책임이니...』

부드러운 온기와 상반되게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그날, 그곳의 그녀가 있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곱슬머리, 그 머리를 단단히 묶고 있는 붉은색 끈, 날카로운 붉은 눈동자, 뱀의 비늘 같은 게 나 있는 얼굴까지... 내 기억에 박힌 그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우울한 표정만 제외하면.

그녀는 날 볼 면목이 없는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우울할 기색과 검정 일색은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이 검은 공간에 흡수당할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난 혹시라도 그렇게 될까 무서워져 어깨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았다.

『너....』

그제야 그녀의 붉은 눈과 겨우 마주칠 수 있었다. 아마 내 눈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일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동요에 눈이 뜨거워졌으니까.

『...네 말대로 시간이 별로 없다만 그래도 들어다오. 너는 곧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그래도 털어놓고 싶은 것이 있단다.』

나는 제대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시간이 없어도, 곧 잊어버리게 되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는지 바로 말을 하지 않은 채 입만 움찔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겨우 고민을 마쳤는지 내 시선을 맞받아치며 말을 시작했다.

『나는 메두사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뱀들은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뱀들이었다. 그 뱀들로 만든 세계가 바로 너희들이 「아지랑이 데이즈」라고 부르는 그 세계지. 그런데 네가 가자고 있는 뱀, 즉「눈을 꿰뚫어 보는 뱀」은 원래는 없던 뱀이었다.』

카노에게 10마리의 뱀 이야기를 들을 때 눈치채긴 했지만, 막상 본인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충격적이었다. 뭐라 하고 싶은 맘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이야기를 끊고 싶지 않아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으로 대신했다. 누누이 말했듯이 시간이 별로 없다. 아마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촉박할 터다. 왜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더더욱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다.

『이 루프를 반복하면서 언젠가 생긴 뱀이지. 언제 생겼는지는 나조차도 잘 알 수 없다만 아마 「눈이 맑아지는 뱀의 속셈을 알았더라면」이라는 내 마음에서 태어난 아이 같구나.』

「에이토 오빠의 속내를 알았더라면」

내가 그날 죽으면서 한 생각과 거의 흡사하다.

『이 아이라면 눈이 맑아지는 뱀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었단다. 그렇지만 역시 누군가에게 주는 것은 꺼려졌지. 내가 멋대로, 억지로 이 미친 짓거리에 밀어 넣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날, 너의 죽음과 내 질문에 대한 대답과 곧은 눈을 보고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라면 괜찮을 거라고.』

「좋아, 하지만 살고 싶다는 것도, 그렇게 되겠다는 것도 전부 네 선택이란 것을 잊지 마라.」

그녀가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뜻이었던 건가.

『...미안하다. 이런 일에 억지로 휩쓸리게 해서, 내 과오를 너희들에게 뒤집어씌워서.』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나에게, 아니, 우리 메카쿠시단 전체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사과에 나는 그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럽다. 어쩌면 내가 이 루프에 휩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단 사실 하나 때문에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알고 있다. 결국 내 선택으로 이렇게 된 것이란 걸. 결국 그 아이들도 자신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란 걸. 원인이 딱 하나뿐인 결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작은 눈송이가 모이고 쌓여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이유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녀에게 겨우 고개를 젓는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일의 피해자인 그녀에게,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란 뜻으로. 그런 내 뜻이 전해진 듯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고맙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주제에 네가 이 반복을 끊어주길 바랐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만...』

아까의 죄책감이 되살아나 이번엔 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그러했듯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듯이 네 잘못이 아니니 고개를 숙이지 말아라. 그리고 이 반복을 끊길 바라는 것은 비단 나와 너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멀거니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제대로 직시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따라서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자 검정밖에 보이지 않던 풍경 사이로 두 개의 붉은 색이 보였다.

신타로씨와 아야노 선배였다.

『저 소년에게 깃든 뱀 또한 원래는 없던 뱀이지. 하지만 너의 뱀과 달리 나의 뱀이 아니야. 내 손녀, 마리가 만든 뱀이지.』

마리가? 믿기지 않아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 아이도 나름대로 이 반복을 끊는 노력을 하고 있어. 그리고 저기 있는 소녀 역시 마찬가지이지. 나는 저 둘이 이 반복을 끊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 눈을 응시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강렬한 붉은 시선에 나는 시선을 박고 다음 말만 기다렸다.

『저들을 이끄는 역할을 네가 할 거라고 믿고 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그녀의 눈에 깃든 「믿음」이 시선과 시선을 통해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무겁다.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 어떤 근거도 없이 꼭 이 반복을 끊어 보이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녀의 손을 잡던 내 손이 사라져갔다. 깜짝 놀라 급히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팔, 다리부터 시작하여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여기서 헤어지게 되었구나. 내가 했던 말은 너는 전부 잊어버릴 터지만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으마.』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있지도 않은 손을 내밀었다. 아직,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의 이름을─

「괜찮아. 꼭 물어보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누군가는 아까 내게 「너 사람이 최선책이야!」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 안에서 빠져나와 내 앞에 나타났다.

뱀이었다.

나의 뱀이자 그녀의 11번째 뱀.

「그럼 또 보자.」

뱀은 손 대신 혀를 날름거리며 내게 인사를 하더니 이내 멀어져만 갔다. 그녀의 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죽으면 나에게로 오게 되겠지.

그래 「또」다. 원하든 원치 않든 또 태어나, 또 죽고, 또 저 뱀을 얻고, 또 메카쿠시단 애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야말로 또 죽고, 또 반복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이 반복에서 벗어나고 나면... 그때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묻도록 하자.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으아앙!"

"축하드립니다. 공주님이세요."

"수고했어... 수고했어, 여보.. 보여? 이 애가 우리 딸이야. 우리 딸 시라키 이치카야..."

남성은 간호사에게서 아기를 받아들고 자신의 아내에게 가까이 데려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여성은 흐려진 눈동자로 자신의 아기를 보았다.

" 이치카...우리 이치카..."

여성은 손을 뻗어 아기의 작은 손을 감격스럽다는 듯 조심히 잡았다. 작은 손임에도 따스한 온기는 확실히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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