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aris
03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어둠 속에서 새하얀 땅 위를 걷고 있다. 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세상. 유채색은 존재하지 않는 백색 공간에서 정처없이 떠돌았다. 이곳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나는 무얼 찾아 떠돌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형상화된 것처럼 저 멀리 흐릿한 형체가 떠올랐다. 검은 손에 끌려가는 사야의 모습.
“삼촌!”
“샤!”
검은 손은 내 아이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안 돼, 그러지 마. 차라리 날 데려가. 그 아이는 안 돼. 손을 뻗고 불꽃을 피워올려도 흩어지는 불씨는 어둠을 밝히지 못했고, 하얀 세상을 녹이지 못했다. 하하하, 검은 손 위로 거대한 부리가 튀어나오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신을 향한 조롱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부리라고 생각했던 가면이 벗겨지면서 드러났다. 카른. 내 아이를 데려가는 과거의 끊어내지 못한 잔재. 그의 검은 수족들은 사야의 입을 막고, 몸을 휘어감으며 그의 품속으로 잡아당겼다. 간절히 나를 쳐다보는 눈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손을 뻗지만 끝끝내 가까워지지 못했다. 비웃음 담긴 목소리가 까마귀 떼가 우는 것처럼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너의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해라, 아미토.”
윽! 복부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땅 위로 몸이 처박혔다. 손으로 환부를 감싸고 남은 손으로 하얀 땅을 쥐어뜯으며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몸은 의사를 따르지 않았고, 카른과 사야의 모습은 점차 흐려졌다. 안 돼, 안 된다고. 샤, 내가 갈게, 잠시만….
“오빠….”
흠칫. 땅을 쥐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흰 세상을 밟고 선 작은 발.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자 아이의 체구치고도 여리고, 얇은 다리가 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 드레스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보다는 창백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카락에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는데도 눈은 깜빡임조차 허락지 않은 채로 결국 야윈 얼굴을 담아냈다. 상대는 표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조각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웨르….”
“오빠, 도와줘. 아파.”
“웨르, 내가, 내가….”
“오빠, 왜 안 도와줘? 왜? 또 구하지 않는 거야?”
“아니야, 웨르. 그게 아니야. 제발….”
상처도 돌보지 않고 양손으로 너를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너 또한 닿지 않았다. 그 때처럼 네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겨우겨우 다가가 손을 뻗어도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막혔다. 이깟 바람이 뭐라고. 그렇지만 손은 바람을 지나치지 못 했다. 순백의 머리카락과 드레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웨르의 몸은 땅에서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발끝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왜 아무도 지키지 못할까. 나라는 녀석은 결국 이렇게 잃기만 하는 걸까. 발끝이라도 겨우 닿을까 했는데 손이 닿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거두지 못했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면서도 너를 놓칠 수 없었다. 네가 나의 미련이자 절망이다. 다시는 너처럼 잃고싶지 않았다. 몸을 휘감는 바람에 웨르의 몸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제는 가슴까지도 흐려진 웨르를 올려다볼 때, 그 입술이 움직였다.
“오빠….”
“헉!”
“자기야! 정신이 들어?”
하이엠스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붉은 잔상에 두 눈을 깜빡였다. 샤…샤.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족이 침대에 누운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아귀에 담긴 힘이 강해서, 하이엠스는 말하지 않아도 감정을 전달받았다. 걱정과 분노.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가장 강렬한 두 감정이다.
“샤샤, 얼른… 윽!”
“아직 일어나지 마라.”
문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하이엠스는 상체를 일으켰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옷의 핏물이 배었다. 사야샤는 손을 더욱 꽉 쥐었지만 하이엠스는 다리까지도 침대 밖으로 빼내 일어서려 했다.
“내가 일어나지 말라고 한 거 같은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탁, 그의 머리를 파일철로 쳤다. 그러나 하이엠스는 그것을 쳐내며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 해. 샤를 구해야 해….”
“이 상태로 잘도 가겠다. 좋은 말로할 때 앉아.”
“가야한다고. 막지 마, 막으면 선배라도….”
“하, 답없는 새끼.”
턱, 쿠당탕! 발을 거는 것조차 피하지 못한 하이엠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윽! 그 충격으로 상처가 또 터졌는지 손이 배를 움켜쥐었고, 사야샤가 옆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탁, 탁, 탁. 서류철로 제 어깨를 두드리며 선배라고 불린 이가 한심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너보고 구하러 가지 말래? 근데 그 꼴로 어쩔 건데. 걔네가 뭘 원하는 지 알면서 목숨 헌납이라도 하게? 네 목숨 하나면 끝이야?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써? 너 하나 잡겠다고 그 집 부부는 그 녀석들한테 감시당하고 협박당했어. 그 때 만약 딸이 이능력자인 걸 들켰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런데도 그 부부는 너희한테 미안하다 말하는데, 넌 네 사정이면 끝이야?”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하이엠스는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었다. 알 수 있다. 맞잡은 사야샤의 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지금 당장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있다는 걸. 사야샤를 말릴 만한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다. 아마도 진작 그러고 싶던 걸 하이엠스 때문에, 그리고 앞에서 논리적인 말만 해대는 선배 탓에 못 가고 있었을 거다. 분노와 인내가 손을 타고 전해져와 맞잡은 손이 떨렸다. 머리 위에서 어깨를 두드리던 파일철 소리가 잦아들고 한숨소리가 깔리면, 선배는 무릎을 쪼그려 앉아 하이엠스와 사야샤를 보았다.
“너희가 강한 건 알아. 그런데 둘이서 다 해결할 수 있으면 너희는 뭣하러 여기에 들어왔냐? 우리가 약해서 너희가 구제해주러 왔어? 결국 서로가 서로 돕고살자는 거 아니었냐 이 말이야.”
“…….”
“너희 아이를 구하러가지 말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갈 거라면 우리도 같이 가라. 이미 밖에서는 너희를 도와줄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 녀석들에 대한 정보도 나름 모아둔 게 있다. 어차피 그 녀석들의 목표는 너희가 오는 거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무턱대고 가는 것보다는 계획을 세우고 찾아가는 게 그 아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내 말에 틀린 말이 있어?”
“…없어.”
“그럼 일단 누워 있어라. 늦어도 밤 전에는 다 준비 될 거야. 우리가 조사한 것도 있지만 네가 아는 것도 있겠지. 이따가 회의할 때 한번에 취합할 예정이니까 그 전까지 회복하고 있어. 그리고… 사야샤 잘 붙들고 있어. 뛰쳐나가려는 거 너 때문에 잡아둔 거니까.”
하여간 닮은 녀석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선 선배는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고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하이엠스는 사야샤의 손을 꼬옥 쥐며 고개를 숙였다. 목을 긁으며 올라오는 목소리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미안해, 샤샤. 내가 지키지 못했어. 바보 같이….”
“자기 탓이 아니야. 그 녀석들이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왔잖아. 자기여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내 잘못으로 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샤는 그렇게 약한 애가 아니야. 나랑 만났을 때부터 강한 아이였어. 그래도 우리가 얼른 구해주러 가야지. 샤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그렇지, 자기야?”
“…응.”
숙인 고개를 들지는 못 했지만 그런 그를 감싸듯, 사야샤의 손이 그의 손 위를 덮었다.
주변이 온통 무채색으로만 가득한 공간. 붉은 머리의 아이는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침대에 앉아 있고, 그 앞으로는 가면을 쓴 사람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아이를 관찰했다. 딱 봐도 무서울 법한 상황에서도 사야의 녹빛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가면 뒤의 붉은 눈동자가 똑같이 그것을 응시하며 부리 위를 입술 대신 매만졌다.
“참으로 신기해. 친 혈육도 아닐 텐데 이렇게 닮을 수가 있나? 머리 색깔이며, 생긴 거며, 그리고 그 재수없는 눈동자까지 정말 단 하나도 다른 게 없네.”
드륵,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 카른은 사야의 턱을 잡고 위로 당겨들었다.
“다른 건 다 사야샤를 닮았는데, 나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는 정말 아미토 녀석을 닮았어.”
“이거 놔!”
사야는 고개를 돌려 손을 쳐내며 발버둥쳤다. 카른은 그것을 얌전히 놔두었고, 침대 위로 기어올라간 사야는 더 높은 포식자에게 날을 세우듯이 으르렁거렸다. 카른은 자신의 손을 살살 흔들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성격까지도 쏙 빼닮았네.”
“너가 이래봤자 샤샤나 삼촌이 오면 끝이야!”
“두 사람에 대한 신뢰가 크네? 그 중 한 명은 저번에 중상을 입지 않았던가.”
“삼촌은 그 정도로 쓰러지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데 너, 아미토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그거야 물론….”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걸? 그 두 사람이 강한 것 정도는 알아. 수준급이지.”
카른의 말에 사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숨에 바뀐 목소리 톤과 가면 너머에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둘에게 느끼는 감정이 보통의 감정이 아니라는 게 어린 나이임에도 잘 느껴졌다. 달칵, 카른은 가면을 벗어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냈다. 한 쪽 눈가를 뒤덮은 화상 자국. 그 아래에 붉은 눈동자가 사무치는 원망을 담아 사야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확실히 다 눌러버릴 거야. 그놈들이 피워대는 불꽃따위, 불씨조차 남지 않게 꺼트려주지. 너를 이용해서 말이야.”
짓누르는 강한 위압감에 사야는 이불보를 꽉 쥐고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카른은 가면을 얼굴 위로 가져갔다. 역시나 재수없는 눈빛. 휙, 몸을 돌려 문을 연 카른은 밖으로 나가며 사야를 돌아보았다.
“그 때까지는 네게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거니까 가만히 있도록 해. 그래야 죽기 직전에 서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틈 사이로 카른의 붉은 눈이 점차 사라졌다. 꽉 깨문 잇새로 사야의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샤샤, 삼촌….”
“자! 이걸로 모든 계획은 전달했다. 모두 확인했겠지.”
선배가 책상 위를 양손으로 짚고 일어서며 묻자 자리에 앉은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까이에 앉은 하이엠스와 사야샤의 손은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좌중을 한 번 돌아본 그는 이어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아이의 구출!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안전히 빠져나오는 게 목표다. 모두 명심해! 우리의 목표는 절대로 싸움이 아니다!”
“네!”
무너뜨리기 위해 싸움을 건 적들. 그들을 상대할 것을 각오하며 흰 제복을 입은 모두가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싸움. 리버티가 비상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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