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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의 폭풍

(2022년 타이버니-우사토라-ㄴ님 신청)

연습장 by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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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이저

어느덧 봄이다. 곳곳에 움튼 푸른 싹이며 샛노랗고 희어 어여쁜 들꽃들이 고개를 드는 계절이란 말이다. 날은 흐리지도 않고, 매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완연한 봄날이었다. 가족끼리 소풍 나들이하는 일도 많은 날씨. 그게 오늘 날씨였다. 그런 따뜻하고, 어쩌면 온화해서 기분마저 나른하게 풀어질 법한 완벽한 날. 평온을 가르고 큰 소리가 날아듦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젊은 청년-버나비 브룩스 주니어-이 뛰어들어 장시간 이어진 술래잡기의 끝을 알렸다.

“허억…허억…하―…잡았다. 이제 도망 못 가요. 코테츠 씨! 오늘에야말로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아니-아니! 얼마 전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람! 버니! 뭘 오해했는진 모르겠는데…내 식사는 내가 해결한다니까!”

“전부터 그러셨죠, 하지만 약속했잖아요? 서로 잘 챙겨 먹기로. 제가 그 말을 어겼던가요?”

“윽―그건, 음. …미안.”

내내 곤란한 기색이었던 카부라기 T 코테츠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이 없던지 그는 모자까지 이마 아래로 눌러 덮고 있었다.

“쭉 지켜보아도 늘 대충 때우고 볶음밥이나 술만…이젠 못 참아요. 순순히 따라오시죠.”

버나비가 코테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마른 은행잎처럼 은은한 금발이 한낮의 볕을 듬뿍 받아 마치 왕관처럼 찬란히 빛났다. 내리쬔 빛 때문에 버나비의 속눈썹 아래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

“안 잡으세요? 왜 빤히 바라보고…”

“읏차, 그냥 일어날 수 있어. 그보단 말이지, 버니~?”

“너 말야…속눈썹 영양제라도 발랐냐?”

“네?”

“묘-하게 저번보다 긴 것 같아서.”

“칭찬인가요, 그래도 안 봐줘요.”

“아니 진짜로!”

손목이 질질 끌리는 모양새였음에도 코테츠는 연신 버나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목시계에서 반사된 빛이 요란스럽다가 다시 바닥을 비추고, 버나비를 계속 뜯어볼 듯 가까웠다가도 어느새 멀어져 함께 나갈 채비를 마친 코테츠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방송인 특유의 듣기 좋은 음성이 과장되게 커졌다.

<콤비 활동으로 유명한 히어로, 와일드 타이거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인기인인 연예인 Q씨와 긴밀한 사이라는 말이…>

“오, 버니. 저건 진짜 나 아니다.”

“어제도 말했잖아요. 알아요. 늘 그래왔듯, 가십이란 항상 저렇죠.”

정말로, 코테츠의 영양 불균형 식사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주제였다. 히어로 전용 대기실에 항상 틀어뒀던 텔레비전의 연예 뉴스는 늘 그렇듯 가십에 불과할 뿐인 소식과 어디서 구했을지도 모를 저화질의 사진을 화면에 띄우곤 또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명성이 있다면 항상 저런 식으로 엮는다. 지나치게 허접한 이미지에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

그러나 바라본 코테츠가 골똘히 화면을 살피고 있다. 저런 반응이라면 오해를 살만하다. 진실이 아니라면 무시해도 될 텐데. 한숨 쉬며 버나비 브룩스 주니어는 거울을 보았다. 이상이라곤 없어 보이는 제 모습, 그리고 버나비가 거울을 보는 걸 알자 장난스레 웃으며 사진 찍듯 엉성한 포즈를 취한 코테츠에 작게 웃어버린다. 티비를 다른 채널로 돌린 코테츠가 버나비의 머릴 헝클었다.

“가자, 오늘 대접해준다며? 얼마나 좋을지 기대되는걸!”

어찌나 경쾌하게 제 머릴 헤집는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창은 모두 닫혔고, 환풍기에선 어떠한 이변도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부라기 T 코테츠의 손끝에선 항상 기분 좋은 바람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쑥스럽지만 싫진 않은 기분. 긴 손가락이 머리칼을 스쳐 빠져나가고, 코테츠가 앞장서듯 몸을 돌렸다. 하여 버나비도 아직 뜯지 않은 수분 보충용 음료를 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잠깐만요- 치사해요, 기다려주세요!”

메인디쉬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범했다. ‘대접’이라는 거창한 단어치곤 그랬다. 버나비가 이끈 그 가게는 한적한 거리의, 그것도 좀 더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꽃집 근처에 있었으며, 가게 사이의 거리는 어찌나 가까웠던지 테라스를 바라보자니 바깥바람에 실린 꽃이 잠시 코테츠의 시야에서 어른거릴 정도였다. 멀리서 바이올린 선율이 공간을 빙빙 돌다 차츰 옅어졌다. 생각보다 소담하긴 하지만, 어쨌건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다. 메뉴판을 내민 버나비를 마주하자 그가 고개를 까딱여 코테츠를 재촉했다. 가게 안은 온후하다.

“제일 값싼 음식을 주문하는 건 막을 거예요.”

“어쭈? 이것도 만만찮다고. 이 값을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 역시 이건 ‘대접’이다. 그것도 굉장히 무서운! 생각을 고쳐먹는다. 척 봐도 비싼 메뉴에 질겁하듯 코테츠가 손가락을 뻗자 버나비가 으름장을 놓았다. 하여 그는 조금 억울해졌다. 나름 배려였는데, 사회 초년생에게 이런 식으로 뜯어먹고 싶진 않단 말이 혀 끝에서 굴렀다가 이어진 버나비의 면박에 녹아버렸다.

“무엇이든 대충 먹고 건강이 나빠져서 신세 질 병원의 청구료보단 낫잖아요?”

“거참…그렇게까지 안 심해진다니까.”

“혹시 모르죠.”

팔짱을 낀 버나비의 녹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듯한 기세에 코테츠가 슬그머니 손가락을 내렸다.

“그, 그럼 이걸로.”

“…2번째로 싼 메뉴군요.”

“애쓴 거야.”

“알아요.”

버나비의 고운 낯에 주름이 졌다. 코테츠가 그의 미간에 손가락을 얹었다.

“워워, 그렇다고 인상 쓰진 말고. 있던 인기 전부 날아가겠어.”

“코테츠 씨는.”

“나? 나는 왜?”

“너무 남에게 물러요.”

“음…그렇지만도 않은데.”

“지금은 뭔가요?”

“뭐, 이건 버니를 위한 서비스 친절로 치자.”

코테츠는 웃었다. 크림색 커튼에 스며든 볕이 그의 눈동자를 등불처럼 은은히 빛나게 했다. 다갈색, 가을 낙엽 같은 색. 부스러지듯, 어쩌면 실없이 보이는 작은 웃음소리.

“하하…그래, 그런 얼굴이 좋다니까. 아, 이걸로 주문할게요.”

“….”

버나비는 물잔을 꽉 쥐었다. 찬찬히, 흔들리는 수면 위에 맺힌 그의 상이 흐려졌다.

디저트

“근데 스캔들은 왜 일어난 걸까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버니, 그걸 믿는 건 아니겠지?”

“저야말로 혹시나 해서 말하는 겁니다.”

버나비의 걱정과는 달리 이곳의 음식이 카부라기 T 코테츠의 입맛에 맞았던지, 그는 제법 잘 먹었다.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모습에 추가로 음식을 시키고 싶었을 정도로. 코테츠가 한사코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코스 요리를 더 주문했을 텐데. 디저트로 나온 쿠키와 케이크를 먹으며 그의 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진 일을 물었다. 코테츠가 따분하다는 듯 쿠키를 씹으며 대꾸했기에 버나비는 조금 안도했다. 귀찮은 일은 아니었군.

“그냥, 친해졌거든.”

“그게 끝?”

“아마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일 수도 있다고 연락이 오긴 했는데.”

“친하긴 친하네요, 그걸 보통 당사자에게 말하나?”

“뭐, 사람 좋단 평 들었으니까. 그것보단 문제아란 말을 좀 더 들었지만.”

“…코테츠 씨는 사람 좋은 거 맞아요.”

“오, 이것도 대접이니?”

“너무 무르단 문제가 있지만. 사람 좋단 건 진실이죠.”

“오…고맙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친해질 줄은 몰랐단 말이지, 봐봐, 예전에 겨울의 넌…”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해는 어느덧 거의 저물었고,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아주 옅은 여우비였기에 그들은 크게 허둥거리며 나갈 채비를 하지 않았다. 다만 좀 더 이야기를 이었을 뿐이다. 과거에 함께 걸어왔던 길이나 각자의 이야기, 앞으로의 다짐 같은 말들을. 단 걸 너무 많이 섭취했던가, 목이 말라 버나비는 차를 마셨다.

“봄이 좋긴 좋아. 따뜻하거든.”

“그건 그렇죠.”

“다음에 한가해지면 꽃이나 보러 가자. 집에도 사진 보내주고 싶고.”

“좋아요. 어…?”

“왜 그래?”

“아뇨. 방금, 차를 흘린 것 같았는데….”

“전혀?”

무언가 넘친 느낌, 손을 내려다보았으나 어디에도 물 자국은 없다. 코테츠의 말대로 버나비의 손은 조금도 젖지 않았으나 선연했던 감각에 되레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 그는 분명 차를 마셨다. 적당히 식어 마시기 좋으나 여전히 온기를 품은 찻물이 입을 적셨을 터. 그런데 여전히 목이 마르다니. 어쩌면 디저트가 너무 달았고, 차가 너무 쓰게 변했기 때문인 걸까?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버나비는 찻잔을 내려다보았으나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찻잔은 분명 넘쳤다. 찻물이 어디에 떨어졌을지는 몰라도….

“이제 슬슬 나갈까요?”

“좋아. 가는 길에 공원 좀 가로질러 가자. 벚꽃이 만개했더라.”

계산을 마친 버나비가 겉옷을 챙겨 코테츠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오, 비가 오는구만.”

아주 옅은 비에 머리칼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찻잔 속의 폭풍

지나치게 건조했던 날은 어느덧 드문드문 뺨이며 이마에 닿는 물기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옅은 빗발에 차츰 적셔졌다. 뺨에 닿는 물기가 퍽 미지근했다. 공원에는 봄에 피는 꽃이 가득했다. 조경 담당자가 새로 바뀌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는데, 과연 일을 잘해놓았다. 마른 풀 냄새가 나던 잔디가 이젠 푹신하다.

“버니, 이리 와봐. 여기 좀 밟자.”

“네?”

“별건 아니고, 봐봐, 꽃이 많이도 쌓였잖아. 낙엽 밟는 것처럼 계절감이 느껴져서 좋다니까?”

코테츠가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버나비는 그의 눈을 본다. 가로등 빛에 반짝이는, 짙은 호박(琥珀) 같은 눈동자. 방심하면 미끄러질 듯한 시선. 버나비가 머뭇거리다 손을 잡자 코테츠가 그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리고 춤추듯 스텝을 밟는다. 왈츠를 추는 듯한 우아함은 아니었으나 윤무와도 같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꽃무덤을 무대 삼아 그 위에서 돌고 돈다. 비바람이 불어 꽃잎이 흩어지고, 옷깃이 젖는다. 분분히 나부끼던 연하고 부드러운 꽃잎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코테츠는 눈을 감고 선율을 느끼듯 버나비의 손을 잡은 채다. 엉성하다. 발이 뒤엉켜 금방이라도 넘어질까 두려워지는 시간이 펼쳐짐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희미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선율이 들렸다. 호탕하게 웃은 코테츠가 한 바퀴를 돌자 이번에야말로 그가 미끄러질 듯해 가슴이 선득거렸다. 그의 허리를 붙잡는다. 우렁찬 목소리로 코테츠가 감탄사를 던졌다.

“나이스 캐치!”

“전혀 나이스가 아니지요. 다쳤으면 어떡하려고요? 너무 절 믿는 거 아니에요?”

“하하, 믿는 게 기분 나쁘더냐?”

“….”

“나쁘지 않지? 신뢰감.”

어느덧 봄이다. 곳곳에 움튼 푸른 싹이며 샛노랗고 희어 어여쁜 들꽃들이 고개를 드는 계절이란 말이다. 날은 흐리지도 않고, 매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완연한 봄날의 아침이 주로 찾아오며, 가족끼리 소풍 나들이하는 일도 많은 계절이다. 그런 따뜻하고, 어쩌면 온화해서 기분마저 나른하게 풀어질 법한 완벽한 날이었을 터. 그러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술래잡기’는 끝났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런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미묘한 아쉬움이 마치 먹구름처럼 껴서, 기분이 저조해지다니. 잠시간의 침묵. 버니의 그런 마음을 달래듯 코테츠가 말했다.

“오늘 재밌었어. 고맙다. 다음엔 내가 사줄게.”

“…!”

“음, 지금은 좀 그러니 내년 봄에 말이다!”

“…약속이라도 하시려고요?”

“어차피 봄은 오니까. 너랑 만난 시간이 쌓이는 것처럼.”

“그런가요.”

“그렇지. 봄은 와.”

“….”

하여 버나비 브룩스 주니어는 알 수 없는 회한을 느꼈다. 먹구름이 비가 되었다. 그래, 봄비가 속을 씻어 내렸다. 마음속 말라붙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움트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시 오고야 말 봄이라…그 말이 맞아요,”

“응? 그렇지?”

비가 내렸으니 빠른 시일 내로 만개한 꽃들은 떨어지리라. 유독 온화했던 날은 차츰 더워질 것이며, 건조했던 공기는 습도를 얻어 여름을 알리겠지. 봄이 왔다. 그리고 봄이 간다.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나지만, 아쉬웠지만 버나비는 이제 괜찮았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분명 봄이 올 테니까.

“그럼 그때 가고 싶은 식당 불러도 되나요?”

“뭣? 너무 부담스러운 곳은 안 돼! 내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하하…!”

“뭐야? 왜 웃어? 버나비 화났어?”

바람이 불었다. 공원 바닥에 물을 쏟아낸 텅 빈 페트병이 그 바람을 따라 한 바퀴 굴렀다. 비와 쏟아진 물에 웅덩이진 곳에 내려앉은 꽃잎이 춤을 추고 있다. 마치 찻잔 같았던, 돌고 돌았던 자그만 세계에, 마치 폭풍과도 같은 새로운 바람(그러나 몹시도 다정한)이 그를 좀 더 넓은 미래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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