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우리'라고?
오스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악마는 자신과 그를 묶어서 말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악마를 부른 후 그는 바람 앞에 놓은 낙엽처럼 이리저리 휩쓸렸지만, 한바탕 서럽게 울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진 오스카는 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분명 악마는 이전에 오스카가 주문을 다르게 쓴 덕분에 저주를 피했다고 말했다. 악마에게 휘말려 서점까지 그와 함께 왔지만....결론적으로 지금 이건 악마만의 문제 아닌가? 아니, 악마가 아무리 예쁘더라도 오스카는 더 이상 이 오컬트 드라마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오스카는 악마를 바라보며 무를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왜 '우리' 예요? 아까 전 저주를 피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뭐...돌아가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정확히 제 문제는 아니죠."
악마는 그런 오스카를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듯 스스로 이마를 팍 쳤다. 이마에서 손이 스르륵 내려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악마는 갑갑한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오스카에게 핀잔을 줬다.
"너 이제까지 내가 한 말은 뭐로 들은 거야? 진짜 새대가리냐? 지금 네 뇌랑 비둘기 뇌랑 바꿔도 모를..."
악마는 곧바로 무언가를 덧붙이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오스카는 얼떨결에 같이 창문을 바라봤지만 창문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먼지 때문에 해도 제대로 들지 않았기에 누가 밖에 있어도 내부를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창문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다시 돌린 뒤 입 모양을 최소화하여 숨소리에 가깝게 속삭였다.
"지금 바로 문밖으로 나가. 최대한 조용하게."
분명히 창문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악마는 마치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창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악마는 오스카가 무의식중에 창문을 보려고 하자 오스카의 팔에 팔짱을 꼈다.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함에 오스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팔에 팔짱을 낀 악마가 그를 질질 문 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꽤 당혹스러웠지만 악마가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싫지 않아 오스카는 그 서늘함을 즐기며 같이 문밖으로 걸어갔다.
서점의 문을 비명처럼 삐걱거리며 닫혔다. 같이 차를 주차한 골목으로 걸어가는 내내 악마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오스카는 자신의 옆에 꼭 붙어있는 악마의 정수리를 슬쩍 바라보자 괜시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조금....데이트 같네.'
대체 어떤 대가리면 지금 상황에서 사고가 이렇게 흐르냐고? 어쩔 수 없다. 해가 바뀌어 오스카가 18살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는 아직 10대였다. 상상만으로도 녹아버리는 나이였다. 더군다나 이상형과 취향이 상관 없어지는 저 얼굴 앞에선 더. 호두까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걷던 오스카는 마치 데이트 상대에게 하듯 서툴게 조수석 문을 열어 줬다. 악마가 그런 대접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차에 타자 오스카의 3초 동안 둘이 입양할 아이의 이름 후보 5개를 뚝딱 만들었다. 오스카는 망상을 자제하려 머리를 한번 가볍게 턴 후 빙 돌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우르릉 우는 소리가 차 안을 울리자 가볍게 페달을 밟으며 타이어 자국이 얼룩덜룩하게 칠해진 눈 위에 자국 하나를 더했다. 이전보단 덜 급박했으나 집으로 가는 내내 여전히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창밖만 바라보는 악마는 여전히 많은 생각에 빠져 보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악마는 거실 벽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오스카를 보고 있었다. 괜시리 어색한 분위기에 오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뒤적이던 중 차가운 콜라 두 캔을 챙겨 터벅터벅 다시 거실로 걸어왔다. 악마에게 캔 하나를 건넨 오스카는 소파에 걸터앉아 콜라를 땄다. 칙-소리와 기포가 바글바글 올라오다가 팡-터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며 오스카는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운을 땠다.
"음..저기요.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벽에 기대있던 악마는 차가운 콜라 캔을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악마가 거실 테이블에 캔을 내려놓자 탁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악마는 소파에 다가와 오스카의 바로 옆에 앉았다. 그는 허공에 무엇을 그리려고 손가락질을 하려다 관두고 손을 무릎 위에 둔 채 한숨 쉬었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겠지? 이런 유형의 저주는 저주가 목적이 아니라고."
악마는 테이블 위에 있는 콜라 캔을 집어 들었다. 악마는 검은 손톱으로 캔 뚜껑을 두드렸다. 그의 손톱이 얇은 알루미늄에 손톱이 닿자 틱틱- 소리가 났다.
"내용물을 마시기 위해선 이 캔 뚜껑을 따야 하지. 하지만 어떤 캔은 뚜껑을 딸 때 도구가 필요해."
"혹은 스스로 딸 수 있지만 캔이 너무 날카로워서 다칠 위험이 있는 것도 있지."
악마는 손을 뻗어 오스카의 검지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석회암 같이 창백한 손이 오스카의 손가락을 감싸자 악마가 알면 즉시 천장행에 처해질 생각만 들었기에 오스카는 몸이 불편해서 조금씩 움찔거렸다. 오스카의 움찔거림을 신경 쓰지 않고 악마는 오스카의 손가락을 끌어당겨 캔 위에 올렸다. 캔의 차가운 감촉이 오스카의 검지 손가락에 닿자 오스카는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이런 저주는 그럴 때 쓰는 거야. 뚜껑을 딸 도구로 쓰거나 나 대신 뚜껑을 딸 순진한 멍청이를 위한 함정으로."
악마는 오스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으나 한 줄기의 빛 조차 허락되지 않은 저 커다란 검은 눈에 오스카는 비치지 않았다. 이윽고 악마는 오스카의 손가락을 살짝 잡아 캔 입구 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하지-만 넌 의식에 실패했지.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결론적으로 캔을 여는 것엔 성공했어. 하지만...캔 뚜껑을 따지 않고 열어버린 거야. 그리고 이것부터 문제가 시작돼."
"첫째, 저주를 건 사람은 네가 캔 뚜껑을 따지 않아서 목적 달성에 실패했어. 둘째, 그렇다지만 넌 결론적으로 캔을 열어버렸지. 저주가 네게 영향을 끼쳤...이건 솔직히 지금 나도 파악이 안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알아둬."
"마지막으로 셋째,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서 서류 보던 내가 여기 소환되었다. 음...인간의 언어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악마는 업무 유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는데 그중 나는 관리직. 직접 소환되기엔 내 계급이 좀 높거든."
"그렇기에 이 내가 그 엉터리 인장과 주문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은 아주 큰 일인 거야. 이제까지 없던 신유형의 크레바스가 생겨서 거기 매몰된 거지. 인간처럼 표현하자면 '버그'가 발생하였고 이 버그가 픽스되기 전까지는 어떤 문제가 계속 발생할지 아무도 몰라."
악마는 오스카의 손가락을 떼어내고 오스카의 체온에 약간 미지근해진 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악마는 오스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선 여기까지. 질문 있어? 하나만 대답해줄게."
악마의 말을 들은 오스카는 속으로 계속 고민했다. 저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 저주를 건 사람? 저주를 피하는 방법? 여러 가지의 것들이 오스카의 머리 속에서 공처럼 휙휙 던졌지만 오스카를 강타한 생각 하나가 있었다. 잠시 후 오스카는 민망한 듯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지금 묻기엔 좀 이상한데, 이름이 뭐예요?"
그 말에 악마는 황당해하며 눈썹을 추켜올렸다. 허, 하는 헛웃음을 지은 그가 습관처럼 오른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리자 작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악마는 꽤나 흥미로워 보이는 얼굴로 오스카 쪽으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단숨에 새빨개진 오스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악마한테 이름을 묻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그리고 악마는 즐거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오스카에게 키스할 것처럼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자 오스카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금기의 과일을 건네주는 뱀처럼 느릿하고 매혹적인 악마는 커다란 두 눈 안에 오스카를 가득 담았다. 갈색 눈동자에 녹색이 살짝 흩뿌려진 듯한 헤이즐 색 눈동자는 악마의 블랙홀 같은 죄악의 눈동자를 비추자 마치 일식이 일어나듯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악마는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바람결처럼 속삭였다.
"헤임."
"그게 내 이름이야."
악마가 조용히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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