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면
청당 청명당보
* 본 작품은 2차 창작물로 원작 스토리 진행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 원작 날조, 적폐 캐해 유의
보통 돌로 이루어신 산에는 들짐승이 자리 잡기 어려운 법이다. 흙으로 되어 있어 굴을 팔 수가 있나, 먹을 게 넘쳐나나. 그럼에도 섬서의 끝자락에 위치한 화산에는 이름 높은 범이 살았다.
화음의 양민들은 그 범을 화산을 지키는 신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동네 아해들은 날 때부터 구설을 듣고 자랐다. 자연히 화산을 지나갈 적이면 입구에 밥이나 간식 따위를 두었다. 산 깊이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지만 범이 있다면 소박한 음식을 봐서라도 화음을 잘 살펴주라는, 흔한 양민들의 정성이었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해가 지기 전이면 누군가 들고 가는지 놔둔 자릴 돌아보면 흔적도 없었다. 개방 거지가 가져갔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양민들은 화산의 범이 내려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끔 화음에 큰 경사에 대한 소문이 돌면─이를테면 어느 댁 부부가 아이가 없어 몇 년을 치성을 드렸는데 드디어 아이를 배었다든지, 어느 댁 장남이 과거에 합격하여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든지, 어느 댁 막내딸이 똘똘하더라니 모 문파의 의약당에 들어가게 되었다든지─ 꼭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집에 산삼이며 약초며, 사슴 고기 따위가 걸려있었다.
정말 범이 내려와 주는 게 아니라면 누가 중원 구석의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의 경사까지 챙겨주리!
그리하여 화산범이라 불리는 신선인지 뭔지 모를 존재와 화음현의 양민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던 차였다.
“흠. 화산이라...”
여기를 또 살펴보자면, 사천의 그 대단하다 하는 당가의 망나니 되시겠다. 사실 망나니라는 것도 당보를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운 당가의 입장일 뿐, 막상 그를 꼼꼼히 뜯어보면 그 정도는 아니다.
제법 헌앙한 외모도 한몫하겠거니와, 당가의 암기를 다루는 실력이나 비도술은 가히 당가제일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세간에서는 일수탈명이니 뭐니 하는 별호로 불리고 있으니 아무렴 무인으로서 망나니라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다만 집안의 여러 고리타분한 관행과 도무지 앞 날을 고려하지 않는 듯한 행태에 질린 나머지 걸핏하면 술에 절어 삐죽 대고 있는 데다 장로라는 것이 툭하면 회의를 빠지고 역마살 낀 마냥 온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기 바쁘니 당가에서는 적당히 망나니라 취급을 해버린 셈이다. 그 김에 당보는 아예 당가의 잔소리를 피해 가진 것 중 비싼 패물을 싹싹 긁어 전낭을 두둑이 채운 채 이곳 화음까지 흘러들어왔다.
화산이라면 딱히 사람의 손을 탈 일도 없었을 것이고, 대충 동네 돌아가는 소문에 범이 산다고 하지만 그깟 짐승쯤은 그에게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적당히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고 돈이 떨어질 때까지 붙어있을 심산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그때 당가에 가서 또 패물을 털어다 오면 된다.
경공으로 산의 이곳저곳을 다니다 발견한 동굴은 꽤 아늑했다. 입구 쪽에는 볕이 잘 들기도 했고, 동굴이라 해서 지나치게 서늘하지도 않았다. 바닥에 손바닥을 짚어보니 묘하게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그 외에 특별히 손을 타거나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아 당보는 당연히 주인이 없으리라 짐작했다.
지금쯤 당가의 원로들이나 가주가 자길 찾겠노라 성을 내고 있겠지만 그래봐야 제깟 것들이 날 어떻게 잡아가겠냐는 한량 같은 생각을 하며 분주를 꺼내 들었다. 이런 험준한 산이라면 수련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사람이 쉬이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편하게 귀나 꼬리를 내어놓고 다니기에도 좋다. 게다가 제법 운치가 있지 않은가! 지극히 세가 도련님다운 생각을 하며 한 잔, 두 잔, 두 잔이 넉 잔이 되고 넉 잔이 여덟 잔이 될 정도로 들이키고는 뺨을 얼룩덜룩 붉게 물들인 채 쿠아아, 하고 잠들었다.
당보가 눈을 번쩍 뜬 건 해가 내리쬐어서가 아니었다. 낯선 잠자리라 예민하게 반응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갑자기 꼬리가 잡혀 몸이 훅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취한 채 잠들었다 해도 이만한 기감조차 눈치를 못 챘다니! 스스로의 안일함에 한탄하면서도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당보의 푹신한 꼬리를 한 손에 잡아채 몸을 들어 올린 사내는 잔뜩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나 꼬리를 보아하니 범인 것 같았다.
“이, 이보시오! 이거 내려놓게나!”
“얼씨구. 뭘 내려놔? 불청객은 내쫓아야지. 한 밤 무사히 지냈는데 이 산의 주인에게 감사는 못할망정 눈깔을 부라려?”
“이익! 산에 웬 주인이란 말이오! 댁이 산신이라도 되나?!”
“산신까진 아니긴 한데... 화산에 백 년 묵은 범이라고, 들어는 봤나 모르겠네.”
동굴 밖에 나선 범은 당보를 던지듯 휙 내어놓았다. 볼품없이 바닥에 구른 당보는 구겨진 장포를 툭툭 털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놈의 힘이 이리도 센지. 이래 봬도 당보라 하면 모르는 이 없건만 힘도 제대로 못 쓰고 덜렁 들려 쫓겨난 것이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사천에서 온 놈이 그걸 어찌 아오?”
“여긴 내 구역이야. 내가 지키는 곳이기도 하고. 네가 자리 잡은 동굴은 내가 겨울을 나려고 딱 봐둔 자리었다고. 여기가 좋으면 힘으로 뺏어보던가.”
씩 웃는 범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당보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기세 좋게 비도를 발출 했다.
**
“으아아...”
“그러게 덤빌 자리를 보고 덤벼야지.”
“이런 무식하게 센 놈이 다 있나...”
범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하나로 당보의 공격을 죄다 쳐내었다. 독공을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당보는 위급해지자 결국 독을 꺼낸 자신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고 말았다. 물론 그마저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당보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데다 한참 얻어맞아 이리저리 멍이 든 몸을 겨우겨우 일으켰다.
“... 물의를 일으켜 미안하오. 내 사과드리지.”
“새끼가 사과를 말로만 하네... 야, 전낭 내놔.”
“... 엥?”
“내놔. 나도 먹고살아야지.”
“이거 웬 산적 새끼도 아니고...”
“어딜 산적 놈에 빗대?!”
“악!”
범의 이름은 청명이라 했다. 이름 한 번 차암~ 잘 지었다며 비꼬았다가 맞았던 데를 방금 또 맞은 탓에 머리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은 당보는 방금까지 어른답게 좋은 대련이었소, 하고 마무리 짓고 유유히 이곳을 떠나려던 자신의 계획이 제법 많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내 돈이오, 내 돈! 사천에서 온갖 패물을 끌어다 야무지게 팔아넘기고 마련한 돈인데... 이걸 그냥 넘기라고? 절대 안 되오! 난 그쪽 동굴이라도 차지해야겠어.”
“그러던지.”
화산의 범, 청명은 꽤 재밌는 존재를 알게 되어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전낭도 두둑해, 몸도 튼튼하고 건강한 것이 좀 굴려도 쉽게 쓰러지지 않아 때리는 맛도 있었다. 거기다 겁도 없이 떽떽대며 붙어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아주 드물게 화산을 넘으려는 이들은 청명의 존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주저앉아 벌벌 떨어댔으니 범의 모습으로 사람과 마주한 일이 손에 꼽았다.
“어디 보자... 기왕 공돈이 생겼으니 야금 하나 장만할까. 아주 푹신한 놈으로다가 골라야겠어. 어디 보자, 촉금으로 된 걸 살까?”
“이 범이 눈이 돌았구먼?”
당보의 반응은 재미가 있었다. 청명은 낄낄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에 여기 좋은 약초 자리 알아봐 주지.”
“... 그러면 뭐... 금사로 자수 놓인 이불도 예쁘던데...”
입을 삐죽 대면서도 덧붙이는 말에 청명은 드물게 크게 웃었다.
**
청명은 당보와 지내던 몇 주야가 지나고 한 가지 알게 된 점이 생겼다. 당보의 꼬리가 무척이나 푹신하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털 짐승 출신이지만 여우의 털은 제 것보다 훨씬 보드라웠다. 세가에서 나고 자라 털 관리를 잘 받은 덕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베개 대신 꼬리를 베고 자는 게 훨씬 숙면을 취하기 좋다는 점을 알았다.
“이놈의 호랑이가 여우꼬리 다 뜯어간다, 아주.”
당보는 늘 아침이면 처녀 애들이 쓸법한 빗을 가지고 제 꼬리를 야무지게 빗어냈다. 집중하느라 삐죽 튀어나온 입이나, 역시 집중하느라 쫑긋 대고 있는 귀를 보면 꼭 잡아당겨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랬다간 또 청명의 등짝을 확 긁어놓을지 몰라 얌전히 참았다. 어차피 저 꼬리는 또 오늘 밤 청명의 베개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저리 아침부터 빗고 있는 게 아닌가. 늘 툴툴대면서도 밤에 꼬리를 슬 대어주는 게 제법 귀엽기도 했다.
“너는 왜 멀쩡한 집 두고 여기 사냐.”
“아. 그 망할 놈의 집구석 얘긴 꺼내기도 싫소!”
─라고 말한 게 일 각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청명은 어느새 당가의 고리타분한 가풍에 대해 줄줄이 듣고 있었다. 듣다 보니 정이 들기도 하고. 귀를 후비적 대면서 적당히 듣고 있으려니 또 대충 듣는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래도 겨울을 여기서 보내긴 좀 힘들 텐데.”
“흥. 여우 무시합니까?”
“여우는 좀 따뜻한 델 좋아하지 않나... 여기 겨울 되면 해 잘 안 든다.”
“해 받고 싶으면 요 밑에나 내려가보면 되죠.”
“여우 놈이 화음을 제집처럼 드나드네.”
“같이 사는데, 집이지!”
“너 그럼 언제 너네 집 가는데.”
“뭐... 돈 떨어지면...”
끝 말이 흐려지면서도 애틋한 눈빛으로 사천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걸 보니 말은 저렇게 해도 제 집안에 대한 애정은 대단한가 보다. 듣기로 당가 놈들은 손익을 따져 해가 될 일은 곧 죽어도 하지 않고, 계산적이기로는 제갈 놈들 뺨친다 하더니. 눈앞의 사내는 그런 것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거 당가 놈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그가 보여준 비도술이나 암기, 독 따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믿기 어려웠을 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그토록 좌절하고 실망하여 화음까지 기어들어오진 못했겠지.
“필요하면 도와줄게. 범이 난장 치면 할 말이 있겠냐?”
“형님이 난장 치면 원로원들 다 죽는소리 할 거요.”
“뭐 어때. 엉? 아우를 괴롭힌다 하니 형님이 가만있을 수가 있나.”
“어휴...”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냥 싫진 않은 듯 샐쭉 웃는 모양새가 고왔다. 반쯤 틀어 올린 머리를 붙든 비녀에 시선이 갔다. 저런 거 하나 사다 줄까. 당보의 전낭을 털어 선물을 사주기에는 면이 안 서니 조만간 멧돼지라도 잡아다 팔아야겠다 싶었다.
**
날이 점점 추워졌다. 털 짐승이란 게 날이 추우면 털을 한껏 부풀려 온도를 유지하려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화산의 아늑한 동굴에는 털이 잔뜩 날리고 있었다. 연신 재채기를 하던 당보는 에잇! 하고 자리를 박차더니 밖으로 나가 제 옷에 엉겨 붙은 여우 털인지 범 털인지 모를 것들을 털어냈다.
그 꼴을 잠시 지켜보던 청명이 당보가 들고 다니던 빗을 들어 제 꼬리를 삭삭 쓸어내렸다. 이러면 좀 덜 날리려나. 아마 봄이 되면 털갈이를 하느라 더 날릴 테다. 그때쯤에도 당보가 곁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빗어달라 하지 그러셨소.”
“이렇게 털이 많이 날릴 줄은 몰랐지.”
“솔직히 형님 털보단 제 털이 많긴 할걸요...”
새삼 저 풍성하고 풍덩한 여우꼬리에 시선이 갔다. 푹신한 것이 털이 얼마나 빽빽하게 차 있을지. 청명은 손을 뻗어 당보의 꼬리를 확 낚아채었다.
“아!”
평소에도 잘만 베고 자던 건데, 아마 처음 봤을 때도 꼬리를 휙 들어 올렸던 것 같은데... 당보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나자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보는 입술을 꾹 말아 물며 형님이 들었으려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저 놈의 범이 아주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조만간에─
“하지, 하지 마시오!”
“어쭈, 반항을 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청명이 그 커다란 덩치로 덮치듯 당보의 위에 올라타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유난히 예민한 감각을 가진 건 당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법. 아무래도 독을 다루다 보니 당연했다. 그걸 용케 알아챈 청명이 종종 장난을 친답시고 간지럼을 잔뜩 태워 진을 쏙 빼놓곤 했다. 하필 오늘이 그랬다. 한창 옆구리며 목덜미며, 허리까지 건드려대며 당보가 바르작대는 꼴을 지켜보던 청명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동굴 속이 순식간에 차분해지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당보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뜨며 고개를 바로 했다. 제 위에 올라탄 청명이 꼭 바위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 왜 갑자기 얌전해지셨소?”
“가만있어봐.”
청명의 짙은 눈썹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저 양반이 왜 저래? 당보는 상체를 일으키려다 그의 손에 제지당하고는 얌전히 누웠다.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범이 귀신을 무서워한다면 그만큼 우스운 일은 없겠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당보의 눈에 묘한 장면이 들어왔다. 잠시 무언갈 고민하는 듯하던 청명이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물들이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어디가 아픈가 싶어 손을 뻗어 뺨을 쥐었다.
“큰일 났네...”
청명은 당보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 내려다보다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고는 유유히 동굴 밖을 나섰다. 당보만이 당최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허물어진 채 드러누워 청명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왜 저런담...”
아무래도 상태가 영 이상하다 싶어 그날 저녁, 당보는 저가 가진 약초를 살펴보았다. 열을 내리는 게 있으려나, 저 범이 둔해 빠져서 지가 아픈 줄도 모르고 참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리저리 약초를 구분 지어 놓고 뿌듯함에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노라니 뒤에서 얌전히 좀 있으라며 꼬리를 또 확 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거, 자꾸 남의 꼬리를 막 쥐고 그러시면 되겠소, 안 되겠소?”
“어, 돼. 나는 돼. 딴 새끼한테 쥐어주진 마라.”
“참 나... 이 당보의 꼬리를 막 쥐어서 주물대는 사람은 형님이 유일무이하니 걱정하지 마쇼!”
“내가 유일하냐?”
히죽대는 얼굴을 보니까 해열 말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게 필요하겠다며 중얼거린 당보는 또 딱밤을 맞고서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청명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제 구역에 쳐들어온 여우의 존재에도 당황스러웠는데, 몇 주야를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정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더 깊이 정이 들어버린 게 아닌가!
평소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던 그날이 문제였다.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곤란한 듯 질끈 감고 모로 기댄 머리, 그 바람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라거나... 청명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흐트러진 옷, 긴장에 쫑긋 대는 귀와 푹신한 꼬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져 이상함을 감지했다. 멈추고 가만 내려다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놈이 이렇게 한 품에 안기 딱 좋게 생겼던가. 좀 삐죽 대고 말이 많고 비무 하자더니 정작 몇 합 만에 나가떨어지고, 지 가문을 욕보면서도 같이 욕 해주면 토라지는 꼴이 재밌기는 했지만...
그제야 벼락같이 자각을 해버린 것이다.
몇 십 년, 백 년 조금 넘는 시간을 화산이라는 돌산에 처박혀 제대로 된 관계 한 번 맺어보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던 청명에게 은애 한다는 감정은 저 세상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알지도 못하고 알아갈 이유도 없다 생각했는데. 저 화음의 양민들이 사랑 하나에 울고 불고 죽니 사니 하는 모양새를 보며 저것들은 명줄이 짧아 저리 불꽃같은 감정에 목숨을 거나, 싶었다. 딱 그 정도의 감상에 불과했던 게 제 안에도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인처럼 각막에 새겨진 인영이 의아하다는 듯 저를 올려다보고, 살짝 찹찹한 손 끝을 제 뺨에 대었다. 청명은 멍하니 있다 곧이어 당보를 팽개치곤 밖으로 나섰다. 찬 바람이 얼굴에 닿으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저 새낀 돈 떨어지면 집에 간다는 놈인데 어쩌다가. 어휴...”
청명은 저 여우 새끼를 제 옆구리에 딱 붙여 놀 계획이 필요했다.
저저, 저 봐라. 여우 놈이 꼬리 흔들면서 범을 홀린다. 청명은 약초를 잔뜩 늘어놓고 신난다는 듯 실룩대는 꼬리를 잡아챘다. 또 왁왁대며 함부로 잡는 것 아니라는 잔소릴 늘어놨지만 어디 제대로 새겨들을쏘냐. 그래도 이걸 잡고 베고 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는 소린 제법 기꺼웠다.
“야. 너 봄에도 있어라.”
“엥. 언제는 빨리 가라고 난리셨으면서요?”
“봄에 여기 예쁜 꽃도 피고, 어? 계곡 물도 시원해.”
“꽃... 꽃구경은 하면 좋긴 하겠네요. 그런데 좀 있음 돈 떨어질 것 같은데.”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밤은 제법 추웠기에 전낭을 탈탈 털어 동굴을 최대한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벌써 홀쭉해진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봄이 되면 슬 돈이 떨어지겠구나.
당보는 돌산에 꽃이 피면 어떤 광경일지 잠시 상상하다 제 옆에 자리 잡은 청명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형님. 저 그런데 꼭 돈이 아니어도 너무 오래 가출하면 좀 그렇거든요.”
“왜, 그놈의 원로원인지 뭔지가 괴롭히냐?”
“그것도 그렇고... 은근히 저 기다리는 아해들도 있거든요.”
“아평인가 뭔가 하는 걔?”
“네. 봄이 되면요, 당가에 형님을 초대해 드릴게요. 사천에 맛있는 술이 있는데.”
즐거운 듯 제 고향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니 청명은 깨달아버렸다. 이 놈을 화산에 붙여놓고 살 수는 없겠구나. 어쨌든 목줄 달린 강아지처럼 제 집에는 들어갈 놈이구나. 하지만 청명은 집요한 범이었다. 한 계절을 함께 한 정도로 만족할 수야 없지.
“너 집 갈 때, 나도 따라가자.”
“어. 그래도 돼요? 산 비워도 되나?”
“뭐 어때. 어차피 여기 사람이 사는 산도 아니고.”
“그러면 형님 옷도 좀 맞춰서 가야겠다. 그래도 사천에 가는데 후줄근하게 가기는 좀 그렇죠.”
“뭐 상견례하냐?”
청명의 마지막 말에 유쾌하게 웃는 얼굴이 내심 얄미웠다. 이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임을 이 놈은 모르겠지. 여우가 여우 같지 않고 곰 같다. 범을 홀려놓고 저는 모르는 꼴을 보자니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런 놈한테 코가 꿰었는지. 청명은 답답한 마음을 당보의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는 걸로 풀었다.
“말코!”
“어쭈. 반항하냐?”
“반항하면 뭐해요, 한 번을 이기질 못하는데...”
또 또. 입을 삐죽 내민 게 댓 발이 나와 꼭 오리 입 같았다. 청명은 손가락으로 당보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입. 또 튀어나오지?”
“으브베베벱!”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손을 떼어 놓으려는 움직임이 귀여워 보이면 이건 중증이겠지... 청명은 손으로 당보의 입술을 붙들어 놓은 채 또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당보는 요 며칠 영 이상하게 구는 청명이 낯설었다. 남의 입을 쥐어뜯을 기세로 잡고는 딴생각이야? 청명의 옆구리에 주먹을 퍽 꽂아 넣고는 다른 손으로 제 입에 얹어진 손등을 콱 꼬집었다. 아! 짧은 단말마에 손이 떨어지자 그대로 품에 몸을 박치기하듯 밀어 넘어뜨렸다. 뒤로 쿵 넘어진 소리가 제법 컸다. 당보는 청명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있다 슬쩍 눈을 굴려 쳐다보았다. 화난 것 같으면 도망이라도 칠 요량으로. 그런데 웬걸, 이 바위 같은 사내가 화를 내기는커녕 제 뒤통수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이는 게 아닌가. 당보는 평소와 다른 청명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봄이 되면... 사천에도 가고. 사천 갔다가 또 화산 왔다가. 아예 안 가본 곳에 가도 좋고.”
“... 그건 좋은데.”
“너 좋아하는 비무도 하고, 산적 놈들 전낭도 좀 털고.”
“응.”
“그러다가 뭐... 너도 갑자기 마음이 생겨서 평생 붙어있을 수도 있고.”
“응... 에. 네?”
“뭐.”
“뭐?”
“뭐가.”
“뭐가, 라뇨. 방금 그거 뭡니까?”
얌전히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이상한 소릴 들었다. 이 범이 뭐라는 겨? 고개를 팍 쳐들고 청명을 보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당보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거 고백 아니오?”
“아. 그러네?”
난데없이 고백 비슷한 발언을 던져놓고는 그게 뭐 어때서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니꼬웠다.
“아, 그러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새끼... 왜 이렇게 앙탈이야. 어? 이 화산범이 여우가 좋다 하면 감사합니다, 하면 그만이지.”
“제 마음은 어디 간 겁니까?”
“너도 나 좋아하잖아.”
“제가요?”
댕글댕글. 눈이 마주쳤다.
“어이없네... 아니 뭐 세뇌라도 하십니까?”
“아니지. 네가 자각 못하니까 내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지.”
“어째서 좋아할 거라고 단정 짓는데요?”
“너 집에 안 가고 여기 붙어있잖아.”
“그건 원래 그러려고 했던 건데.”
“너 가끔 나 보면 귀엽게 웃거든.”
“제가요?”
“내가 없으면 귀가 축 늘어져있고, 내가 오면 귀가 확 펴져. 엄청 쫑긋거려. 꼬리도 미친 듯이 흔들고.”
“... 제가요?”
“어, 그랬다니까? 그러니까 나도 넘어갔지. 여우 같은 놈.”
“여운데요!”
당보의 얼굴이 꼭 겨울 끝물에 피어오른 매화색 같았다. 가슴팍에 양손을 받쳐 상체를 들어 올리고는 한껏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새색시 같기도 하고. 청명은 모르겠으면 알면 된다, 말하고는 당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옆으로 휘 돌아누웠다.
“내가 뭐... 줄 건 없는데. 그래도 좋은 구경은 많이 시켜줄게. 너 모르는 거 다 알려줄게.”
**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어느 날. 당가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지난겨울 집을 나간 장로가 돌아온 탓이었다. 단순히 돌아온 게 아니라, 신랑이랍시고 웬 범을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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