𝚊𝚏𝚝𝚎𝚛

음악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Another One Bites the Dust - Queen

「すいそう」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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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One Bites the Dust

Are you ready? Hey, are you ready for this?

준비 됐어? 어이, 준비 됐냐고?

Are you hanging on the edge of your seat?

긴장되어서 안절부절 못하겠지?



   오전 4시는 새벽이라 하기에도 아침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린쿄 토와는 24시간 영업하는 다이너를 찾았다. 식사를 위해 찾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 카페테리아의 커피가 동났고 지금 필요한 것은 잠이 아닌 더 많은 카페인이었다. 음식이 형편없기로 소문난 다이너였지만 커피만큼은 멀쩡하길 바라며 문을 열었다.

   크림색 벽과 빨간 에나멜 가죽 의자. 유행 지난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손님은 자신밖에 없다. 지폐 한 장으로 커피 한 잔과 베이글 하나를 받고 가장 구석으로 들어갔다. 크림치즈도 없이 질긴 빵을 씹어 먹으며 커피로 넘긴다. 아무 맛도 안 났다. 베이글과 커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이 그러했다.


   토와는 고개를 들 힘도 없어 창문에 머리를 박고 바닥을 봤다. 체스판 같은 흑백 타일 바닥이 무한히 깔려있다. 검정 정장, 하얀 셔츠, 검정 넥타이, 하얀 양말, 검정 구두. 입고 있는 옷도 그러했다. 밖엔 회색 아스팔트 위에 회색 건물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자신도 그러했다. 회색 인간이었다.


끼익──.

이 시간에 손님이 둘이나.

이런 걸 팔고도 인복도 많다.

창문 틈 사이로 마른 바람이 들어왔다.

커피 잔을 들었지만 이것도 식은 지 오래다.


“내가 내려준게 낫지?”


   불쑥 걸려온 말. 그대로 커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봉숭아로 물들인 주황색 손톱. 형광색 아크릴 반지들이 손가락에 빼곡히 껴있다. 빨간 체크 원피스, 빨간 망사스타킹, 검은 버클 부츠. 금붕어가 새하얀 머리 위를 지나간다. 절대 잊지 못할 그녀가 반대편 자리에서 몸을 내밀고 쏟기 직전의 커피 잔을 잡고 있다.

“……시이나 선배?”

결국 과로사로 죽나.

그러면서 보는 주마등인가 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

“찾~았다.”

시이나 킹교가 맞았다.

저 히죽거리는 얼굴은 저승사자도 흉내 못 낸다.


   토와는 미간을 짚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사라졌냐는 질문? 그걸 물어보기엔 자신도 그녀를 찾으려 한 적조차 없었다. 그럼 10년간 뭘 하고 있었냐는 질문? 그걸 물어보는 건 자살행위다. 이야기를 평생 쏟아낼 것이다. 그럼 자신이 10년 동안 뭘 했는지? 그걸 왜 설명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무슨 할 말이 더 있다고 지금 이렇게─


“아─ 그만 생각해!”


킹교가 검지로 이마를 꾹 눌렀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 사고가 잘렸다.


“시계가 고장 난 줄 알았어~. 토와 군, 퇴근 안 해? 지금도 퇴근 아니지?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고— 아, 괜찮아! 심심하진 않았어, 벤치에서 비둘기랑 놀았거든? 그러다 깜빡 졸았는데…”


“계속 밖에 있었습니까?”

지금 못 잔 지 족히 36시간은 되었을 거다.

대도시에서 밤새 여자 혼자 벤치에서 노숙하는 건 미친 짓이다.

“당신 여기서 뭐합니까?”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음에 나온 말이 더 미친 소리였으니까.


“베이시스트를 찾으러 왔어.”


   그녀가 두 손으로 컵을 가져가더니 태연하게 호로록 커피를 마신다. 차라리 가져가서 다행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떨어뜨렸을 거다. 토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 사람과는 상종하면 안 된다. 에에~? 어디 가? 못 들은 것으로 치부한다. 들을 필요도 없다. 토와는 서류 가방 속 워크맨을 찾았다. 전원을 키고 노래를 들으려는데,

“이거 찾아?”

   빤뜩이는 소파에 기대어 이어폰을 흔들고 있다. 선이 완전히 엉켜버린 이어폰. 도대체 어디서부터 뒤엉킨 건지 인생도 전부 꼬였다. 이젠 생각까지 읽는지 한번 얽힌 인연은 평생 따라가는 거야~ 라고 다리를 한 번 꼬며 말한다. 토와는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주십시오.

“너 지금 전부 때려치고 싶지?”

진한 다홍색 여명이 밝아온다.


“그게 무슨….”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토와 군이 귀찮은게 뭔지 알아?”

킹교가 소파에서 폴짝 내려와 다가왔다.


───지루한 게 귀찮은 거야.


가슴 팍을 손끝으로 콕 찌르는데, 

과녁 한가운데 말이 꽂힌다.


정곡이다.

   회색 도시의 회색 건물에 회색 인간이 살고 있다. 채도를 전부 잃었다. 찾으려고 한 적도 없다. 길을 가다 칼을 맞으면 몸에서 나오는 피도 미지근한 회색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저 손톱이 심장을 뚫어 기어코 피를 내려 한다. 37도의 뜨거운 심장을 뜯어 쥐여주고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꼴을 굳이 확인시키려 한다. 그 앞에서 네 심장은 빨갛다고 조롱한다.


맥박이 토할 것 같이 뛰었다.

분명 카페인 탓일 것이다.

   강렬한 태양빛이 잿빛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넘쳐흘렀다. 다이너 안의 철제 인테리어가 시끄럽게 일출을 반사한다. 온통 빨갛다. 붉게 달궈진 지옥 속에 두 사람이 서있었다. 주홍은 죄의 색이다. 주홍 글씨도 그렇지 않은가? 작열하는 저 눈동자와 가늘게 뜬 미소 모두 악마의 것이다.

“전부 쏟아내고 싶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안엔 베이스 피크가 있었다.

그는 백색 타일 위에 멈춰있었다.

아니, 백색은 이미 여명에 집어삼켜졌다.

혹은 원래부터 붉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토와는 발을 떼어 검은 타일로 들어갔다.

금붕어가 히죽 웃고 있는 타일이었다.




Out of the doorway the bullets rip

문 밖에는 총알이

To the sound of the beat, yeah

리듬에 맞춰 갈겨지고 있는데 말이야

Hey, I'm gonna get you too

이봐, 너도 내게 잡힐 거야



해가 높이 떠 있는 화창한 낮, 번잡한 도시의 길거리에는 사람들과 차들이 오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자의 바쁜 일상을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느릿한 걸음으로 걷는 후쿠다 쇼가 있다. 지나가는 주민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한가롭게 순찰을 돌고 있었다.


행복한 사회란 경찰이 할 일 없는 사회로 무소식이 희소식인 셈이다.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확인했다. 역시나 아무런 호출도 보고도 없다. 그러니 지금이 좋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지금도 말이 좋아 순찰이지, 경찰서에서 동료들이 먹어대는 도넛 단내에 질려 나온 거다. 도대체 경찰이 도넛을 좋아한다는 편견은 어디서 시작된 건가…. 머리를 벅적벅적 긁다 제복 모자로 앞머리를 넘겨 눌러썼다.


파란 하늘에서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오고 

나비가 짝을 지어 펜스 근처를 팔랑거렸다. 

오늘도 평온한 날이었다. 


귀한 세금으로 돈 벌어먹는 사람인데 최소한의 노동은 해야지. 경찰이 공공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시민들에게 안전감을 주고 뭐… 범죄 예방에도 좋겠다 싶어 무작정 걸었다. 빛바랜 차들이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지나갔다. 저 차들도 새 차일 땐 알록달록했겠다. 지금은 평화로운 햇살에 찌들어 전부 성격을 잃었고.

그는 천 번은 돌았을 익숙한 인도를 따라 걸었다. 길가에 불법으로 주차된 차를 발견해 수첩을 꺼내 단속 딱지를 휘갈겨 썼다. 대범하게도 세워놨구먼. 어디 보자, 차량번호는… 번호판을 보는데 덜컹, 누가 자동차 본네트에 앉았다. 차 주인인가? 후쿠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누군지 확인했다.

“경찰 아저씨~ 오늘도 수고!”

   앵클부츠가 번호판을 툭툭 치고 있다. 한껏 멋이라도 내려는지 찢어진 청바지 틈으로 하얀 무릎이 보였다. 바지와 짝을 맞춘 데님 청재킷. 옆길에 차가 지나갈 때마다 링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무슨 색인지 뻔하다.

……일단 머리부터 꽁 쥐어박았다.

므냑───!!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뻔뻔하게 불어대던 풍선껌이 펑 터졌다. 


“뭐하는 짓이야!!!”

“소리 지르는 걸 보니 헛것은 아니네.”

“너무 한 거 아니야, 마사루 군?!?!??!”

저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니 더욱 헛것이 아니었다.


맞은 곳을 매만지며 폭력 경찰이라니 신고하겠다니 중얼거렸다. 그래, 해봐라. 머리에 혹만 더 생기지. 후쿠다는 삐뚜름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선배에 대한 존중은 어디로 간 거야?!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고 못마땅한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봤다. 눈동자의 색이 드디어 공개되고 역시나 예상한 색이다. 말끔한 선홍.

“넌 지금 선배 소리가 듣고 싶냐? 

지금껏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그래서 10년만에 선배 소리 들으러 왔잖아.”


자동차 범퍼를 가볍게 차며 땅을 밟는다. 사뿐한 걸음걸이로 보도 쪽으로 가길래 얼른 딱지를 찢어 와이퍼 뒤에 끼워두곤 쫓아갔다. 그게 뭔 소린데? 그녀가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앞으로 간다. 말을 걸면 대답은 해야 할 거 아니야? 횡단보도의 신호등 색은 빨강. 후쿠다는 킹교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뒤돌아본 금붕어가 뭐라 뻐끔거린다.


빠아앙─

자동차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후쿠다는 잠시 침음에 빠졌다. 가슴팍에 걸려있는 경찰 뱃지를 가리켰다. 이거 안 보이냐? 좀 봐줘라, 그런 거 졸업한 지가 10년이라고, 10년! 그 시간이면 애가 학교를 갈 나이다?? 킹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헐, 마사루 군 애 있어? 입까지 가려가며 놀라는데, 웃고 있는 게 다 보여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반쯤 접어올린 빨간 눈웃음.

적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면 사고 난다.

저건 절대 포기 안 할 표정이다.

   하….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꺼내 열었다. 딱딱하게 찍힌 경찰 신분증과 그 구석엔… 후쿠다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동전 하나를 꺼냈다. 야, 와 봐. 공중전화 부스에 기대어 길거리 잡지를 고르고 있는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렇게 하자. 

동전 던져서 이 나오면 네 말대로 하고, 

가 나오면 내 맘대로 하는 거다.”

“오~ 내 앞에서 내기하자는 거야?”

“그래, 그래. 이견 없지?”


참고로 손장난 좀 칠 거다.

어차피 논리가 통하는 녀석도 아니니

이런 식으로 납득시키는 게 낫다.


   엄지 끝에 동전을 올리고 위로 높게 튕겼다. 공중에서 맑은 금속 소리가 또랑또랑 돌았다. 그리고 손등에 떨어지기 전 손바닥으로 탁 덮었다. 여기서 약간의 기술이 들어간다. 동기한테 배운 건데 무조건 뒷면이 나오는 기술이다. 경찰이 이런 걸 알아서 쓸 데가 있겠냐고 뭐라 했는데 다음에 술이라도 사줘야겠다.

“자, 뒷면이지? 네가 포기해라.”


손을 치우기 전까지 혹시나 했지만 다행히 뒷면이 나왔다. 저쪽은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으니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었다. 흐응─…. 손등의 동전을 확인하곤 빤히 자신을 본다. 미안하게 됐지만 손장난 친 걸 알았다고 해도 증거 불충분, 혐의 없음이다.


“그래, 뭐. 약속했으니까~.”


생각보다 심심한 반응이었다. 솔직히 좀 더 과격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간 세월 동안 네 나름대로 어른스러워진 건지 저항 없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마침 횡단보도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먼저 앞서가며 어린애들 장난처럼 폴짝폴짝 까만 선만 밟고 길을 건넌다.


“근데 마사루 군.”


길을 거의 다 건넜을 쯤, 

느닷없이 자신을 뒤돌아보며 부른다.

“언제까지 ‘꼬리’만 물고 다닐거야?”


하? 


그게 뭔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 작은 은빛이 시야를 강타한다.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탁, 납작하고 차가운 게 잡혔다. 나이스 캐치~ 그녀가 장난스럽게 야구 선수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돌려줄 거면 평범하게 돌려줄 순 없는 거냐?

이게 동전인 건 알았다. 

하지만 후쿠다는 손을 펼쳐 보기 싫었다. 

그녀가 보란 듯이 자신 있게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동자 속 붉은 금붕어가 세차게 퍼덕거린다. 

빨간불이 깜빡인다.

“난 간다~!”


   손을 흔들며 그대로 떠났다. 놓친 연이 하늘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금붕어가 저 멀리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멀뚱하게 서있던 후쿠다는 요란한 경적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길을 마저 건넜다.

이게 지금 10년 만에 보는 선배다. 보통 순서라는 게 있지 않나? 약속 장소를 정하고, 안부 인사를 묻고, 지나간 나날에 대한 회포를 푸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질구레한 과정을 야구 배트로 시원하게 날려버리고 10년의 공백을 단 10분의 콜드 게임으로 메꿔버렸다.

손을 펼쳐보니 동전 앞면이 고개를 내민다.


지갑을 다시 꺼내 동전을 집어넣는데

경찰 신분증이 꽂힌 투명한 필름 구석,

석류색 기타 피크와 눈이 마주친다.

───마사루 군, 밴드하자.

허, 하고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다만 헛웃음도 웃음이 아니던가?


적신호를 무시하면 사고난다.

뒤가 나오면 내 맘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빌어먹을 평화다.

후쿠다는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까딱거리며 나아갔다.


까짓것, 하면 되지.



How do you think I'm going to get along

내가 어떻게 해 나갈 것 같아,

Are you happy, are you satisfied?

기분 좋아, 만족스러워?

How long can you stand the heat?

언제까지 그 열기를 견딜 수 있겠어?


밤이 깊어져간다. 밝은 조명 아래, 카드 덱이 소리 내어 섞이고 슬롯머신이 화려하게 카지노를 밝힌다. 오늘도 누군가 꿈을 사고 꿈을 잃는다. 후지와라 료헤이는 꿈에 몸을 맡기고 술과 담배에 몸을 적셨다. 어제 딴 3억을 오늘의 꿈에 전부 털고 왔다. 상관없다. 내일 밤, 내일의 꿈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미련 없이 칩을 쏟아 넘어뜨리고 자리를 떠났다. 주머니 속에 이름 모를 연락처 찌라시 따위가 가득 잡혔다. 그가 카지노에서 얻은 결과였다. 쓰레기를 꾸깃하게 뭉쳐 지나가던 웨이트리스 쟁반 위에 팁과 함께 버렸다. 들어올 때와 다르게 료헤이는 깔끔하게 빈손이 되어 카지노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차가운 공기가 열기를 가라앉힌다. 밤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났고,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찾았다. 카지노의 소란 속에서 느낄 수 없는 고요함과 자유로움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료헤이는 필터를 질겅거리며 라이터를 찾는다. 


틱, 찰칵이는 소리.

“잃는 게 무섭진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잃을 것도 없는 걸, 킹교.”

태연하게 불기둥에 담배를 가져댔다.

   니코틴이 몸에 차오르자 마음에 평온이 가득 찼다. 입에서 나오는 연기가 밤하늘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소년은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풀썩이는 기척. 하늘거리는 느낌에 옆을 본다. 곁에 앉은 소녀는 두꺼운 밍크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왜소한 몸을 잡아 삼킬 만큼 커다란 퍼 코트 아래로 짧은 치맛자락이 보였다. 코트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주니 아, 고마워. 하고 웃는다. 킹교는 검게 윤이 나는 핸드백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끝없는 우주를 본다.


“손버릇은 여전하고?”


그게 무슨 뜻인지 료헤이는 한번에 알아챘다.


담배가 걸린 제 손을 봤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단단한 손가락. 피아니스트에게 적합한 모양이다. 과거, 학교 음악실은 그의 개인 실과 다름없었다. 손이 피아노 건반을 쓸어내릴 때마다 모두 그를 주목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연모와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그 인기를 자신의 세계 속에서 홀로 즐겼다.


찬양과 환호, 소년의 우주를 무너뜨리고

건반 위의 제 손을 잡은 것은 시이나 킹교, 

그녀가 유일했다.


“…손 뗀지 오래야."


하지만 그것도 전부 과거의 일이다.

미형에 가까웠던 손도 지금은 거칠어졌다.

지금 제 손이 찾는 것은 피아노가 아닌

알코올과 담배, 그리고 포커 칩이었다.


   카지노는 소년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었다. 그 안에선 자신을 잊고 도박에 빠져들 수 있었다. 칩을 따고 잃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돈은 어차피 흘러 지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료헤이에게 있어 승리와 패배는 동일했다. 이곳에선 꿈과 현실의 선이 흐려졌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쾌락 속에서 소년은 우주를 떠돌아다녔다.


“난 이제 못 쳐.”


   네게 모질게 굴고 싶진 않아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다른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입이 익숙한 모양을 잡아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녀가 반박하며 일어섰다. 도박하는 사람이 왜 이래? 주사위는 던지기 전까진 모르는 거야.

료헤이는 부정의 의미로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서너 번 피며 연기만 후우 내불었다. 그리고 룟군—, 킹교는 뒤에서 그의 코트를 다시 어깨에 걸쳐주며 혼자 말을 이어갔다. 찬 바람을 몰아내고 약간 데워진 온기가 안겨왔다. 


“여전히 허전하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지노의 현란한 네온 사인 아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찬연한 주홍.

“킹교,”

담배 필터가 타들어 가는 것도 잊었다.


“난 제법 즐겁게 살고 있어.”

소년의 웃음이 어그러졌다.


   이거 보여? 그녀에게 가만히 있질 못하는 손을 보여줬다. 술이 없으면 이렇게 떨려. 마지막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게 10년 전이다. 네가 꿈 많은 소녀인 것을 안다. 꿈으로 도망치는 자신에 비해, 너는 꿈을 건져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너는 나를 꿈이 담긴 예쁜 선물 상자 따위로 볼지 모르겠지만, 리본을 풀고 열면 거기엔 죽은 고양이만 있을 뿐이야.


뭉툭해진 담배 끝의 열기가 느껴져 대리석 계단 벽에 비벼 껐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 마셨다. 밤의 풍경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소년이 향하는 곳은 낭만적인 밤하늘이 아닌 인공조명과 술에 찌든 도시의 야경이었다. 오랜만의 재회가 반가웠다. 하지만 소년은 스스로 그림자를 택한다.

신은 주사위 게임을 하지 않아.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잠시간의 정적.

그녀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이야기가 종료되었다고 생각했다.

“시───끄러워───!!!”


제 앞에 당당히 서고

두 뺨에 철썩 손을 붙이고 자신을 노려봤다.

신한테 참견 좀 하지 마, 아인슈타인!

룟군을 못 믿겠으면, 룟군을 믿는 날 믿어.”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오늘은 때마침 가는 손톱 달이 떠있었다.


───네 행운의 여신이잖아?

붉은 금붕어가 헤엄친다.


그걸 보는 자신의 눈에도 분명

복스러운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을 테다.


료헤이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물에 빠진 자신을 건져낸다.


온도가 다른 빨강.

소년이 소녀를 만난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예감이 덮쳐왔다.



There are plenty of ways you can hurt a man

여러 가지가 있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And bring him to the ground

바닥으로 내모는 방법은

You can beat him, you can cheat him, you can treat him bad

때릴 수도, 속일 수도, 나쁘게 대할 수도



   일교차가 심한 날이었다. 그건 도시의 특성이다. 아이들이 바닥에 분필로 무지개색 그림을 그리던 이곳은 해가 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낮의 온기는 반전되어 싸늘한 바람만이 불었다. 주인 잃은 개가 어슬렁거리고 갈 곳 없는 이들이 박스 조각을 덮고 누워있다. 그리고 모리 사소리는 심야에 사는 사람이었다.

정비소에 딸린 작은 복권 편의점 창밖으로 손님을 기다렸다. 기다린다고는 해도 대상이 있진 않았다. 기다려지지도 않았고. 라디오 채널을 바꾸니 의미 없는 정치 뉴스만 지나간다. 사고나 테러는 없었다. 사소리는 정비소 주인이 붙여놓은 철제 방범창이 답답했다. 차라리 강도라도 들면 기분 전환이 될 텐데.

왼쪽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분명 심장은 정박자로 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것도 그의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다. 지루함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소리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 자유는 그를 고립시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겨버리기도 했다.

검은 베일 뒤로 가려진 심장.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도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다.

또 다시 무상무념, 아무 것도 없다.

“복권 한 장이랑 초콜릿 머핀이요.”

적당히 밤이 무르익자 ‘손님’이 왔다.

사소리는 ‘주문’을 받고 검은 비닐봉지에서…

“아니 아니 아니, 진짜 초코 머핀─!!!”

드르륵, 방범창을 올리며 빼꼼 얼굴을 내민다.

사소리는 눈을 깜빡였다.

*금붕어*였다.

“킹교 씨?”


   여어~! 경쾌하게 인사를 걸어왔다. 그녀는 몸에 딱 맞는 까만 가죽 원피스 위로 두툼한 항공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패션인지 실제로 다녀온 건지 여러 국가의 와펜 자수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스타일은 달랐지만 10년 전과 비슷하게 양 갈래로 묶은 머리 때문에 순간 지금이 몇 년도인지 의심했다. 물론 전혀 자라지 않은 키도 한몫을 했다. 

복권은 제일 안 나간 걸로 줘, 킹교가 팔아줄게! 그 소리에 사소리는 기계적으로 복권 한 장을 뜯고 멀쩡한 초콜릿 머핀도 꺼내왔다. 잠깐 기다려봐─ 하며 잽싸게 복권을 먼저 낚아채간다. 계산도 안 하고 손톱을 세워 은박지를 긁는데,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점주가 봤으면 혼났을 거다.


“3등! 돈은 이 정도면 되지?”

“……너무 충분한데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

   히히덕거리머 웃더니 초콜릿 머핀을 반으로 쪼개 자신에게 내밀었다. 사소리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아니야? 초콜릿 칩도 위에만 있고 밀가루 맛밖에 안 나네. 킹교가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들으며 사소리는 라디오 볼륨을 낮췄다. 단조로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보단 금붕어 퍼덕이는 소리가…


뭐라 해야할까.

‘재밌다’고 느껴지진 아니지만

이쪽이 좀 더 활기찼다.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길고 짧은 시곗바늘이 한곳에 모였다. 사소리는 오일이 묻은 정비소 재킷을 걸쳐 입고 가게 불을 껐다. 유통기한이 지난 컵 누들 두 개와 맥주 두 캔, 담배 한 갑을 챙겨 나왔다. 때로 얼룩진 가게 셔터를 차르륵 내리다, 마지막으로 사과 한 알을 주머니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어떤 게 좋아요?”


   씨푸드 맛과 카레 맛 컵 누들을 보여줬다. 오! 출출했는데! 그럼 킹교는 카레 맛이려나~. 냉큼 두 손으로 받아 간다. 3분이 지나고 뚜껑을 벗겨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담배 연기와 달리 촉촉하고 이불 속에 있을 때 닿는 감촉과 비슷하다. 플라스틱 포크가 열에 닿아 흐물거린다. 면을 바로 입에 넣는데 자신을 보고선 으엑, 안 뜨거워? 하고 놀란다. 고양이가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건 알았는데 금붕어도 그런지 연거푸 입김을 불며 식혀 먹고 있다.

사소리는 포크질 다섯 번 만에 다 먹고 국물까지 전부 털어 넣었다. 입안이 뜨겁고 염분에 혀가 쩍 달라붙었다. 비닐봉지에서 맥주 캔을 꺼내 열심히 누들을 먹고 있는 그녀에게도 하나를 권했다. 자정을 넘긴 온도에 맥주는 여전히 차가웠다. 캔을 따는 청량한 소리. 그녀가 짠~ 하고 건배를 청하기에 통 가져댔다.

“재밌는 건 좀 찾았어?”

“뭐… 알잖아요.”

   하얀 맥주 거품이 일었다. 황금빛 물결이 목을 친다. 따가운 감각과 시원함이 찾아온다. 나름대로 물리적인 자극을 충족할 수 있어 사소리는 이것들이 싫지 않았다. 촉감 이상의 감상은 없었지만 자극이 되어주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 유일했다.


“있지, 네게 재밌지는 모르겠는데─”


다 마신 캔은 어느새 재떨이가 되었다. 

식후 담배를 태우던 중 그녀가 말을 걸었다.

“죽이는 일 해볼래?”

의외의 말이 나와 입에서 담배를 뗐다.

“…킹교 씨, 그런 쪽에 관심 있어요?”

그리 말하니 그녀가 쿡쿡 웃는다.

“아니, ‘시간’ 죽이는 일.” 

누가 봐도 의도적인 말장난이었다.

뭐, 나름 끝내주는 일이기도 하고?

히죽거리며 말을 덧붙인다. 

벽에 기대어 두 사람은 계속 담배를 피웠다. 골목길엔 지저분한 그래피티와 쓰레기가 쌓여 딱히 볼 그림이 못 되었다. 그나마 볼 거라곤 저 멀리 사람이 다니지 않는 들길 정도였는데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자오록하게 피어오르는 동안 사소리는 어두운 들을 전짓불로 비추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해했다.

“사과는 맛있어?”

주머니에 불룩 튀어나온 사과를 보더니

그녀가 엉뚱한 말을 했다.

“그냥 먹는 거예요.”

사소리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그래도 사과를 골랐네.”

이상한 말.

이상한 사람.

   사소리는 심야의 사람이었다. 그에겐 아침이 밝아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촘촘한 어둠 속에 있고 심중소회가 밝혀질 날이 없다.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 없으니 원하는 것도 없고, 번뇌 없이 도탈했는가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소리는 늘 목말랐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허기짐’은 감정이다.

‘춥다’도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시렵다’는 감정이다.

  

사소리는 감정이 없다.

하지만 갈증 나고 목이 탔다.


───그것은 감정일까?

킹교는 제 주머니 속 사과를 가져가더니 옷깃으로 문질러 다시 줬다. 빨갛게 윤이 나는 사과가 신선해 보인다. 사과를 받고 아작, 한 입 씹어 먹었다. 풍부한 과즙이 뚝뚝 흐를 것 같이 터져 나왔다.

“맛있어?”


사소리는 사과를 골랐다.

10년 전의 자신도 사과를 골랐다.

싫지도 좋지도 않지만 골랐다.


“…맛없진 않아요.”

한 번 더 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소리는 10년 전 그녀를 만났다.

싫지도 좋지도 않지만 드럼을 골랐다.

“그럼 괜찮네.”

그녀 입에 미소가 번진다.


“재미없진 않을 거야.”

킹교는 커다란 배낭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가죽끈으로 묶인 단단한 드럼채를 건넸다.

10년 만에 만난 드럼채였다.

골목길에 고등 하나가 켜져 있다. 

오렌지색 등불 아래 금붕어가 더 붉다.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은 의미가 없었지만

선택한 결과가 의미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소리는 손에 쥔 드럼채를 내려봤다.

싫지도 좋지도 않지만,

사과를 먹는 만족감이 잠시 배를 채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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