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24화

속죄와 책임(2)

루에리와 합류한 나는 프라이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 내게 프라이스는 지인에게 받았다며 책을 건네었다. 마족의 언어로 쓰인 책이었다.

“내가 아는 고블린에게 이 책을 번역해달라고 했는데, 인간의 언어가 서툴러서 그런지 번역이 영 쉽지가 않더군. 그래도 확실한 건 골렘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는 점일세.”

“이 책은 제게 맡기세요.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루에리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그럼 나는 마리오네트의 포션을 해독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어.”

“그 점에 관해서는 티르 코네일의 딜리스 양을 찾아가보는게 좋겠습니다. 마법과 의술에 능통한 자라 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지하실에서 봤던 내용을 최대한 떠올려보았다. 마리오네트의 포션은 마족 스크롤의 성분을 추출한 일종의 마취제. 마취제를 복용하여 의식이 사라진 사람에게 마법을 사용하면 그 자는 시전자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선 시전자의 마법이 끊기거나 사라지는게 최고의 방법이지만, 우리가 에스라스를 잡는데 실패하면 그에 대비할 것이 필요하긴 하다.

게다가 그런 마취제 성분이 절대 안전하다고 확언하지도 못하고.

나는 루에리를 불러세우고 즉석에서 쓴 짧은 편지를 건네었다.

“딜리스 씨는 성인 남자를 무서워하니까 먼저 이걸 건네줘. 널 보증해줄 거야.”

딜리스는 스스럼없이 친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게는 호의적이기 때문에 교류가 있었다. 내가 막 에린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약하고 어리숙한 밀레시안이라 다칠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한숨을 내쉬면서 붕대를 감아주곤 했다.

그래서 다칠 때면 종종 딜리스가 생각났다.

루에리는 내가 건넨 편지를 품 안에 넣고 금방 돌아오겠다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크리스텔을 찾아갔다. 매번 번역을 맡기는 게 미안했지만 크리스텔은 괘념치 말라며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녀의 호의는 매번 큰 도움이었다.

내게서 건네받은 책을 본 크리스텔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타바르타스…? 이건 고대의 지혜에 대해 다루는 내용인 것 같네요.”

“고대의 지혜요?”

“네, 저도 자세히는 몰라 알려드릴 수 없지만, 고대의 지혜는 신이 내린 지식, 더 나아가 질서라 하며 포워르는 예부터 그것을 수호해왔어요. 그리고 그런 고대의 지혜를 지키는 수문장을 타바르타스라고 불렀지요.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골렘은 타바르타스를 흉내낸 모방품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에스라스의 목적을 확신할 수 있었다. 타바르타스. 그래, 에스라스는 타바르타스를 소환하려고 하는 것이다! 골렘 소환은 그걸 위한 연습이었던 거고.

그렇다면 타바르타스를 소환하려는 목적은 역시 고대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일까? 그런데 고대의 지혜를 얻어야 할 이유는 또 뭐지? 안타깝게도 크리스텔은 내 의문점을 풀어줄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크리스텔이 책을 번역해주자 마자 내용을 살폈다. 책에는 에스라스에 대한 언급이 짧게 있었다. 그러나 내 확신을 증명해주는 것 이상의 수확은 없었다.

뜻밖에도 내가 원한 정보는 루에리가 얻어왔다.

“촌장님께 인사드릴 겸 갔는데 마리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 마리가 지금의 모습…, 나오가 된 과정에 아마 네가 말하는 그 힘이 쓰여진 것 같아. 고대의 지혜라고 했지? 촌장님도 정확히 그 단어를 언급하셨어.”

“그럼 고대의 지혜란 게 정확히 무슨 기능이지?”

“그걸 통해 선택받은 자가 신의 영혼을 대리하게 되면서 신과 동화된다고 하더군.”

“마치 신이 아닌 자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나 또한.”

…에스라스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미쳤고, 대범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내막을 전해들은 프라이스는 이제 증거는 충분하고 에스라스를 체포할 일만 남았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에서는 세월이 겹겹이 쌓인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는 이멘마하 성당의 부사제인 제임스와 이미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제임스에 대해 말하자면, 정확히는 법황청 소속인 척하는 왕실 직속 조사관이라 한다. 그는 오랜시간 동안 에스라스의 뒷조사를 해왔고 증거와 목적이 드러난 지금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상부에 보고할 예정이라 했다.

그러니 우리는 때를 기다려 에스라스를 체포하면 된다.

“주의해야할 이는 크레이그라네.”

현재 팔라딘의 인사권은 에스라스의 손에 있다. 옛날에는 영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에스라스의 꾸준한 물밑작업으로 의도가 퇴색된 셈이다. 실제로 내가 잠깐 팔라딘 수업을 들은 것도 에스라스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니.

그러니 팔라딘 단장인 크레이그도 에스라스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라이스는 한 가지 예외를 덧붙였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에스라스에게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자신이 본 것과 정의를 외면하지는 않을 성격이니 우린 그를 설득해야 해.”

“그렇다면 이 증거들만 보여주면 될 것 같은데요.”

프라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안면이 있는 내가 크레이그를 직접 설득하러 갈걸세. 그동안 자네들에겐 에스라스의 체포와 영주님의 보호를 부탁하지.”

“직접 하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프라이스는 분명히 에스라스의 모략에 휘말린 피해자고, 분노하고 있었다. 내가 그라면, 분명히 에스라스를 직접 마주할 것이었다.

하지만 프라이스는 거절했다. 그건 용기가 부족해서도, 분노가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비록 에스라스가 그 날 일을 꾸몄다고 하더라도, 참극의 피해는 아직도 상흔처럼 남아있어. …시간이 지나도 깍인 바위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 말에 문득 나와 함께 대화했던 팔라딘 수련생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잃었다던 그는 마족을 미워했다. 그뿐만 아니라,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상실을 겪은 많은 사람들.

“내겐 자격이 없다네.”

프라이스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무거운 책임이다. 한 사람의 양심으로 버티기에는.

그의 또렷하게 뜨인 눈이 루에리에게 향했다.

“오히려…, 양보할 필요가 있는 것 같군.”

루에리 님.

프라이스는 지금껏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루에리의 이름을 꺼내었다. 지금껏 아버지에 의해 흔적이 지워졌던 이멘마하 성의 그림자. 이멘마하에는 루에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이제 없다.

과거를 아는 자의 부름에 루에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디 당신이 가는 길에 빛이 깃들길 빌겠습니다.”

* * *

이멘마하 성으로 잠입할 때까지 루에리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묵묵히. 그저 앞을 보고 갈 뿐이었다.

시종을 마주하면 가볍게 기절시키고, 기사를 마주하면 제압했다. 소란이 이어지다가 영주성 안쪽, 집무실에서 에스라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에스라스는 여유롭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 올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늦은 것 아닌가요? 기다리느라 이골이 났답니다….”

“에스라스! 리안은 어디있지?”

“후훗. 영주님이라면 이 성에는 없습니다.”

루에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에스라스는 말을 이었다.

“당신과는 꽤 많은 시간을 보냈죠. 리안 영주님이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모습도, 허약한 몸 때문에 침대에 눕혀 간병하던 때도. 그 순간을 공유하면서 저는 한결같이 생각했습니다….”

“….”

“이 불쌍하기 그지없는 형제를 이용하자고, 말이에요.”

잔인한 미소를 베어물며 키득거린 에스라스가 외쳤다.

“제 아비의 죄악 때문에 태어났을 때부터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형, 그런 운명을 형 덕분에 피했으면서도 건강을 얻지 못해 시들어가는 동생!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은 아버지. 손 안에 굴리기엔 제겐 너무 쉬운 일이었답니다.”

“입 닥쳐!”

더 듣다 못한 내가 검을 휘두르자 에스라스는 가볍게 피해내곤 허공 속으로 녹듯이 사라졌다. 젠장. 나는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마법에 까막눈이 아니라 흐릿하게 마력의 흔적이 남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얼른 쫓아야 해, 루에리. 아직 마법을 쓴 흔적이 남아있어.”

나는 멍하니 서있는 루에리의 팔을 잡아챘다. 두 어깨를 붙들고 그에게 집씻듯 전했다.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주한 두 눈동자. 잔혹한 핏빛 같다가도 모든 걸 불태우는 화염같기도 했다.

그 양면의 눈이 내게 향하자 부풀어오르는 착각이 느껴졌다. 장작을 먹은 불처럼 말이다.

내가 그 빛에 잠시 붙잡힌 사이, 루에리가 말했다.

“가자.”

그에겐 아직 잃으면 안 될 것이 남아있어서. 어리숙하게 굴다 후회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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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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