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빛과 어둠(2)
케오섬의 지하.
아르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물의 정령다운 신비로운 외양과는 다르게 아르는 아이처럼 신나서 네일과 자신의 근황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았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말을 막지 않고 경청했다.
한참을 즐거이 떠들고 나서야 제 행동을 깨달았는지 아르가 멋쩍게 웃었다.
“어머, 들떠서 너무 말이 많았네요. 어떤 용건으로 오셨는지…?”
“혹시 루 라바다의 갑옷에 대해 들어봤나요?”
“루 라바다…. 모를 리가 없지요. 그가 가졌던 갑옷에 누구의 힘이 깃들었는 지는.”
오묘한 말이었다. 루 라바다에게 축복을 내린 정령을 모를 리가 없다는 뉘앙스니까. 하지만 아르는 금세 화제를 돌려 내 주의를 끌었다.
“팔라딘의 갑옷에는 저와 같은 정령의 힘이 필요하지만,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내려주지 않아요. 물론 솔라 씨는 제게 충분히 감사한 일을 해주셨고…, 네일이 들려준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힘을 빌려 드리겠어요.”
아르는 내게 갑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신과 인간, 그리고 정령. 그 셋의 축복이 필요한 팔라딘의 갑옷은 미스릴 광석으로 만들어진다. 미스릴은 신이 인간을 축복하며 내린 광석으로, 그것으로 인간이 갑옷을 만들면 준비는 완료된다. 그러고 나서 아르의 힘이 깃들게 하면….
설명을 끝낸 아르는 나를 반호르의 아이데른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아무리 전설적인 장비라 해도 결국 갑옷이기 때문에 대장장이를 통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아이데른은 아르의 편지를 받고 난처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미스릴 광석이 얼마나 들어갈지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갑옷이 뭐 미스릴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지 않겠어?”
“미스릴 광석이나 재료라면 필요한 만큼 조달해 드릴 수 있어요.”
“허참…. 광석이니 재료니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야. 중요한 건 도면일세. 뭐든 만들 때는 도면이 필요한 법이니까. 들은 바로는 저 바리 던전 미스릴 광산 안에 게브네가 남긴 도면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있으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구만.”
막막한 과제였다. 던전은 제물로 바치는 아이템에 따라 그 모양과 보상이 바뀌는데 그걸 하나하나 다 쥐 잡듯 뒤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곤란해 하는 나에게 아이데른이 단서를 주었다.
“저기, 길모어한테 가보는게 어떤가. 그 양반이라면 이것저것 특이한 통행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길모어는 반호르 구석에서 갖가지 도면을 파는 왜소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인상을 잔뜩 쓴 미간 덕분에 신경질이 나 보였으나 내가 구매 용건을 갖고 말하면 꼬박 대꾸해 주었다.
“미스릴 광산 통행증? 예전부터 모험가들이 광부를 데리고 줄곧 들어가는 곳이었지…. 댁도 그런 용건이라면 그다지 추천해 주진 않수. 거기서 미스릴 캘 바에 정직하게 장사 하는 게 낫지.”
투덜거리면서도 길모어는 통행증을 내게 팔았다. 나는 혹여 게브네의 도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을까 물었다.
“게브네의 도면? 뭐…, 그런 전설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 던전을 끝까지 간 사람은 없다고 보면 돼. 던전이 깊기도 하거니와 목적이 미스릴이기 때문에 다들 도중에 나왔다고 들었수.”
확실하지는 않아도 아마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점인가.
혼자서 길고 긴 던전을 공략한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빠를수록 좋고.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블래시와 엔더에게 기별을 넣었다. 답장은 금방 날아 왔다. 수락이었다.
둘을 기다리며 바리 던전에서 대기하고 있으려니, 예전에 다른 세상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도 바리 던전을 통했었는데, 지금도 바리 던전이네.
“여, 오랜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블래시와 엔더가 도착했다. 이 정도면 거의 포션만 사고 바로 온 시간인데? 나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엔더는 그래도 수업 때문에 얼굴을 보긴 했지만 블래시는 정말로 오래간 만이었다.
“너, 엔더에게 마법 배운다는 거 진짜였구나?”
블래시가 내가 옆구리에 찬 원드를 가리켰다. 이내 턱을 쓸며 하는 말은, 자기도 활을 기가 막히게 가르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때, 어때? 구미가 댕기지 않아?”
한 쪽 눈을 찡긋거린 블래시가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엔더가 스태프로 블래시를 쭉 밀어냈다.
“솔라에게 부담스러운 행동 하지 마세요, 블래시.”
밀려난 블래시는 불쾌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엔더에게 삿대질을 했다. 별안간 손가락이 코 앞에 놓인 엔더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나 없는 사이에 친해졌구나!”
“뭔 소리입니까, 정말.”
“너 평소에 남들 부를 때 꼭 샌님 같은 호칭을 쓰잖아. 근데 지금 뭐? 솔라 씨가 아니라 솔라?”
아. 블래시가 하는 말을 듣고나서야 나는 엔더가 내게 퍽 친근하게 굴었다는 걸 자각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니 엔더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귓가가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하하하! 바보같기는!”
블래시가 쾌활하게 웃었다. 그리곤 우리 두 사람의 어깨에 각각 팔을 얹고는 단상 위로 끌었다.
“자아, 통행증 꺼내고~”
“자, 잠깐만요.”
나는 급히 품에서 통행증을 꺼냈다. 여신상에 바치니 장소가 뒤바뀌면서 우리는 던전에 진입했다.
그 뒤로는 일사불란하게 던전 공략의 시간이었다. 나름 즐거웠다. 혼자 도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던전은 바리 던전 답게 지하로 꽤 깊게 이어졌지만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파했다.
중반쯤 왔을까, 바닥 난 스태미나를 회복할 겸 모닥불을 피우고 주위에 둘러 앉았다. 블래시는 정체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운 금화니 포션이니 정리하고, 나와 엔더는 요깃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식재료로 가져온 두꺼운 베이컨을 후라이팬 위에 올리고 소금 한 꼬집, 그리고 그 옆에 노른자를 푼 계란을 붓는다. 계란은 포슬포슬하게 익도록 적당히 팬 위에서 휘휘 저어주고 그릇에 빼냈다. 베이컨은 노릇노릇하게 색이 바뀔 때까지 굽기.
맛있는 냄새가 던전 안에 퍼졌다. 우리는 다 만들어진 음식을 각자의 몫만큼 그릇에 옮겨담고 먹기 시작했다.
사실 던전 공략이란 게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있으면 다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단번에 몰아쳐서 사냥만 하면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인간은 지치기 마련이거든.
그 때야, 여신을 구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이 있으니 그러진 않았지만.
식사를 어느 정도 하며 허기를 달래자, 엔더가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 게브네의 도면이란 게 왜 필요한가요?”
“미스릴 갑옷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미스릴 갑옷?”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되물어오는 두 명의 의문에 나는 천천히 답해주었다. 팔라딘의 갑옷을 만들기 위해선 미스릴 갑옷에 정령의 축복이 깃들어야 한다고. 당연지사 팔라딘의 갑옷이 필요한 이유도 물어보길래 모리안 여신의 꿈 속 부탁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진정한 팔라딘이라…. 그럴듯 하지만….”
엔더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솔라, 모리안 여신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나에게는 뜻 밖의 의견이었다. 여신을 믿지 말라니….
“찝찝한 의문이 있어요. 모리안 여신은 아직 우리에게 진정한 티르 나 노이에 대해 해명하지도 않았고.”
“그게 무슨 말이야?”
“모든 게 아직은 가정이긴 합니다만…. 모리안 여신이 글라스 기브넨으로부터 티르 나 노이를 지키기 위해 솔라를 불렀죠? 티르 나 노이…. 그러니까 우리가 갔던 그 세상 말이에요. 그런데 그곳은 이미 마족의 땅이고, 낙원이라 부를 수 없는 형태였어요. 그래요, 적어도 고통과 절망이 없는 세상 같진 않았어요.”
그 말로도 나는 엔더가 하는 말이 무슨 의도인지 충분히 알았다.
모리안 여신이 말한 티르 나 노이는 결국 어떤 세상이었던 걸까? 그녀는 그 때 엔더의 질문에 답해주지도 않았다.
“전 여신이 인간의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신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요.”
엔더의 담담한 결론을 끝으로 질긴 적막이 내려앉았다. 각자의 생각에 갇혀있는 이 시간. 하지만 나는 의외로 불안에 휩싸이진 않았다.
왜냐하면 엔더의 말을 거꾸로 하면, 모리안 여신은 인간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역사 속에서도 인간을 수호하는 여신…. 적어도 그녀가 보내는 애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신의 의지가 결국 나의 의지와도 맞닿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 또한 인간이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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