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쿱, 액체의 범위

신체의 8%는 혈액

돌밭 by 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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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팀)고잉블루. 승철의 얼굴 아래에 뜨는 자막이 부르는 이름은 그랬다. 지금은 젊은 녀석이 제 이름을 이어 쓰고 있는 중이다. 승철이 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걸로 센터에서 수근거리는 건 알고 있지만 괜찮았다. 그냥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묻혀있는 인물이면 됐다.


*

처음으로 전장에 나간 날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제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현장이 체질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사수의 사인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전방에는 선배들이 각자의 능력으로 시민들을 구출하고 악당들을 차분히 처리하고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을 듯? 이 형은 왜 나 앞으로 안 보내주지? 안일한 생각 중 갑작스레 건물 틈에서 튀어나온 처리 대상에 승철은 당황해 지하로 흐르던 수도관을 터뜨렸다. 바닥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물줄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녀석은 바닥에 몸이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 사수를 바라봤다.


헉... 저 잘했죠!

뭘 잘했다고 웃어... 물 좀 꺼라. 선배 능력도 못 쓰게 하게?

아! 맞다. 형 불이지. 나랑 진짜 상성 반대인데 왜 붙여줬징.

어쭈. 말이 많다. 또 순간적으로 능력 조절 안하지. 다시 기초훈련 처음부터 받고 싶어? 


솔직히 말해 존심이 상했다. 어디서 신체 능력이 모자란다, 능력이 부족하다 소리는 들은 적도 없는데. 제 성적표 보셨어요? A+이 가득하다구요. (사실 B+도 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입술만 삐죽이며 손에 힘을 주어 물을 잠갔다. 제 몸과 주변에 있던 물방울을 한데 모아 멀리 던졌더니 무거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젖어있는 옷을 탈탈 털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보송해진 선배가 있었다. 치사하게 자기 혼자 능력으로 말리고 말이야. 저거저거 또 삐질라고? 지훈은 승철의 옷에 손바닥을 대곤 열을 가했다. 둘의 주변으로 증기가 가득 차더니 금세 옷이 보송해졌다.


건조기 능력 좋네요. 이름 바꾸자. 고잉레드 말고 고잉건조기 어때요?

오늘따라 들떴네. 굽히고 싶지 않으면 좀 가만히 있을래?

넵, 선배님. 


핫데뷔 무대(지훈은 이를 축축데뷔라 불렀다)를 마친 승철은 자발적으로 추가 훈련 신청을 했다. 고잉레드, 지훈의 입에서 다시는 쓴소리 안 들어야지 하는 혼자만의 존심 싸움이었다. 승철처럼 능력이 좋은 녀석들은 눈의 띄게 능력치가 올라가는 편이다. 활용도도 높이고 있고 모의훈련, 실전에서도 꽤나 높은 성공률을 자랑했다. 승철은 자신감에 어깨가 솟아 있었다. 

우선 내가 실수할 일은 점점 줄고, 물 옆엔 항상 불이 있을 거니까 제가 물로 폭주하면 레드가 나 잡아주면 되고. 그쵸. 

지훈은 승철의 어깨를 탈탈 털어주며 웃었다.

*

하루는 출동 전 머리가 조금 지끈거려 약을 털어 먹었다. 오늘은 쉬지? 지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정도는 괜찮아다며 괜히 힘나는 척을 했다. 베이스에서 현 상황을 듣고 작전을 시작했다. 앞서 나간 지훈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발끝으로 물이 찰랑이며 무겁게 걸음을 잡아 당기는 것 같았다. 연계되어야 할 공격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무거운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지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 승철의 어깨를 쥐었다. 안되겠다, 너 들어가야겠다. 

승철을 부축하는 찰나에 문 옆에 숨어있던 녀석이 튀어나왔다. 승철은 이전과 같이 바닥에서 수도관을 터뜨리려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바닥은 울림 없이 조용했다. 남자는 칼을 쥐고 지훈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사람을 향해 직접적으로 능력을 쓰는 것을 망설이던 지훈은 앞에 불을 쏘아 올리려 했으나 발아래 있던 수도관을 터뜨려 지훈을 피하게 한 승철이 조금 더 빨랐다. 수압에 밀려 벽에 등을 부딪히고 쓰러진 지훈을 보곤 남자는 승철의 앞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쥔 주먹에 힘을 줬다. 수도야, 제발제발 터져라.

질끈 감은 눈을 떠 쓰러진 지훈을 흘겨봤다. 들리라는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머리 위에서 괴성이 들렸다. 상대의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는 승철의 앞에서 픽 쓰러졌다. 제 얼굴에 피를 토하고선. 항상 보던 물과는 다른 점성.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것 같은 온도. 끈적거리는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진한 쇠냄새가 속에 꽂혔다. 헛구역질이 났다. 눈안으로 가득 차는 열과 목구멍에 차오르는 숨을 느끼며 승철은 뒤로 쓰러졌다. 

*

승철은 빡빡한 눈꺼풀을 겨우 밀어내며 눈을 떴다. 주변을 살펴보니 하얀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삐삑거리는 소음. 아, 병원이다. 쓰러졌구나 생각을 하며 시야를 돌리자 옆에 있던 피곤한 얼굴의 담당의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떼려고 했으나 목구멍이 다 달라 붙은 것처럼 따가웠다. 어 깨셨네. 하는 덤덤한 말투와 함께 잠시 밖으로 나서는 듯 싶더니 승철 부서의 관리장이 들어왔다. 

정신 좀 들어요? 일어나자 마자 하는 말이 이거라 미안해요. 우리도 지금 바로 고지를 해줘야 해서.. 

8일, 23시시 22분, 작전명 XXX. 결과적으로 성공은 했어요. 상대는 OOO. 서버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승철 씨가 상대방 피를 액체로 오인식해서 역류 시켰고, 온 몸에 있는 혈액을 바깥으로 분출시켜서 처리했어요. 이런 거 우리 훈련 중에 안 했는데도 혼자 잘 했네요? 사실 골치아픈 녀석이었는데 주변에 피해 안 끼치고 하나 딱 처리해주셔서 저희로는 아, 이거는 너무 TMI 였다. 미안해요. 그건 그렇고 본인 능력에, 본인 피에 목구멍 막혀서 익사할 뻔 한 건 알아요? 피를 쏟아서 그런가 하얀 얼굴 더 창백해졌네. ... 아무튼 푹 쉬어요.

그는 말을 쏟아냈다는 것이 맞았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말들이 속을 울리며 잠에 빠지게 했다. 며칠간의 지루한 회복 중에 들은 말로는 지훈은 그 일을 계기로 은퇴를 했댔다. 허리를 다쳤다고 한 거 같다. 더이상의 현장직은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고잉레드의 이름을 내려놨댔다. 그래도 영 떠나지는 않았다. 후배 양성을 위해 개발훈련부서에 들어가 이런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게 뭔가 새로 만든다고 했다. 

누구보다 능력 좋던 지훈의 앞길을 막은 것이 전부 제 탓 같았다. 새로운 팀을 꾸리고 새로운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승철은 생각의 꼬리를 결국 잘라내지 못했다. 내가 출동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죄책감에 고잉블루라는 이름도 내려놓지 못했다. 이걸 놓으면 혼자 털어버리고 그를 여기 두고 가버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이름만 잡고 있었다는게 맞았다. 승철은 복귀 후 출전을 거부하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은 아직 회복이 덜 됐나보다 하며 다른 사람들이 대신 나가주기도 했지만 몇 번의 거절 후 부르지도 않는 제 이름에 그나마 안심했다. 상처를 덧대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이기적인 안도감이었다. 승철은 쇼파에 기대 몸을 웅크렸다. 휴대폰의 밝은 빛을 손가락으로 내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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