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악마도 반품이 되나요?

8화

1차 BL

Rose by 제로지
10
0
0

헤임은 오스카에게서 손을 빼낸 뒤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레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손등과 손바닥 전부 문질러 닦아낸 헤임은 조금 새침하게 오스카에게 말했다.

"방 하나만 줘."

"방이요?"

"그래. 공간이 좀 필요해."

오스카는 고민하던 끝에 아빠 방이었으나 이젠 손님방이 된 곳으로 헤임을 안내했다. 비록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은 이모들이 마리아를 보러 오는 날 외엔 없었지만 마리아는 늘 그 방을 깨끗이 관리했다. 덕분에 이전에 오스카의 지저분한 방 안에 들어갈 때와 달리 헤임의 걸음은 평안했다. 오스카는 조금 멋쩍게 헤임에게 가볍게 방 안내를 했다.

"여길 쓰시면 돼요. 안에 욕실 있는데, 창문 열면 가끔 새가 안에 들어오기도 하니까 창문은 아주 조금만 여세요."

헤임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둘러봤다. 전체적으로 인간의 흔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죽은 공간이었지만 관리가 잘 된 방이었다. 오스카가 방을 나가자 헤임은 곧바로 옷을 전부 벗어 깔끔히 접어둔 뒤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서늘한 몸 위로 쏟아지자 헤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상황 한번 참..."

어쩌다 이런 일에 얽혀버린건지. 아발람의 밑에서 일하며 수많은 크레바스 케이스에 대해 들어왔지만 이런 류의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탄을 해봤자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헤임은 그것을 떨쳐내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계속 되새김질 하는 것은 낭비였다. 차라리 물에 생각을 흘려보내 머리를 비우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헤임은 옆에 놓인 바디워시 통을 열어 쭉 짜낸 뒤 거품을 내고 몸에 문질렀다. 오렌지와 티트리가 섞인 상쾌한 향이 금세 욕실을 가득 채웠다. 헤임이 이전보단 꽤 나아진 기분으로 샤워를 하던 중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헤임은 물을 잠그고 건조한 타일 위에 물을 뚝뚝 흘리며 곧바로 문을 확 열었다. 커다란 한 손으로 양 눈을 전부 덮은 오스카가 한 손엔 약간 낡은 공룡 무늬 파자마를 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두 눈을 더 세게 누르는 오스카는 빨개진 귀로 떠듬거렸다.         

"어...음...갈아입을 옷인데요....샤워하고 같은 옷 입으면 찝찝하잖아요....제가 중학생 때 입던 거라 무늬가 좀 웃기긴 한데 그래도 이모들이 선물해준거라...그냥...음....이거 엄청 보들보들해서 힘들 때 입으면 기분이 좀 좋아지거든요. 그래서...앗, 아니에요. 그냥..그냥 혹시라도 필요한 거면 입으세요..."                

긴장감에 두 눈을 짓이길 듯 꽉 누른 오스카는 그 말을 끝으로 뒷걸음질 쳐 침대 가장자리에 파자마를 아슬아슬하게 내려놓고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갔다. 헤임은 여전히 건조한 타일에 물을 뚝뚝 흘리며 오스카가 나간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가리고 파자마를 내려둔 덕에 가장자리에서 떨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파자마 속 공룡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었지만 전부 멍청하고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꼭 지 닮은 것만...."

혀에 버터를 잔뜩 바르고 그의 비위를 맞추던 이들도 당연히 이 정도는 했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질 좋은 원단의 옷들이 당연하게 욕실 앞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왜 저 멍청한 공룡은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헤임은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재빨리 샤워기 아래로 가서 뜨거운 물을 틀어 온몸에 퍼부었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다른 게 있었다. 그 멍청한 공룡들이 뜨거운 물에 씻겨 배수구로 흘러 사라지기만을 바라며 한참 동안 뜨거운 물 아래에 서 있었다.

샤워를 마친 헤임은 허리에 수건을 감고 나왔다. 그러다 침대 위에 파자마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재빨리 구석으로 집어던져 시야에서 차단했다. 아마 저걸 또 보면 하루종일 샤워기 밑에 있어야할지도 몰랐다. 공동 합의서 조항에 따라 헤임은 내일부턴 필멸자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마력이 남아있는 지금 빨리 많은 것을 알아내야 했다. 술사에 대한 실마리는 '제 0의 서' 와 서점에서 혹시라도 도움 될까 싶어 가져온 트위즐러뿐이었다. 카펫에 주저 앉아 '제 0의 서'의 표지를 넘기자 예상한 대로 속지는 이미 까맣게 탄 상태였다.

'역시 이건...우연이 아니다.'

저주가 시행된 후 글자끼리 서로를 죽여 속지를 검게 타게 만드는 술법은 이만한 저주를 만드는 술사들은 대부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헤임이 기억하기로는 17세기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 그 당시 무자비하게 시행된 박해로 내로라하는 위대한 술사들은 전부 죽음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몇 명이 있었다고는 하나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지옥과의 연을 끊었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헤임은 더더욱 이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우연히' 운이 나빠서 '제 0의 서'를 구매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체 왜? 제물의 냄새는 아니었는데...'          

이런 아주 조막만한 증거들을 모아봐도 이건 절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무조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긴다.

왜?

오스카는 인큐버스나 부르는 한심한 짓을 제외하면 완전히 평범했다. 잘생긴 하드웨어와 찐따 같은 소프트웨어를 가졌을 뿐, 그에게선 제물 특유의 갇혀서 자란 돼지 같은 달큰한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옷장 속에 무엇을 숨긴걸까? ....하지만 뭐, 술사만 죽이면 헤임은 지옥으로 갈 수 있을텐데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지금 헤임의 석쇠에도 물고기가 잔뜩 있다. 남의 생선까지 봐줄 시간은 없었다. 헤임은 그냥 술사를 죽일 때까지 오스카에게 사탕발림이나 잔뜩 해주면서 체스말로 쓰면 그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엔 마력을 펑펑 쓰는 악마의 마법은 효과가 없었다. 인간 대부분이 아주 적은 마력에 의존해야했기에 그들의 기술은 조금 더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다. 마인박해 (인간들이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는 것) 당시 소수의 악마들이 그 아비규환 속에서 연인을 데리고 지옥으로 대피했을 때 헤임은 그 인간들로부터 꽤 많은 것을 배웠다. 이것도 그 중 하나였다. 준비물은 간단하다. 누군가가 맨 처음으로 소유한 물건만 있으면 된다. 천이나 종이, 혹은 모래나 심지어는 연못이더라도 최초 소유자의 현재 모습을 그려낼 수 있기에 지금처럼 마력이 아주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쓰기 좋은 술법이었다. 그에게 이걸 가르쳐 준 어린 마녀는 지옥에 있는 애인이 보고 싶어서 개발했다고 말했었다. 뭐, 그런 것치곤 주문이 살벌했지만 말이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메모지 한장을 뜯어낸 뒤 헤임은 새끼손가락을 물었다. 잉크처럼 새까만 피가 손가락 끝에서 방울지며 카펫 위로 떨어지자 그 자리마다 검게 부식되었다. 헤임은 정신을 집중하고 메모지 위로 새끼손가락을 가져갔다.

"Dilecte mi, ostende mihi partem tuam pulchram. Si cum aliquo es me, erue cor tuum et da mihi. Ego ruminabo cor tuum, et moriar cum illo. (사랑하는 나의 당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만약 내가 아닌 사람과 함께한다면, 심장을 뽑아 내게 주세요. 나는 당신의 심장을 씹어먹고 심장과 함께 죽을 겁니다.)"

새까만 피가 종이를 가득 덮고, 점점 피끼리 뭉치며 어떤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점점 사람의 형태를 띄우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종이 끝이 검게 말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헤임의 시도를 눈치챈 것이다. 헤임은 누군가 자신에게 개기는 것을 제일 싫어했기에 이를 악물고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염사를 시도했다. 피가 인간의 형태에 가까워지자 종이 끝이 점점 더 빠르게 검게 타기 시작했다. 종이가 전부 타버리기 전에 인상착의라도 확인하기위해 마력을 쏟아부느라 눈에 검은 핏줄이 터지고 목에 힘줄이 섰을 때, 양측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종이가 터져버렸다. 거의 잿가루가 된 종이가 카페트 위로 쏟아졌다. 헤임이 아무리 지금 딸피라고 해도, 필멸자 따위가 감히 헤임과 맞먹으려고 했다는 것과 최종적으로 헤임이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결국 그의 분노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눈에 검은 실핏줄이 잔뜩 터진 헤임은 얼굴이 잔뜩 구겨지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채 사자후를 지르며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그나마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 한 톨이 지금 바닥을 내려치면 뚫릴거라고 경고한 덕이었다.

"으아아악!!!!!!!!!!!!!!"      

고함에 깜짝 놀란 오스카는 양치하다 말고 칫솔을 문 채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 안은 가관이었다. 카펫은 곳곳이 부식되어있었고 헤임은 목청, 혹은 고막 둘 중 하나는 터트릴 기세로 악을 쓰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양심인지 뭔지가 가까스로 바닥이 아니라 허벅지를 부서질 정도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자존감에 실금이 간 악마의 얼굴은 온통 구겨져 검은 핏줄이 얼굴 곳곳에 올라왔고, 실핏줄이 다 터져 악마의 눈은 동공과 흰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흑안이 된 악마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유황불이 끓는 듯한 끔찍하고 음산한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바포메트의 뿔에 이름을 걸고!"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