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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 / 백찬영

책갈피 by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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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깜박거리고 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2시 45분이었다.

*

백찬영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천이플은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결말이 그 모양 그 꼴인 이상 별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백찬영이 영영 천이플과 관련된 것들을 잊어버렸어도 그랬을 것이다. 백찬영이 영원히 동생을 잊고 산다고 해도 그는 천이플에게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유일한 오빠였고, 입시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미래고의 천이플과 백찬영으로 시작하면 됐다. 정말이지 천이플은 자신이 있었다. 백찬영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자신이. 이유는 별 것 없다. 오빠는 마음이 약하니까. 생각보다 더, 더 약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본 백찬영은 어릴 적과 많이 달랐지만 천이플의 가족이라는 덴 변함이 없었다.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천이플이 백찬영을 좋아하리라는 말만큼이나.

‘있잖아, 찬영아.’

그래서 천이플은 슬프지 않았다. 단지 기뻤다.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나, 백찬영이 소리를 지르면서도 마지못해 수긍해 주던 때나, 마침내 그렇게 찾던 동생이 누구인지 알았을 때도. 슬프지 않은 그대로 좋았다. 끝끝내 마지막이 될 부름에서도 그랬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더라도, 단지.

‘왜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게 만들어졌을까?’

‘겨울에 이만큼이나 먹으니까 당연하지.’

‘그치만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단 말이야!’

‘너 다음부터는 검사 맡고 먹어. 아이스크림 하루에 세 개 이상 먹으면 압수할 거야. 오경아랑 진하윤한테도 말해 둘 거니까 숨길 생각하지 말고.’

‘힝.’

‘……힝 해도 안 돼!’

시시덕거리면서 웃는 목소리 그 자체로 좋던 기억들도 있다. 천이플의 ‘좋은 기억’은 백찬영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백찬영이 없었더라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들이므로. 근처에서 이플이가 원한다는데 그냥 먹게 두라고 말을 붙이는 곽상현이나, 그러다 애 정말 심하게 탈 나서 고생하면 책임질 거냐고 역정을 내는 백찬영이나, 흥미진진하게 팝콘 사와다 관람하는 도강림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강선규까지 전부 그랬다. 태연하게 책임지겠다고 대꾸하는 곽상현 앞에서 백찬영이 정말 열 받는 얼굴로 천이플에게 둘러주려던 담요를 냅다 내팽개치는 순간까지도.

그 모든 기억은 천이플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천이플이 그 모든 이들의 기억 끝자락에 자리하듯이.

“괜찮아! 금방 열어줄게!”

맞아. 슬프지 않았어, 찬영아. 분명 너희만이 내 모든 행동의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차지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서운하지 않았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야. 그래도 늘 괜찮았어. 천이플은 무섭도록 번져 오는 불꽃 틈에서 외치며, 단지 그런 생각을 한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그 누구도 사람을 구하러 오지 않은 그 철문 바깥에서.

슬프지 않았어. 그러나 그런 말은 언제나 많은 감정을 내포한다. 무엇을 무서워한 적이 없지만 언제나 공포를 느끼는 것과 유사했다. 천이플은 아주 많은 일에 슬퍼했다. 그래서 많은 일에 슬프지 않았다. 슬픔에는 언제나 희미하게 얼어 있는 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설사 그게 고작해야 의미 없는 희망이나 바람에 불과할지라도.

“부쉈어!”

철문 아래로 악을 쓰듯이 천이플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을 때, 희뿌옇게 차오르는 연기 속에서 간신히 문을 열고 그 너머로 겁에 질린 수백 명의 시선이 닿았을 때,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두려움 속에서 천이플은 생각했다. 그래, 그랬어.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았어.

그래서 결국 천이플은 이 자리에 있다.

*

째깍, 하고 다시 시침이 넘어갔다.

거기까지 쓰고 남자는 눈을 깜박였다. 문장 하나하나를 너무 과하게 들여다본 탓인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흰 창에 까맣게 들어찬 글자가 빽빽했다. 단 한 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물론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유독. 정말이지 유독 이 장면은.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잘 기억이 안 나요. 너무 옛날이기도 하고 그땐…… 정신이, 없었으니까.’

십삼 년 전 그날을 기억하는 졸업생들을 모조리 찾아내 물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 순간을 기억하는 아이들이었다. 구체적인 대답은 없었지만 모두 단지 기억만은 하고 있었다. 소리 높여 부르던 목소리, 바닥을 스치는 불꽃을 뒤로 하고 학생들을 먼저 앞으로 보내던,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 하나를.

아주 긴 세월 속에 완전히 잊히고 말았더라도, 그때의 희망만은 기억했다.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어요. 이럴 거면 그냥 반항이라도 해 볼 걸 싶었어요. 아무도 안 올 걸 알잖아요. 누가 오겠어요, 아무도 우리는 구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

‘근데 갑자기 쾅쾅거리면서 바깥에서 있냐고 묻는 거예요. 분명 들렸거든요. 정확히 뭐라고 했는진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단체로 울면서, 있다고, 여기 갇혔다고 제발 열어달라고, 그러는데 괜찮다고 자기가 열 거라면서. 금방 열 테니까 문 열리면 바로 대피하라고, 잘 들리지도 않는 벽 밖으로 소리 지르면서 그러는 거예요, 목소리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때만 기억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애들이 단체로 뛰쳐나가는데 자그마한 여자애 혼자 계속 소리 지르면서, 안 그래도 천장 무너지는데 아슬아슬하게. 계속 뒤로 가는 거예요, 위험한데. 불렀는데도 안 돌아보고 그냥 자꾸 갔어요, 그냥.’

상반되는 이야기부터 지어낸 듯한, 천이플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의 묘사까지 많았다. 이야기를 묶어보면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 작은 여자애가, 이름도 모르는 야구모자를 쓴 단발머리 여자애가 그냥 자꾸 뒤로 갔다고 말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도망쳐 나오는 불꽃더미 안으로, 속으로. 바닥이 삐걱거리고 지붕이 흔들려도 넘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계속.

몇몇 애들은 그걸 써달라고 했다. 그 순간을 제발 모두가 기억하게 해 달라고 우는 아이가 있었다.

남자는 단지 이야기를 듣다가, 웃으려다가, 그러진 못하고 사과했다. 그래도 글을 쓰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대부분 고맙다고 했다. 백찬영은 밖으로 나오면서 그가 그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만은 없었다. 그 애가 그 순간 무슨 기분이었는지,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으므로.

천이플이 정말 슬퍼하지 않았는지, 서러워하지 않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모든 활자 속의 천이플이 결국 누군가의 기억만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비슷하게. ‘백찬영’은 천이플의 가족이었고, 오빠였고, 그 애를 좋아한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는 천이플이 아니니까. 천이플의 모든 것은 알지 못했으므로.

어두운 방 홀로 빛나는 컴퓨터 화면 반대에 시계가 비춰진다.

그러니까 이건 의미 없는 미련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미력한, 희망 같은 서술일 뿐이다.

번잡한 화면 속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창을 다시 띄웠다. 정말 완결 부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건 그래서 느끼는 허망한 감상이었다. 천이플이 차라리 마지막 순간에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기껏해야 소망에 가까운 자기위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소원들을 나열하면서, 백찬영은 파일을 삭제한다. 너를 기억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그가 써야 할 문장은 명확했다.

그는 끝을 내야 했다.

천이플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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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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