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s pareil
비유클리드적 타원 공간에서의 평행선 부재에 대한 논고
기숙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이었다. 악명 높은 졸업과제에 치여 고향에 돌아가기를 포기한 동급생들을 뒤로하고 시프레는 가족이 있는 부르고뉴에 방문했다가 과제 제출을 이틀쯤 남긴 밤 기숙사로 복귀했다. 방학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졸업과제를 제출해 두었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는 재학 중 최대의 난관으로 불린다지만, 그렇게까지 어려운 과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사를 맡은 선생들도 더 볼 것 없다는 듯 남은 방학은 고향에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기에 별 생각 없이 권유에 따랐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방문을 열자 수식이 빽빽히 적힌 공책을 들여다보던 룸메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잠을 아끼며 과제에 몰두 중인지 피곤한 낯이었다. 다녀왔구나, 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시프레는 가까이 다가가 어깨 너머로 룸메이트의 책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수업 중 배웠던 이론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를 한 것처럼 보였다. 썩 훌륭하지는 않아도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만 고치면 될 것 같다 싶어 오류가 있는 부분을 두 군데 찾아내 손끝으로 가리켰다.
룸메이트는 시프레가 짚은 부분을 들여다보고는 말을 잃은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에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바싹 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진심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프레는 그 눈물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아연해졌다. 자신이 수식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어떻게 그를 슬프게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잘못된 곳을 고치면 금방 증명을 마무리하고 쉴 수 있을 텐데. 고맙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릴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엔 논리적 인과관계가 부족했다. 하지만 룸메이트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에는 더럭 겁이 났다.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린데다 붙임성까지 없어 늘 겉돌았던 자신을 친언니처럼 상냥히 챙기던 사람이었으니까. 시프레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사과한 뒤 도망치듯 방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20년쯤 지난 지금도 그때 그가 울었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빽빽히 쓰인 수식의 오류를 한 번에 알아보는 눈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조금 멍청했더라면 차라리 나았던 걸까. 이게 내가 가진 유일한 특별함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건 없는 편이 좋았을 텐데... ...
*
시간이 늦어 텅 비다시피 한 중앙 휴게실.
“하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만약을 따지게 되잖아요. 이 재능이 아니었다면, …원망하게 되잖아요. 제, 제가 가진 유일한 특별함을 미워하게 되잖아요…!”
목소리가 높아지는 순간 시프레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제부터였던가,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곤 했다. 평소에는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버릇 중 하나다. 절박하게까지 들리는 외침이 떠난 이들의 빈자리만큼 크게 울리고, 휴게실 벽에 부딪혀 공명하듯 되돌아오고 나서야 겨우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행운. 타인의 진로를 가로막아서라도 주인의 길을 열어 놓고야 마는 재능. 하지만 가로막힌 사람들에게 행운—즉, 그들에게는 불운—을 탓할 권리는 없다. 재능이라는 광차의 궤도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들인 것이다. 적어도 시프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마주친 수많은 질타 어린 시선이 전부 자신의 잘못으로 귀착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가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가 타고난 특별함을 원망하다 못해 증오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행운의 주인 하민채와 시프레 드 비제네르에게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초세계급으로 손꼽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당당함을 유지하던 대학생, 그리고 거의 평생 동안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고 살아온 천재 수학자. 두 사람의 삶에 연장선을 그어 본들 두 선이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공간은 평면이 아닌 구면. 타원 공간에서는 어떤 선도 다른 선과 완벽히 평행할 수 없다. 어딘가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지금 같은 순간이기 마련이라...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물러섰던 한 걸음만큼 도로 내딛는다. 지금이 아주 찰나라 해도,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두 선으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분명 서로의 교점임이 틀림없기에.
"본래 재능이란 그런 것일세. 스스로가 타고난 것들을 흠 없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테지. 자네도 이곳에서 사람들이 가진 재능의 이면을 보지 않았나. 나 또한...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해의 공백을 메우듯 손을 뻗어 상대의 어깨에 얹는다. 건네지 못했던 위로를 뒤늦게 전하려는 사람처럼.
"다만 행운은 자네의 유일한 특별함이 아닐세. ...거침없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나, 의심한다고 말하면서도 타인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다감함 또한, 누군가에게는 없는 자네의 특별함이네. 자네에게는... 스스로를 탓할 만한 일보다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는 일이 많아."
논리가 아닌 감정에서 비롯된 언어로, 필요한 말을 찾아 천천히 입에 올렸다.
"그러니 '행운'을 원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원망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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