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Truth or Dare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카노와 세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107」이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버린 것만 같았다. 빨리, 서둘러야만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쫓아오지 마, 아줌─우왓?!"

"히비야군, 위험해!"

갑자기 문에서 뛰쳐나온 히비야가 카노에게 부딪혀 넘어지고, 넘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모모가 히비야를 잡았다. 히비야는 찧은 코를 살살 문지르다가 이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나 다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카노쪽이 더 빨랐다. 카노는 나가려는 히비야의 손목을 빠르게 붙잡고, 휘청거리는 히비야의 중심을 잡아준 후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서로 다른 두 소년의 갈색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붉은색이 아닌 갈색 눈이.

"히비야군, 도와줘! 네 도움이 필요해!"

"뭐,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가!...어라? 어제 히요리 누나의 무덤에서 봤던 그 고양이 눈 아저씨잖아?"

"에? 카노씨랑 세토씨?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그리고 등에 있는 사람은..."

"아... 실은 저도 잘은 모름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비켜! 난 히요리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히비야는 카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는 고등학생인 카노였다. 초등학생인 히비야가 힘으로 카노를 이겨낼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더 세게 들어간 악력에 히비야의 손목이 더욱 붉어졌다. 그런데도 히비야는 악을 쓰며 나가려 애썼다. 세토와 모모가 자신들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려는 때 카노의 차가운 목소리가 히비야를 꿰뚫었다.

"혼자서? 혼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린애에 불과한 네가?"

퉁명스러운 말투도, 비꼬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뱉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건 히비야가 아닌 카노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 말에 울컥한 히비야가 세게 카노의 손을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카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포악했던 눈빛은 카노의 눈빛과 얽히자마자 바로 주춤거리고 말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 자신이 아닌 다른 데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올곧은 시선. 처음 무덤에서 봤던 장난기 가득한 눈과 상반되는 그 모습에 히비야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세토와 모모까지.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속일 여유가 없었다. 카노는 그 눈빛을 유지한 채 다시 차갑게 말을 이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지."

"하, 하지만 얼른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쩌면 히요리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다가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알잖아?"

히비야가 움찔거렸다. 확실히 자신은 몇 번이고 죽는 히요리를 구하려 대신 죽으려고 했다. 어째서인지 살아있는 건 자신이지만.

"자자, 둘 다 진정하심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구요. 할 얘기가 많지 않슴까."

"마, 맞아요! 히비야군도 진정해. 우리가 히요리쨩 찾는 거 도와줄 테니까, 응?"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세토와 모모가 겨우 깨트리고는 두 사람을 아지트 안쪽으로 밀었다. 히비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모모가 미는 대로 움직였고, 카노는 그런 히비야를 흘낏 쳐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냈다. 너무 흥분해버려서 어린 애를 감정적으로 대해 버렸다. 불현듯 모모의 매니저를 상대로 밀리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맞섰던 이치카의 모습이 카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라키라면 어떻게 하면 했을까. 급하다고 감정적으로 나서지 않고 좀 더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한 후 히비야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카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흥분했던 머리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지트 안쪽으로 들어오자 세토는 여태까지 업고 있던 타카네를 반대쪽 빈 소파에 조심조심 내려놓고, 그 옆에 히비야를 앉혔다. 세토가 낯선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히비야는 한 번 눈길만 주고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카노가 한 말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은연 중으로 세토가 자신을 보살펴준 사람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사람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크기의 쇼파이기 때문에 세 사람이 앉았을 뿐인데도 소파 하나가 다 차버렸다. 자연히 시선은 반대쪽 소파로 옮기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한 사람, 키사라기 신타로가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아! 오빠 방해돼!"

일어나라며 큰 소리를 낸 모모는 소파 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오빠, 키사라기 신타로를 마구 흔들어댔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을 번뜩 뜨며 괴롭게 일어나는 모습을 보자 카노의 죄책감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렇게 된 것은 필시 자신의 탓이리라...

"뭐, 뭐야?! 모모였냐... 좀 봐줘라. 밤에 잘 못 잤단 말이야..."

"미안해~ 신타로군. 밤에 잘 못 자게 해버려서."

"...카노?"

크게 뜨인 신타로의 눈을 카노는 회피했다. 눈의 능력으로 「속인」 탓에 아마 신타로에게는 카노가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카노는 아직 신타로에게 제대로 사과할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능력을 써왔던 탓에 속인 모습으로 장난스럽게 내뱉는 게 최선이었다. 거기에 신타로에게 자신이 했던 일 하나하나 다 해명하고 사과할 시간 따위 지금은 없었다. 다시금 마음이 초조해져 오는 것을 카노는 속인 모습을 덧씌운 채 심호흡을 하며 겨우 진정시켰다. 또 감정적으로 부딪혔다가 좌절하는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절대로.

"자아,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메카쿠시단 전원을 좀 깨워줄래? 모두가 들어야만 해. 중요한 일이거든."

"아, 넵! 그럼 전 단장님을 깨우고 오겠습니다!"

"그럼 저는 마리를 깨우고 오겠슴다. 신타로씨는 저기 있는 코노하씨 좀 깨워주시겠슴까? 부탁드리겠슴다."

"어? 어... 그래─ 타카네, 선배?"

2년 전 기억에만 있던 그리운 얼굴을 현재에 마주치게 되자 신타로의 눈은 다시 한번 커졌다. 길이가 길어지긴 했지만 검정 머리의 트윈테일도,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매도, 아담한 체구도 기억 속의 타카네가 맞았다. 왜 지금, 여기에, 이 사람이 있는 것인지 신타로는 그 좋은 머리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눈은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소년에게로 돌아갔다. 밤 중에 돌아와 아야노로 변했던 그 소년, 카노는 웃고는 있지만 진지하게 신타로의 눈빛을 받아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여깄냐~ 넌 대체 누구냐~ 뭐, 이런 생각이라도 하는 눈빛이네. 그렇지만 진정해, 진정해, 전부 다 말해줄 테니까. 히비야군도 그렇게 째려보지만 말고 진정해줄래? 나도 지금 너와 같은 기분이니까 말이지~"

카노는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설렁설렁 말했지만 진지함이 말속에서 묻어나왔다. 그에 신타로는 눈빛을 피하고는 질문으로 가득 찬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에 각종 감정이 휘몰아치는 게 엿보였다. 한편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히비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아까처럼 히비야를 잡으려던 카노는 그 발길의 종착지가 어딘지 알아채자 그냥 소파에 앉았다. 히비야는 코노하에게 갔다. 그리고 냅다 걷어찼다. 나름 깨우려고 한 짓이었다. 눈치를 보던 신타로는 건너편의 타카네를깨우려하다가 곧바로 카노에게 제재당했다. 한쪽 팔로 신타로를 막고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만 냈을 뿐이지만.

그렇게 메카쿠시단이 하나둘 거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비몽사몽한 채이지만 그 와중에 옷은 챙겨입고 모모와 나온 키도,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잠옷을 입고 거의 세토에게 매달려서 나오는 마리,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작은 히비야에게 끌려 온 코노하까지. 이렇게 모이게 된 원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 드디어 메카쿠시단 전원이 모이게 되었다.

카노는 저도 모르게 중앙에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메두사의 후예인 마리에게 깃든 여왕뱀.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왕뱀에게 모여든 다른 뱀들. 결국 그 눈이 맑아지는 뱀의 말대로 되었구나. 덕분에 모두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지만 카노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카노는 소파에서 일어나 모두를 등지고 몇 발자국 걸었다. 모두의 시선이 카노 등에 꽂혔다. 긴장된다. 이걸 말해도 되는지, 말해도 믿어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하기로 결심했다. 긴 시간이 지나 이제서야.

"자, 이렇게 모두를 모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메카쿠시단의 짧은 역사에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카노는 일부러 과장되게 빙글 돈 후 연극 톤으로 말을 했다. 이런 「속임」마저 없으며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노는 잠시 말을 끊고 자신에게 모인 시선들을 쭉 살펴보았다. 괜찮아, 말할 수 있어. 스스로 주문을 걸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후 카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라키쨩이 납치당했습니다!"

일동 경직.

아지트 내에 싸늘한 공기만 맴돌았다. 분명 카노는 일본어로 얘기했는데도 단원들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카노와 세토가 데굴데굴 눈만 굴릴 때 키도가 뛰쳐나가 카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걸 시작으로 모두의 목소리가 봇물 터진 듯이 쏟아졌다.


눈을 떴다. 맨 처음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윽!"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려 상체를 일으키자 눈앞이 핑 돌았다. 왼손으로 머리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상체를 지탱해 넘어지는 사태를 막았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고, 왼 발목은 여전히 시큰거리고, 속은 쓰리다. 컨디션이 완전 최악이다.

그렇지만 고맙게도 머리는 냉정하게 작동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례대로 되짚기 시작했다. 밤중에 깨서 카노랑 밤거리를 거닐다 에네를 자신의 몸에 데려다준 후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 같이 울었고, 세토를 만났고, 타카네씨를 만났고, 그리고... 그리고─

"납치, 당했지..."

맙소사.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전개에 절로 머리가 짚어졌다. 얼마나 운이 없어야 이런 사건·사고들에 계속 휘말리는 거냐고...

그때 후드 주머니에서 갑자기 지잉-하고 진동이 울렸다. 진동의 원인인 휴대폰을 꺼내자 7 : 00 시간과 함께「문자 메시지 1통」이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 와중에 대체 무슨 문자지 싶어 바로 상태 바를 내렸다.

카노였다.

바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려 카노의 메세지함에 들어가자마자 무수한 0과 1이 튀어나와 휴대폰을 잠식해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 0과 1이 점차 모여 하나의 모양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모양이 왠지 익숙하다고 느낄 무렵 모여있던 0과 1에 각각의 색깔이 입혀졌고, 그제야 난 그 익숙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푸핫! 역시 메시지 함은 너무 답답했어요!"

"에네!"

낯선 공간에서 아는 사람과의 재회는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행여나 누가 올세라 차마 크게 소리를 내진 못했지만 내 목소리엔 기쁨이 가득 묻어나와 있었다. 에네는 정말 답답했던 것인지 숨을 몇 번 크게 내쉬다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이제야 눈치채주셨군요! 아니, 지금 일어난 거려나요? 도착하고 나서 계속 진동을 윙윙 울려댔는데도 문자를 안 보시길래 큰일 난 줄 알았어요."

"와줘서 정말 고마워... 아, 아니 고마워요."

"아아! 어색해!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에네 상태에서 존댓말 듣는 건 제 쪽이 더 불편하니까요. 아, 제가 있다는 거 들키면 곤란할지도 모르니까 이어폰 끼세요."

"아, 응. 알겠어."

후드 속 주머니에서 하얀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꽂고는 오른쪽 귀에만 이어폰을 꼈다. 나머지 왼쪽 귀는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남겨놓았다. 아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편하게 막 말해도 되겠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근처에 사람은 안 보이나요? 애초에 여긴 어딜까요? 여우눈씨 말로는 실험실일 거라던데... 휴대폰 카메라 좀 들어주시겠어요? 저도 좀 봐야겠어요!"

"저기... 좀 천천히 말해줘..."

이어폰을 끼자마자 봇물 쏟아지듯 밀려오는 에네의 질문에 정신이 더 사나워졌다. 저 많은 질문을 하는데 채 10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말의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지금은 프로그램이라 가능한 걸까? 유익하지 않은 궁금증은 저 멀리 밀어버리고 에네 말대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같이 이곳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하얀 방'이었다. 천장도, 벽도 온통 하얀 데다가 그 흔한 의자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넓이는 교실 하나 정도 돼 보이는데 그런 곳이 텅텅 비어있으니 그 이상으로 넓어 보였다. 앞에서 오른쪽에 문이 하나 있어서 일단 그쪽으로 걸어갔다. 에네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에 가리니 이후 살짝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잠겨있는 탓에 철컥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잠겨있나요?"

"...응."

"곤란하네요. 이거 열쇠로 잠근 거라서 해킹해서 열 수도 없고..."

"아냐. 괜찮아. 무작정 나갔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여기 있다가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는 거지만. 힘이 쭉 빠져 문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앉았다. 기운이 없다. 기운이 나지 않는다. 대책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뭘 해야 좋은 걸까. 뭘 어떻게 해야....

"...여동생 친구분! 기운을 내세요! 아, 맞다, 맞다. 여우눈씨가 보낸 메시지는 보셨어요?"

"카노가 보낸 메시지? 그게 에네 너잖아."

"아뇨, 아뇨. 저 말고 말 그대로 문자에 써진 메시지요. 여우눈씨가 저 보내기 직전에 뭐라 몇 글자 적는 걸 봤거든요."

카노가? 에네에게 잠시 비켜달라 말하고 다시 한 번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맨 위에 있는 카노가 보낸 문자를 터치하자 짧지만 강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 : 기다려

모두와 함께 꼭 구하러 갈게.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거기에 머리를 박았다. 그 짧은 문장에 안심이 된다. 의지가 된다. 그런데 왜인지 심장이 시끄럽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빨리 와줘."

핸드폰을 붙잡고 조용히 그 말을 중얼거렸다.


키도가 카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털 때마다 카노의 입에서는 그동안 숨겨왔던 사실들이 빠르게 하나씩 쏟아져나왔다.

어젯밤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메카쿠시단에게 깃든 10마리의 「뱀」과 원래 주인인 「괴물」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 즉 켄지로에게 「눈이 맑아지는 뱀」이 깃들었다는 것, 켄지로의 「다시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소원 때문에 그 뱀이 했다는 여러 실험, 그 뱀의 목적은 10마리의 뱀이 전부 모아서 새로운 괴물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 그랬다간 능력(뱀) 소유자인 자신들이 죽는다는 것, 그걸 막기 위한 아야노 누나의 노력까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카노는 모두에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카노는 키도가 무서워 횡설수설한 것처럼 보였지만 한 번 이치카에게 얘기했던 내용이기도 하고, 오면서 계속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했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게 전달은 잘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억과 상식을 전부 뒤집어 엎어야 하는데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거짓말."

힘없이 카노의 멱살을 놓으며 흘려내듯이 말한 키도의 이 말이 단원 전체의 기분을 대표해주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카노는 이 말만큼은 능력도 쓰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단원들 모두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소화 안 되는 것처럼 거북하고 토하고 싶었다. 아지트 전체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카노 본인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면하게 되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면 항상 분위기를 풀어주던 세토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 카노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저기!"

그 분위기를 비집고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모모였다. 모모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카노씨, 죄송한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전원 얼음. 머리를 쓸어넘기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는 작은 동작마저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얼음. 모두의 시선이 한 번에 모모에게로 쏠리자 모모는 당황하면서도 또 말했다.

"엣? 저만 못 알아들은 거예요?"

"아니... 나도, 잘 못 알아들었어... 괜찮아."

"코노하씨도요? 다행이다! 저만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아줌마!"

"네가 머리가 나쁘다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아니지, 모모!"

"까, 깜짝이야! 히비야군도, 오빠도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야!"

"지를 만도 하지! 너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기나 해?"

"이... 이익! 당연히 알지! 이치카쨩이 납치당한 엄청 위험한 상황이잖아! 구하러 가야지!"

"그, 그건... 맞긴 맞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닌, 오히려 정론에 가까운 모모의 말에 신타로의 말끝은 흐려졌고, 대려 모모가 더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

"어이! 당신도 멍한 표정만 짓지 말고 화를 내 거나 하라고! 결국 당신도 나나 히요리처럼 실험의 피해자였다는 거 아니야!"

"에? 화, 내야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아, 됐다. 말을 말자."

흥분해서 일어나 있던 히비야는 코노하의 변함없는 태도에 기운이 빠져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콩트 같은 네 사람의 모습에 마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에 따라서 세토도 가볍게 웃었다. 키도는 손으로 머리를 짚긴 했지만 희미하게 실소를 짓기는 했다. 참 바보 같은 이유 때문이긴 해도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볍게 바뀌었다. 그 틈을 놓칠세라 카노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지금은 키사라기쨩 말대로 시라키쨩을 구하는 게 가장 먼저라구? 아빠 실험실은 어딘지 아니까 안내는 맡겨줘."

"아아. 확실히 그게 먼저이기는 하군. 자, 가자. 메카쿠시단의 새로운 임무다. 중요한 만큼 위험하니 각자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갓 들어와서 정신은 없겠지만 히비야하고 코노하, 너희 둘도 도와주길 바란다. 아마 너희 둘도 얻는 게 있을 거야."

"칫, 이렇게 된 이상 당연히 도울 수밖에 없잖아! 거기에 히요리를 구할 증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응... 나도 열심히 도와줄게..."

흥분한 히비야와 여전히 멍한 코노하. 상반된 모습이었지만 그 속의 진지함만은 똑같았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한다. NO. 8 아마미야 히비야, NO. 9 코노하!"

"...뭐야, 그건."

"No. 9?"

이 와중에도 단원 넘버를 붙여주는 키도와 어이없어하는 히비야와멍한 코노하를 보고 카노는 몰래 웃었다. 누나 대신 단장이 막 되었을 때는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키도도 이젠 폼도 잡으며 제법 단장다워졌다. 웃던 카노는 문득 뭔가가 생각나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맞아, 맞아. 마리."

"응?"

"이번 일은 네가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역할이야. 너는 여왕님이거든."

"나, 나 여왕이야?"

카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겠는건 사실 카노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봐도,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마리는 여왕이나 괴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여왕님은 이내 표정을 다잡고 씩씩하게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치카를 구하는 거라면 나, 힘낼게!"

"와아, 믿음직한데요. 마리."

"에헤헤, 정말?"

"가다가 지쳐서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정말 믿음직할 텐데~"

"우우우... 세토오..."

"괜찮슴다, 마리! 여차하면 업어줄 테니까요!"

"남자다운 걸, 세토~ 그런데 타카네쨩은 어떻게 하려고?"

카노의 손가락 끝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타카네를 발견하고 세토는 작게 아 소리를 냈다. 에네는 이치카한테 가기 직전 분명 세토에게 자신의 몸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만약에 안 챙기고 그냥 갔다간... 으윽. 세토는 자신을 날카롭게 째려보던 타카네의 눈빛을 떠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조금 짜증 내는 걸로도 무서운 사람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사태는 부디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리도 챙겨줘야 하는데... 아아...

"저기..."

코노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세토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저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가도 될까?"

"아, 네! 코노하씨가 데리고 가주시려고요?"

"응... 내가 데리고 가주고 싶어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노하는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한쪽 손으로 심장 부근을 짚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카노는 그 모습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기억을 잃어버렸어도 소중한 사람에 대한 잔재는 남아있는 거구나. 자신이 누나에 대한 걸 잊지 못하듯이. 어쨌든 덕분에 갈 준비는 얼추 되어서 메카쿠시단 전원 「107」 문 너머로 발을 뻗었다.

나름 단장이라고 폼을 잡으며 선두로 나아간 소녀,

겉으로는 장난스레 웃고 있지만 실상 누구보다 긴장한 소년,

듬직하게 웃으며 안절부절못해 하는 하얀 소녀를 이끌어주는 소년,

이 상황을 가장 이해 못했으면서도 가장 씩씩하게 발을 뻗는 소녀,

그런 소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뒤죽박죽 아파지는 머리를 짚는 소년,

「이번에야말로」라며 비장한 마음가짐이 된 소년,

뒤에 엎은 검은 양 갈래의 소녀를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소년.

소년, 소녀들이 드디어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안돼?"

"네... 문자도, 전화도, 심지어 인터넷도 먹통이네요. 방해 전파 같은 게 있는지 저도 깨기가 힘들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침울 해있는 에네를 애써 웃으며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봤자 액정을 만지는 것뿐이었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 에네를 위로해주고 있지만 실상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카노에게 괜찮다고 문자를 보낼 때 뜬 송신 실패를 보고 눈치채긴 했지만 설마 에네까지 안 통할 줄은 몰랐다. 애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나.

안돼, 안돼. 지금 뭐 하는 거야! 남에게 기대려고만 하고! 고개를 붕붕 휘저어 아까의 생각을 흩뿌려드렸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그랬다. 이렇게 처져있을 순 없다. 애들이 날 구하러 올 거라는 데에는 한 치의 의심조차 없지만 나 자신도 뭔갈 해야 한다. 날 빤히 쳐다보는데 에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심호흡을 들이쉬며 자신을 달랬다. 용사님이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공주님 따윈 동화책에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그리고 뭣보다 난 공주님 타입이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전 백화점 사건이 있었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도 빠르게 진정되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뭐니 뭐니해도 주변 파악이다. 당연히 「주변」이란 것은 이 더럽게 넓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이 아닌 더 바깥쪽을 의미한다.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눈에 모았다. 그 여느 때보다 더 천천히 눈의 온도가 올라갔다. 일단 이 근처부터 좀 더 먼 곳까지 서서히 능력 범위를 넓힐 생각이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대신 이 방만큼이나 공허한 복도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좀 더 시야를 넓히자 아까까지 타카네씨가 들어가 있었던 수조 같은 게 있는 방과 의료실같이 보이는 방이 보였다. 크기는 대략 이 방만해 보인다. 그렇다는 건 여긴 아까 카노와 왔던 그 실험실 건물? 그리고 그 방 뒤에 복도에서 드디어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 실험복을 입은 세 사람이 적당히 수다를 하며 걷고 있는 것 같은데, 각자 마이크까지 달린 블루투스 이어폰을 달고 있었다.

"...저기 에네."

"네?"

"인터넷을 통해 이 건물 밖 서버에 가는 건 못해도 이 건물 안의 기기로 옮겨가는 건 할 수 있어?"

"그럼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근처에 무슨 기기가 있나요? 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좀 멀리 떨어져 있거든. 그럼 이 방에서 나가야만 하는데..."

능력을 풀고 다시금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쭉 살펴보니까 하나같이 다 첨단기기로 가득하던데 왜 이 문만 열쇠로 열어야 하는 건지... 에네가 따라올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여기에 가뒀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애초에 여긴 에네조차도 뚫지 못하는 방해 전파가 있는 곳이니까. 어쩌면 그냥 별 이유 없이 여기가 유일한 빈방이라서 여기에 가둔 걸지도.

잠겨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꿎은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아까 이 근처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기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열지... 이 근처에 열쇠가 떨어져 있을 리도 없고... 혹시나 하는 맘에 다시 방을 둘러봤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다시 능력을 써서 바깥을 봐도 아무도 없었다. 뭐, 있어도 도움은 전혀 못 받겠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이 방에서 나가는 방법은 그거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따는 수밖에 없나..."

"어머, 어머! 여동생 친구분 문도 딸 줄 아세요? 그거 범죄라구요?"

"순식간에 백화점 메인 컴퓨터를 해킹하는 건 범죄가 아니구요?"

일부러 과장된 에네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 치자 에네는 까르륵 웃으며 뱅글뱅글 돌았다. 나도 살짝 웃어주고는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클립 같은 철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실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았다."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실핀을 겨우 찾아 꺼냈다. 반으로 곱게 접힌 실핀을 일자로 곧게 핀 다음 끝부분만 살짝 구부려 기역 자로 만든 후 열쇠 구멍에 가져다 대었다. 솔직히 딴다고 말은 했지만 말해서 태어나서 난생처음 시도하는 거라 자신은 없다. 나같이 법을 지키며 살아온 애가 따본 적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해보는 것은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고,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고리를 옆에서 바라본 후, 다시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눈에 모으고 눈을 떴다.

"아. 이거 생각보다 훨씬 어렵네."

"네? 지금 손 한 번도 안 움직였잖아요?"

"능력으로 문고리를 투시해서 안 구조를 보면서 따려고 했거든. 근데 딱 맞게 투시하는 게 어려워. 끄응..."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힘을 세게 하면 문고리 자체를 투시해버리고, 약하게 하면 안쪽 구조가 안 보여서 엄청 난감하다. 이 중간의 세기로 해야 하는 건 아는데 그동안 이 정도면 될 거란 수준으로 투시를 해왔지 이런 세밀한 제어를 한 적이 없어서 그 중간이 뭔지 감이 오질 않는다. 좋게 생각하자, 이 기회에 제어를 더 수련하는 거라고. 납치당한 상황에서 수련하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힘을 주었다 뺐다를 계속 반복하다가 겨우 안쪽 구조가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난 또 하나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핀이 안 보여."

낭패다. 안쪽 구조가 보여도 핀이 보여야 손을 적절히 움직이고 할 텐데 워낙 얇은 실핀이다 보니 눈에 힘을 줘도 빼도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와 주지 않는다. 그냥 손끝의 감각으로 어떻게 해볼까 하고 실핀을 움직여 보았지만 한 번도 문 따본 적이 없는 나에게 손끝의 감각이 예리할 리가 없었다. 결국 몇 번 해보다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미치겠네.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계속 집중한 탓에 눈이 어지간히도 뻑뻑하고 아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저께 아지트에서 모모 능력 제어 연습할 때 구경만 하지 말고 나도 좀 할 걸 그랬어.

"여동생 친구분 힘내세요, 힘! 아자아자 파이팅!"

"...그 치어리더 복은 어디서 난 거야?"

"에헤헷, 비밀이랍니다! 아무튼 힘내주세요! 어디에든 다른 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까요!"

활기차게 양손으로 응원 수술을 흔들며 날 응원해주는 에네였지만 내심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날 구해주려고 자신의 몸도 내버려 두고 왔을 텐데 아무것도 못 하고 휴대폰 안에 갇혀있으니 조바심이 날 만도 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침착해.

조바심 내지 마.

조바심낼 수록 일을 그르치기 쉬워져.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잖아.

차분히 가자.

괜찮아.

할 수 있어.

눈을 감고 주문 외우듯이 이 말을 중얼거렸다. 내 버릇 중 하나이다. 시험이나 대회같이 중요한 일인데 긴장될 때마다 일종의 자기암시 걸기. 입으로는 중얼거리고, 머릿속으로는 이 일이 잘된 후에 기뻐하실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메카쿠시단 애들과 다 함께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절히 뜨거워진 눈 안쪽이 어서 눈을 뜨라며 아우성친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할 수 있다. 다시 핀을 열쇠 구멍에 집어넣고 온 신경을 눈에만 집중했다. 드디어 보이게 된 핀으로 문고리 안쪽 구조를 몇 번 건드리니 얼마 안 되어

달칵 소리가 나고, 이내 문고리가 돌아갔다.

"열렸─!"

아니, 잠깐만 기다려. 난 문을 따긴 했지만 돌린 적은 없는데,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문을 딸 줄이야."

내 손이 닿지 않은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을 멍하게 바라만 보다 들리는 목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복도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눈이 부시긴 했지만 내 앞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 각진 안경, 정리 안 된 수염, 무엇보다 하얀 백의와 넥타이에 단 빨간색 핀. 불과 며칠 전에 본 사람일 터인데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목소리를 듣고에네도 누군지 알았는지 이어폰을 통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타테야마 선생님..."

나와 모모의 담임이자 타카네씨의 옛 담임, 그리고 아야노 선배의 아버지이신 타테야마 선생님이 붉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으셨다.


"아저씨."

"응? 히비야군이 무슨 일로 날 부르는 걸까나~?"

별말 없이 잘 걷고 있던 히비야가 갑자기 카노의 후드를 두 번 잡아당겼다. 카노는 내심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뒤로 빙글 돌아 히비야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속인 모습이고, 진짜는 착실히 실험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히비야의 눈에는 그저 카노가 뒤로 빨리 걷는 거로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질문을 던졌다.

"아까 내 도움이 필요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날 잡았었잖아. 그거 무슨 뜻이야?"

"아아, 그거 말이지~ 아까 말했다시피 너는 그 실험으로 인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뱀, 즉 능력을 갖추게 되었어. 너에게 깃든 뱀은 「눈을 집중시키는 뱀」이지.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네가 가진 뱀은 어떤 능력일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이, 카노 장난치지 말고 얼른 알려줘."

"네에~ 단장님! 안 그래도 말할 생각이었다구."

카노는 가볍게 키도에게 대답해준 뒤 분위기를 잡으려 일부러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답답해진 히비야가 카노의 후드를 몇 번 더 잡아당기고 나서야 카노는 겨우 말을 이어주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천리안' 비슷한 능력이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정보도 알 수 있지. 난 실험실의 위치는 알지만 시라키쨩이 정확히 실험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단 말이지~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말을 끊고 카노는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 고이 넣어져 있던 이치카의 붉은 머리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카노의 손에 잡혀 꺼내졌다. 내딛는 발걸음에 따라 끈이 하늘하늘 아름답게 흔들렸다.

"이거, 시라키쨩의 머리끈이야. 능력을 쓰고 이걸 보면 시라키쨩이 어디 있는지 보일 거야.

"헤에... 그럼 그 능력이란 건 어떻게 쓰는 건데?"

"눈에 신경을 집중해서 눈 안쪽이 뜨거워지게 만들면 돼. 단,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면 능력이 풀려버리니까 이 점 주의하도록 해."

"하아? 그렇게 말해서 어떻게 하는지 알 리가 없잖아."

카노는 대답하는 대신 키도와 세토에게 도움의 눈길을 던졌다. 그에 키도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고, 세토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세 사람 다 그 말 외에는 능력 제어법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이걸 말로만 설명한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었다.

"자, 봐봐 히비야군. 이런 식으로 눈에 집중하는 거야! 끄으응...!"

"봐도 전혀 모르겠거든, 아줌마!"

"아, 아줌...!"

"헉헉... 그것보다 모모 너 아직, 능력 제어, 못하잖아. 헉헉... 뭘 잘난 듯이, 가르쳐주고 있는 거야... 하아... 죽겠네..."

"읏...! 오빠야말로 벌써 힘들어서 헉헉거리고 있잖아!"

"당연하지! 내 유리 같은 체력을 과대평가하지 마!"

자랑도 아닌데 당당히 말하는 신타로와 바락바락 대드는 모모, 키사라기 남매는 뛰어가는 와중에도 참 잘 다투고 있다. 옆에서 키도와 세토, 카노가 말리고 나서야 겨우 싸움은 끝이 났지만, 모모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렸다. 오빠인 신타로와 히비야, 어딘지 모르게 닮은 두 사람한테 동시에 잔소리를 들어서 더 그런 듯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얼굴을 붉히던 모모는 잠시 뭔갈 생각하다가 갑자기 홱 카노 손에 있던 이치카의 머리끈을 빼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카노가 막을 새도 없이 머리끈은 모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키사라기쨩?"

"잠시 빌리겠습니다, 카노씨! 히비야군, 물론 난 아직 능력 제어가 서툴긴 하지만 메카메카단이랑 만나서 능력 제어하는 방법을 배웠어.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능력을 쓸 줄 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너랑 마찬가지로 초보인 나한테 배우는 편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모모는 말을 끊고 키도와 카노에게 배웠던 대로 두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만일을 위해 키도가 모모 옆에 바싹 붙었다. 지금이라면, 모두와 함께 있는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모모와 가장 친한 친구인 이치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많이 도와준 이치카를 모모는 꼭 도와주고 싶었다. 항상 이유 없이 시선을 몰아 불편하기만 하고, 싫어했던 이 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카가 대단하다고 말해주었던 이 능력. 그런 능력이 지금 이치카를 구할 한 발이 될 거라고 모모는 믿었다.

그 굳은 믿음으로 모모의 두 눈은 붉은빛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모모의 시선이 닿아있는 이치카의 머리끈에 닿았다. 저절로 모두의 시선이 거기에 쏠렸다.

"그리고 내 능력은 시선을 모으는 「눈을 빼앗는 능력」이니까 이렇게 내 능력을 사용하면 히비야군이 더 집중하기 쉬울 거야!"

"정말 그렇네..."

멍하니 모모 손에 있는 머리끈을 바라보며 히비야는 저도 모르게 순순히 모모의 말을 인정했다.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게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이걸 자신의 능력을 써서 본다면, 어쩌면 히요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히비야의 눈 안쪽이 간질거렸다. 미약하기만 했던 그 감각은 이내 불씨가 갑자기 커지듯이 눈 전체에 퍼졌다. 눈이 뜨겁다. 눈 안쪽에 불이 있는 것만 같다. 「눈에 신경을 집중해서 눈 안쪽이 뜨거워지게 만들면 돼」는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고 히비야는 깨닫게 되었다.

"아."

"뭔가 보여, 히비야군?"

"응. 이 검푸른 머리의 사람은 어제 날 잡았던─아, 이 사람이 아줌마, 아저씨가 말한 그 「시라키 이치카」란 사람이구나."

히비야의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애써 밝게 가고는 있었지만 이치카를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 매한가지였다. 세토 등에 업힌 채 불안한 표정을 짓던 마리를 시작으로 질문이 하나둘 쏟아졌다.

"저, 저기 히비야! 이치카 어때?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

"장소는? 어떤 곳에 있는 것 같아, 히비야군?"

"으음... 가구라던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냥 텅 빈 방 같아."

"텅 빈 방이라~ 텅 빈 방은 꽤 많은데... 하나하나 들어가 봐야겠네."

"그런데 저 아저씨는 누구야?"

"...아저씨?"

"안경을 쓰고 백의를 입은 아저씨랑 같이 있어. 어라? 이 아저씨도 눈이 붉─"

"─큿!"

"잠...! 어이, 카노 같이 가!"

히비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카노는 속도를 높여 빠르게 뛰어갔다. 뒤에서 애들이 급하게 따라오며 자신에게 소리치는 목소리 따위 카노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 뱀이다.

눈이 맑아지는 뱀이다.

그 망할 자식이 지금 시라키랑 같이 있다.

"젠장!!"

이미 한발 늦은 건가! 앞뒤로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발이 두려움에 미약하게 떨렸다.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또다시 소중한 누군가를 잃기는 싫다. 카노도, 다른 애들도 그 마음은 같았다. 예전에 소중한 한 사람을 잃은 기억을 상실한 그 사람까지도. 코노하는 카노를 따라잡으려 더욱더 힘차게 지면을 찼다.

"으앗?!"

"어... 저기... 미안... 그래도, 일단 진정해?"

거의 날아오다시피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코노하에 놀라 카노는 급히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카노가 놀라는 게 자신은 탓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코노하는 떨어지려는 타카네를 바로 업으며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했다. 카노는 어벙하게 있으면서도 타카네의 몸이 심히 걱정되었다. 나중에 돌아오면 몸이 아프다고 할지도 모른다면서. 아, 그때 나한테 짜증 내면 어떡하지. 문득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카노는 실소를 지었다.

"아하하... 깜짝 놀랐다구, 코노하군? 나는 완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 보다 봐. 도착했어."

카노는 무대를 소개하는 것처럼 우아하게 팔을 움직여 한 건물을 가리켰다. 카노와 코노하를 뒤따르던 아이들은 하나둘 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드디어. 드디어 실험실 건물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엄에 한눈에 모두 이 건물이 카노가 말한 실험실 건물임을 깨달았다. 이 안에 이치카가 있다.

"자, 그럼 가볼까. 오늘도 전쟁이다."

단장 키도의 말을 신호로 일제히 건물 안으로 발을 뻗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굳이 붉은 눈이 아니더라도 위압적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는 타테야마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모른 척해야 하나?

아니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귀띔하고 대화를 시도해 봐야 하나?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내 뇌는 미친 듯이 돌아갔다.

"다행이다..."

일단 안심한 미소를 짓고 심장 부근에 손을 갖다 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내가 실험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니 모르는 척하는 게 아무래도 본전은 건질 것 같았다.

"...하! 보기완 다르게 능청스럽군. 시치미 떼지 마라. 「속이는 아이」한테서 다 들었을 텐데?"

아, 이런. 다 알고 있었구나.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비웃으며 날 노려보는 모습에 얼른 태도를 차갑게 바꾸었다. 내 어쭙잖은 연기 따위는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본모습대로 막 나가는 수밖에. 기죽지 않게 나도 눈에 힘을 주고 선생님, 아니 눈이 맑아지는 뱀을 째려보았다. 뱀의 입꼬리가 더욱더 삐딱하게 올라갔다. 「네까짓 게 감히」란 말을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뭐지, 그 눈은? 내가 무섭지도 않은 건가?"

"덥수룩한 아저씨 몰골에 겁먹을 정도로 배짱이 없진 않거든요."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섭다. 카노에게 들었던, 비윤리적인 실험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뱀이 무섭지 않을 리가. 그렇지만 친구들이 날 도우러 와주고 있다. 물론 이 뱀은 그 정도는 가볍게 간파하고 있을 터다. 오히려 그걸 바라고 날 납치한 것일 거다. 즉, 나는 메카쿠시단을 끌어모으기 위한 미끼. 그 애들이 오기 전까지 내 목숨은 무사할 것이다. 아마.

그렇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벌자. 애들이 올 때까지 이 작자가 미친 짓을 더 하지 않게, 애들이 온 후에도 이 작자가 바로 손을 쓰지 않게. 어쩌면 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몰라.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게 뱀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렸는지 계속 올라가던 입꼬리가 원래 자리를 되찾아왔다. 정색하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아까보다 더 차갑고 날카롭고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내밀려 한다.

"겁먹지 마세요, 여동생 친구분! 잘하고 있어요!"

가는 이어폰을 타고 에네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백화점 사건 때 신타로씨가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너무 무섭고 불안한데도 이상하게 용기가 난다.

밀리지 말자.

괜찮아.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한번 핥아 적셔준 뒤 당돌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는 뭔가요?"

도발적인 내 말에 뱀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미약했던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광기 어린 소리로 변모되었다.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름 돋는 목소리였다. 진짜 미친 것 같다.

무섭다. 무서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휴대폰을 세게 쥐었다. 에네가 그런 나를 달래려는 듯 약하게 진동이 울렸다.

그 사이 웃음소리는 차츰 잦아들었고 뱀의 시선은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아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아니라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눈빛이었다만, 어째서인지 공포는 아까보다 더 커졌다. 카노에게 누누히 들었던 거지만 이 눈빛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몸이 오싹오싹 떨려왔다.

"재미있군. 역시 너는 재미있어. 겁도 안 먹고 말이야. 왜 왔냐고 물었겠다? 뭐, 아직은 여유로운 것 같으니 간단히 얘기해줄까. 여태까지 여러 번 얘기했던 것이기도 하니."

"그것참 고맙네요. 그런데─우린 초면 아닌가요?"

뱀의 말에 위화감을 느끼고 조심히 물었다. 물론 뱀의 입장에서 우린 초면은 아닐 것이다. 난 반장이니까 학기 초부터 타테야마 선생님과 뺀질나게 만나며 일을 도와드렸으니 선생님 속에 있는 뱀은 날 몇 번이고 봤을 거다. 하지만 그 많은 만남 중에 뱀과 얘기했던 기억은커녕 뱀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적도 한 번도 없다. 선생님과의 대화도 대부분은 학급 일이나 선생님의 시답잖은 너스레 정도였고, 애초에 난 내 능력을 숨겼고 선생님이 능력자인 걸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말하는 투가 너무 자연스럽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능력을 써서 확인해 봐도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사실이라고 다가온 느낌─

"읏?!"

갑자기 뱀이 몸을 숙이더니 내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의 붉은 두 눈에 마찬가지로 붉은 눈을 한 내가 보였다. 턱이 잡힌 아픔과 선생님이 피우시는 담배 냄새가 풍겨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번 루프 때 눈치챈 건 역시 요행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니면 그 눈, 너의 뱀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루프?"

"뭐, 됐어. 그래봤자 달라질 것이 없을 테니. 아니, 오히려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돌아갈 거다. 너의 존재로 인해서."

말이 끝난 후에도 뱀은 강렬한 기세로 내 눈을 응시했다. 내 눈을 뚫어버릴 듯한 기세에 눌려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나 역시 뱀의 눈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을 써서 선명한 붉은 빛이 된 나와 달리 검붉은 빛깔인 그의 눈은 온갖 것들이 섞여 있어 그의 감정이 무슨 감정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나에게는 이로운 감정이 아니라는 것. 그걸 깨닫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의외로 순순히 손을 뗐다. 약하게 아파지는 턱을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다시 뱀을 째려봤다. 저 뱀의 페이스에 휘말려선 안 되니까. 그런데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뱀은 여전히 날 지긋이 내려봤다.

"「속이는 아이」한테서 얼마나 들었지? 내 실험들에 대해서는 들었나?"

"그 미친 짓들 말하는 건가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경계를 바짝 세운 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뱀은 그 침묵을 대체 뭐로 받아들였는지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미친 짓이라니. 평가가 너무 짜군. 그 실험은 아지랑이 데이즈를 창조했던 10마리의 뱀을 모아 새로운 「괴물」을 만든 뒤, 이 세계 또한 아지랑이 데이즈처럼 만든다는 원대한 계획이란 말이다. 뭐, 네 녀석도 알 테지만 어떤 「바보」 때문에 그 계획은 틀어져 버렸지."

「바보」는 바로 아야노 선배를 말하는 것일 거다. 아야노 선배가 8월 15일 날 일부러 자살하고 능력을 얻은 채 이쪽 세계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걸 카노에게 들었으니까. 다만 타테야마 선생님의 모습을 한 채 아야노 선배를 바보라고 칭하는 것에 그만 눈썹이 움찔거리고 말았다. 아야노 선배는 타테야마 선생님의 딸인데...

"그 덕분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처음부터 다시」하는 거지."

"「처음부터 다시」라니... 뱀은 이미 아지랑이 데이즈 내의 아야노 선배에게 있고 이쪽 세계에 있는 한 그 뱀을 빼 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말을 똑바로 들어. 「처음부터 다시」라고."

뱀은 「처음」에 악센트를 주며 강조했다. 처음? 처음이라니? 실험의 맨 처음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타카네씨와 코노하씨의 실험과 히비야의 실험은 이미 성공했을 터, 일부러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애초에 아야노 선배때문에 실험을 처음부터 할 생각이었다면 히비야의 실험은 실행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히비야의 실험을 한 걸까. 그만큼 히비야의 실험이 중요한 실험이라는 걸까? 중요도로 따지자면 히비야보다 여왕 뱀을 가진 마리가 더 중요할 텐데? 여왕 뱀은 새로운 괴물의 핵심이니. 뱀이 한 마리 없어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본인 입으로 계획이 틀어졌다고 했으니까. 혹시 뱀의 숫자는 괴물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10마리의 완전체가 아니라서 아지랑이 데이즈화는 못해도 뭔가는 할 수 있다든가. 그 뭔가를 하려는데 뱀이 9마리가 필요해서 히비야를 이용해 뱀을 한 마리 더 데리고 온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괴물의 힘을 이용하여서 하려는 것은─

─그때 내 뇌를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루프

아까 뱀은 「저번 루프 때 눈치챈 건 역시 요행이 아니었던 모양이군」라며 루프를 언급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라고 말했다. 그 「처음」이란 게 혹시?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라는 건 진짜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건가?!

"설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래! 드디어 눈치챈 모양이군. 그 표정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붉은 두 눈은 내 「설마」가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에는 없슴다!"

"여기도 없어..."

"그쪽도냐... 여기도 없다고."

"어이, 카노 어떻게 된 거야! 어디에도 없잖아!"

"잠, 키도 아팟!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텅 빈 방은 엄청 많은걸."

키도에게 맞은 배를 문지르며 카노가 대꾸했다. 웃으며 말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 실험실 건물은 크기는 큰 주제에 실제로 사용되는 방은 굉장히 제한되어 있어서 텅 빈 방은 널리고 널렸다. 지금까지 메카쿠시단이 뒤져본 방만해도 어느덧 10개. 키도의 능력이 있긴 하지만 사람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곳곳에 있는 감시자들까지 피해 다녀야만 해서 시간이 장난 아니게 들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에도 시라키쨩은...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카노는 모두를 이끌고 다음 층으로 향했다. 초조해지는 것은 비단 카노뿐만이 아니었는지 신타로가 능력 쓰는 데 집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히비야에게 물었다.

"히비야, 텅 빈 방 이외에 뭔가 더 단서 같은 건 없어?"

"아까부터 말했잖아. 없다고. 문은 열려있는데 아저씨가 가로 막고 서있어서 두 사람이랑 텅 빈 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

"저기... 히비야, 이치카는 어때? 괜찮아?"

"아~! 그러니까! 괜찮다고도 계속 말했잖아! 계속 얘기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미, 미안해..."

아까부터 계속 날아드는 질문들에 짜증이 난 히비야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마리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런 마리를 세토가 위로해주고 있는 사이 히비야는 능력이 풀리자 그냥 확 눈을 감아버렸다. 모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처음 능력을 쓰는 터라 내내 쓸데없이 눈에 힘을 주고 있어서 눈이 무척 아려왔다. 능력은 툭하면 풀리기 일쑤인데 마리처럼 다른 사람들이 계속 저를 보채는 터라 안 쓰고 있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치카와 같이 있는 아저씨를 만나면 히요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히비야를 움직이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답답하게 단체로 헤매고만 있다니... 제길. 히비야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어허! 히비야군,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아줌마!"

"이익! 아줌마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것보다 능력 또 풀렸어. 다시 반짝반짝 보이게 해줘."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치카쨩이 위험한 상태니까. 어리고 능력 제어 못 하는 히비야군을 위해 아줌마가 아닌 누나인 내가 또 힘을 써줄게!"

"어이, 키사라기. 너도 이제 갓 능력 제어할 줄 알게 된 거잖아. 너무 자만하지 말도록"

"넵!"

키도의 핀잔에 모모는 헤헤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하더니 눈에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직 능력 제어가 미숙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모모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키도는 모모의 옆에 바짝 섰다. 히비야는 모모의 능력으로 다시 반짝반짝해 보이는 이치카의 머리끈을 바라보았다. 눈 안쪽이 뜨거워짐과 동시에 이치카와 어떤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보았지만, 아까와 별 차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하는 건지... 히비야는 혹시 들릴까 싶어 눈에 힘을 더 주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힘을 더 준 탓에 능력이 풀려버렸다. 히비야는 치솟는 짜증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두 눈 사이를 지그시 누른 후 다시 집중하려 애썼다.

한편 히비야, 모모, 키도, 그리고 체력 약한 마리를 제외한 남자 단원들은 또 빈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벌써 5층째인데 어디에서도 이치카는 보이지 않았다. 실험실 건물은 총 7층. 이런 식이면 이치카를 찾기도 전에 곳곳에 있는 감시자들에게 잡힐 것만 같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신타로는 겨우 방 하나를 확인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모 곁으로 돌아왔다.

"으휴... 하여간 약하다니까. 그보다 어때? 있었어?"

"있었을 것 같냐. 젠장... 힘들어 죽겠네. 너희 쪽은 어때? 뭐 바뀐 거 없어?"

"없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번 볼게."

"...그러고보니 문 열려 있었다고 했었지?"

"응."

"그럼 우리가 이렇게 방 뒤지고 다니는 건 의미 없는 거 아냐? 그냥 방 문 열려있는 데만 보면 되잖아."

"아."

뒤늦게 돌아온 세토와 카노가 신타로의 말을 짓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동안 우리가 했던 짓은 무엇이었던 건가.

"그런 건 좀 빨리빨리 말해달라고, 신타로군~"

"나도 방금 깨달았다고! 알았으면 이러고 있었겠냐! 젠장. 아까부터 머리가 너무 아파..."

"신타로 괜찮아? 이거 마실래?"

"어? 어어... 고마워, 마리."

"안색이 좋지 않슴다. 머리 많이 아픈가요?"

"아프다기보단... 뭐랄까, 혼란스러워."

신타로는 마리에게 받은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이 건물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기시감은 신타로 뇌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낯설지 않다. 카노가 어디 어디가 빈방이라고 말해주기도 전에 빈방을 찾아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어떠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어서 어지러웠다. 원인 불명의 귀울림은 멈추지 않는다. 이 기억에는 없는 기억들이 대체 무엇이고 뭘 의미하는지 신타로는 알 수가 없었다.

"어라? 그런데 코노하는 어디 있어?"

"응?"

그러고 보니 탐색조 중에 유일하게 코노하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코노하에게는 안쪽에 있는 방을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아서 진작에 돌아왔어야만 했다. 게다가 코노하는 누구보다도 속도가 빨라서 항상 제일 먼저 돌아와 있곤 했다. 그런데 여태껏 오고 있지 않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애들은 찾으러 가자는 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장인 키도 중심으로 모여 일제히 걸어갔다. 코노하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고, 코노하의 큰 키와 특이한 외견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 저기 있다. 코노하─엑."

다만 찾기 싫은 사람들까지 찾아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하얀 옷을 입고 마이크가 달린 이어셋을 찬 사람들이 코노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총까지 겨누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건만 코노하는 그 상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여자애 정말 못 봤냐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에게 이치카의 위치를 물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위험한 상황인 만큼 코노하의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키도는 머리를 짚었다.

"이걸 어쩔까나~? 내가 능력 쓰고 가볼까, 키도?"

"아니, 수가 꽤 많으니 그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할 거야."

"백화점 때처럼 마리랑 눈 마주치게 하면 되지 않아?"

"나?! 우으... 저 사람들 무서운데..."

"괜찮아, 마리쨩! 그때처럼만 하면 되니까!"

"으응!"

"뭐야, 뭐 하려는 건데."

유일하게 백화점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히비야한테 모모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잘 보고 있으라고 대답한 후 마리와 함께 키도에게서 두세 발짝 떨어졌다. 코노하까지 돌로 만드는 사태를 막기 위해 카노가 능력을 써서 저들과 비슷한 모습을 한 채 다가갔다. 카노는 하얀 옷의 사람들에게 의뢰자의 명령으로 이 청년은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말하며 등 뒤로 OK 신호를 보냈고, 그 신호를 확인한 키도는 즉시 모모와 마리 쪽의 능력을 풀었다.

"키사라기 모모, 16세! 아이돌을 하고 있습니다!"

"죄송해요!"

메카쿠시단과 카노때문에 눈이 가려진 코노하를 제외한 모든 이가 모모에게 눈을 빼앗겼고, 마리와 눈이 마주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작전 성공이라며 모모와 마리는 웃으며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두 사람을 보던 히비야는 뭔가에 놀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줌마, 아이돌이었어?!"

"응! 난 아줌마가 아니라 아이돌이라구. 아이돌! 못 믿겠으면 노래 불러줄까?"

"그건 임무가 완전히 끝난 후에 하도록 해, 키사라기."

"코노하 다친 데는 없어?"

"아, 응... 괜찮아."

신타로의 말에 코노하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으로 위협받기만 한 모양이었다. 한편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을 장난스레 쿡쿡 찔러보던 카노는 이내 그들의 귀에 박혀있던 이어셋을 빼내어 본인이 썼다. 방해 전파가 깔린 이곳에서 유일한 통신 수단은 뱀이 나눠준 이 이어셋뿐이었다. 혹시나 작은 단서라도 건지지 않을까 카노는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왔나 보군."

"왔다니 누가요? 그보다 제 「설마」가 진짜 맞는 거예요? 빨리 대답해!"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 무대는 지금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니까."

뱀은 내 말을 가볍게 밟아 넘기고서는 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주 잠깐이라도 반항할 생각을 못 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뱀은 내 물음의 대답을 회피했을 뿐,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의 긍정을 한 느낌이다. 만약 정말로 내 「설마」가 맞는 거라면...

말도 안 돼.

그런 미친 짓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너무하잖아, 이건.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미친 짓을 멈출 수 있지?

내가 대체 뭘 해야?

메카쿠시단 애들과 만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따위 말들이 뇌 속에 가득 차버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다시 주저앉을 나를 끌고 뱀은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힘없는 발이 질질 끌리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뱀은 너무 즐거워서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귀에 있던 이어셋의 마이크를 내렸다.

"나다. 최상층으로 올라갈 테니 그 꼬맹이들을 데리고 오도록."

꼬맹이들? 애들이 온 건가?

"오지 마... 도망쳐!"

너희들이 오면 모두 죽을지도 몰라! 닿을 리 없다는 걸 뻔히 알기에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에 뱀은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더욱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서 소리 없는 진동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린 내 두 눈에는 검은 색깔만이 채워진 핸드폰 액정만이 들어왔다.


지직-

한 줌의 소리도 없던 이어셋에서 희미한 노이즈가 들렸다. 분명 사람 목소리였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고 잡음이 심한 탓에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잘 들으려 카노는 한껏 귀 기울여봤지만, 아까의 노이즈를 끝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단서를 놓친 건가 싶어 귀를 떼려 하기 무섭게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여보세요? 들리십니까?”

"으앗?!"

방심하던 중 들려온 귀를 지르는 목소리에 카노는 먹먹해진 귀를 잡고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얼마나 소리가 컸는지 주변에 있던 다른 애들도 그 소리를 전부 듣고 카노 근처로 몰려들었다. 와글거리며 금세 시끄러워진 와중에 카노는 어딘지 익숙한 이 목소리를 곰곰이 되씹었다. 이 목소리는─

"─에네?"

"에네?!"

“오오! 이 목소리는 여우눈씨! 역시 이곳에 와있었군요! 아, 거기 제 몸 있나요?”

"있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라키쨩은?"

"그 수염 턱주가리 아저씨가 데려가 버렸어."

이어셋이 아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동 시선이 코노하쪽으로 옮겨갔다. 가장 놀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코노하였는지 평소 멍한 얼굴엔 누가 봐도 역력히 놀란 기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코노하의 등에서 내려온 타카네는 고맙다는 말 대신 코노하를 한번 째려봐주고는 몸을 몇 차례 움직였다.

"아아, 역시 이 몸은 좀 불편하네. 근데 왜 이렇게 목이 아프지?"

타카네가 목을 빙글빙글 돌리자 뚜둑 소리가 났다. 카노와 세토는 코노하를 한 번 보고는 서로 마주 보며 암묵의 대화로 혹여나 자신들에게로 불똥이 튈까 입을 다물고 있기로 정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로 붉은 저지가 펄럭이며 느리게 타카네 쪽으로 다가갔다.

"진짜... 타카네... 선배?"

타카네는 자신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검은 눈과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는데... 속으로 짜증을 내며 타카네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렸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콕 박힌 시선은 없어지지 않자 짧게 한숨을 쉬고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안녕, 신타로."

"진짜로 타카네 선배... 입니까?"

"아아아! 불편해! 갑자기 웬 존댓말이야! 차라리 평소처럼 싹수없게 굴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따가 다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따라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신타로의 존댓말과 선배 소리에 타카네는 몸서리를 치더니 신타로의 손목을 낚아챘다.

"무, 무슨?!"

"말했잖아? 이치카가 수염 턱주가리 아저씨한테 끌려가 버렸다고."

"어디로 갔는데?"

당황해하는 신타로를 무시하고 카노가 재빠르게 말을 붙였다. 타카네는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인 메카쿠시단을 쭉 훑어보며 답했다.

"최상층. 너희를 최상층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리더라."

"...메인 연구실."

카노가 멍청한 표정을 한 채 중얼거렸다. 최상층은 뱀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일급 비밀의 메인 연구실이었다. 거기로 우릴 데려가는 이유는 대체 뭐지? 카노는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러보려 했으나 그 대답이 무엇이든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최상층으로 가는 것.

"그럼 갈까."

단장 키도의 말을 신호로 일제히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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