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연성

다시 만난 세계

청당 청명당보

초록의 열매 by 강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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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은 2차 창작물로 원작 스토리 진행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원작 날조, 적폐 캐해 유의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더니. 당가에 소소한 경사가 생겼다. 소소는 막냇동생이 남아인 것에 살짝 아쉬워했지만 나이 차가 제법 나서 그런지 퍽 예뻐했다.

 

“까꿍! 아유, 예뻐.”

“애 이름이 뭐라고요?”

“보일세, 당보.”

“... 이름 잘 지으셨네.”

“전쟁영웅이신 선조의 이름을 땄지.”

 

당군악의 품에 안긴 갓난쟁이는 배냇짓을 하며 제 아비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작은 행동에도 다들 애달파하는 신음을 내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심신이 지칠수록 귀여운 것을 보아야 한다질 않는가. 다들 어쩜 저렇게 소소와 잔이를 반반 섞은 것 같냐며 신기해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죄 당군악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포동포동한 아기를 보느라 헤벌레 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던 청명이 보드라운 볼에 손가락을 슬쩍 가져다 대었더니 이도 채 나지 않은 입을 크게 벌려 꺄르륵, 웃었다.

 

“얘 진짜 예쁘네요.”

“아내를 닮았어.”

“어쩐지!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사매랑 당잔도 외탁이죠?”

“... 약간...”

“그래도 외탁이라 다행이네요.”

“이보게...”

 

킬킬대며 당군악에게 장난을 건 청명이 다시금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제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가 파악이라도 하려는지 통통한 팔을 뻗어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댔다. 청명은 설마, 설마 저와 같이 당보 놈도 환생을 한 것인지 잠깐 생각을 했지만 이내 지워냈다. 그런 꿈같은 일이 여러 번 벌어지긴 어려우리라. 그런 존재는 저와 천마로 족했다.

 

“너는 꼭 비도로 중원을 재패해라, 알았냐. 그러면 천하제이인 자리는 내어줄 테니.”

“보통은 천하제일인이 되어라 하지 않나?”

“그건 제 거니까요.”

 

**

 

사패련과의 지난한 전투와 마교와의 끔찍한 전쟁. 그 모든 혼란과 위기 속에서도 당보는 무럭무럭 자랐다. 백 년 전의 그 당보와 비슷하게 어김없이 비도에 관심을 보였다. 재능도 꽤 있어 당군악과 당잔이 신나 했다. 당보가 가르치는 족족 잘 해내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운다며 들떠했다. 당잔이 우리 막내, 하며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글 돌리면 당보는 꺄르륵 웃어댔다.

 

그걸 보고 있는 청명은 계속 백 년 전의 정인을 떠올렸다. 그 녀석도 어릴 땐 저랬을까. 당보가 좀 자라 지학이 되니 점점 청명의 기억 속 당보와 닮아가기 시작했다. 행동거지도 그랬거니와, 입맛이나 취향 따위가 죄 그놈 탁이었다.

 

그 새끼 핏줄은 왜 저렇게 ‘나 당보 후손이오’를 티 내지? 그러면서도 청명은 어린 당보의 머리를 싹싹 쓸어주고 당과를 입에 물려주며, 가끔 비무를 청해 오면 상대해주기도 했다. 지금의 성장세로 보면 암존 당보를 뛰어넘을지 모른다. 지금의 당가는 백 년 전보다는 덜 답답할 테니 마음껏 재능을 피우고, 무학이 완성되면 제자도 들여 키울 수 있을 테다.

 

‘네 꿈이 어느 정도 이뤄지겠구나.’

 

청명은 하늘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

 

모든 전쟁이 끝이 났다. 채 목숨을 건지지 못해 스러진 사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며 전후 상황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어느덧 약관이 훌쩍 넘어 이립을 바라보기에 더 가까워진 당보는 의술에도 재능이 있어 능숙하게 소소의 뒤를 따라 부상자를 치료했다.

 

“형님은 몸을 아끼는 법을 좀 배우시오!”

“너 그 잔소리 지금까지 한 백 번은 했을걸.”

“그걸 또 세고 계셨소?”

 

당보는 능숙하게 바느질을 해 청명의 팔뚝 상처를 꿰맸다. 그 위로 약을 덧바르고는 붕대로 단단히 감싸두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상처를 봐야 하니 의약당에 늦지 않게 오라는 잔소리 끝에 눈이 마주쳤다.

 

막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지붕에서 술을 마시던 청명과 마주한 당보는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대었다. 독공을 쌓기 위해 그보다 더 쓴 것들을 입에 넣었지만 술은 조금 결이 달랐다. 몇 병 비워내니 몸이 두둥실 뜨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들뜬 상태에서 아우, 형님 하기로 정하고는 둘은 사이좋게 지붕에서 뻗었다. 그 꼴을 당패와 백천에게 들켜 쌍으로 잔소리를 왕창 들은 건 덤이었다.

 

그 뒤로 종종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당보에게 청명은 익숙하면서도 어려운 존재였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커서 보니 늘 당보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했다. 누가 보면 제 손으로 키운 자식을 보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당보는 그 안에 다른 감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았다. 아버지나 누님, 형님이 보는 눈빛과는 결이 달랐다. 당보는 어색한 기분에 급히 치료 도구를 정리하며 고개를 떨구어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요. 이제 전쟁도 막바지인데, 잔당들은 다른 분께 맡기고 정양에 드시오.”

“다른 놈들한테 맡겼다가 의약당 일이 더 늘 텐데 뭐 하러.”

“진짜 말 안 들어...”

 

청명은 문득 그리운 마음에 제 눈앞에 흔들리는 당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었다. 짙은 나무색의 머리카락이 보드라웠다. 사내치고는 외모에 신경을 쓰던 것도 백 년 전과 똑 닮았다. 그때 그놈도 씻고 나면 꼭 머릿기름을 발라 정돈하곤 했다. 그러고 나면 결이 부들부들해져 손가락 사이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지금의 당보도 머리카락을 정돈하길 좋아했다. 꼭 면경을 앞에 두고 빗질을 해댔다. 그걸 가끔 뒤에서 쳐다보면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 묻는 얼굴이 앳되어, 그제야 저 아이는 내가 아는 당보가 아니다, 깨닫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닮았으니 청명은 속절없이 과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툴툴대면서도 치료는 정성껏 해주는 모습이나, 답답해하면서도 청명의 뜻을 기어코 꺾어내지는 못하고 뒤에서 받쳐주는 모습이나. 이게 더 예쁘다고 손에 쥐어준 매화색 비녀를 보고 살포시 웃는 모습이나. 그 바람에 볼우물이 패이는 모습 따위가 그랬다.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당보는 청명을 쳐다보았다. 청명의 눈빛은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열을 잔뜩 품은, 한껏 달궈져 처음처럼 뜨거운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지만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큰일 나기 딱 좋은 가마 같았다. 당보는 등허리에서부터 오소소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방을 빠져나왔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후방에서 마교의 잔당을 마저 처리하고, 부상자들이 이동 가능할 정도로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보는 치료 시간 외 청명을 찾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일에 바빠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쳤으나 청명은 알 수 있었다. 당보가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껄끄러움을 느낀 건지, 간혹 청명의 행동에 부담스러움을 느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명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머리카락 좀 건드렸다고 괭이 새끼 마냥 화들짝 놀라 도망을 쳐? 청명은 당보를 마주하면 딱밤을 한대 놔주리라 결심했다.

 

“당보가 쓰러졌다!”

 

누군가 외친 소리에 청명이 빠르게 인파를 헤집고 파고들자 소소가 쓰러진 당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뭔데?”

“피로가 심했나 봐요.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의약당에 가자.”

 

청명은 당보를 들어 안아 의약당으로 향했다. 침상 위에 눕히고 보니 애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슴팍을 움켜쥔 채 끙끙댔다. 하필 움켜쥔 곳이 오래전 마교의 칼을 맞은 부위라, 청명은 조용히 희게 질린 손을 붙잡아 주었다. 소소가 들고 온 젖은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그 자리를 지켰다.

 

“사형이 당보를 많이 아끼긴 하나 봐요.”

“원체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가 보지. 아보가 좀 크고서는 둘이 형님 아우 하던데.”

“그런 것도 있지만...”

 

소소는 패의 어깨너머로 의약당을 가만 쳐다보았다.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라고 느끼지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리움인지, 연모인지 알기 어려웠다.

 

**

 

「형님, 당가... 당가를... 제 숙질들을...」

 

“허억!”

 

눈을 번쩍 뜬 당보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사위는 어둑어둑해져 이미 밤이었다. 대충 둘러보니 의약당이었다.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에 끙끙대다 쓰러진 기억까진 났다. 그 뒤로는 쭉 악몽인지 뭔지 모를 꿈을 꾸었는데... 우습게도 눈을 뜨고 나니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아 머리가 멍했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숙이던 그의 시야에는 침상 머리맡에 고개를 기대어 잠든 청명이 보였다. 그 옆에는 놋대야와 물수건이 놓여 있었다.

 

당보는 손을 뻗어 청명을 깨우려다, 그의 머리카락에 단단히 매달린 긴 녹색 끈을 쥐었다. 꼭 당가를 상징하는 듯한 끈을 머리와 허리, 항상 패용하고 다니는 매화검의 손잡이 끝에 늘 달고 다녔다. 어릴 적에는 그게 단순히 천우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 보란 듯이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예로 당가에서는 매화 문양을 곳곳에 새기는 게 유행을 타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보니 꼭 다른 의미가 있는 듯 싶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오...”

 

나직하게 읊조리자 청명의 몸이 움찔댔다. 깨려나? 손을 떼고 잠시 지켜보니 뭐라 중얼대기에 몸을 숙여 귀를 가까이했더니─

 

“당보야...”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 꿈이라도 꾸시는 거요?”

 

당보도 어렴풋이 알았다. 청명의 눈이 품고 있는 애틋함과 어떤 열락은 온전히 그 자신을 향한 게 아님을. 자신을 통해 다른 이를 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몰랐다. 당가에 나 이전에 청명과 가까웠을 인물이 있는가. 하지만 누님과 형님을 마주하기 이전에는 사천과 연이 없었다 들었다. 또 모르지, 꼭 당가가 아니라 녹색을 그리도 사랑하는 이를 개방에서 만났을지도. 당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청명의 등을 가만 쓸어내렸다.

 

“... 일어났냐.”

 

잠깐 쓸어준 게 전부인데, 청명이 번쩍 눈을 뜨고는 당보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두움을 밝히는 호롱불이 흔들려 청명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저를 그리 애타게 기다리셨소?”

“어. 너 아파 뒤질까 봐 걱정했다.”

“저는 형님이 누굴 그리 걱정하는지 모르겠소.”

“넌 왜 자꾸 나를 피하냐.”

“제가 언제요? 저 되게 바빴는뎁쇼?”

“이 새끼...”

 

냅다 딱밤을 얻어맞은 당보는 아야!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쌌다. 얼얼함이 잠시 머무르다 사라져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청명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당보의 뺨을 사정없이 늘였다.

 

“이놈 자식, 사람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어디 또 길바닥에 쓰러져봐라, 그땐 진짜 가만 안 둔다?”

“으에에에!”

“으에에, 거리고 있네.”

 

볼을 세게 꼬집어주고는 휙 손을 떼어낸 청명은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당보의 이마를 짚어보다, 침의를 헤집더니 냅다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살짝 놀란 당보가 청명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아랑곳 않은 채 단전을 확인할 요량으로 내력을 운용했다. 찹찹한 살갗에 따끈한 손이 얹어지니 기분이 묘했다. 당보는 계속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가슴팍이 간질간질한 것이...

 

“됐네. 단전이나 기운에는 이상이 없고... 얼씨구. 야, 배 좀 만졌다고 사내놈이 얼굴을 그리 붉혀서는...”

“가, 갑자기 손부터 집어넣었잖소! 변태요? 변태야?”

“변태 같은 소리 하네. 야, 내가 너 갓난쟁이일 때부터 봤다!”

“으... 어린애한테 음심이나 품고.”

“이게 아주 혼나려고.”

 

민망함에 바락바락 대들던 당보는 결국 또 딱밤을 얻어맞았다. 그만 자라며 헤집어진 침의를 곱게 매어주고, 침상에 상체를 밀어 눕히고, 그 위로 두툼한 야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곧 죽어도 남들에게 이런 짓 안 하면서. 왜 저에게는 이렇게 다정할까, 한도 끝도 없이 사람을 흔들어 놓을까,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걸까...

 

이립이 되기까지 사 년의 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동안 당보의 세상은 혼란스러움이 대부분이었다. 태어나길 그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그러니 제 감정 하나 돌아보는 데는 영 서투를 따름이었다. 애초에 다양한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훌쩍 커버리기도 했고. 일생을 훈련과 전쟁으로 보냈으니 당연했다. 그러니 당보는 제 감정이 무엇인지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형님.”

“자라니까.”

“아니,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형님은 왜 매번 저를 이상하게 보시오?”

“내가 언제, 인마.”

“이상하게 봤는데...”

“뭐가 이상해.”

“막... 막 간질거리고, 좀 있으면 잡아먹을 것처럼...”

“... 안 그랬어!”

“아야! 아니, 왜 자꾸 머리를 때리오?! 이러다가 머리 나빠지면 책임질 거냐고!”

“이게 예쁘다고 봐주니까 기어올라, 자꾸!”

“아니면 아닌 거지 성을 내쇼!”

 

눈을 끔벅이며 묻는 당보에 제 발이 저린 청명이 또 냅다 딱밤을 때렸다. 이번에는 좀 셌다. 이마를 감싸 쥐고 낑낑대다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토로하던 당보가 몸을 모로 훽 돌려 누웠다. 청명을 등진 채 꿍얼대더니 어느새 호흡이 느려지다 숨이 차분해졌다.

 

“... 그걸 다 느꼈네.”

 

청명은 제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계속 새어나가는 일이 없어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보는 너무나 백 년 전과 같았고, 다른 사람임을 계속 인지하고 있어도 도사 형님이라 부를 때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잔뜩 귀여워해주고 싶었다. 형님을 그렇게 애타게 찾았더냐, 어디 접문이라도 해주랴, 요 귀연 놈... 이런 생각 따위를 했다. 청명은 마른세수를 하며 조심히 의약당을 나섰다. 차라리 저 당보가 정말로 백 년 전 당보의 환생이면 오죽 좋을까.

 

**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한창 바쁠 누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징징대서 겨우 얻은 담소 시간이니 귀중했다.

 

“누님. 저 정말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어어. 뭔데, 읊어봐.”

 

쟤도 어릴 때는 참 귀여웠지... 아무래도 소소에게는 당잔보다 더 어리고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때리면서 키우지는 않았다. 그래도 참하게 자란 편인데 한 번씩 이렇게 똥고집을 부릴 때면 당가 핏줄 어디 안 간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

 

“도사 형님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꾹 죄어오고, 손이 닿으면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이 마주치면 자꾸 피하게 됩니다.”

“... 어... 어?”

“이건 무슨 병일까요...”

“난 내 동생이 지 감정도 모르는 등신인 줄 몰랐네.”

“이게 무슨 감정일까요? 역시 두려움인가... 가끔씩 형님이 엄청 애틋하다는 듯 쳐다보면 심장이 두 방망이질을 치기도 합니다.”

“... 사형이 널 그렇게 봐?”

“누님은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눈치가 워낙 빠르시니까...”

“아니. 좀 남다르게 보는 줄은 알긴 했는데... 당사자 입으로 들으니까 묘하네.”

 

쌍방이군. 소소는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역시 배알이 꼴린다. 아보랑 사형과의 나이 차가 제법 나는데... 이 어린것을 홀라당 해먹을 속셈이라니, 용서치 못한다. 화산의 신룡 출신 검협, 게다가 마교를 무찌른 전쟁 영웅. 타이틀이야 웅장하고 아무래도 어떤 혼처보다 최고인 건 알겠다만...

 

“아. 나이 차이가 너무 걸린다.”

“예?”

“네 감정은 네가 알아서 잘 찾도록 하고. 이 누이는 사형이랑 면담을 좀 해야겠다.”

“누님! 아시면 좀 알려주고 가세요...!”

“띨빵한 아우야, 그 정도는 혼자 알아라.”

 

소소는 차를 마저 들이키고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결국 당보는 어느 것도 얻지 못한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 참 뜨겁구먼.

 

“무슨 속셈이죠.”

“갑자기 뭐야?”

“무슨 속셈이냐고요.”

“아니, 뭔 소리냐고.”

“우리 막내는 못 드립니다.”

“... 뭐래.”

“아직 어리다고요. 고작해야 스물여섯인데, 사형 나이를 생각해 봐요. 솔직히 무인이라 덜 늙어서 외관이야 그럴싸하지만 양심이 있다면 어린애를 그런 눈깔로 보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사매. 난 그런 적 없어.”

“뭐가 그런 적 없어요? 전 다 봤습니다. 아보를 무슨 은애 하는 정인 보듯 쳐다보시고선... 어릴 때는 그냥 좀 귀여워서 그리 보시나, 했더니 어째 딱 애가 성인이 되고서는 아주...”

“생사람 잡네!”

“아보한테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세요.”

 

소소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거 장난이 아니었다. 청명은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가슴팍이 답답한 것이... 저 혼자만의 감정이라 생각했거늘, 당사자도 알고 당사자의 누이도 눈치챌 정도면 전혀 숨기질 못했음이 자명했다.

 

“당보도 알더냐?”

“뭔가 다르다는 건 아는데 지 감정을 몰라 헤매고 있어요. 저를 데려다 묻길래 그런 건 알아서 찾으라 했는데...”

 

소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 끝 하나 대지 마쇼.”

 

그 말을 끝으로 소소가 흥, 콧바람을 세차게 뱉어내고는 자리를 떴다. 아아. 청명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애초에 자신은 아보를 상대로 당보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그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어린애를 흔들기까지 한 셈이다. 제 감정을 몰라 혼란스럽다 할 때 그만두면 괜찮아질까. 만약 안 괜찮다 해도 소소가 가만있지 않을 테다. 그걸 다 떠나서, 지금의 당보가 청명에게 연모한다 말하면 온전히 당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물론 결코 발설할 일은 없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당보가 알게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는가. 그러니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

 

그날 한 번 쓰러진 걸 기점으로 종종 두통이 극심하게 찾아왔다. 당보는 끙끙대면서도 환자의 환부를 치료했다. 결국 못 견디겠어서 잠시 의약당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몸을 등에 푹 기대었다. 단순히 아픈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종종 알 수 없는 환상이 시야를 스치는 게 문제였다. 전쟁 후유증 같은 건가. 마교와의 전쟁은 끝이 났는데도 전쟁 상황이 자꾸 떠올랐다.

 

십만대산, 그곳에서 당보는 청명으로 추정되는─다소 외관이 다르지만 언행이 일치했다─ 이의 뒤를 받쳐 마교를 쳐내고 있다. 그러다 그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온몸을 바쳐 막아낸다. 당보의 가슴팍에 검이 꽂히고, 그걸 보는 청명은 절망에 물든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손을 꾹 쥔 채 당가를 부탁하고... 그러다 보면 시야가 암전 되었다 확 밝아진다. 이번에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형님, 하고 부르면 청명이 퍽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 입술을 꾹 눌러온다. 그러면 품에 안겨든다. 완전히 밀착되어 숨을 나누는 시간이 어쩐지 익숙하기도 하고...

 

“흐윽,”

 

기억이 들쑥날쑥하다. 당보는 급하게 장포를 뒤져 약을 한 알 입에 밀어 넣었다. 약효가 들기까지 천천히 숨을 쉬며 바쁜 의약당을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아갔다. 대체 누구의 기억인가. 당보는 자신이 왜 이런 환상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비틀대며 겨우 찾은 한적한 장소에 자리 잡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으려니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았다. 청명이었다.

 

“어, 도사 형님.”

“아보냐.”

“아보라뇨, 이제 나이가 있는뎁쇼.”

“나한테는 한참 어리지.”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너 여기 오길래. 할 말도 있고 해서.”

“무슨 말을...”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

“뭐를요?”

“어제 소소한테 들었는데. 이제 너 그렇게 볼 일 없다고. 걱정 마라 얘기해 주러.”

“아.”

 

청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당보는 자꾸 식은땀이 나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약효가 잘 안 드나. 좀 쉬려고 여기 왔더니 괜히 또 청명의 앞에서 쓰러지게 생겼다. 앞섶을 조금 벌려 팔락대고 있으니 이상함을 느낀 청명이 당보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어디 아프냐? 열나는 것 같은데.”

“약을 먹었는데도 효과가 없는 것 같소.”

“야, 그럼 가서 쉬어야지. 왜 여기까지 와서 청승이야?”

“쉬려고 여기 온 건데 형님이 왔잖소.”

“업혀. 처소에 데려다줄 테니까.”

“걸을 수는 있는데요.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애라니까.”

 

계속 거절해 봐야 맴돌 것 같아 당보는 그만 포기하고 청명의 등에 답삭 업혔다. 잘 몰랐는데 제법 너른 등이 포근해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립기도 한 것이... 그러다 당보는 또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애가 왜 자꾸 아픈지...”

“혹시 마기에 노출이 된 것은 아닌가...”

“내력은 괜찮던데...”

 

어휴, 시끄러워. 당보는 제 주변을 둘러싼 소음에 미약하게 눈썹을 좁혔다. 그걸 그새 봤는지 주변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눈을 슬 뜨니 당가 식구들이 죄 몰려와 아보야, 괜찮으냐, 하며 걱정을 쏟아내었다. 당보는 무척이나 몸이 가뿐했다. 게다가,

 

“도사 형님은요?”

“너 쓰러졌다고 의약당을 독촉하고 있다.”

“말코...”

 

좀 자고 일어난 정도인데. 그래, 청명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인물이었다. 당보는 자신이 암존 당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혼란스러웠던 환상과 잘 기억나지 않던 꿈, 청명을 보며 가슴이 조여오던 감정들과 어쩐지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듯한 기분이 무엇인지도 죄 알았다. 그리고 저 바보 같은 사내는 아마 당보를 당보로 보지 못한다 생각하고 선을 그으려 했을 테다. 어찌 그리 미련해서 그 오래 전의 정인을 잊지 못해 지금껏 붙들고 있는지. 당보는 옅게 웃으며 정말 몸이 괜찮다고 가족들에게 일렀다. 식솔들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곁에 머무르다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괜찮냐?”

“괜찮소. 몸이 가뿐한데... 푹 자서 그런가 보오.”

“새끼, 하여간 약해 빠져 가지고.”

“거, 자꾸 본인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이거나 먹어라.”

 

곱게 쑨 미음을 내민 청명은 투덜대며 당보의 침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보는 이 양반을 어찌 놀려줄지 고민하며 숟가락으로 미음을 휘저으며 내려다보았다.

 

“제가 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 뭔 꿈.”

“제 가슴팍에 검상을 입고, 형님이 제 손을 잡은 채 우는 꿈이요.”

“... 넌 살아있으니 됐다.”

“제가 아마 우리 당가를 잘 부탁한다 했겠지요.”

“너,”

“우리 도사 형님이... 저를 못 잊고 몇 년을 이렇게 끙끙 앓으실 줄 알았으면 빨리 태어나는 건데... 그건 제 의지가 아니어서.”

“야!”

“아이고, 깜짝이야. 환자한테 그리 소리치면 씁니까?”

“언제부터야.”

“방금요. 요 며칠 계속 머리가 어지럽고 이상한 게 보인다 싶더니... 그게 전생을 떠올리느라 그랬나 봅니다.”

“미치겠네... 진작 좀 오지 그랬냐!”

“그러게 그건 제 의지가 아니래도요.”

 

놀란 듯 펄쩍 뛰었던 청명은 당보의 몸 이리저리를 살펴보듯 들춰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새끼... 환생한 게 맞았구나. 어쩐지 쓰잘 데 없는 구석까지 죄 당보를 닮았더라. 그런데 왜 이제 와서야 기억이 돌아온 거냐고.

 

“그래도 우리 나이 차이는 꽤 납니다. 형님이 하도 일찍 와 계시는 바람에.”

“야, 나라도 일찍 안 왔으면 중원은 끝장났어.”

“그건 그렇네.”

“미음이나 먹어라.”

“형님. 제가 그리 좋소?”

“조용히 해라.”

“제가 좀 둔했구려, 진작에 형님 마음을 알아야 했는데...”

 

히죽대며 웃는 표정이 퍽 얄미우면서도 애틋했다. 청명은 정수리에 딱밤을 먹여주었다. 그제야 일그러지는 얼굴이 좀 마음에 들었다. 당보는 환자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며 떽떽댔다.

 

“제가 기억 못 했으면 그 감정 꾹꾹 눌렀다가 아주 모르는 척하려고 했죠?”

“그럼.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오래 전의 너를 사랑하는지 나조차 헷갈렸는데. 애한테 어떻게 그러냐.”

“형님은 내가 좋았던 거지. 그러니까 선을 그으려고 했던 거지.”

“그게 그렇게 되냐?”

“그러면 다시 멋들어지게 고백 좀 해보십쇼. 내가 형님 눈빛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데.”

“얘가 기억을 찾더니 들이박네, 아주.”

“이게 다 형님이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 해줘서 그렇지 않소.”

“내 업보다, 업보야.”

 

혀를 끌끌 차던 청명은 몸을 기울여 당보와 눈을 마주했다. 일전엔 눈만 마주쳤다 하면 수줍게 고개를 숙이더니 이제는 귀가 붉어져도 얌전히 쳐다보고 있는다.

 

“예나 지금이나, 연모한다.”

“그거면 됐소!”

 

해사하게 웃는 게 과거랑은 조금 달랐다. 그때보다 더 앳된 얼굴로 포르르 웃으니 볼우물이 폭, 좀 더 맑았다. 청명은 아무래도 소소한테 대침을 좀 맞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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