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th

Deaglan & Co

(4-b-2) / 자잘한 설정풀이에 가깝습니다.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니므가 시내에 있는 작고 오래된 서점에서 파트 타임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했다. 시내를 산책하던 중 한 서점을 마주쳤고, 그 서점의 유리 창문에는 마구 휘갈긴 글씨로 적힌 구인 공고가 붙어 있었으며, 니므는 서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마침, 용돈벌이의 필요성을 좀 느끼고 있는 참이기도 했고.

그래서 니므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서점의 문을 밀었다.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라는 살가운 인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오래된 나무와 종이 냄새가 니므를 반겼다. 이윽고 눈에 담긴 서점 내부는, 딱 밖에서 보이던 만큼 낡아 있었다. 따스한 주홍색 빛을 내는 고전적인 모양의 전등과 모서리가 전부 뭉툭하게 닳은 낡은 책장들, 서가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접이식 사다리는 색이 짙었고, 둥그런 카운터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듯 맨들맨들했다. 그러나 세월이 남긴 흔적이 짙을 뿐, 작은 서점은 구석구석에서 애정을 가지고 신경 써 관리한 태가 났다. 기름을 먹인 마룻바닥은 오랜 시간을 견뎠을 것이 분명함에도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책장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하나둘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긴 니므는, 오래 가지 않아 둥그런 카운터 앞에 도착했다. 카운터에는 서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노인의 정수리가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자신에게 아직 약간 높은 카운터 앞에서 슬쩍 까치발을 든 니므는, 특유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구인 공고 보고 왔는데요.”

그러자 노인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고, 제 앞에 있는 여자애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몇 배는 괴상한 얼굴이 됐다.

“시간제 직원을 구하신다면서요? 서점 유리창에 붙어 있는 걸 봤어요.”

‘그걸 보고 정말로 왔다고?’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노인은 주섬주섬 안경을 찾아 쓰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댔다. 직원 필요해서 구인 공고 붙여두신 거 아니에요? 그딴 걸 보고 진짜 올 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그래서, 구하시는 거예요, 안 구하시는 거예요? 잠깐 있어 봐라. 노인은 한참을 툴툴댔고, 니므를 이상한 별종 보듯 쳐다봤지만 어쨌든 채용은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급료는 많지 않았으나 일이 고되지 않았고, 주인 할아버지는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손수 작성한 꼼꼼한 계약서를 니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럼 된 것 아니겠는가? 결과주의적 면모가 있는 니므 레드몬드는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를 만족스레 내려다봤다. 벌써 이 일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

서점의 주인 할아버지 이름은 ‘데클런Deaglan’으로 그를 아는 이들 사이에선 ‘데클런 영감’으로 통했다. 부인은 몇 해 전 세상을 뜨고, 하나 있는 아들 부부는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다는 그는 홀로 서점을 감당하기 벅차 사람을 뽑은 것이라고 했다. 데클런 영감은 평소에도 아일랜드어를 사용했고, 니므Niamh를 ‘니브’라 부르고는 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적, 니므는 데클런이 하는 말을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순히 사투리가 심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빠에게 말해보니 데클런 영감은 지금까지 계속 아일랜드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던거번은 가까운 곳에 게일터흐트Gaeltacht 지구가 있는 만큼 나이가 많을수록 일상에서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수가 꽤 되는 곳이었다. 아니, 그런 사정이 어쨌건 난 런던 출신이라고! 니므는 한동안 고민해 봐야 했다. 이건 혹시 내가 런던 출신 여자애라 돌려서 욕하는 것인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클런 영감은 니므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만큼은 착실히 아일랜드 남부 사투리가 강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히죽 웃으면서, ‘다섯 번째 서가에 먼지가 쌓였는데 좀 털고 오거라.’ 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저 영감,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지!

데클런 영감이 아일랜드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의 사소한 습관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먼스터 지방을 ‘언 부운an Mhumhain’이라 불렀고, 워터퍼드 주를 ‘콘테 포르토 라르케Contae Phort Láirge’라 일컬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니므는 곧 그런 데클런 영감에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반쯤은 오기로 아일랜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빠는 아일랜드어를 가르쳐 달라는 니므의 요청에 매우 기뻐했고, 니므는 착실히 하나둘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저 영감 분명 내 욕할 때만 아일랜드어 쓴단 말이지? 어디를 청소하라는 둥 뭘 꽂아놓으라는 둥 하는 말들은 전부 영어로 하면서 말이야. 영감의 히죽 웃는 얼굴이 짜증 났다. 언젠가 그 얼굴이 무너지는 걸 꼭 보고 말리라.

니므가 아일랜드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데클런 영감이 하는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그에게 아일랜드어를 한두 마디 묻고 배우려 하자 영감의 태도는 약간이나마 유해졌다. 여전히 친절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니므의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고, 무뚝뚝한 니므의 성격을 비난하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영감의 혼잣말에 아일랜드어로 받아쳤을 때 지었던 이상한 표정이란! 니므는 데클런 영감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짧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은 서점에는 당연하게도 손님이 적었다. 데클런 영감과 니므는 자연스레 서점 안에서 말없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책을 읽곤 했다. 아일랜드의 싸늘한 날씨에는 뜨겁고 진하게 우린 차가 잘 어울렸고, 니므는 데클런 영감에게 차에 잼을 넣어 마시는 법을 배웠다. 비록 그는 차에 잼보다 위스키를 섞는 날이 더 많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는 것이 늘었다. 니므가 서점에 처음으로 애쉴린을 데려온 날, 데클런 영감은 온 서점을 고양이 털 범벅으로 만들 거냐며 질색했다. 집에서 부엉이를 두 마리나 더 키운다는 사실을 알자, 사람 사는 집이 아니고 동물 우리냐며 기겁을 했다. 친구들이 서점으로 찾아와도 되냐는 니므의 요청에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더니 결국 허락하고, 우르르 몰려온 꼬마 마법사와 마녀들에게 기꺼이 코코아를 한 잔씩 내어주기도 했다. 분명 애들이 많아 정신이 없다더니, 그때 놀러 왔던 네 친구들을 또 초대할 일이 없냐며 니므에게 은근슬쩍 묻기도 했다.

선물 받은 록밴드 음반을 온 서점이 울리도록 크게 틀어놨을 때 짓던 표정이란! 니므는 그날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 웃었다. 종국에는 데클런 영감이 음악 소리가 아닌 니므를 보고 질겁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니므가 영화관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점에 배달되는 영화 각본집의 수가 늘었다. 학기가 시작되어 호그와트에 가면 편지 한 장 않는 니므에게 거긴 대체 뭐 하는 학교길래 학생이 편지 하나 부치지 못하냐고 성을 냈다. 그 역정에 담긴 서운함을 읽은 니므는 그다음 학기부터 엄마에게 편지를 보내며 전달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떤 책을 구해달라는 내용이긴 했지만, 어쨌든 편지는 편지 아닌가? 그럼 영감은 이런 배은망덕한 것을 봤냐며 구시렁대는 말들로 가득 찬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니므는 그 퉁명스러운 편지에 어린 걱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 물론 ‘부탁한 물건’ 또한 늘 상하지 않고 잘 도착했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데클런 영감은 책을 읽다 말고 혀를 끌끌 차고는 했다. 책의 시대는 라디오의 등장으로 진작 끝나버렸다며. 심지어 그 대단하던 라디오조차 MTV의 등장으로 명을 달리했고, 이제는 영화가 티비쇼를 위헙하고, 컴퓨터가, 비디오 게임이 새 시대의 적수로 떠올랐다. 그런 와중 책 따위가 설 자리가 어디 있겠냐며, 요즘 시대에 책 따위 누가 읽겠느냐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 놓았다. 그러고는 꼭 니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리 말하는 것이다.

“책은 루저들이나 읽는 거지.”

“본인이 서점 주인이라는 건 알죠? 벌써 오락가락할 나이는 아니신데.”

니므의 버릇없는 대답에 데클런은 킬킬 웃었다. 너는 서점에서 먼지 먹은 책이나 정리할 게 아니라, 가서 비디오 게임을 해야 돼.

원하시면 당장 내일부터 일을 그만둘 수도 있는데요. 그럼 이제 높은 책장은 절대 못 채우시겠지만, 저도 평생 책 정리만 하면서 살 생각은 아니거든요. 예끼 이놈, 누가 이 서점을 물려주기라도 한대? 그럴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을 거니까 꿈 깨라. 이 서점이 정말로 사라지면 누구보다 아쉬워할 분이 왜 저러신담. 창고 재고 정리 끝냈어요, 데클런. 오냐.

그래도 니므 본인도 아쉬울 것 같았다. 이 오래되고 낡고 작은 공간이 사라지면.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친밀감, 그리고 투덕거림으로 만들어진 편안한 관계가 끊어지면.

니므가 나이를 먹자, 영감은 서점 열쇠의 복사본을 니므에게 건넸다. 서점 열쇠의 복사본을 받은 그날, 니므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그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서점의 문을 여는 것은 니므의 일이 되었다.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 냉기가 감도는 내부를 가로질러 불을 켠다. 커튼을 걷고 라디에이터의 온도를 올리고, 밤새 쌓인 먼지가 없는지 점검한다. 서점의 문은 데클런 영감이 닫았다. 때로 그는 니므가 서점에서 밤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자식을 적당히 방임하는 레드몬드 부부는 그것을 막지 않았고, 그럼 니므는 애쉴린을 데려와 끌어안고 밤새 책을 먹어 치웠다. 고양이 털을 질색하는 데클런 영감이지만, 니므가 서점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면 애쉴린을 데리고 오는 것을 눈감아줬다.

니므에게 열쇠의 복사본을 넘긴 뒤로, 영감은 종종 니므에게 서점을 완전히 맡기고 책을 구하러 며칠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단골이 찾아달라고 요청한 책이 있다나. 어쩐지 이렇게 손님이 없는 서점이 어떻게 운영되나 했더니 오래 거래하고 있는 단골들이 있단다.

“어쩐지 매일 카운터에서 편지를 쓰고 나한테 책을 찾으라 시키고 택배를 부치더라. 난 친구도 없는 영감이 어디에 자꾸 편지를 보내나 했죠. 러브레터라도 쓰나, 싶고.”

“이 망할 녀석이!”

“단골 장사라니, 의외네요. 여기가 ‘채링크로스 84번지84, Charing Cross Road도 아니고. 이 서점은 Marks & Co가 아니라 Deaglan & Co잖아요?”

“그래서, 네 그 못생긴 고양이가 새끼를 몇 마리나 낳았다고?”

“불리해지니까 말 돌리시는 거 봐. 네 마리요. 엄청 귀여워요. 좀 더 크면 데려와서 보여드릴게요.”

“아서라. 어떻게 집에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많을 수 있냐? 나 원 참, 징그러워서.”

“아, 맞아. 알피 부인한테 러브레터 쓸 생각 있으시면 도와드릴 생각이 있어요.”

“이놈이 다 늙은 노인을 놀려!”

그러거나 말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운터에는 고양이 간식 통이 생겼다. 데클런 영감은 니므에게 슬쩍 첫 데이트에는 무슨 꽃이 좋겠느냐 물었다. 둘은 닮은 동시에 달랐기에, 서로가 편안했다. 그렇게 쌓은 우정이 견고했다. 괴팍한 아일랜드 노인과 무뚝뚝한 잉글랜드 여자애, 그리고 제멋대로인 고양이가 있는 서점의 유리창에서 오늘도 따스한 불빛이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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