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결혼해 주세요

당신이 죽는 꿈을 꿨어 / 데릭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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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 주세요!"

결혼해 주세요!

결혼해 주세요!

결혼해 주세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저택을 울렸다. 복도에 전시된 도자기를 닦고 있던 카렌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다가 도자기를 깨뜨렸다. 꺅 하는 작은 비명소리에 이어, 열심히 할 일 하려는 하녀를 놀려먹던 고매하신 집 주인님께서도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남의 저택에서 우렁차게 공개 고백을 갈긴 여자가 주먹을 꾹 쥐고 상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상사와 친구(직업: 하녀 및 마녀)의 앞에서 청혼을 받은 신시아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신시아!"

"네……?"

얼굴만 침착하지 좀 혼이 나간 것 같은 답변이었다. 물론 신시아 잘못은 아니었다. 누구든 근무 중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공개 고백을 받았다면 혼이 나갈 것이다. 근처에 눈 동그랗게 뜬 친구와 놀려먹을 준비만 하고 있는 상사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저, 아니, 그, 일단 누구신지……."

"내 손님이야."

혼란에 젖은 신시아의 질문에 스테판이 끼어들었다. 실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다.

"마법사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러 왔는데…… 어쩐지 회의에서 자꾸 말을 안 하고 멍하니 있다가 아까 본 비서님 이름이 뭐냐고 묻더니 이래서였나?"

그래서 방으로 안 돌아가고 자꾸 카렌 놀리면서 신시아 곁에서 알짱거렸던 건가? 그냥 카렌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신시아는 최근 들어 솟아오르는 상사를 향한 급격한 폭력성을 억누르며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을 응시했다.

손님이라니, 아까 스쳐지나가듯 보았던가? 오펠리 씨에게 손님이 방문하신단 소리는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물론 그냥 서류 들고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복도에 서 있던 홀린 듯이 자신을 보던 여성분이 냅다 고백을 갈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 그렇지…… 그런데…….

"처, 처음 뵙는데 청혼부터 해서 죄송해요, 근데 제가 정말 운명을 느껴서, 저랑 결혼…… 아니 연애…… 아니 이왕이면 결혼, 결혼해 주세요 신시아……."

여자가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스테판이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카렌이 도자기를 치울 생각도 하지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서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살피다가 문득 움찔했다. 복도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여자가 질끈 눈을 감았다. 혼란에 젖어 잠깐 고장난 신시아 앞에서 우렁차게 외쳤다.

"첫눈에 반했어요!"

동시에 묵직한 걸음소리가 들렸다.

신시아는 그제야 그 걸음소리를 자각했다. 이쪽을 직시하는 어떤 남자의 시선도.

신시아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다소 충격받은 듯한 얼굴이 이상하게 오래 박혔다.

*

이름도 모를 청혼자는 본래 회의만 끝나고 돌아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려고 했다, 는 말은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건 바로 도파민과 웃긴 일과 도망과 도피와 즐겁고 우스운 일에 미쳐 있는 (과격한 표현이지만 신시아는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미친 게 틀림없다.) 고매하고 위대하신 그놈의 공작님께서 웃다 거의 울며 좀 더 머무르라고 했기 때문이다.

'신시아에게 폐가…….'

'아니? 저녁까지만 있어. 꼭 있어. 꼭. 명령이야.'

역시 공작님은 미친 게 틀림없다. 새빨개진 얼굴로 신시아의 얼굴을 힐끔힐끔힐끔힐끔 보면서도 폐가 된다며 거절하려던 청혼자를 강제로 붙였다. 거의 우는 것 같아 보이는 스테판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한 달은 아랫사람 갈궈대며 연애 얘기 뜯고 놀려먹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한 달 정도 편안할 것이다.

문젠 제물로 바쳐진 신시아였다.

"죄송해요."

아니…… 딱히 신시아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청혼자의 시무룩한 사과에 신시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그냥 웃었다. 공작님 아래서 굴렀던 세월이 빛을 발했다.

"아니에요. 실수하실 수도 있죠."

청혼을 가벼운 헤프닝으로 치부하는 노련한 대답이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실수는 아니에요!"

"……."

"지, 진짜로요! 전 진심이에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몇 번째인지 모를 청혼에 공작님이 옆에서 또 웃다 울었다. 스테판이 강제로 끌고 온 카렌이 불안불안하다는 눈으로 스테판과 신시아와 그 옆을 응시했다. 신시아는 뒤통수에 느껴지는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끼며 애써 눈을 피했다.

문제는 그 시선을 의식하는 건 신시아뿐만이 아니었단 점이다.

"그런데 저 기사님은……?"

청혼자가 조심스레 어느 순간 합류한 데릭을 보며 물었다.

복도에서 다소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온 데릭은 청혼을 두 눈으로 목격하곤 영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다가, 스테판의 주도로 이루어진 산책에 급격히 끼어 들었다. 스테판이 폭소하다가 눈을 닦으며 '이거 재밌군. 이 인원으로 산책이나 하러 가는 거 어때? 청혼까지 했는데 바로 보내는 것도 실례 아닌가.' 라는 본인 일 아닌 걸 마주한 권력자다운 태도로 일을 주도했고 신시아의 눈치를 보는 카렌을 도자기로 협박하며 끌어들였다.

'……저도.'

데릭이 말을 꺼낸 것은 신시아가 상사에 대한 폭력성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잠깐 했던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는 스테판에게 말했다.

'동행하겠습니다.'

'경은 굳이 왜?'

'공작님을 호위할 인원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는데.'

'필요합니다.'

'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공작님은 호위가 필요합니다.'

그런 대화를 거쳤으니 데릭이 기사라는 것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차림새나 체구만 보아도 누가 봐도 몸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 질문은, 왜 저렇게 노려보시냐는 거겠지.

"아무래도 손님분과 공작님이 해를 당하면 위험하니까요…… 호위 기사님이에요."

저도 모르겠어요. 신시아는 제 뒤통수로 꽂히는 강렬한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적당히 대답했다. 머릿속에선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들으셨겠지?'

기척 감지기처럼 뭔 온갖 곳의 기척을 감지하는 사람인데 그 우렁찬 청혼을 못 들었을 리 없다. 다소 흐트러졌던 차림새를 생각하면 청혼 듣고 뛰어왔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뛰어올 이유도 없지만.

'혹시 그건가? 내가 결혼하면 나한테 1순위가 결혼 상대가 돼서?'

가장 친한 친구 자리에 집착하던 남자를 떠올리면 가능성이 있다. 아니, 결혼할 마음도 없지만. 그렇지만.

신시아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일단, 죄송해요. 제가 당장은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

스무 번 정도 이 말로 차였더니 자연스레 같은 말이 흘러나온다. 약간 세뇌당한 기분으로 말하자 여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저…… 연인분이 이미 있으신가요?"

데릭의 시선이 한 층 더 강렬해졌다. 스테판이 뒤집어졌다. 카렌이 불안한 얼굴로, 혹 문제가 터지면 신시아만은 구해내리라 굳게 다짐하며 신시아의 곁으로 몰래 반 발자국 다가갔다. 신시아는 이번에도 애써 눈을 피하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

"그렇지는 않고요, 정말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

"혹시 그러면 따로 좋아하시는 상대라도……?"

"그런 거……."

없어요, 라고 말하려던 말이 턱 걸렸다. 간절하게 쳐다봐오는 눈이 어쩐지 익숙했다. 홀린 듯한 시선, 예의상으로 웃어주면 빨개지는 뺨, 긴장한 듯 약간 떨리는 듯한 손길.

아. 당신은 나구나.

연애할 생각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후원에서 발이라도 헛디디면 다칠 일 없게 자신이 들고 가면 안 되냐고 속삭이며, 다정하고도 따뜻한 손으로 붙잡아 당겼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면서.

그 순간의 호흡과 고동을…….

"……네, 그래서요. 제가 따로 좋아하는 분이 있어서, 다른 분과는 연애를 할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반 뼘 정도 여자에게서 멀어지며 신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고 있던 스테판의 흥미로운 듯한 시선이 신시아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신시아는 데릭을 쳐다보지 않고 가만히 여자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래도 감사해요."

여자가 떨리는 뺨으로 웃었다. 스테판이 혀를 차며 작게 재미없다고 중얼거렸다.

데릭은 말이 없었다.

*

"기사님 아니에요."

여자는 저녁까지 머무르지 않고 떠났다. 스테판은 그쯤 되어서야 붙잡지 않았다. 신시아는 적절히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했고, 여자도 인사하며 헤프닝은 마무리되었다. 그때까지도 데릭은 신시아의 옆에 있었다. 스테판과 카렌이 들어가고도 계속 있었다.

신시아는 둘만 남겨지자 가타부타 없이 그 말부터 했다.

"아까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 기사님 아니에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데릭은 대답했다.

"아닙니까?"

"네."

"절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희 근데 혹시 이 대화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진짜 끝까지 그렇게 물어보실 거예요?"

"신시아 씨."

"네?"

산책 이후로 계속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신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남자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앞머리에 잠깐 가려졌던 눈이 똑바로 신시아를 직시했다.

어떤 표정일까? 저건.

서러운 듯 아닌 듯, 어떤 감정인지 모를 것이 배인 저 눈은.

당신은…….

신시아는 숨을 삼켰다.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할까?

"……그럼 누구를 좋아합니까?"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데릭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확신하지 못하며 여자를 그저 응시했다. 동그랗게 뜨여 있던 여자의 잎사귀 같은 눈으로도 빛이 스며 들었다. 눈에 박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그랬다. 오늘도 그랬다. 무의식적인 울림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신은 날 좋아하는데……. 아니.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 좋다고 했으니까.

당신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오후, 어떤 외침이 귀에 닿았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정신을 차리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니.

그 솔직하기 짝이 없는 막무가내의 답변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아니 불안하던지.

그도 알았다. 신시아는 작고 연약하고 가늘고,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를 걸으면 긴 머리카락에서 빛이 날 것처럼 흔들렸고 웃을 때면 올라가는 입매와 둥글어지는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는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그냥 보다 보니 그 단어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걱정스럽고 살결이 닿으면 좋고, 손을 잡고 싶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헤집고 싶고 당기고 싶고 그냥 그의 곁에 서 있다는 게 좋아서…….

그만이 그렇게 느낄 것이 아닌데.

첫눈에 반했다.

처음 만남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지?

그의 이름이 불렸을 때 어땠지.

웃었을 때 어땠었지.

"……절, 안 좋아합니까?"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문장이 뱉어졌을 때 신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달빛이 선명하게 쏟아지는 창문 아래에서 그는 꼭, 묘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듯…….

구애하는 자의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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