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2019. 08. 22 최초 작성

2023. 12. 18 포스타입에서 옮김

※ 성별 중립적인 인칭 대명사 '그'를 씁니다(등장인물이 직접 '그녀'라고 지칭하는 부분 제외).
※ 주인공 밀레시안의 설정은 글마다 별개로 존재합니다. 따로 표기하지 않는 이상 같은 밀레시안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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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시안과 르웰린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Photo by JOHN TOWNER on Unsplash

 마지막 신시엘라크는 오래된 예배당에서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듯 높다란 의자에 앉아있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의자는 그러나 검게 물든 예배당보다도 화려함을 잃었다. 예언의 위상이 추락한 시대에 걸맞게. 가느다란 세 개의 다리는 아직 굳건하나 변해가는 세계의 무게를 지탱하지는 못한다. 사제의 뒤로는 좁고 긴 창이 세워져 있다. 압도적으로 높은 천장까지 이어진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살은 마치 검처럼 그의 등 뒤로 내리꽂힌다. 금빛 베일 사이로 새어드는 빛은 그의 눈을 가렸다. 보이지 않는 보석안.

 과거는 바뀌지 않고 현재는 잡을 수 없으며 미래는 보이지 않네요.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밀레시안 님.

 빛 아래 그러모은 두 손은 양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채다. 단정히 침묵하던 르웰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언젠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느냐 물으셨죠. 아니요, 원하지 않아요. 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바꿀 수 없고 바꿀 수 없을 거예요. 그건 제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니까요.

 주신께서는 그저 보는 것만을 제게 허락하셨죠. 알더라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경고한들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다면.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들을 보는 것은 의미가 있었어요. 큰 흐름은 바꿀 수 없었어도 작은 것들은 돌려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같은 작은 생명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의미였어요. 돌아간다면, 그래요. 어쩌면 덧없던 희생들을 줄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대가로 겪어오신 모든 일을 다시 겪어야 한다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요?

 어떠한 슬픔도 아픔도 고뇌도 두려움도 무력감도 후회도 회한도 원망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얼굴에 표정이 지워진다. 완전히 무감정한 그 표정은 마치 신탁을 내림받는 사제와도 같았다. 신이 든 얼굴.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하셔도 되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르웰린은 가만히 눈을 한 번 내리감았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 찰나와도 같은 영원, 한순간의 깜빡임. 재차 열리는 눈은 고요했다.

 닥쳐올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제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더라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제 신앙이니까요.

 종언을 고하는 신의 시대. 새로이 열릴 이성의 시대.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낡은 성지에서 그 잔해로 쌓아 올린 폐허에 올라앉아 사제는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이제는 주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전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네요. 그러니 다른 말로 전하겠습니다. 당신의 앞길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더는 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신의 뜻에 의해 그의 마지막 사제가 신을 버렸다. 알던, 의지하던, 사랑하던 이들의 비석을 세우는 가혹한 의무도 끝을 맺을 때가 되었다. 지켜보며 기록하는 것이 신시엘라크의 역할. 이제 젖은 흙을 파 내려가던 손을 닦아내고 펜을 내려놓으며 사제는 옷깃을 여민다.

 다시 뵐 일은 없겠죠. ...부디 안녕히.

 저무는 성소에서 홀로 질 한 영혼을 위하여 영웅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렸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노을의 반짝임이 남는다. 최초로 신이 임하였던 장소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가 닫히고 브류나크가 성지를 봉인했다. 빛으로 화하여 사라지는 신의 검을 보며 밀레시안은 쓰디쓴 입안과 함께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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