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2019. 05. 29 최초 작성
2023. 12. 14 포스타입에서 옮김
※ 성별 중립적인 인칭 대명사 '그'를 씁니다(등장인물이 직접 '그녀'라고 지칭하는 부분 제외).
※ 주인공 밀레시안의 설정은 글마다 별개로 존재합니다. 따로 표기하지 않는 이상 같은 밀레시안은 없습니다.
마비노기 팬픽션
현대 판타지 AU
밀레시안과 알반 기사단
G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등장인물의 부상
"와, 이제 저게 하늘에서도 떨어지네."
이대로 경계지 밖까지 밀어내고 돌아가면 되겠다, 싶어서 마음이 느슨해질 무렵이었다. 수상한 기척에 돌아보자 자욱한 안개 깔린 텅 빈 전장의 하늘에서 마족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면 이번에야말로 페스 피아다를 어떻게든 정리하고 말겠다고, 밀레시안은 굳게 마음 먹었다.
"포위당하기 전에 돌아가야겠어요."
"제가 길을 뚫을게요."
알터가 디바인 블레이드를 땅과 평행하게 내려 쥐고, 밀레시안이 환생한 지 얼마 안 된 작은 몸으로 아벨린의 등에 답싹 매달렸다. 그대로 돌진하는 알터의 뒤를 따라 아벨린이 달린다. 밀레시안은 동화에 나오는 곧 길 잃을 남매마냥 아벨린의 등 뒤로 아이스 마인을 떨구며 얼음 창을 내리꽂았다. 언제 쫓기고 있었느냐는 듯 뒤돌아서 달려드는 마족들은 밀레시안의 마법에 효과적으로 저지되고 있었다.
페스 피아다의 시작점에 도달한 일행이 이미 진형을 이룬 마족들의 대열 한 군데를 뚫었다. 임시로나마 보호막을 발동시킬 수 있는 본진까지는 겨우 몇백 미터 남짓, 그러나 그들은 페스 피아다를 넘지 못했다. 안개가 확장되고 있었다. 밀레시안이 대열을 바꾸기 위해 아벨린에게서 뛰어내렸다. 좀 더 무기의 리치가 긴 아벨린이 최전선에 섰다. 이대로 마족들을 저지하며 돌아가면─
"밀레시안 님!"
알터가 위에서 랜스를 들고 떨어지는 마족을 발견했다. 밀레시안을 밀쳐내고 랜스를 대신 받아낸 알터의 갑옷에서 장작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밀레시안의 핏빛 눈이 크게 뜨였다. 굳어버린 밀레시안 대신 아벨린이 쓰러지는 알터의 몸을 받아냈다. 동시에 눈먼 화살이 그리브 위를 파고들었다.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아벨린이 알터를 밀레시안에게 맡기고 적들을 막아섰다. 알터가 던진 디바인 블레이드가 마족을 꿰뚫은 채로 저 멀리 나뒹굴었다. 밀레시안이 아벨린의 등을 보는 자세로 알터를 질질 끌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이런 작은 몸으로 성인 남성을 안아들거나 둘러메는 것은 무리였다. 이따금 알터를 내려놓고 아벨린의 랜스 안으로 파고드는 적을 요격하면서, 밀레시안은 성공적으로 성벽 앞까지 물러날 수 있었다.
알터의 앞에 방호벽을 하나 깐 밀레시안이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르웰린, 위에 있지?"
'네. 말씀하세요.'
"도와줘! 알터가 다쳤어."
'3분 내로 도착합니다.'
무전이 잠깐 끊겼다 다시 연결되었다.
'부상자의 상태는요.'
"우복부에 창상, 같은 쪽 허벅지에 화살에 의한 자상. 스스로 지혈 중이야."
알터가 방호벽에 기댄 채 화살을 뽑고 그리브를 벗었다. 구급낭을 펼쳐 지혈대를 꺼낸 그가 상처 윗부분을 꽉 조여 맸다. 상처에 거즈와 천을 댄 알터가 밀레시안에게 말했다.
"총을 주세요."
밀레시안이 발목의 홀스터에서 총 한 자루를 뽑아 알터에게 건넸다. 알터가 한 손으로 상처를 꽉 누르며 방호벽 너머로 총을 겨눴다.
"금방 돌아올게."
여긴 성벽과 너무 가까웠다. 최소한 헬기가 내려앉을 자리는 마련해야 했다. 그걸 아는 아벨린 역시 전선을 뒤로 물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빠르게 합류한 밀레시안이 최전선에 반원형으로 세 개의 방호벽을 전개했다. 아벨린이 외벽을 박차며 한 바퀴 뒤로 돌아 방호벽 안에 안착했다. 밀레시안이 마법을 영창하는 동안, 아벨린은 랜스를 횡으로 휘둘러 적을 한곳에 모았다. 몇 번 그렇게 쓸어내기를 반복한 밀레시안이 신경질적으로 스태프를 치켜올렸다. 스태프 끝에 얼음의 기운이 모여들더니 꽃의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 십인대장과 백인대장들부터 떨굴 요량이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지휘관부터 요격할게. 아, 키가 작아져서 안 보이잖아! 방금 말은 무시해요. 그냥,"
밀레시안이 이를 악물고 얼음 맺힌 스태프를 힘껏 휘둘렀다.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쓸어버리는 수밖에."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짐승떼의 발굽 울림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의 지원 사격이 시작되었다. 밀레시안이 한껏 고개를 젖혀 지원을 확인했다. 하강 중인 헬기에서 줄사다리가 내려졌다. 밀레시안이 들리지 않을 소리로 중얼거렸다.
"르웰린, 거기서 뛰어내리게?"
그와 동시에 르웰린이 줄사다리를 붙잡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디바인 신시엘라크를 조준한 그가 탄환을 쏘아냈다. 공중에 흩뿌려진 총탄이 정확히 지휘관들의 목을 꿰뚫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한다. 뒤로 꺾다시피 한 고개로 궤적을 가늠하던 밀레시안이 외쳤다.
"오, 스트라이크...! 아니다, 하나 빗나갔네. 아쉽다."
르웰린이 지휘관들을 요격해준 덕분에 여유가 생긴 밀레시안이 '큰 거 한 방'을 준비했다. 아벨린이 마지막 힘을 짜내 엄호했다. 스태프 끝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며 거대한 열기가 느껴진다. 중력이 아닌 마력에 이끌려 떨어져 내린 운석이 전장을 강타했다. 남은 적이 일격에 소거되었다. 전장이 침묵 속에 가라앉은 덕에, 알터의 손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총기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아벨린이 알터에게 달려간다. 밀레시안 역시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가 알터가 떨어뜨린 양손검 주변에 아이스 마인을 쏟아붓다시피 해 매설해놓고 돌아왔다.
알터는 거의 의식을 잃은 듯했다. 아벨린은 부상 탓에 알터가 혼자서 해제하지 못한 흉갑을 탈의시키고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행히 복부의 상처는 갑옷 덕에 크지 않았다. 문제는, 다리에 맞은 화살이었다. 르웰린이 신속한 손길로 의료용 장갑을 착용하고 상처를 살폈다.
"상처 크기에 비해 피가 너무 많이 나네요."
"...동맥 같은 델 다친 건 아니지?"
"그랬으면 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겠죠. 일종의 독일 수도 있겠어요. 해독 포션으로 중화가 되는 독이어야 할 텐데요."
르웰린이 아벨린에게 해독 포션을 건넸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아벨린이 무릎 위에 알터의 상체를 받쳐 올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해독 포션을 흘려 넣었다. 아벨린의 목소리가 침중하게 잠겨 든다.
"...못 삼키는데."
"괜찮아요. 꽉 붙들어주세요."
르웰린이 알터의 입에 깨끗한 천을 물리고 지혈거즈에 해독 포션을 쏟아부었다. 망을 보다 말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알터를 내려다보던 밀레시안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다. 유한한 생명에게 목숨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밀레시안은 저 맹목적인 생존에의 열망이 조금 무서웠다. '고통은 중요하지 않아요. 생존이 중요하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럴 때면 그냥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 그만인 자신의 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가로 평범한 삶을 지불해야 하더라도. 유한한 생명에게 삶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르웰린이 상처에 거즈를 쑤셔 넣었다. 한정된 면적에 최대한 많이, 신속하게 거즈를 밀어 넣고 눌러 재차 지혈을 시도했다. 헤집어지는 상처의 고통에 알터의 고개가 홱 젖혀지며 목울대며 핏대가 잔뜩 솟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안으로 움킨 채였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흙바닥을 움켜쥐듯이 바르작댔다. 아벨린이 알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누르면서도, 그런 알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통증에 반응하다니 좋은 징후네요."
상처의 지혈에 집중하던 르웰린이 별안간 젠장,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동시에 선명한 푸른 빛의 신성 방패가 그들 주위에 맺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밀레시안 역시 망설이지 않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어떤 것이 압력에 못 이겨 갈라지고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설치한 마인이 작동했다. 알터의 무기가 산산이 조각나며 그 파편이 산탄처럼 터져나갔다. 간발의 차로 둘이 막지 못한 파편 하나가 르웰린의 뺨을 긁고 지나갔다. 땅 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거대한 샌드웜이 보였다. 너덜너덜해진 외피 사이로 언뜻 머리 같은 것이 눈에 띈다. 자신의 살을 떼어내어 새끼를 치는 샌드웜에게 최적의 환경이었다.
"알터, 의식 잃지 말아요. 지금 잠들면 영원히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르웰린이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알터의 뺨을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간신히 피가 멎은 상처에 압박붕대를 감은 그가 갑옷을 죄다 해제하기 시작했다. 아벨린은 지쳐 있고, 르웰린은 근력으로 승부하는 타입이 아니다. 알터를 데려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벨린이 아예 단검으로 벨트며 고정끈을 잘라 르웰린을 도왔다. 밀레시안이 갑옷을 주워 소울스트림 틈새, 자신만의 공간에 던져넣었다. 르웰린이 알터를 들어 어깨에 둘러멘다. 배의 지혈을 겸해 어깨로 복부의 상처를 누른 채였다. 알터는 미동도 없었다. 밀레시안은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며 둘을 보냈다.
"괜찮겠어요?"
"응, 이 정도는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 아벨린은 둘을 지켜줘."
돌아보는 아벨린에게 밀레시안이 말했다. 르웰린은 벌써 남은 손에 신시엘라크를 쥐고 샌드웜을 견제하며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벨린이 헬기에 먼저 올라타 알터를 받아들었다. 르웰린까지 무사히 탑승하고, 헬기는 문을 닫은 채 이륙했다. 창 너머로 흔들리는 헬기에서도 침착하게 IV를 잡아 수액과 수혈팩을 연결하는 르웰린의 모습이 보였다. 땅의 핏자국은 벌써 스며들어 지워지고 있었다.
다행이야, 살 수 있겠지.
밀레시안은 멀어지는 일행에게서 눈을 떼고 샌드웜을 주시했다. 짙푸른 색의 엘릭서를 쭉 들이켠 그가 빈 병을 땅에 내던지며 입가를 훔친다. 지금은 광석으로 뒤덮여 딱딱하지만,
"얼렸다 녹였다 몇 번 하면 좀 말랑해지겠지."
차갑게 닫힌 수술실의 문 앞에서 아벨린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의자에 앉아 짧은 다리 너머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만일을 대비해 불려와 대기하는 피네만이 둘을 위로하려 애쓰고 있었다.
천금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마침내가 될지, 결국이 될지 모두가 르웰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의 르웰린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기도하던 아벨린─감사합니다, 아튼 시미니시여─이 안도하며 그 자리에 털썩 내려앉았다. 피네가 환하게 웃었다. 곧이어 흰 침대에 실린 알터가 밖으로 나왔다. 아벨린과 피네가 침대를 밀며 병실로 향하는 간호사를 따라 사라진다.
"고생 많았어."
"괜찮아요.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남문에는 단장이 다칠 만큼 강한 적이 없었는데요."
밀레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터가 날 지키려고 했어."
"응, 바보 같은 짓이었지."
힐난하듯 환하게 웃던 표정이
금세 우는 듯이 무너져내리고
곧 무표정해졌다
"인간은, 응. 좋은 인간은 어린아이한테 약하더라."
밀레시안이 그들을 만난 지도 벌써 열 해를 넘겼는데, 그동안 그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죽은 적도 환생한 적도 없었다. 밀레시안의 삶의 기준점은 그들이 힘을 발현하는 그 시기에 고정된다. 평균적으로 10세, 죽으면 그들은 기준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해 일주일에 일 년 치씩 성장한다. 그의 기준점도 보통의 밀레시안들과 마찬가지로 어렸다. 밀레시안이 전장에서 스러지고 다시 태어난 지 삼 주째, 그는 세 번의 탈피를 마치고 열셋의 몸으로 살고 있었다. 아직 르웰린이나 알터의 허리 즈음에나 올까 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밀레시안이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그곳에 이면이 존재한다고 알려준다 해도 모두가 이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보기 싫은 걸지도 모르고."
알터는 그래서는 안 됐다.
"알터는 좋은 사람이야. 그게 나를 괴롭게 해."
모두가 너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밀레시안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마침내 다시 일어선 그의 눈에는 피곤함만이 서려 있었다.
"배치를 바꾸자. 지금은 피네가 서문에서 북문의 톨비쉬를 지원하고, 카즈윈이 동문에서 남문의 우리를 지원하는 식이지? 피네를 벨테인과 함께 남쪽으로 보내고, 내가 서쪽으로 갈게. 임시로 로간이 벨테인을 지휘할 수 있어. 북쪽과 동쪽은 그대로 톨비쉬와 카즈윈이 맡는 걸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그런 걸로 아직까지 껄끄러우면 밀레시안으로 못 살아. 게다가 알터와 톨비쉬를 붙여놓을 순 없잖아. 전선은 둘인데 지휘관이 한 곳에 몰려있으면 안 되니까. 어차피 너도 예의상 물어본 것일 테고."
밀레시안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연한 라데카색 머리카락이 무너지는 하늘처럼 쏟아져 내린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텐 너희나 톨비쉬나 크게 다를 건 없다고 느껴져. 다들 정도만 다르지 조금씩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거든.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렇지?"
그리고,
"톨비쉬 의견은 무시해. 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네, 물론이죠."
그러면, 이따가 보자. 밀레시안이 빡빡해진 눈을 문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르웰린이 먼저 떠나고, 밀레시안 역시 증발하듯 사라졌다.
알터는 고요히 눈을 떴다. 빛이 보이지 않아서 밤인 줄 알았으나 아직 낮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었다. 비가 와서 사위가 캄캄할 뿐이었다. 이따금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르웰린이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을 들어 올리려는데, 근처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차가운 것이 스테인리스 트레이 같았다.
"르...웰린."
"안녕하세요, 알터."
르웰린은 차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알터가 깨어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았다. 그가 차트를 작성하는 동안 알터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되짚고는, 모두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네, 다행히도. 통증은 좀 어떻죠?"
"아, 괜찮... 윽."
몸을 일으키려던 알터가 배를 붙잡고 신음했다. 그 바람에 치여서 떨어질 뻔한 트레이를 받아낸 르웰린이 협탁에 가득 쌓인 간식거리를 손으로 밀고, 쌓아서 자리를 만든 뒤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기다려요. 누워서."
바깥에서 진통제를 가져온 르웰린이 바늘 먼저 갈겠다고 말했다. 사흘이 지났거든요. 담담히 말하며 테이프를 벗겨내고 알콜솜으로 손등을 누른 채 바늘을 천천히 빼냈다.
"제가 잘 때 갈아줬다면 더 고마웠을 것 같아요..."
"단장이 지금 깨어날 줄 전들 알았겠나요?"
"르웰린은 감이 좋잖아요."
"아무 때나 발휘되는 게 아니에요. 신성력을 이런 곳에 쓸 생각도 없고요."
랜스와 활에 맞았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지혈하며 응사했으면서 작은 바늘 앞에 움츠리는 것에 르웰린이 신랄하게 비꼬았다. 다른 팔에 토니켓을 묶은 그가 어렵지 않게 길고 곧은 혈관을 발견해냈다. 피부를 소독솜으로 훑자 알터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눈을 감는다. 카테터를 삽입하고 스틸렛을 제거하며 수액을 연결하는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클램프를 열어 수액이 떨어지는 모양을 보고 있던 르웰린이 줄을 한 번 감아 고리 모양으로 손등에 고정하고는 알터를 돌아보았다.
"아파요?"
"? 네."
"아뇨, 바늘이 들어간 자리나 그 위로 혈관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통증이 있느냐는 뜻이었어요."
"아, 그건 아니에요. 르웰린 주사 잘 놓네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에 알터의 머쓱한 표정을 무시하고는 유성펜을 들어 반창고 위에 날짜와 시간을 표시한다. 그러고는 줄로부터 갈라져 나온 주입구에 항생제와 진통제를 차례로 주사했다.
"그나저나 사흘이나 지났다니, 피네 님께 또 신세를 져야겠네요. 죄송하지만......"
"힐링은 남발하는 게 아니에요. 회복 마법을 남용하면 인체의 자연 회복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어요. 훗날 은퇴해서 농사 지을 때 호미에 긁힌 상처 가지고 열흘 내내 고생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가요. 전 당신의 주치의로서 그런 결정은 내려줄 수 없어요."
다 쓴 카테터와 텅 빈 수액팩 따위의 부산물을 저 멀리 치운 르웰린이 의자에 앉았다. 단단히 상체를 가로지른 팔이나 빈틈없이 꼬인 다리가 혼낼 태세 만반이다.
"일어났으니, 변명이나 들어보죠."
"그게, 르웰린."
"부단장."
"부단장, 나는..."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러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밀레시안 님은.
"당신은 충동적이고, 덜떨어지고, 어린애 같죠. 당신이 멍청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 결과적으로 당신 때문에 밀레시안 님과 다른 조장분들만 더 고생하게 되셨죠. 명심해요,"
"당신의 그 맹목적인 순수성은 주변에서 보호하기 때문에 발휘될 수 있는 거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지키게 하지 말아요. 알 만한 나이잖아요."
"네, 죄송해요."
"저한테 미안할 건 없죠. 고생하는 건 다른 사람들인데."
"모두에게 제대로 사과할게요."
"그래요."
그럼. 리모컨으로 침대의 상단부를 들어 올린 르웰린이 미니 냉장고에서 카라멜 푸딩을 꺼내 환자용 테이블 위에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강한 신성력 탓에 이미 무언가를 먹어도 될 정도로 몸의 상태는 좋았다.
"먹고, 자요. 환자는 환자답게."
10여 분 전, 르웰린은 수액 세트를 들고 알터의 병실로 향하고 있었다. 병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밀레시안이 르웰린을 보고는 반색했다.
"르웰린, 고생이 많네. 알터는 좀 어때?"
"괜찮아요."
"다행이다. 아참, 이거, 알터 방에 놓아줄 수 있어?"
"초코 푸딩이네요."
다들 달달이 보내는 것 같아서. 병실에 꽃은 안 되잖아. 르웰린이 알았다며, 푸딩을 트레이 한쪽에 얹어놓았다. 바로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죠? 응, 부탁할게.
"너무 혼내지는 마. 환자잖아. 내가 잘 타이를게."
"네, 노력해보죠."
이어 밀레시안이 르웰린의 널찍한 가운 주머니에 카라멜 푸딩을 슬쩍 떨어뜨렸다.
"이건 아무한테도 주지 말고 르웰린 혼자 먹어, 알았지?"
그리고 이거. 신시엘라크의 격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좋다는 찻잎으로 사 왔어. 쉬엄쉬엄해. 너마저 쓰러지면 우리 진짜 끝이니까. 답도 없어.
'알반의 두뇌', '네가 톨비쉬보다 백 배 낫다!' 등의 구호와 함께 양손 불끈 쥐고 파이팅 포즈를 내보이던 밀레시안이 르웰린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키가 안 닿는 것을 깨닫고 적당히 근처에 놓인 손을 한 번 잡아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와, 신시엘라크 제과점 한정판 초코 푸딩! 르웰린이 가져다준 건가요?"
"밀레시안 님이 만드신 거죠."
"밀레시안 님이 만들고 르웰린이 가져다준 거군요! 정말 고마워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 톨비쉬 때문에 새 장비 사느라 돈이 없어. 나랑 같이 과자 팔자. 가문 이름 좀 빌려줄래?' 할 때 그러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전) 단장은 사고 치고 탈주했지, 조장급 기사는 죄다 신성력 봉인의 여파로 골골 앓아누웠지, 재정은 쪼들려가지, 신시엘라크의 가주마저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부업 뛰는 가장의 심정으로 밀레시안과 손을 잡고 사업을 열고 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르웰린은 급격히 당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자기 몫의 푸딩을 꺼내고 만 그가 '이런 곳'에 신성력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신성력으로 물을 끓여 차 두 잔을 내왔다. 전투적으로, 그러나 여전히 우아하게 푸딩을 끝마친 르웰린이 조금 느긋해진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그때까지도 푸딩을 양손에 쥐고만 있던 알터가 르웰린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르웰린은 내가 은퇴할 때까지 살아있길 바라는 모양이네요."
"당연하죠. 당신이 살아있을 땐 뒤치다꺼리하느라 종종거리고, 죽어서는 당신 일까지 떠맡아야 할 제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그렇다고 당신의 빈자리에 톨비쉬 님을 도로 잡아와 앉힐 수도 없잖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르웰린은 역시 상냥해요. 늘 고마워요."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유구한 명언을 떠올린 르웰린이 머리를 짚었다. 향긋한 차에서 갑자기 쓴맛이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톨비쉬는 '그 사건' 이후로 모두를 내보내고 밀레시안만 한 번 더 독대하고 떠나려다 그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내려왔다. 상부에는 사라진 것으로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속죄는 노동으로 해라'는 밀레시안의 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무보수로 열심히 부려먹히는 중이었다. 북문에서. 그러니 알터에게 불운한 일이 생기면 그 구멍을 메우는 건 온전히 르웰린의 몫이 될 터였다.
전 단장이나 현 단장이나 제대로 된 이가 없다. 그것이 르웰린의 불운이었다. 르웰린은 남은 차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요, 부디."
알터는 푸딩 컵을 열었다. 속지 위에 곱게 접힌 쪽지가 놓여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르웰린이 갈 때까지 뚜껑을 열지 않았다.
'알터가 그렇게 간다고 해서 기사단에서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다들 착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원망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서늘하고,
상냥한,
조언이 있었다.
알터의 불가항력
그리고
밀레시안의 불가항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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