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26화

속죄와 책임(4)

루에리는 쓰러진 리안을 안고 모르간트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를 그토록 잔인하게 몰아세운 에스라스에게는 시선 한 줌을 던질 뿐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자신만이 알겠지.

남겨진 나는 묵묵히 에스라스를 결박했다. 뒤늦게 프라이스가 던전에 도착하자 에스라스는 정신을 차렸다.

“하하하….”

실성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모든 걸 앗아가는 자가 거꾸로 모든 걸 잃게 된 지금, 에스라스의 기분은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에스라스, 넌 이제 끝이다. 네 악행은 이멘마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네가 가진 지위와 인망도 잃게 되겠지. 남은 할 말이 있나?”

프라이스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마지막 자비를 던졌다. 그에 에스라스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는 킥, 비웃음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위선을 떠는 모양새라니, 웃기지도 않군.”

에스라스는 존댓말을 벗어던진지 오래였다.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상대를 존중할 가치를 못 느끼는 자의 존대란 결국 조롱이지 않은가.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말은 해볼까. 혹시 그걸 아나? 리안이 죽은 건 참극의 날, 네 칼에 맞은 그 순간이었다.”

“…뭐라고?”

“리안은 즉사했고 시체로 남아 영주가 되었지. 나는 네크로맨서. 시체를 조종하는 일이야말로 내 전문 분야거든.”

저주같은 말은 끝나지 않았다.

“리안은 아주 쓸모있는 아이였어. 어렸을 땐 몸이 약하단 이유로 내가 전 영주의 측근이 될 수 있게 해주었고, 죽은 이후에는 이 내가 이멘마하를 다스릴 수 있도록 창구가 되어주었지.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타바르타스의 제물로 바쳐졌으니 그 쓸모를 말하자면 길지.”

“이 자식…! 더 이상 영주님을 모욕한다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프라이스가 에스라스의 멱살을 잡았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그런 프라이스를 막았다. 안돼요, 이 자에게 휘말리지 마세요….

그러나 프라이스를 말리는 내 손 또한 떨리고 있었다. 리안을 죽인 게 내가 아니라는 안도, 그리고 안도를 느끼는 내 자신을 향한 구역질 나는 역겨움….

에스라스는 그런 내 마음을 꿰뚫은 듯 말했다.

“후후, 인간은 원래 다 그런 존재다. 욕망을 탐하고, 책임을 기피하지. 그러면서 양심의 존재를 찾아. 한 가지 말해줄까? 리안이 그 날 죽은 건 내 계획이 아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지. 그건 그냥 얻어걸린 우연이었고, 리다이어 네 책임이었을 뿐이다.”

프라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이라 말하고 싶지만 에스라스의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연히 날아간 검의 궤도까지 에스라스가 바꿀 수는 없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속죄할 기회가 있는 건 축복이라고.

아하하…! 하하하하!

절망을 안겨준 에스라스가 즐겁게 웃었다. 그녀의 높은 웃음소리가 텅 빈 던전을 울렸다.

나는 그만 참을 수 없어 물었다.

“정말 당신에겐 그들을 향한 일말의 애정이나, 망설임이 없었나요?”

그러나 에스라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서 나는 짙은 허무를 느꼈다.

* * *

에스라스의 체포 소식에 이멘마하는 술렁거렸다. 그녀의 악행이 낱낱이 고해지자 그럴 분이 아니라면서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가려지지 않은 원망이 깃들었다. 그도 그럴게, 참극은 정말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상처를 남겼으니.

그리고 나는 한동안 낭만농장에 칩거했다. 도우갈은 소식을 듣고 내내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뭐라 말하진 않았다.

도우갈이 농장에 있을 때면, 우리는 종종 티타임을 가졌다. 오늘의 차와 디저트는 레몬티와 초코칩쿠키였다.

“요새 뭐하고 지내요?”

“뭐, 이것저것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돈이요?”

“언제까지 이 농장에 얹혀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흐음.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몬티인데 떫을 수도 있나?

“다들 계획이 있는 것 같아요. 저만 빼고….”

“사람은 어쨌든 앞을 봐야하는 존재죠. 시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수명은 유한하니.”

“와, 정말 철학적인 말이다.”

“뭐, 당신에겐 해당되지 않으려나요?”

도우갈이 덧붙였다. 밀레시안은 죽지 않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살아있으면 미래로 향할 뿐이니 밀레시안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밀레시안은 대부분의 것을 잘 하지만, 과거로 갈 수있는 특별한 능력따윈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려 했을까?

“그럼 솔라도 슬슬 움직여야죠.”

도우갈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펼쳐 보니 그건 작은 포춘쿠기였다.

“심심해서 구워봤습니다. 뭐, 운세따윈 믿지 않지만….”

“…고마워요.”

나는 쿠키의 반으로 갈랐다. 쿠키를 만든 사람이 썼을 단정한 글씨가 보였다.

[ 현재의 일이 큰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풀린다. ]

뽑기가 아니니 결국 이건 도우갈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인 셈이다. 나는 그게 기껍고, 고마워서 쪽지만 따로 접어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덕분에 결심했어요. 저,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요.”

농장에서 나온 나는 시드스넷타로 향했다. 이제껏 만나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 했던 이야기.

사실 말이죠. 루에리가 그를 따라갔어요. 전 그걸 막질 못했어요. 왜냐면요, 리안이 죽은 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사실에 안도를 느꼈어요. 이런 제가 정말 미웠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의 친구를 잡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하지만.

내겐 기회가 아직 남아있으니 다시 루에리를 이곳으로 데려올게요. 이건 온전히 제 책임이에요. 루에리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타르라크, 이게 옳은 결정일까요? 부디 이 끝에 괜찮은 결말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눈이 아롱아롱 내렸다. 시드 스넷타는 내겐 시작의 장소였다. 그리고 끝의 장소이기도 했고.

내쉬는 숨이 얼어붙어 하얗게 빛났다. 나는 떨어지는 눈발 사이로 타르라크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밭은 기침을 하며 서있었다. 보고 있자니 언제든 여기서 나를 반겨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발견한 타르라크의 시선이 잠시 옆을 훑었을 땐 조금 긴장했지만, 이내 지어진 흐릿한 미소에 안심했다.

말할 용기가 생겼다.

* * *

루에리는 모르간트를 응시했다. 검은 투구 때문에 눈을 볼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가 깊은 회한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건 루에리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모르간트. 당신은 어째서 인간이면서 마족의 편에 섰지?”

“네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군.”

“너와 내가 같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 침묵하던 모르간트는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이건 내 운명을 결정했던 검이다.”

“이 검은…!”

“알고 있는 눈치로군.”

“프라가라흐…. 빛의 기사가 지난 마족과의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신검. 이 검의 이야기라면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수십 번을 들었으니까. 마족과의 절망적인 싸움에 용감히 맞서 전황을 바꾼 위대한 용사의 이야기를.”

루에리는 저절로 악문 이에서 겨우 힘을 빼고 물었다.

“루 라바다. 그게 당신의 정체였나?”

모르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루에리. 넌 너와 내가 같지 않다고 했지만 결국 본질적인 이유는 같다.”

그는 그 뒤에 말을 더 잇지는 않았으나 루에리는 답을 알았다.

모르간트는 인간이라는 족속들에게 실망한 것이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아무리 선하고 소중한 걸 아낄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결국 옳지 못한 인간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한 인간을 이용하고 해친다. 제 동생 리안과 에스라스처럼.

그런 걸 운명처럼 정해놓은 세상이, 증오스러웠다.

지금의 세상을 전복시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딱히 마족의 편을 들고 싶진 않았지만, 힘을 얻으려면 모르간트를 따라야했다.

제게 남은 얼마 안되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이걸 네게 주마.”

모르간트에게서 프라가라흐를 받아들며 루에리는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녹음 같은 눈을 한 상냥한 여자의 얼굴을.

솔라. 그 이름을 속으로 되새겼지만 자꾸 잊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분명 자신에게 희망을 준 고마운 이였는데, 지금은 솔라를 떠올리면 죽어서 재가 되어 사라진 리안도 떠올랐다.

온전히 그녀의 탓이 아닌 걸 안다. 하지만 한편으론 원망이 든다.

왜 인간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걸까. 그랬다면 이렇게 갈등하지도, 괴롭지도 않을텐데.

그런 루에리의 마음을 알아챈듯, 손에 쥔 프라가라흐에서 옅은 진동이 울렸다.

.

.

.

그 날, 신검 프라가라흐가 루에리에게 계승되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