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속죄와 책임(3)
흔적은 바리 던전으로 이어져 있었다. 던전에 들어간 우리는 빠르게 방을 거쳐갔다. 에스라스는 던전의 끝에서 우릴 맞이했다.
“잽싸기도 하셔라.”
“리안은 어디에 있지!?”
루에리의 외침에 에스라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게 보고싶으시다면야, 보여드리죠.”
에스라스가 힘을 모으듯 합장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불길한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진과도 같은 흔들림이 던전 내부를 울렸고, 바위 파편들은 일제히 모여 거대한 골렘으로 태어났다.
“저건, 타바르타스…?”
“그래요. 이 골렘은 타바르타스. 바로 고대의 지혜를 지키는 수문장. 그리고 제 의지를 받들어 당신들을 짓밟을 대리인이기도 하고요.”
타바르타스의 몸체는 검은 바위와 금으로 그려진 문양을 제외하면 골렘과 유사했다. 다만, 풍겨오는 힘만큼은 일반 골렘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강했다.
“루에리, 내가 타바르타스를 상대할게. 너는 그동안 에스라스를 제압해줘. 아마 이 골렘은 주인이 없으면 동작하지 않을테니까.”
“…그래.”
나는 원드를 뽑기 좋게 허리춤에 차고, 두 자루의 검은 양손에 단단히 쥐었다.
“몸 조심해!”
“너야말로.”
우리는 각자의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타바르타스는 거대한만큼 움직임이 둔했다. 그리고 얕은 공격으로는 다운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보통 골렘의 약점으로 생각되는 돌과 돌의 이음새를 노렸다. 하지만 들어가는 대미지는 전무했다.
지금 우리에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타바르타스를 조종하는 에스라스를 노리는 것. 이게 여의치 않을 때는 타바르타스 자체를 파괴해야한다. 그러나 타바르타스가 그렇게 쉽게 파괴된다면 수문장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은 타바르타스와 에스라스의 연결을 끊는 것이다.
나는 루에리를 흘낏 보았다. 에스라스는 의외로 육탄전에도 밀리지 않았다. 근접전에 밀리지 않는 마법사란, 정말 성가신 존재다. 게다가 네크로맨서의 금지된 마법은 루에리에게 한 방 한 방이 클 터.
그렇다면 난 나대로 에스라스의 지배를 끊는 방법을 찾아야겠어.
타바르타스의 스톰프 공격은 정말로 성가셨다. 땅을 찍을 때마다 퍼지는 검은 파동은 꽤 멀리까지 가기도 했고, 거리가 멀어도 위력이 작지 않았다.
다가갔다간 윈드밀과 스톰프 세례에 역으로 내가 당한다. 나는 파이어 원드로 바꿔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중급마법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타바르타스의 가운데 바위를 중심으로 마나가 기묘하게 몰리고 있었다. 어쩌면 저기가 중요한 핵일지도 몰라. 그렇게 반쯤 확신한 순간 둔탁한 고통이 머리를 내려쳤다.
“윽!”
“괜찮아!?”
이제껏 잘 피했다가 잠깐 넋을 놓았다고 한 방 맞아 버렸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다. 집채만한 바위 주먹에 맞았으니 당연한 건가…. 루에리도 내게 잠시 한눈을 팔았다 에스라스의 공격을 겨우 피했다.
“괜찮으니까 네 앞을 집중해!”
나는 다시 공격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일어났다. 머리에서 액체가 주륵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땀은 아니겠고, 그럼 피겠네. 피가 눈꺼풀을 가리기 전에 팔로 비벼 없애고 이번엔 제대로 마법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스킬은 손에 쥔 원드에 맞는 파이어 볼. 썬더로는 타바르타스의 근처에 가기가 힘들었고 아이스 스피어는 얼어붙기 때문에 살피기 어려웠다. 적을 무조건 다운시키는 파이어 볼이 필요했다.
엔더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나는 파이어볼의 차지를 유독 못했지만, 그의 말 하나하나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구를 빠르게 회전시키면서도 터지지 않게 해야하고, 그러면서 조준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내 원드에서 시작된 불마력의 응집체가 빙글빙글 가속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타바르타스의 공격을 무빙 캐스팅으로 겨우 피했지만 파이어볼 차지는 멈추지 않았다. 타격을 주기 위해 5차지는 해야한다. 무빙 캐스팅 수련 게을리 하지 말 걸.
마법을 신경쓰랴, 공격을 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때는 찾아왔다.
엔더 앞에서 매번 실패했던 파이어볼은 다섯 번의 차지 끝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화력이 되어 내 원드 끝에서 유유히 날아갔다.
타바르타스를 가격한 화염구는 확 올라오는 열기와 함께 터졌다. 나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뛰어들었다. 온몸이 뜨거웠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올라탄 타바르타스의 중심. 그 곳에서 나는….
난…,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토록 루에리가 찾고 있던, 리안….
창백한 리안의 시체를.
불길이 일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다면 에스라스는 산산히 조각났을 것이다.
“에스라스ㅡ!!!”
에스라스는 그런 내 분노를 받고 움찔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걸 앗아가려고 하는 거야!”
“하, 그런 건 이제 저에게 의미가 없으니까요! 뭐하고 있어, 타바르타스! 어서 일어나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도 루에리가 에스라스를 망설임없이 공격했다. 그 충격으로 조종자의 연결이 끊어진 걸까, 일어나려던 타바르타스는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리안을 무너지는 돌더미에서 꺼냈다. 몸이 찼다. 아직 남아있는 잔열 속에서도.
“리안!”
루에리가 달려와 리안을 받아들었다가 곧 동생의 죽음을 알아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리안의 뺨을 두드렸지만 감긴 눈은 떠질 줄 몰랐다.
“어째서, 어째서!!!”
“….”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일그러진 얼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 터벅터벅, 낯선 이의 무거운 발걸음이 던전을 울렸다.
그는 모르간트였다. 검은 어둠의 기사는 이 참사를 훑어보더니 루에리에게 담담히 물었다. 그 목소리는 고요한 동굴 내부를 울리는 작은 물방울 소리처럼 뚜렷하게 들렸다.
“루에리, 이래도 너에게 세상을 벌할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가? 소중한 걸 잃게 한 인간들의 잘못된 진리와 신념을 바로잡고 싶지 않은가?”
“…아냐, 네가 말하는 힘은 올바르지 않아.”
“세상에 올바르지 않는 힘 따윈 없다. 각자의 신념이 있고 정의가 있다. 그걸 끝까지 관철하는 자야말로 올바른 힘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나는 루에리를 말리고 싶었지만 내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혀를 굳게 했다.
르나도, 이렇게 리안을 죽게 한 걸까? 그래서 그녀는 아무 변명조차 하지 못 했던 걸까?
루에리가 나를 보았다. 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루에리는 다시 모르간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어쩌면, 안일했을 지도 모른다.
르나와는 달리 루에리는 나에게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몽상 속의 모습처럼 그는 끝내 말했다.
“난…. 그래, 나는 힘이 필요해…. 그 누구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넘볼 수 없도록….”
“잘 생각했다.”
“루에리!”
나는 온 힘을 다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내 작고 볼품없는 외침을 루에리는 외면했다. 단지 내 곁을 스쳐가며 작게 작별을 고했을 뿐이었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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