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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f Irish and Half English

(4-b-1) / 자잘한 설정 풀이에 가까워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집에 가자, 니므.”

3학년이 끝나고 맞은 여름방학 첫날, 킹스크로스역에서 엄마는 그리 말했다. ‘집’에 가자고. 그렇게 아일랜드는 니므의 집이 되었다. 본인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제부터 그곳은 니므가 반강제적으로 부여받은 ‘돌아갈 곳’이었다. 아무리 낯설고, 서먹하고, 생소할지라도. 그리고 4학년을 마치고 맞은 여름방학 첫날, 레드몬드 부부는 이번에도 딸을 아일랜드로 이끌었다.

몇 달 만에 밟은 아일랜드 땅은, 여전히 익숙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므의 사정이 어쨌건, 니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약속이 있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바쁘다는 것은 ‘생각’을 이어갈 겨를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땅과 자신의 괴리를 오래도록 곱씹다가는, 영 좋지 않은 결과로만 이어질 것이 분명했으니.

그래서 니므는 엄마의 작업실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쓰길 반복하면서, 더듬더듬 느리게 타자를 쳤다. 엄마는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할 것이라는 딸의 짧은 통보에 뛸 듯이 기뻐했다. 가족끼리 해외로 여름휴가를 떠나려던 계획을 취소하며 온갖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하고, 지팡이를 휘둘러 온 집안을 단장했다. 아빠는 딸의 귀찮은 요구에도 기꺼이 응하며 친구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리고 와주겠다 약속했다. 짧은 회상과 마지막 마침표를 끝으로, 차가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뜨끈하고 하얀 종이를 울컥울컥 토해낸다. 그것들을 잘 모아 정리한 니므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서점으로 출근할 시간이었다.

파트 타임으로 일하게 된 오래된 서점에서 편지와 함께 보낼 선물을 고르고, 집에 돌아와 각자에게 보낼 편지를 마무리 지은 뒤 포장까지 마치자,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방 안에 진동하는 잉크 냄새를 뒤로하고, 니므는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한 번에 초대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섬세하지 못한 인간인 니므 레드몬드의 고민은 짧았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잘래.’ 침대는 푹신했고 이불은 포근했으며, 애쉴린은 변함없이 무거웠다.

*

딸의 마법사 친구들을 초대하느라 여름휴가 계획을 취소한 레드몬드 가는 온 여름을 아일랜드에서 보냈다. 매해 여름이면 해외를 떠돌던 니므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아일랜드로 돌아왔던 작년조차 7월 한 달간은 집을 떠나 헝가리에 머무르며 휴가를 즐긴 바 있었으니.

그렇게 맞은 여름. 처음으로 마주한 아일랜드의 7월.

아일랜드는 끔찍이 고요했다. 아직 여름이 한 달이나 남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쩌면 한바탕 떠들썩한 시간을 보낸 뒤라 이 적막이 더욱 노골적으로 와닿는 것일지도 몰랐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기분을 느꼈던 멀지 않은 과거가 니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집안은 시끄러웠고, 엄마와 아빠는 애들에게 온갖 쓸데없는 질문 세례를 퍼부었으며, 걔들은 그걸 또 좋다고 웃으며 신나게 학교 이야기를 떠들었다. 주말이면 모두가 아빠의 차에 구겨져 탑승한 채, 혹시라도 경찰에게 들켜 벌금을 물까봐 창문 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숙여가며 아일랜드 곳곳을 구경했다. 비가 오는 날엔 집에 틀어박혀 보드게임을 했고, 하늘이 맑은 날엔 항구로 향해 할아버지의 요트를 탔다. 갑자기 내린 비로 모두가 쫄딱 젖어 덜덜 떨고, 누군가가 대차게 멀미를 하기도 했지만.

파자마 파티와 베개 싸움으로 순식간에 흘러간 새벽, 자신이 일하는 서점에 다 같이 몰려가 주인 할아버지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게 만들고, 또 코코아를 한 잔씩 얻어먹었던 오후.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금 세상이 더욱 고요한 것은 그 탓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있을 여름 동안의 모든 소란을 그 짧은 시간 안에 전부 미리 사용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므는 주어진 환경에 제법 잘 적응하는, 무던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니므는 금세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 떠오른 해에 눈이 떠지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황무지를 산책했고, 평소보다 눈을 조금 일찍 떴거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항구에 가서 해가 뜨는 걸 구경했다. 수평선에 반쯤 잠겨있던 해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며, 종내에는 하늘 꼭대기에 걸리는 과정을, 방파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전부 지켜봤다. 해가 완전히 떠오른 뒤에는 엄마와 아빠 몰래 할아버지의 요트를 몰고 가까운 바다를 누볐다. 날이 아주 맑은 날이면, 새벽 중에 비가 내려 대기 중에 안개도 먼지도 없는 날이면 요트를 끌고 바다로 나갔을 때 저 멀리서 영국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한 날이면, 몰래 바다로 요트를 몰고 나간 날이면 아빠의 고향이 항구 도시라 다행이라는 안도가 짧게 찾아왔다. 이것조차 없었으면, 이 여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했을 테니.

마법사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서점에서 일을 구하고, 황무지를 산책하고, 항구를 오가는 것. 전부 니므가 처음 해본 일들이었다. 누군가는 보잘것없다 평할지 모르나 니므에겐 전부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리고 도전을 거듭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한 것일지라도.

1995년의 여름, 니므는 아빠가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야 런던에서 살던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 그야 런던에서 살던 집에는 아빠가 엄마를 위해 훌륭하게 반주를 해줄 수 없었으니까.

아빠가 피아노를 치고, 엄마가 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반대로도 했다. 엄마 역시 피아노를 잘 쳤고, 아빠 또한 노래를 잘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아빠가 낡은 거실 피아노의 덮개를 올리면 집안에선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의 반주에 맞춰 엄마는 니므에게 춤을 추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1995년의 여름을 맞기 전까지, 니므는 아빠가 먼스터 아일랜드어Gaelainn na Mumhan를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을 몰랐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런던에서 살던 시절 아빠는 아일랜드어를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젊은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이었고, 당시 영국에서는 아일랜드인 한두 명이 죽임당하고 실종되는 것 정도야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아빠가 영국으로 향하기 전까지 아일랜드의 저항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빠에게 어릴 적 시위대에 휩쓸려 죽은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죽은 고모의 무덤을 직접 보는 것은 전해 들은 사실을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독립전쟁에서 전사한 참전용사라는 것 또한 아빠가 자랑스레 꺼내놓은 훈장을 눈에 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영국에서 밝히지 않아야 했던 모든 사실이, ‘먼스터 지방an Mhumhain에 위치한 워터퍼드 주Contae Phort Láirge의 항구 도시 던가번Dún Garbhán 출신 청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온 아일랜드인 젊은이’가 되는 동안 뒤로 해야 했던 모든 삶이, 이 오래된 집에 가득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날, 저녁으로 아빠가 만든 아이리시 스튜 파이를 먹던 니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아빠는 대체 어떻게 영국인인 엄마랑 결혼한 거야?”

그러자 아빠는 아주 당연한 명제를 확신하듯 답했다.

“운명이었으니까.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머글과 마녀가 만나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던 거야. 자, 우리 공주님.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저녁 다 먹었으면 얼른 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빠는 아직도 내가 열 살인 줄 알아.”

“자꾸 책 읽느라 밤새다간 키가 하나도 안 커서 평생 아빠한테 꼬마 아가씨라 불리는 수가 있는데도?”

“윽. 알겠어요. 잘 자요. 엄마도.”

“좋은 꿈 꿔, 우리 공주님!”

“아, 진짜 끝까지!”

유독 처음과 새로운 것이 많았던 여름이다. 당연한 무지가 커다란 파도가 되어 덮쳐왔던 날들이다.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자신이 변화를 시도한 계절이다. 그러니 아무리 잊고자 해도, 기억하길 원치 않아도 1995년의 여름은 영영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끔찍하게 적막한 7월이, 아일랜드의 여름이. 이 땅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고요는 폐에 달라붙어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그러다 한 번씩,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예기치 못하게 스멀스멀 피어올라 영국인 마녀를 일깨울 것이다. 그렇게 니므 윈슬로 레드몬드를 그 끔찍했던 여름의 한복판으로 다시금 데리고 갈 것이다. 언제 어디서고, 몇 번이든.

창밖에서 무자비한 여름 폭우가 세차게 쏟아졌다. 앞으로도 일주일간은 배들이 항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겠구나.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독한 섬에서는, 바다에 뛰어드는 것 말고는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행이야,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존재가 나 하나만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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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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