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되지 못 한 잎은

청연 합작 제 1 회: 봄, 그리고 시작

비망록 by 샐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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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저녁 6시 42분을 지나고 있었다. Y는 작은 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버튼을 눌러 불을 켰다. 주변이 어둠에 물들 즈음이라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에서도 불꽃은 밝았다. 꽁무니로 옮겨 붙은 불꽃은 붉은 점이 되어 Y의 손에 따라 움직였다. 하얀 연기가 붉은 점이 그려낸 선처럼 허공을 그었다. 후우ㅡ. 불이 붙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Y가 구름 같은 연기를 한숨처럼 토해냈다. 연기가 올라가 허공에 뿌옇게 흩어지는 것을 Y는 눈으로 좇았다. 시선을 그렇게 위로 옮기니, 하얀 거품 같은 꽃송이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가로등 불빛에 어른거리는 것이 Y의 눈에 들어왔다.

 때는 바야흐로 봄, 조그마한 꽃눈에서 화사한 꽃망울이 태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봄의 시작에서 주목받는 것은 꽃이었다. 꽃보다 잎이 먼저 나는 식물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화 장면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벌써 봄이 왔구나. 어느새 세간에 있어서 꽃은 봄의 전령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꽃은 사람들을 매료할 만한 감각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지 위에 화려하게 내려앉은 자태, 밝고 아름다운 색채, 달콤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 보드랍고 폭신한 촉감……. 오감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어도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꽃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꽃이 관심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 관심이 꽃에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봄의 시작이라는 상징의 자리를 꽃이 차지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 아이는 언제나 사랑받았나 봐.

 Y는 매캐한 향을 내며 타오르는 담배의 필터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Y의 남동생은 꽃이었다. 고운 모습과 여린 성품, 적당히 출중한 능력을 가진 남동생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관심 받는 대상을 넘어서 그 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어떻게 보면, 꽃 같은 남동생에게 있어 자신이 긍정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꽃은 그저 피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받는 경우가 다수였으니까.

 Y는 잎이었다. 꽃보다 먼저 피어난 잎이었건만, Y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지, 잎을 보고 예쁘다 말하는 사람들은 한 손을 겨우 꼽을 정도였다. 절대적으로 따져도, 상대적으로 따져도, Y는 남동생보다 뒤처지는 부분은 단연코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일화를 들자면, Y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이었다. 1학년 1학기부터 Y는 학과 수석을 놓치는 일이 없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남은 학기동안 전액 장학금을 수여받는 입장으로 이어졌다. 남동생은 반액 장학금, 그것도 1학년 2학기에만 수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전액 장학금 수여는 Y가 아주 자랑스럽게 여겨도 될 만한 성적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Y가 장학금을 받았을 때, 부모님의 칭찬과 남동생의 동경 어린 시선,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당연하게도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기대에 긍정적인 답변만을 주지 않는다. 부모님은 Y의 장학금 소식을 듣자마자 Y에게 들어갈 돈이 줄었다며 안도했다. 그리고 Y의 다음 학비로 들어갈 돈을 최신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데에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남동생의 동경 어린 시선과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긴 했지만 그것들은 미약하고 일시적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들에 Y는 어리둥절해했다.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Y는 일단 이러한 감정들을 분출하지 않고 제 선에서 정리했다. 풍족하다고 볼 수 없는 집안에 자신의 장학금은 최신 가전제품의 형태로 보탬이 된 것이라고 Y는 생각했다. 게다가 남동생은 Y보다 6살 어렸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나이에 장학금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질투 어린 시선과 비아냥을 하나도 듣지 않은 게 어디인가, 하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이로부터 6년 뒤의 상황만 몰랐더라면 그 생각은 지속될 터였다.

 남동생이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반액 장학금을 수여받자 온 집안이 환희로 떠들썩해졌다. 집안이라고 해 봐야 친척들을 제외하면 부모님과 Y, 남동생으로 구성된 4인 가족이 다였지만, 부모님은 그야말로 온 집안이 떠나가라 외쳤다. 우리 아들이 장학금을 다 받았구나! 우리 아들 장하다! 부모님의 큰 소리에 Y는 귀와 머릿속이 얼얼했다. Y가 장학금을 처음 타왔을 때 부모님은 돈이 굳었다고 기뻐했지, Y에게 장하다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성과 자체를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Y는 남동생과 자신의 차이를 절절하게 느꼈다. 그동안 어렴풋하게만 느끼던 것이 갑자기 명확한 실체로 다가오는 경험은 실로 아픈 것이었다. 남동생의 성과를 순수하게 축하해줄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Y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축하를 바라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동생에게 Y는 짧게 말했다. 축하해.

 반액 장학금을 받은 기념으로 부모님은 남동생에게 여행을 보내주었다. Y에게는 선물하지 않았던 특별 대우였다. 한가위 명절이 끼어있는 황금연휴의 첫날, 여행길에 오른 남동생이 비행기에서 눈을 붙이고 있을 때 Y는 집 앞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Y의 입에는 불이 붙은 담배 한 대가 매달려 있었다. 그 날 처음으로 흡입한 담배 연기는 그동안 거쳐 온 인생만큼 맵고 썼다. Y는 그 때 한창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Y도 꽃이 되고 싶었다. 모두에게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만큼은 예쁨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Y는 노력을 했다. 열심히 공부했고, 사람들에게 사근사근 대했으며, 세련된 옷과 화장품에 자신을 맞추어보았다. 이 세 가지의 대표적인 노력은 Y에게 있어서 지극히 힘들고 불편한 것이었다. 사이즈가 작아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기 위해 억지로 체형을 바꾸는 것과 같은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면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Y는 옷에 맞춰 체형을 바꾸고 억지로 몸을 우겨넣었다.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성향, 착하고 싹싹하다고 보기 힘든 성격, 꾸미기에 무관심한 성향이 Y의 본성이었지만 Y는 사춘기 때부터 본성을 바꾸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하지만 Y는 깨달았다. Y 자신이 꽃이 되려면 애초부터 남동생과 같은 출발선에 서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Y가 애초부터 꽃으로 태어나야 했다는 의미이다. 한 번 잎으로 태어난 이상 꽃으로 착각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꽃으로 성질이 완전하게 바뀔 수 없었다. 설령 Y 자신이 자신을 꽃이라고 인식하면서 꽃으로의 변화를 꾀할지라도, 사람들은 Y를 향해 이상하다는 눈초리와 수군거림을 쏘아댈 것이었다. 그동안 맞지 않은 옷을 입기 위해 이뤄냈던 피나는 노력들은 휴지조각보다 못 한 취급을 받을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 노력들은 Y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면서까지 쏟아 붓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는 노력은 Y에게 있어서 무의미함을 뜻했으니까.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 Y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살아온 인생의 절반. 너무나도 긴 대가였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다. Y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발령 소식을 전해들은 날, Y는 곧장 미용실로 향했다. 그리고 미용사에게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달라고 말했다. 미용사의 가위가 허리까지 내려오던 Y의 갈색 생머리를 썩둑, 잘랐다. 수많은 가위질이 오간 끝에, 거울에 비친 Y의 머리칼은 스포츠 스타일에 가까운 쇼트커트 스타일로 잘려 있었다. 그렇게 Y는 오랜 시간동안 억지로 했던 노력 중 하나를 처음으로 잘라내었다.

 사실 이런 비유들은 현실과 1대1로 대응시키기엔 허점투성이지만.

 Y가 어렴풋이 생각했다. Y의 들숨을 타고 깊게 빨아들여진 연기가 폐부를 하얗게 채웠다. 이내 연기는 날숨을 타고 Y의 밖으로 나와 하얗게 허공을 떠돌다가 사라졌다.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연기를 보니, Y의 머리에 불현 듯 생각이 스쳤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언제나 계속 피어있을 것 같은 꽃이 지면 그 자리를 뒤이어 열매가 맺힌다.

 그렇다면 열매 또한 시작이 아닐까. 열매 또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오히려 꽃보다 열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꽃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작이라고 한정하여 인식했던 관념에서 이제는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자신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지만 줄곧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주목만은 바라왔다. 마침 세간에서의 열매는 결실의 상징이다. 고생하여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와 보답의 의미를 내포하는, 대표적인 상징물.

 그렇다면 꽃으로서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제 포기하겠다고, 꽃의 곁에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 하고 스러져갔던 잎의 삶을 비관하며 꽃이 되기를 열망하느니, 차라리 열매가 되어 꽃의 죽음을 기리고 꽃이 남기고 간 자리에 서겠다고. Y는 다짐하듯 생각을 다져나갔다. 갑자기 뇌리를 스친 생각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도 급작스러워서 Y 자신도 얼떨떨했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예상치도 못 하게 문을 세게 두드리며 다가올 때도 있는 법이었다.

 물론 비유를 그대로 현실에 끼워 맞출 생각이 Y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열매가 되기 위해서 Y가 남동생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다는 극단적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Y는 자신이 생각한 비유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의 전환 정도는 Y의 자유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 번 가진 생각을 바꾸기는 굉장히 힘든 일인데, 생각을 바꾸고 싶다고 스스로 바라는 것은 엄청난 기회이다. 기회를 향해 손을 뻗는 시도는 힘들긴 하여도 무의미함을 가져다주진 않을 것이다.

 불꽃이 담뱃대의 3분의 2 가량을 붉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퇴근 후의 작은 휴식이 끝날 때가 온 것이다. Y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떼고는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구두의 앞쪽 밑창으로 불꽃을 짓이겼다. 발을 움직여 구두를 들어보니, 불이 붙어 있었던 담배의 끝 부분엔 타오른 흉터가 검게 남아있었다. Y는 꽁초를 주워 바로 근처에 놓인 철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꽁초를 주운 손을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처리한 Y는 정해진 수순처럼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났다. 규칙적으로 또각또각 소리만을 남기며, Y의 발을 담은 구두가 Y를 귀갓길의 어둠 속으로 실어 보냈다.

 때는 바야흐로 봄, 꽃망울이 날개 같은 꽃잎을 펼쳐 저마다의 가지에 송이송이 맺힐 무렵.

 열매의 시작을 위해, 꽃잎 한 장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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