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빛과 어둠(1)
이멘마하는 영주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온했다. 나는 아침부터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다니다 델이 주는 일감을 받고 서문으로 향했다.
꽃 밭에서 알록달록한 꽃송이를 채집한 후,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마감 시간까지는 시간이 얼추 남았으니 이정도 땡땡이는 괜찮겠지.
오늘따라 이멘마하 호수를 감싼 흐린 안개도 사라져 유난히 하늘이 맑아보였다. 구름 한 점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모양새가 꼭 던컨 촌장님 댁에 사는 이상한 고양이를 닮았다.
“…….”
사실, 어제 꿈을 꿨다.
모리안 여신이 내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둘러 빛의 기사가 되라고 재촉하는 꿈이었다. 빛의 기사란, 결국 팔라딘을 뜻하는데…, 팔라딘 훈련을 그만 둔 내게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내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모리안은 ‘진정한’ 팔라딘이 되라 재차 강조할 뿐이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진정한 팔라딘이라….
그래서 일단 이멘마하에 오긴 했으나, 팔라딘 수련장 쪽으로 가진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 쪽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싱그러운 풀 냄새에 꽃 향기가 섞여 맡아졌다. 기온도 딱 좋을 만큼 선선해 나들이를 해도 좋을 날이다. 이대로 평화로운 날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루에리를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진 못하겠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카락에 얹혀있던 꽃잎 몇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간질간질하게 시선이 느껴져 시야를 돌리니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의 남자가.
시선이 마주친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밀레시안 솔라 씨입니까?”
“네, 무슨 일이신가요?”
벌러덩 누워있는 모습을 들켜 조금 민망했지만 성실히 대꾸해주었다. 그러자 상대의 진중한 얼굴이 살짝 풀렸다.
“저번에 너머로 보긴 했지만 직접 대화하는 건 처음이군요. 얼마 전 이멘마하의 사건을 해결하신 분이라 들어 저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낯이 익은 이유가 있었다. 예전, 에스라스에게 팔라딘이 되기를 청할 때 성 앞에서 지키던 그 젊은 기사였던 것이다. 이 사람과는 볼 때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네. 나는 설레설레 손을 젓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성함이?”
“아, 저는 근위대 소속 기사 아이던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휴무라 군장은 안 했지만요.”
아이던은 기사답게 딱딱한 말투를 썼지만 악의나 경계가 느껴지진 않아서 예의를 차린다는 느낌만 받았다. 우리는 꽃밭에서 가볍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하다 보니 어렴풋이 느꼈는데, 그는 보기 드물게 정직하고 곧은 성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까, 마음 속에서 작은 욕구가 생겼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겁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내 행동을 아이던이 알아채고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그 덕분에 나는 내내 품고 있던 의문인 ‘진정한 팔라딘은 무엇인가’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웬만하면 흘려듣거나 대충 답할만큼 고루한 질문이었지만 아이던은 진지하게 고찰해주었다.
“진정한 팔라딘이라 하면…, 역시 루 라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군요.”
루 라바다에 대해서는 타르라크에게 간단하게 들은 적이 있다. 2차 모이투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팔라딘의 이상과도 같은 자.
“빛의 기사 루는 모든 기사들의 영웅이죠. 마족들과의 전투가 끝나고 에일리흐 왕국을 재건하신 분이기도 하죠. 저 또한 루와 같은 기사가 되기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요?”
“흠…. [ 모이투라의 영웅, 빛의 기사 루 ] 라는 제목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그 책이라면 루의 행적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드는군요.”
꽤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 시간을 확인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있는 정오. 어느덧 아르바이트 마감 시간이 지났다. 내가 가려는 채비를 하자, 아이던은 눈치좋게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제가 너무 붙잡았군요. 혹시 더 궁금한 사항이 생기시면 제가 근무하는 이멘마하 성으로 오셔도 됩니다.”
“일하시는데 민폐는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솔라 씨의 용건은 개인적인 목적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요.”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이던이 황급히 덧붙였다.
“업무의 일환으로 본의 아니게 솔라 씨의 행적에 주의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알게 되더군요….”
그러니까, 무엇을? 궁금했지만 아이던은 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나도 서둘러 꽃바구니를 챙겼다.
“하나, 둘, 셋…. 수고하셨어요. 여기 아르바이트 보상 드릴게요.”
델이 짤랑이는 금화를 내밀었다. 내가 금화를 품에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델의 쌍둥이 동생인 델렌이 끼어들었다.
“솔라 씨, 혹시 서문쪽에서 근위대장님 못 보셨어요?”
“근위대장이요?”
“네, 아까 그쪽으로 가시길래 만났나해서요!”
만난 사람이라고는 아이던 밖에 없는데…. 그때 딱, 머릿속을 스쳐가는 가정이 있었다.
“혹시 아이던 씨가 근위대장인가요?”
“네~! 당연하죠! 어라, 솔라 씨는 몰랐나요?”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근위대 소속이라고만 했지 대장이라고는 말 안했으니 모르는게 당연하다. 델렌은 내 반응에 어째선지 신이 나서 아이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대충 쓸모있는 정보를 건지자면 영주님과 재상이 사라지고 공백이 생긴 업무를 아이던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점점 수다삼매경에 빠진 델렌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늦겠는데…. 그런 나를 구해준 건 언니 쪽인 델이었다.
“얘, 델렌. 이제 그만해. 솔라 씨가 난처해하시잖아.”
“흥,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슬슬 끝내려 했어. 아무튼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해요! 언니랑은 이런 얘기 해봤자 취향이 달라서 안 맞거든요.”
취향…? 솔직히 말해 델렌의 말의 절반도 이해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게 다였지만 델렌은 얼추 말이 통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꽃집 쌍둥이가 있는 이멘마하를 떠나 던바튼에 도착한 나는 아이라의 서점에 들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원하던 책을 살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비용을 고스란히 책 값으로 내밀어야 했지만….
[ 모이투라의 영웅, 빛의 기사 루 ]
조금 낡은 듯 먼지가 쌓인 책의 서문은 마족과의 옛 전란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도자 루 라바다에 대한 간단한 생과 모이투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에 대한 분석이 나열돼 있었다.
내가 집중한 부분은 루 라바다의 갑옷이었다. 정령의 축복으로 만들어진 빛나는 갑옷.
정령은 보통 신성하고 맑은 영혼의 존재로 알려진다. 그런 그들의 축복을 받으려면 그만한 존재여야 하겠지.
…때마침 알고 있는 정령이 있다. 내게 보답할 거라 말했던. 여전히 케오섬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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