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aris
02
휴일의 아침은 느긋하다. 하이엠스는 식사를 마친 후에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사야샤는 소파에서 빈둥댔다. 사야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보통은 반대가 맞지 않나 싶은 말이 나올 법했으나 이들에게는 딱히 필요없었다. 이게 우리였으니까. 설거지를 마친 하이엠스는 손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소파로 다가왔다. 사야샤와 사야의 한가운데에 앉은 그는 무릎을 사야샤에게 내어주었고, 팔은 사야의 어깨에 두르며 웃었다.
“우리 샤는 휴일 아침인데도 열심히 책 읽네. 샤샤는 밥 먹자마자 드러누웠고.”
“샤가 원래 성실하잖아.”
“샤샤는 원래 그렇잖아.”
동시에 대답하는 말에 하이엠스는 웃었다. 비슷한 말을 하는 것도 웃긴데, 둘의 성향을 긍정하는 말이면서도 그 뜻이 이리도 다르니 웃기지 않을 리 없다. 양손이 사야의 동그란 머리와 사야샤의 앞머리를 쓸었다. 애정 어린 손길에 두 사람은 편히 기댔다. 이 시간이 최고의 휴식이다. 비록 이곳에서 평생을 살 건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집인 이상 필요한 물건은 두루 있었다. 텔레비전도, 전자기기도, 책도. 그 외로도 사치품이 많지는 않을지언정 남아있는 문물은 많았다. 그런데도 하이엠스는 이 둘과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기대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아, 맞다. 이따가 장 보러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있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이엠스가 둘을 보았다. 식재료들이 거의 다 떨어져서 점심이 되기 전에 장을 보고와야 했다. 사야샤는 드러누운 몸을 뒤척이며 오늘은 푹 쉴래, 라고 대답했고 책에서 고개를 돌린 사야는 에메랄드를 닮은 녹빛 동공으로 나는 갈래, 답했다. 이 착한 아이는 삼촌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귀여운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편히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아직 밥 먹은지 30분도 안 지났으니까. 더 쉬어도 괜찮았다.
“지금이 8시니까 이따가 9시쯤 되면 나가자.”
“알았어.”
그 때까진 쉬자는 말을 알아들은 사야는 하이엠스의 팔에 등을 기대어 마저 책을 읽었다. 이제 11살. 한창 뛰놀아도 좋고 게임이든 텔레비전이든 재밌는 걸 찾고자 한다면 부탁할 수 있을 텐데도 사야는 책을 좋아했다. 하이엠스와 사야샤는 육아에 크게 관여를 안 한다. 단지 사야가 하고싶은 걸 하게 놔두고 좋아하는 걸 챙겨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로도 모자라서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은데 사야는 욕심을 내지를 않았다. 어쩌면 기회가 적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여건이 좋은 중간 지역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게다가 이쪽 부근은 아직 불안해.’
질서를 잡아가는 초창기다 보니까 인사이동은 어디에나 있다. 몇 주 전에 들은 안 좋은 소식을 경계했지만 아직까지는 별 일 없었다. 리버티로부터 연락도 없었고, 그도 수상한 기척 같은 걸 못 느꼈으니까. 그렇다 해서 안심이 될 리가 없었으므로 차라리 그들이 빨리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게 나았다. 그러나 8구역에 자리 잡은지도 오래된 건 아니라서 실질적으로 자금이 부족했다. 더 조심해야지. 사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 했다. 동그란 뒤통수를 담던 시야가 눈꺼풀이 닫히며 어두워지고도 그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잔상이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하는 순간까지도, 하이엠스는 다짐을 되새겼다.
*
“아침 장터라서 그런지 조용하네.”
“응.”
“맛있어?”
“먹을만 해.”
사야의 대답에 웃음이 샜다. 양손에 각각 장바구니와 사야의 손을 잡은 하이엠스처럼, 사야도 양손을 둘 다 쓰고 있었다. 신상으로 나왔다는 말에 하이엠스가 사준 아이스크림이었는데 안 사줘도 된다고 하면서도 막상 사주면 잘 먹는 조카를 보며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장바구니에 빼곡히 담긴 식료품이 보였다. 계란과 고기, 야채들과 밀가루나 면 같은 것들. 가게를 마치고 들어갈 때 조금씩 사들고가야하는데 최근에는 신경이 곤두 서서 이번에 몰아서 사버리고 말았다. 그렇다해도 소식하는 하이엠스와 사야샤와 달리, 성장기인 사야는 음식을 곧잘 먹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안 했다.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윽! 안 그래도 생각하던 걸 치고 들어오네.”
“그럴 거 같았어. 또 나한테 잔뜩 먹으라고 만들어 줄 계획이지?”
“샤는 이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
“매일 내가 제일 많이 먹는데 당연하지. 이런 건 다섯 살짜리 애도 알 걸.”
사야는 픽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는 소리 들을 열 한 살은, 하이엠스의 눈에는 너무도 귀여워서 잡고있던 손을 놓고 대신 머리를 헝클였다. 아, 삼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좌우로 도리질쳤지만 그 모습까지도 조그마한 소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딱 아기 고양이가 이런 느낌이다. 분명 이 생각을 말로서 꺼냈다면 절대 아니라고 성화를 냈을 테지만.
“여기도 잠시만 들르자.”
”응.“
둘의 발걸음을 밀가루를 파는 가게 앞에 멈춰섰다. 안정화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구축된 건 식량의 공급을 높이기 위한 농사와, 그것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물론 공장은 도시에 가까운 부지에 설치되었고 어지간한 마을 하나에는 이런 가게가 한 두 개 있을까 말까한 형편이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을 수준으로 꾸준히 물량이 들어왔다. 게다가 별개로 열매나 약초 따위를 갈아주거나 직접 파는 곳이기도 해서, 필요할 때면 찾아오고는 했던 단골 가게다. 애초에 빵집에서 쓰는 밀가루는 모두 이곳을 통해서 얻는데다가 리버티와도 연이 있는 곳이라는 게 더 큰 이유라면 이유겠다.
”누님, 형님. 있어?“
딸랑, 문 위에 달린 종이 흔들리면서 맑은 소리가 퍼졌다. 평상시였으면 반겨주었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휴일에는 딸까지 가게에 앉아서 오순도순 앉아있던 일이 많았는데, 문 열어두고 어디라도 간 걸까? 의문을 표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샤,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입구에서 만난 길고양이에게 시선이 빼앗겨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로 장난을 치던 사야는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냥. 찰나에 고양이가 손에 든 막대를 빼앗아가버리자 아, 짧은 탄식을 뱉으며 두 고양이는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하이엠스는 입구를 등지며 내부를 살폈다.
”이상하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주변으로 퍼지지 못하고 입가에만 머물렀다. 이상했다. 가게는 열려있는데 정작 사람이 있던 흔적이 안 느껴졌다. 분명 난방기구는 돌아가는 거 같은데,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낮아지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침에 가게를 연것치고는 한 쪽에 배치된 기계도 돌아간 적 없다는 듯이 차가웠고, 지나치게 인기척이 없었다. 기껏해야 뒤에서 사야와 고양이가 서로 노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아무도 없어?“
가게 안쪽에 방과 연결된 문을 향해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여봤으나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정말 가게만 열어두고 가족끼리 어디 갔나. 그렇다면 닫았다는 표시라도 했을 텐데. 하기사, 같이 밥 먹기 위해 나갔거나 가볍게 장을 보러 갔을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 가게에는 훔칠 만한 물건도 많지 않았으니 이렇게 보안도 허술한 것이겠지. 입구에서 장난치는 소리가 가게를 채우듯 괜한 잡념이 그의 머리에 가득 찼다.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왜.
‘왜 이렇게 감이 안 좋지?’
최근에 들은 소식 탓일까. 군부의 인사이동과 리버티와 연이 있는 이 가족의 부재가 억지로 연결됐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러나 곧 생각을 지웠다. 이곳이 리버티와 연이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딸이 메트로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버티는 아이에게 생기는 이능력 파장이 군부에게 들키지 않게 도와주었고, 그 후로도 능력을 함부로 쓰지말라는 교육과 함께 원조를 했다. 부부는 감사의 의미로 적극적인 활동까지는 아니고, 필요시에 가벼운 연락통 정도의 역할만 해주었다. 그렇기에 덜미가 잡힐 건 없다. 그래. 억측인 거다. 최근 들어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라며 하이엠스는 고개를 저었다. 가게에는 다시 찾아오고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 입구에 있을 사야를 부르기 위해 하이엠스의 고개가 천천히 뒤돌았다.
”샤, 이제 그만 가….“
뒷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끊긴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시끄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고양이와 놀던 탓에 가게를 살피는 동안 끊기지 않던 소리였다. 고양이가 돌아갔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샤는 나를 불렀을 텐데? 휙! 단숨에 몸이 뒤돌고 아무도 없는 빈 출입문 앞을 발견했을 때 우당탕, 하이엠스는 빠르게 뛰쳐나갔다. 이것도 괜한 걱정인 거다. 고양이랑 놀다가 잠시 옆 건물이나 골목에라도 갔겠지, 무언가 흥미를 끌어 그곳에 구경 간 거겠지. 생각과 달리 굳은 표정으로 뛰쳐나온 그의 귀로.
”안녕?“
”…크윽!“
나긋한 인사말과 함께 허리쪽으로 알싸한 고통이 몰려왔다. 손에 들려있던 장바구니가 떨어지며 내용물이 부서지고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선은 땅바닥이 아니라 제 허리를 찌른 날붙이를 든 괴한으로 향했다.
”눈빛 무섭네. 미친 개라더니, 킬킬….“
푸욱, 조소 섞인 기분 나쁜 목소리를 가진 괴한은 허리에 박혀있던 단도를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허리를 짚으며 몸을 숙인 하이엠스의 시선이 절로 아래로 내려갔지만 그는 어떻게든 고개를 들기 위해 애썼다. 괴한이 내려앉은 자리에 여러 개의 발이 있었다.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쳐들자마자 발버둥치는 작은 몸통이 보였다.
”…으읍! 읍!“
”…샤!“
아픔을 참는 탓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겨우 사야를 불렀다. 아이의 작은 몸만큼의 팔뚝을 지닌 무식하게 거대한 녀석이 샤의 입을 막고 있었고, 그 옆으로 똑같은 로브를 눌러쓴 녀석들이 연달아 서있었다. 로브 아래로는 가면까지 쓰고있어 누가보아도 수상한 행색이었으나 그 모습을 볼 사람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아침이라 사람이 적기는 했지만 지금의 길거리는 완전히 휑했다.
‘당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곳과 길거리는 지금 차단되었다는 걸. 오랜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도저히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는 고요라는 것을. 한 쪽 무릎이 땅에 닿은 채로 상처를 더욱 세게 감싸쥔 하이엠스의 앞으로 중심에 있는 사람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가 가면에 막혀 어눌한 울림을 가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되게 반갑네.“
그의 손이 가면으로 향했다. 달칵, 가면을 벗는 소리와 함께 뒤이은 그의 목소리는 전과 사뭇 달랐다. 그리고.
”나 기억해, 아미토?“
하이엠스, 그가 기억하는 목소리였다. 까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샜다.
”…카른!“
”그래. 잘 기억해서 다행이야.“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상정했던 상황 중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나타났다. 카른. 9구역에 있던 하이엠스와 함께 있었던 케니스이자, 연구가였다. 얼굴을 아는 녀석들은 대부분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실에도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본관과는 거리가 있는데다가 안에 있는 약품들이 알아서 터지기를 바라며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설마하니 살아서 집요하게 쫓아오는 녀석이 정말로 있을 줄이야. 하이엠스의 표정을 내려다보던 카른은 휙 고개를 돌려 사야를 응시했다. 그가 손을 내젓자 입을 막던 손이 치워지고 사야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는 꽤 많아 보이는데. 사야샤를 많이 닮았네. 숨겨둔 동생인가?“
”이거 놔!“
사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주먹과 발을 내질렀지만 카른에게 닿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지 마, 샤! 목끝까지 차오른 말이 제대로 내뱉기도 전에 앙! 날카로운 이빨이 제 몸을 쥔 손을 세게 깨물었다. 우어워! 덩치 큰 남자는 고함을 지르며 반대편 손을 들었다. 사야의 머리보다도 큰 손을 금방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화륵! 탁!
”크아악!“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고함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덩치의 다리부터 몸통, 팔까지 불꽃이 소용돌이처럼 휘감았고 그 자리 그대로 칼에 베인 듯한 자상이 남았다. 찰나에 그 옆으로 몸을 드러낸 하이엠스의 얼굴에는 음영이 져, 불꽃을 닮은 눈동자가 유달리 반짝였다. 표정없는 얼굴에서 홀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 반짝이는 야수의 눈빛과 같았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덩치의 목으로 향해 내리꽂히려는 순간, 앞서 몸을 찔렀던 녀석이 순식간에 다가와 그를 발로 걷어찼다.
”크헉!“
”삼촌!“
단순히 발로 차인 것치고는 먼 거리를 날아간 하이엠스는 그대로 건물 외벽에 부딪혔다. 입에서 기침이 나올 때면 허리 부근에서 많은 양의 출혈이 나왔다. 사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지만 그 목소리를 덮어씌우는 나긋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안 되지, 안 돼. 중요한 인질인데 함부로 대하면. 저 녀석은 미친개라서 눈 돌아가면 앞뒤 안 가린단 말이야.“
달칵, 카른의 눈동자가 가면 속에서 휘어졌다. 그가 몸을 돌리면 나란히 서있던 녀석들도 모두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사야는 여전히 발버둥을 쳤지만 칼로 베였음에도 멀쩡히 서있는 덩치가 어깨에 들쳐메며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카른은 하이엠스 앞으로 구슬 한 개를 던졌다. 도르르륵, 손 앞까지 굴러와 멈춘 구슬을 땅바닥과 함께 그러모아 쥐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시각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로 흐릿해져가는지. 사라져가는 적의 모습이 두 눈에 담겼다. 그 와중에도 사야의 붉은색만은 뚜렷하여 입술이 떨렸다.
”이 녀석을 구하고 싶다면 그 안에 적힌 장소로 와. 시간은 아마 그렇게 길진 않을 거야. 그리고 올 때는 꼭 사야샤 녀석도 데려 오고.“
”…기, 다려.“
중얼거림에도 그 자들의 형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뒤늦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으나 전부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었다. 달려온 사람들은 어깨를 붙들어 흔들었으나 하이엠스는 멀어진 잔상만을 여전히 응시했다.
”…샤.“
그는 입 안에서만 겨우 맴도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끝내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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