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음

테베르와 첫눈, 그리고 가족.

루키모 by 루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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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녀왔습니다-."

사제로서, 신성기사로서 집을 떠난 뒤 정말 오래간만에 들린 집이었다. 얼마나 떠나 있었다고. 새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인들의 딱딱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대대적으로 구조를 바꾼 1층 현관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제외하면 자라오면서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낯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막내야-!"

집안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질러 나를 부르는 둘째 누나,

"집에 좀 들리라고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제서야…. 후후, 어서와."

그 뒤로 여유롭게 웃으며 따라 나오는 큰 누나까지. 너무나도 반갑게 날 반겨주는 누나들에 의해 그런 기분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운 목소리, 그리운 온기. 힘껏 뛰어올라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안긴 둘째 누나 소레토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큰 누나 레티레이에게도 눈짓하였다.

"헤헤, 다녀왔어요."

처음 저택 문을 열고 들어오며 내민, 이제는 버릇이 된 형식적인 말투의 인사가 아닌, 가족에게 하는 편한 말버릇이 나와 다시 인사하였다.

"밖에 춥지? 이리와서 벽난로 좀 쬐고, 배는 안 고프니?"

"여기가 따듯하니까 이쪽으로 앉아! 어머, 못 본 새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네? 잘라줄까?"

이것저것 세심하게 챙겨주는 누나들에게 손사래를 치고는 괜찮다고 말했다. 늘 누나들 사이에 있으면 이곳에 처음 왔던 열 세살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키도 덩치도 이렇게나 커졌는데 그들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이로 보이는 듯 하였다. 미리 거절해놓지 않으면 위장도, 머리카락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밥은 먹고 왔어요. 이따 저녁 먹을 때 같이 먹어요. 머리카락은…, 아직 괜찮은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러게, 이뿌다~"

스스럼없이 내 머리카락 끝을 빙글빙글 꼬아주던 소레토 누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밝게 웃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서 나도 그저 헤헤 웃었다. 그런데 생글생글 웃는 누나 뒤로 낯선 인영이 하나 보였다. 작은 체구에 긴 머리카락, 언뜻 보기에 자주 놀러오시던 아버지 손님인 세릴티 씨인가 했지만 이쪽의 실루엣이 좀더 밝았다. 거기 있었는 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있던 그녀는 내가 존재를 눈치 챈 순간부터 어색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다! 루뭉아~!"

내 시선을 눈치챈 소레토 누나가 얼른 그 사람에게 달려가 그 손목을 잡고 이끌어왔다.

"헉…, ㄴ, 네…!“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난로 앞에 끌려온 사람은 척 보기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루뭉이라고 해. 지금은 5층 끝방을 쓰고 있고, 그리고 또… 음, 얼마 전부터 같이 살게 됐어!"

둘이 인사하라며 소레토 누나가 가볍게 어깨를 툭툭 치자 루뭉이라고 불린 그녀가 잔뜩 긴장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안녕하세요!! 루뭉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너무 큰 목소리가 나와버려서 부끄러워진 것인지, 자기소개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겨우 한 마디 하고 소레토 누나의 뒤로 슬금슬금 숨는 루뭉이라는 분은 겁이 많은 사람 같았다.

"정말 반가워요. 신성기사 테베르 입니다. 여기 이 두 분의 동생이에요."

키를 맞추기 위해 나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악수를 청했다. 동생이라는 말에 조금 안심했는지, 그녀가 더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그녀는 놀랍게도 요즈족이었다. 체구가 작다고 마냥 어린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맞잡았다.

"자, 잘… 으응, 끅…."

긴장을 얼마나 한 것인지, 그녀는 딸꾹질을 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파리한 안색이 너무나도 걱정되어 맞잡은 손에 다른 한 손을 얹고는 신성력을 조금 담아 보내었다. 호흡의 안정을 돕는 따듯한 기운에 조금은 속이 편해졌는지, 한결 안색이 편안해진 그녀가 놀란 눈을 하였다. 방금은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루뭉…님!"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난 것이 즐겁고 감사해 밝게 웃어보였다. 그녀가 더는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루뭉님도 내게 살풋 웃어주었다.

"얘들아."

우리들의 통성명과 인사가 끝나자 큰 누나 레티레이가 나지막하게 우리를 불렀다.

"웅?"

모두가 일제히 큰 누나쪽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은 그녀의 입꼬리가 기분좋은 호선을 그리며 가늘게 벌어졌다.

"너희들 그거 아니? 밖에 눈이 오기 시작했단다."

그 말에 다시 일제히 창밖을 쳐다보는 우리 세명의 모습은 마치 군무인 양, 완전히 동일한 움직임이었다.

"눈이다!"

가장 먼저 소리친 것은 둘째 누나 소레토였다.

"정말 눈이에요!"

나도 신이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에 달라붙었다.

"눈! 눈…!!“

루뭉님도 가세해 셋이 나란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난다! 완전 많이 오고 있어!"

"그래, 금방 쌓이겠네. 사용인들한테 미리 제설 조치좀 해달라고 요청해야겠어. 닥터랑 아델라인한테 얘기하고 올게."

"어어엇?"

큰 누나의 말에 당황한 우리 셋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모두 한 마음인 것인지, 자리를 뜨려는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 언니이…. 쪼-금만 앉아있다가 하면, …안 돼?"

"레티레이님! 저도 부탁드려요…! 눈은 정말, 저~엉~말 오랜만에 보거든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레티레이를 설득하는 둘 다음으로 내 차례가 되었다.

"저, 저도 계속 따듯한 지방에 파견돼서요. 지금은 눈이 조금…그리워서, 아, 그러니까, 슈샤이어에 못 간지도 꽤 됐고…. 아니, 그게. 누나, 그게,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난 그저 눈밭에서 조금만 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늘 어른스럽고 차분해야 하는, 믿음직스러운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속마음을 숨기는 버릇이 나와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아 버린 것이다. 가족들 앞에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아,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어른스럽지도 못했고, 가식적이라 느껴졌다.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진심을 숨겨버린 탓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후후, 너 되게 아빠처럼 말한다. 다들 뭐니. 놀고 싶다는 거니?"

하지만 큰 누나는 역시 나의 가족이었다. 그 장황한 변명 속 저의를 한눈에 알아챈 누나가 내 진심을 꿰뚫어 보듯 대답해주었다.

"응-!"

"네-!"

어린이처럼 밝게 웃으며 우리 셋은 동시에 대답했다. 큰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좋아, 놀 거면 지금 나가."

그 말에 둘째 누나가 야호 하는 함성을 질렀다. 루뭉님도 나도, 잘됐다는 듯 같이 마주보며 해맑게 웃었다.

"대신…. 나는 쌓인 눈도 싫고, 땅이 질퍽해지는 건 더 싫거든. 저녁먹기 전까지야. 알겠지?"

고개만 붕붕 끄덕인 우리는 바로 나가려고 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복도로 나가는 문을 열려는 순간, 우리 뒷통수에 큰 누나의 목소리가 따끔하게 날아와 박혔다.

"거기 스탑! 겉옷! 따듯하게! 목도리도 하고! 장갑도 해야지! 하…. 소레토, 동생들 옷 좀 챙겨줄래?"

왁왁 소리치던 큰 누나가 일순간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하자 소레토의 얼굴이 답지않게 얼어붙었다.

"으, 응…! 알았어. 나, 나한테 맡겨!"

분위기에 압도된 우리는 서둘러 드레스룸 쪽으로 함께 달려갔다. 오랜만에 본 가족들이지만, 폭발 직전의 큰 누나는 여전했다. 문득 그리운 감각이 들어 큭큭 웃어버렸다.

바깥은 여전히 굉장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게 우리 영지에서는 첫눈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워낙 온갖 지역을 다 돌아다녔지만, 나도 올해 눈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눈에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나는 먼저 달려나간 둘을 쫓기 전, 우뚝 멈추어섰다. 그리고 새하얀 눈을 지그시 올려보다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제 소원은요."

매그너스 씨와 함께, 아냐…. 안 돼. 애석하게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그였다. 하지만 난 사제니까, 좀 더 모두를 위한 소원을 빌어야만 해…. 개인을 위한 욕심은 불온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건 아마도 내 수련이 부족한 탓이겠지. 사제로서는 정말이지 빵점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고민하던 나는 가족을 위한 소원을 빌기로 하였다.

"우리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문을 덧붙이며 소원을 마무리한 나는 후련하게 웃었다. 가족을 위한 소원. 어쩌면… 매그너스 씨와 가족이 될 지도 모르니까. 일말의 불순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나는 소리나지 않게 살짝 웃으며 발자국만 남은 둘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이런 불순하고도 발칙한 마음을 대변하듯, 매서운 바깥공기에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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