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성장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2019. 07. 06 최초 작성

2023. 12. 16 포스타입에서 옮김

※ 성별 중립적인 인칭 대명사 '그'를 씁니다(등장인물이 직접 '그녀'라고 지칭하는 부분 제외).
※ 주인공 밀레시안의 설정은 글마다 별개로 존재합니다. 따로 표기하지 않는 이상 같은 밀레시안은 없습니다.

마비노기 팬픽션

논커플링

밀레시안과 알터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Kimagure Orange road Madoka's Piano Files - Summer Time

 알터는 밀레시안의 응접실에 서 있었다. 갖추지 못한 곳 하나 없음에도 어딘가 어설픈 느낌의 기사단장 갑옷 위로 붉은 망토가 가만히 드리워진 채. 갑주에는 부족한 부분이 없으니 그저 스스로가 이 낯설고 갑작스러운 직책을 어색하게 여기는 탓이 크리라. 밀레시안이, 단장으로서 성장(盛裝)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스카하 해변에서 다시 만났을 적과 같이 아르후안 조원의 차림을 하고 왔을 터였다. 소년 기사는 빛이 머무는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팔라라의 누그러진 광휘를 마주 보는 창으로부터 빛의 길이 놓인다. 열린 문을 통해 안겨오는 바람에 품에 안은 흰 종이의 끝이 날아오를 듯 들썩거렸다. 알터는 서류의 끄트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창을 닫는다. 아르의 옷자락 같은 흰 커튼의 춤이 멎고 부드럽게 휘날리던 망토도 차분히 내려앉았다. 어느덧 청년에 한없이 가까워진 소년의, 기분과 함께.

 알반 기사단과 긴밀히 협력하게 되면서 밀레시안은 타라에 거처를 마련했다. 여관은 기밀을 요하는 정보를 주고받기엔 부적절했으므로. 각지의 숙박업소를 전전하는 장기 투숙객으로서의 삶을 이런 식으로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며 나직히 웃던 그는 그러나 정착에 회의적인 태도와는 달리 손수 벽돌을 쌓아올리고 벽지를 바르며 공들여 집을 지었다.

 외형은 언뜻 갖출 것은 다 갖춘 듯 보였으나 알맹이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일층에는 응접실과 창고가 있고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단단한 마호가니 문으로 굳게 잠겨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은 적절한 가구로 부드럽고 온화하게 꾸며졌으나 창고에는 건량과 의약품, 무기 거치대 따위가 서늘히 늘어서 있을 뿐이다. 일종의 보급 기지─물자든 정보든─정도로 이용되고 있는 곳인 만큼 위층의 개인 공간이 진정한 의미의 집, 즉 제대로 된 휴식처로 기능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보안을 필요로 하는 곳답게 입구부터가 대마법사 멀린이 정교하게 짠 결계로 단단히 보호되고 있는 곳이었으나 밀레시안은 남의 손만으로 자물쇠를 빚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층은 그 자신 역시 마법에 조예가 깊은 밀레시안이 그만의 수식으로 틀어막은 곳으로, 멀린조차 지독하게도 편집적이라며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르곤 사라질 정도였으니. 밀레시안은 알반에 열쇠 하나를 넘기며 내가 집에 없더라도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열쇠는 그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어 사용되면 바로 알 수 있으니 금방 돌아오겠다며. 멀린이 세운 뼈대에 밀레시안이 수식을 엮어 넣은 터라 멀린 역시 열쇠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 밀레시안은 그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는다.

 오늘은 약속을 하고 왔으니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은 없으리라 여겼으나 알터의 예상은 빗나갔다. 망설이며 들어선 곳에서 짙은 붉은색의 카펫은 여전히 부드럽게 발에 감겨온다. 테이블 위에 번잡하게 흩어진 양피지며 지도 따위를 눈으로 훑던 알터의 시선이 창가에 닿았다. 못 보던 흑단 보석함이 팔라라의 빛에 감싸인 채로 창턱에 놓여있다. 마치 태양이 축복하길 바라는 듯, 빛이 정확히 함을 내리쬐는 위치에.

 

 그건 안 될 일이야, 알터는 자신을 타일렀지만 그의 안에서 호기심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종이의 한쪽 끝을 내리눌렀듯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꿎은 보고서 위만 문지르던 그가 머뭇거리며 창가에 다가선다. 팔라라의 온화한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문 채였으나, 손이 닿으면 이 검은 마음에 빛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한동안 조심스레 보석함의 이음매를 쓸어보기만 하던 알터가 결국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뚜껑을 열었다. 잠겨 있지도 않은 채였다.

 검은 벨벳 위에 놓인 것은, 알터가 선물한 수호부.

 순간 알터의 세계가 멎었다.

 

 "미안, 좀 늦었지? 오는 길에 급한 일이 생겼거든."

 달칵,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꼭 자신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같아 알터는 화들짝 놀라며 보석함을 닫아 내려놓았다. 어찌 수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명확한 증거에 모른 척 해주기도 어려우련만 밀레시안은 그저 그 자리에 태연하게 서 있었다.

 "저, 죄송해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어쩐지 익숙한 기운도 느껴지고, 그래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밀레시안 님."

 "괜찮아. 보면 안 되는 거였으면 여기 두지도 않았어."

 의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밀레시안에게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긴다. 대충 물을 끼얹고 털어낸 듯한 로브에선 옅은 물 냄새가. 손끝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사향의 향이. 고개를 수그린 알터의 시선에 로브 끝자락이 닿았다. 저물기 시작한 하늘의 색이 잉크처럼 섞여든 자그마한 물길과 흐르다 만 줄기가 갈 곳을 잃어 옷자락에 서늘하게 달라붙은 끝에, 한낮의 전투의 흔적으로 남은. 밀레시안이 후드 안팎에 엉망으로 엉켜있던 긴 머리카락을 추어올려 얽힌 타래를 풀어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와 붉은 로브. 언젠가 알터가 빨간색을 좋아하시냐고 묻자 웃으며 루아를 좋아하지, 농담 삼아 답했던 적이 있다. 알터는 알아듣지 못했다. 밀레시안은 단지 핏자욱이 덜 드러나기에 붉은색을 선호할 뿐이다. 이제는 알터도 아는 사실이다. 하도 열심히 가교를 놓으려 하기에 결국 넌지시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와 루아는 좋은 친구이기에.

 "그보다 급한 일 같던데. 보고서부터 볼까?"

 알터가 두꺼운 실로 윗부분을 간단히 철한 종이 묶음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보고서를 넘겨보던 밀레시안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붙인다.

 "그래도 어떻게 네가 직접 왔네. 정신없이 바쁠 줄 알아서 부르면서도 기대는 안 했는데."

 "최고 기밀이라서요. 다룰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분들이 모두 바쁘세요. 아시다시피 최근에 그... 일이 있었잖아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는 알터의 행동에 밀레시안이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어. 조만간 본부에 들러서 일의 방향을 결정하도록 하자, 대수롭잖게 답한 그가 보고서를 잠시 내려놓고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염된 채로 봉인이 풀렸으니 아발론에 인원 대다수가 투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 외부 일에는 헤루인만 간신히 차출해낸 모양인데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조장이 빠진 엘베드를 내돌릴 수도 인원이 부족한 아르후안을 멀리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 남는 것은 에일레르 뿐.

 "내가 한 조의 자리를 대신하마. 에일레르를 외부로 돌리도록 해."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가 제안했다. 게이트에 알터가 상주할 터이니 비상시에 아르후안에 편입시켜 함께 움직이면 될 터. 가까운 곳에 계시는 건 좋지만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알터의 말에 쉴 만큼 쉬었다며 불안과 걱정을 잠재우는 것도 잠시,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본 밀레시안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정중하게 포장된 '아발론 정화를 위해 신시엘라크가 보관하던 성물을 게이트로 운반할 것이며 사용에 협조를 구한다'는 요청. 알터의 손에 들려 보낼 보고서라 상세히 적지는 않은 모양이나 기밀로 처리되며 기사단이 직접 발동하지 못하고 밀레시안에게 맡길 정도의 성물이라면, 또 얼마 전에 르웰린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상기하자면 작동 방식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알터가 괜히 걱정한 게 아니었군. 알터야 성물이 신성력보다 더한 것을 요구한다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 그저 무리할까봐 걱정하는 모양이나...

 밀레시안은 시급히 보낸다는 말마따나 생략된 내용이 너무 많아 이해가 어려웠던 탓에 책상 서랍에 두었던 서신을 꺼내 뒤집었다. '신입으로서 결정에 강하게 반대할 수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 제안은 승낙하되 받아낼 것은 받아낼 생각이니 직접 오지 않아도 된다. 이신의 힘을 주입하면 성물이 반발하여 평소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분출할 것으로 사료되니 예상하는 극단적인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다. 알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끝까지 그가 알지 못하도록 잘 부탁한다. 무엇보다 르웰린도 마음을 잘 추스르도록.' 간략히 답장을 쓰고 알터가 열 수 없도록 마법으로 봉한 뒤 건넸다. 기밀이라는 것을 보니 귀한 물건인 듯한데 잃어버리거나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담담하고도 태연하게 덧붙인 말은 그뿐이었다.

 밀레시안이 보고서를 덮었다.

 "서운했니?"

 차를 내오며 밀레시안이 말했다. 가만히 양손으로 찻잔을 쥔 알터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밀레시안 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밀레시안은 온건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기와 자기가 닿아 내는 일견 경쾌한 듯한 소리. 바이올렛 사이로 꽃잎 안으로부터 은은히 피어오르는 백합 향처럼 섞이는 바닐라 향이 났다. 성숙한 듯 미성숙한 어떤 소년에게 어울리는 향이.

 "죽음보다 더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게 밀레시안이다. 그 부상이 옮겨진다면 사망할 수도 있어. 부적이 정말 효과를 발휘해서 네가 다치면 어떻게 할 거지? 전투 중에 한 명이 갑자기 전투불능이 되면 네 조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알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부적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밀레시안 님은 일전에...

 "그땐 나도 두려웠고 의지할 게 필요했으니까. 이 세계에 오기 전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었고 죽어가고 있었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인간으로서 죽지 못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갑자기 피와 살을 희생해야 하는 일에 던져졌으니 달리 무엇에 의지할 수 있었겠어."

 기억을 더듬는 듯 밀레시안이 가만히 허공을 올려다본다. 시선 끝에 닿는 것은 벽과 천장 따위지만 실상 그가 보는 것은 그 어느 곳도 아니다. 밀레시안의 감각으로는 벌써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깊은 세월이 가로놓인 그 너머의 일.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쥔 마음이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희미하여 바랜 채이나 가만 되짚어보면 기억 속에 어른거리는 어떤 반짝임이 있다. 그 반짝임이 반짝임으로 남는 것은 수호부가 아무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방식이 일부 실전된 덕에 상처를 옮기는 주술적 효과는 사라진, 알터의 말대로 그저 기원을 담은 부적일 뿐이었다. 실제로 밀레시안이 다쳤을 때 수호부를 건넨 이가 대신 다친 일도 없었고. 하지만 이 수호부는 마법적 완성도가 제법 높았다. 아마 부족한 술식이 신성력으로 대체된 것이겠지.

 "그래서 가지고 다녔다간 정말로 네가 상처를 대신 받을 수도 있다. 내가 이 수호부를 지키다 다치는 건 서로가 원하는 일이 아닐 것 같구나."

 "이해했어요. 투정부려서 죄송해요, 밀레시안 님."

 "죄송할 게 무어 있겠어. 너는 아직 그럴 나이니 신경 쓰지 말고."

 필요한 만큼 시행착오를 겪도록 해. 그걸 지켜봐 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란다. 단, 네 위치를 자각하도록 노력하면서. 네가 그 자리를 원한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건 알지만 어쨌거나 너는 이미 그 자리에 앉혀졌고 물릴 수도 없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한 집단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용할 건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하며 사사로이 감정만으로 행동해서도 안 된다. 너도 곧 머리로서 일하는 방식을, 또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를 구분하는 방식을 배우겠지만 그 전까지는 일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더 이상의 혼란은 안 돼.

 밀레시안은 수호부를 꺼내 그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알터의 세계는 이번에는 멎지 않았다. 빈 함을 빛 드는 테이블 말미에 밀어둔 그가 체스판을 끌어당긴다. 나무에 니스로 마감한 세트는 과도하게 희거나 검지 않고 밀레시안의 성정만큼 단단하고 부드러웠다. 티 테이블에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진 것은 에린 전도를 펼쳐두어도 남는 작전 회의용 탁자 위에 올라가니 유독 날카롭고 이지적이게 보인다.

 "온 김에 너도 좀 배우려무나. 책략가라는 사람이 일을 벌이려면 수습할 방도도 생각을 해두고 벌여야지 사고만 쳐놓고 홀랑 날아가 버리면 어쩐다니. 남은 사람들은 어찌하라고."

 체스를 둬본 적 있니? 다정한 물음에 알터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알터는 아벨린과 르웰린이 체스를 두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아벨린은 체스를 두는 것이 퍽 즐거워 보였다. 귀족으로 살아온 삶의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벨린의 출신을 크게 의식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사단에 들어온 이후로 사사로운 기쁨이라면 소소한 것마저도 배척하던 그에게 르웰린과의 경기는 긴장을 해소하는 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르웰린 역시 무엇도 설명하지도 설득하지도 않아도 되는 시간이 편했던 모양이다. 아직 짧은 그의 역사에서 너무 많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그다. 예지가 그곳을 가리킨다 말할 수 없어 온갖 논리와 당위를 가져다 붙여야 했던 삶. 그 피로에 휴식이 절실했을 텐데도 르웰린은 알터가 배제된다는 느낌을 받을까 염려하여 당신도 배워요, 라며 체스 테이블에 다정하게 알터를 끌어오곤 했다. 그러고 나선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고 게임에 집중하는 것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내보였지만.

 "자, 왕은 서로 마주 봐야지. 여왕을 자신과 같은 색 의자에 앉히면 된단다."

 그를 대신해 알터를 가르친 것은 아벨린이었다. 말을 움직이는 방법과 경기 예절 같은 기초적인 지식부터 게임 기법에 이르기까지, 르웰린이 어떤 생각으로 수를 뒀으며 자신은 어떤 의도로 말을 움직였는지 천천히 반복하여 설명해주곤 했다. 알터는 사실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배려가 따듯해서 크게 신경 써본 적조차 없었다. 배우라며 알터를 데려와놓고 정작 가르치는 일은 아벨린에게 떠넘기는 르웰린의 태도가 기가 찰 만도 하건만 아벨린은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벨린 역시 알터가 소외당하는 듯한 기분에 닿는 것은 원치 않았으며 또 르웰린도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르웰린의 방에서 '카산드라¹'라는 제목의 낡은 책을 발견한 뒤로는 감이라며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는,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르웰린을 타박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면 안 돼요, 라며 만류하기는 했지만 태도가 불만스러워서라기보다는 르웰린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였다. 르웰린은 왜 배우라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걸까, 말은 안 해도 내심 궁금해하며 그의 태도를 의뭉스럽게 여기던 알터에게 르웰린의 피로와 고단함에 대해 일러준 것도 아벨린이었다. 알터는 아벨린을 통해 르웰린을 이해했고 르웰린은 아벨린을 통해 삶을 이해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둘은 한결 편해질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이라 좀 긴장했나 봐요. 사실 세팅은 가면 늘 되어있다 보니 자세히 보지 않은 것도 있고요... 기보도 기호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말이 말이 아니라 글자로 보인다니까요."

 

 언젠가 관전이 끝나고 멀뚱히 앉아있는 알터에게 르웰린이 넌지시 기보를 써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체스를 두는 것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던 알터는 기보가 무엇이냐며 되물었고 르웰린은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록해두라는 뜻이에요. 나중에 공부할 수 있게, 라고 말하고는 넘어갔다. 기보에 쓰이는 기호를 알 턱이 없던 알터는 전개를 일일이 그림으로 옮겨두곤 잊어버렸는데, 후에 르웰린이 우연히 수첩을 보고 그제야 그와 아벨린이 당연한 전제로 여기는 것이 알터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처음엔 알터를 앉혀놓고 기보를 가르치더니─기억력이라도 좋아서 다행이네요─이내 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가벼운 한숨으로 타박하며 게임이 끝나면 아벨린의 말을 따로 더 해석해주곤 했다. 마찬가지로 알터도 르웰린도 충분히 쉬고 나면 좀 더 주위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던 아벨린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르웰린도 알터도 굳이 아벨린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둘은 둘만의 공부를 계속했다.

 "신뢰받고 있구나. 남에게 자신의 의도를 읽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건 그런 뜻이야."

 "몰랐어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전 늘 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만......"

 으으, 그나저나 왜 꼭 제가 먼저 둬야 하는 걸까요? 르웰린과 아벨린 님도 늘 제가 백을 맡으라고 하셨는데. 끙끙거리며 첫 수를 고민하는 알터를 바라보던 밀레시안이 문득 웃었다. 그야 먼저 두는 쪽이 더 유리하거든. 네? 하지만 저도 먼저 두는 쪽이 유리한 거 아니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르웰린이 무슨 소리죠? 수학적으로 승률은 정확히 동일해요. 그러니 당신이 백을 하도록 하세요, 라고 했는걸요? 이론적으로는 그런데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잖니. 통상적으로는 백이 좀 더 유리하단다. 에엑, 그런 거예요? 후후, 참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니?

 놀란 듯 쑥스러운 듯 다채로운 표정이 지나간 알터가 조심스럽게 킹 앞에 있던 폰을 한 칸 앞으로 옮겼다. 밀레시안이 어렵지 않게 바로 말을 움직인다. 한참, 한참을 고민하던 알터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곤 상대가 한 그대로 자신의 말을 이동시켰다. 재밌다는 듯한 밀레시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 뒤로도 밀레시안이 말을 옮기는 족족 알터는 거울을 마주하듯 그와 똑같이 말을 옮겼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형상이 되었지만 밀레시안은 결국 알터를 이겼다. 처음에 알터가 엉뚱한 수를 놓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승패를 가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초보자에게 이점을 준다는 게 자신에게 유리한 수가 되어 돌아와버렸다.

 "으아, 이런 비겁한 일까지 했는데 져버리다니... 너무 창피해요."

 "비겁하다니? 상급자를 따라 하면서 배우는 게 뭐가 나빠?" 

 민망하다는 듯 알터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붉게 익은 귀며 목덜미가 가린 사이로도 선명하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밀레시안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야, 그렇지만... 이건 경기잖아요."

 밀레시안은 일견 흐뭇해 보이기까지 했다. 알터는 자신을 내려놓고 밀레시안을 배우고자 했다.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방식인데도 불구하고 배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 그것이 알터다.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어가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보여주는 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는 알터와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상대를 도발하여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수를 끌어내서 자기 것으로 하려는 르웰린. 애초에 스스로 무언가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알터는 체스 경험이 부족하고 르웰린은 능숙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둘의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둘은 훌륭하게 서로를 보완하며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지. 설령 경기였다고 해도 뭐, 도의적으로 욕은 좀 먹겠다만 룰을 어긴 건 아니지 않니?" 

 괜찮아. 이건 네 장기가 아니니까. 네가 직접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을 네 편으로 만들면 된다. 뭔가를 하기 전엔 아벨린이나 르웰린과 상의하도록 해.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곤란하다면 내게 오고.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특히 너처럼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자리를 짊어졌다면. 조원이던 시절처럼 단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너희들은 너무 저돌적이야. 언뜻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조차도 앞만 보고 달리지. 밀레시안의 시선에선 다난의 삶이 덧없고 짧다고들 하지만 한때는 나도 인간으로 예순 해를 넘게 살았고 삶이 얼마나 긴지 안단다. 그렇게 전력으로 질주하다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칠 수도 있겠지. 짧은 만큼 강하게 타오르는 게 미덕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톨비쉬에게도 한때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겠지. 인간이든 신이든 혼자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법이야. 내가 끝까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란다. 그러니 사람들과 신뢰를 쌓고 거리를 좁히렴. 그건 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네 장점이야. 르웰린과도 아벨린과도 다른, 너만의 강점.

 "하지만 정말 제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한다는 게 뭘까? 어떻게 하면 잘하는 걸까? 주위에 물어본 적이 있니?"

 부담을 느끼고 있지? 그럴수록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무게를 나누도록 해. 네가 부족하고 준비되어 있지도 않으며 이 모든 게 네게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 조장들 중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널 나쁘게 볼 사람은 없다.

 "당장 그들을 이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오늘 한 것처럼 그들이 가는 길을 살피며 네 것으로 만들면 언젠간 네 스스로 방향을 가리킬 수 있을 거란다."

 르웰린과도 긴밀히 협력하도록 하고. 그는 언젠가 루나사로 돌아가 네 보좌가 될 거고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 한단다. 네게 아벨린은 상사며 어른이니 그를 의지하는 방식이 일방적일 수밖에 없지만 르웰린은 달라. 상호 간에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그래, 착하구나. 르웰린의 냉소를 마주할 땐 그도 그저 네 또래의 소년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너도 르웰린이 어머니 일로 널 책망한다 지레짐작하지 말고. 작은 일부터 솔직히 터놓고 얘기하면 언젠가는 더 큰 일들도 나눌 수 있게 될 거다. 그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갈 거야.

 사람만큼 중요한 건 없어. 여태까지의 모든 대화에 마침표를 찍듯 밀레시안이 말했다.

 둘 사이에 놓인 수호부가 반짝거렸다.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알터는 오래도록 생각했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저, 아벨린 님 말이에요. 어른이시잖아요. 늘 저희를 돌봐주시고 격려해주시고... 그런데 아벨린 님은 누구에게 위로를 받죠? 제가 어떻게 하면 아벨린 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밀레시안 님은 늘 세상을 구하시기만 하는데 그런 밀레시안 님은 누가 구해주시나요?"

 밀레시안이 희미하게 웃는다. 햇살 어린 반짝임이 입술에 머물다 사라진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받은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거란다."

 "우리를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구해주었던 누군가로부터 우리가 돌봐주고 격려해주고 구해주는 누군가에게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거야. 우리가 그럴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무렵엔 받은 사람에게 돌려주기엔 너무 늦어있는 경우가 많거든. 늦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도 내가 자신에게 갚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길 바라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에 의지해서 살고 있어. 어떻게 해도 그 마음들은 갚을 수 없어. 우리에게 마음을 건넸던 사람들은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며 건넨 게 아니니까. 단지 그 마음에 부응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따름이지. 그 노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의 원천 아니겠니."

 잠시간 방금 오간 대화에 침잠했던 알터가 이내 무겁고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알터도 돌아갈 시간, 알터는 망토를 갈무리하며 일어섰다. 밀레시안은 보고서를 벽난로에 던져 넣어 태웠다. 저,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저 꼭 좋은 사람이 될게요. 밀레시안이 돌아보며 웃는다. 그래, 그런 마음이라면 꼭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란다. 잘 가렴.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소년 기사와 그 위로 떨어지는 팔라라의 빛을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어른의 옷으로 성장(盛裝)한다 하여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한 어른으로 성장(成長)해 가겠지, 알터.


¹ 그리스 로마 신화의 등장 인물. 예지 능력을 대가로 신과 거래하였으나 능력만 받고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의 예언을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 이후 조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예언을 이어가며 고군분투하다 고통스럽게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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