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악마도 반품이 되나요?

9화

1차 BL

Rose by 제로지
2
0
0

헤임의 개지랄 단독콘서트를 1열 (15세이상 관람가, 120분)에서 감상하던 오스카는 그냥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것까지 감당해내기엔 오늘치 사건·사고는 OTT 드라마도 PT. 1-2로 나눴을 분량인지라. 오스카는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굳이 자는 개의 입에서 뼈를 빼낼 필요가 없었다. 오스카는 아직도 헤임이 쥐어뜯은 오른쪽 두피가 얼얼했다.

앗. 거품.

칫솔 대를 타고 치약 거품이 바닥 카펫에 떨어졌다. 오스카는 바닥을 대충 문질러 닦고 다시 욕실로 돌아갔다. 악마가 살벌하게 썅욕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은은하게 깔렸다. 부디 이웃집까지만 들리기 않기를... 오스카는 소소하게 기도했다.

***

햇살에 커튼 틈으로 기어들어 오던 오전 9시 45분, 습관처럼 공중에 둥둥 뜬 채 자던 헤임은 그대로 카펫 위로 추락했다. 척추가 아작나는듯한 통증과 함께 눈을 뜬 헤임은 처음 느껴보는 중력의 불쾌함과 아침을 맞았다.

소멸까지 7일, 필멸자 체험판의 시작이었다.

헤임은 평생 마력이 없는 상태로 살아본 적이 없기에 지금 이 감각은 너무 낯설었다. 임프 500마리가 각 팔다리에 묵직하게 붙어서 관절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진짜 임프였으면 싹 다 모가지를 쳤을 텐데. 짜증 난 헤임은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기엔 헤임의 자존심은 너무나도 완고했다.

중력을 견디지 못한 나약한 팔다리가 젤리처럼 덜덜 떨렸음에도 헤임은 고통을 무시하고 냉혹한 다이어트 캠프 트레이너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리를 움직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선 커다란 후디를 뒤집어쓴 오스카가 대접에 넣은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오스카는 고개를 들고 헤임에게 인사하려다가 멈칫했다. 변함없이 우아한 조각상 같은 저 얼굴과 다르게 다리는 맨 아래층 한 칸 남은 젠가처럼 달달 떨고 있었다. 오스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의자를 빼주고 그가 앉을 수 있게 도와줬다. 헤임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리에 앉은 뒤 식탁에 어제 서점에서 가져온 트위즐러 봉투를 던졌다.

"먹으면서 들어. 안 좋은 소식과 더 안 좋은 소식. 뭐부터 들을래?"

"둘 다 아침 식사 하면서 듣기엔 최악인데요....."

헤임은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식탁 위 트위즐러 봉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커다란 캐치프레이즈 스티커 밑에 가려진 유통기한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보여? 네가 책을 샀다던 서점에서 가져온 거야."

"1985년 3월 8일. "

헤임은 서점을 묘사하기 위해 공중에 손을 휘둘렀다가 멈칫하곤 다시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헤임은 진정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 쉬듯 이어 말했다.

"내가 인간사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있진 않으나, 누가 봐도 거긴 버려진 곳이었어.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것 같더군...."

"일단 네가 3주 전에 갔을 때의 모습을 아주 상세히 설명해봐. 정보는 많을 수록 좋으니까."

오스카는 손을 살짝 들고 말을 하기 위해 입안에 있던 치리오스를 분쇄기처럼 가열하게 씹었다. 목구멍 너머로 치리오스 덩어리를 밀어낸 오스카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진짜 처음부터 말해요? 어... 그날 우울해서 바닐라 라떼를..아 여기부터 말고요? 넵"

오스카는 기억을 더듬으며 습관적으로 눈을 굴리며 턱을 검지손가락으로 톡 톡 두들겼다.

"그러니까... 그 카페가 제 단골 가게에요, 근데 건너편에 처음 보는 가게가 있었어요. 네 그 서점이요"

"지금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했던게... 그 카페를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가거든요. 근데 그 서점은 그때 처음 봤어요. 하지만 새것 같은 느낌은 없었는데....."

오스카는 이쯤에서 헤임이 썅욕을 박을 것 같아 눈치를 봤지만 의외로 헤임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빠진 듯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스카는 약간 식은 커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음...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 서점에 들어가면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았어요. 네. 그날 좀 우울했거든요."

"왜?"

"그래서... 네?"

갑자기 헤임이 질문을 던지자 오스카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헤임이 그에게 사적인걸 물어보다니? 헤임의 얼굴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헤임 또한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헤임은 실수했다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됐어 잘못 나왔어. 대답하지.."

"어... 음 대학 문제로 좀... 누나는 4년 전체 장학금 받고 대학을 갔거든요. 가정 형편이 엄청 좋진 않아서, 저도 아마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날 스탠퍼드 면접이었는데... 좀 망친 것 같아서 우울했어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오스카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딱딱하던 분위기가 조금 말랑해졌다. 햇빛이 들어와 식탁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고, 두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숨소리가 가장 큰 소음인... 묘한 무드 속, 헤임은 비상탈출을 위해 주먹을 꽉 쥐고 고개가 약 150도로 돌아갈 정도로 세게 쳤다. 경악한 오스카가 숟가락을 놓치는 바람에 식탁에 우유가 몇방울 튀었다. 하지만 헤임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 손으로 뚜두둑, 뚝 소리를 내며 고개를 원상 복귀 시키곤 자연스레 핀잔을 줬다.

"뭘 봐?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

석회암 같던 볼은 푸르딩딩해졌지만 헤임은 여전히 당당했다. 저 예쁜 천사 같은 얼굴에 악귀라도 든 것 같은 성격이라니... 그가 스스로 악마라고 밝히지 않았더라도 누구든 성수는 한번 뿌려봄 직했다. 도저히 범인의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오스카는 키친타월로 우유를 닦은 후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네..."

오스카는 쓰레기통에 키친타월을 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마저 말씀 드릴게요. 그 서점에 들어갔는데 어제 우리가 갔을 때랑 완전히 달랐어요"

"누가 봐도 관리가 잘 된 중고서점이었고... 아, 되게 신기한? 향이 났어요. 꽃 냄새랑 그을린 가죽 같은 나무 향 같은 게 섞인...."

"흠...."

"그리고 그냥 둘러보는데 엄청 낡고 너덜너덜한 책이..."

오스카는 불현듯 주둥이를 다물었다. 말로 정리하다 보니 너무나도 수상했다. 뱀이 기어 다니는 풀숲에서 피크닉을 한 꼴이었다. 오스카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것투성이인데 헤임은 어떻겠는가, 오스카는 헤임을 하루 (정확히는 한나절) 알았지만 맛보기 스푼으로 찍어 먹어본 것만으로도 헤임의 성격이 지옥보다 더 참혹하다는 건 알았다. 저 성질머리론 곧바로 주먹이 날아와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오스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관용을 베풀어 어제 때린 곳 말고 반대 뺨을 갈겨주길....

하지만 오스카의 예상과 다르게 헤임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도로 위에서 모가지 쭉 뻗고 느릿느릿 걷는 비둘기보다 멍청하다고 모욕하지 않았고, 주먹을 꽉 쥔 채 화를 참으려 심호흡을 하지도 않았다. 헤임의 그저 약간의 의문만 품은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 해?"

"어... 저한테 욕 안 하시네요?"

헤임은 그 말을 듣고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왜?"

"당연히 제가 바보같이 속았다고 욕하실 것 같아서...."

헤임은 말이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오른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게 네 잘못이야? 네 뇌가 완두콩만 하긴 하지만 죄는 속인 자들의 것이야. 인간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 안 해? 어딜 죄를 날로 먹으려고..."

헤임이 화를 내는 포인트는 이상했지만 오스카는 그 말에 조금 위로를 받았다. 오스카가 스스로 풀숲에 들어갔더라도 그 잘못은 뱀을 푼 이에게 있다는 아주 당연한 말이 오스카의 말랑말랑한 마음을 한번 발로 찼다. 헤임은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오스카는 조금 목이 메여서 헛기침을 한번 했다.

"큼... 어쨌든 마저 말 할게요. 그래서 그 책을 봤는데, 진짜 너덜너덜했고 글씨도 반쯤 날아갔는데... 현대 말도 아니었고."

"그래도 중세 문학 수업을 들은 적 있어서 한 1/3은 대충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단어가 어려웠지만... 그리고 대충 봤는데 인큐버스... 를 부르는 소환진이었어요."

오 젠장... 맨 정신에 스스로 인큐버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데는 꽤나 큰 다짐이 필요했다. 그는 얼굴을 시리얼 그릇에 처박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견뎠다.

"그... 리고 3주 동안 책 해석하고, 재료 모으고... 어제 다락방에서, 네. 그거요."

오스카의 말이 전부 끝났다. 방은 또다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오스카는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서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악마의 입에서 흘러나올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조금 두려웠다. 영겁 같던 시간이 지나고 헤임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똑똑.

무언가가 문을 두드렸다.

———

안녕하세요

아ㅋㅋ진짜 오늘 글 안 쓰면 인간 아니다

라는 마인드로 6월과 7월을 보냈습니다

진작 인간실격 되었지만 요즘은 짐승의 자리도 위태롭네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