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빛과 어둠(3)
“이게 게브네의 도면이란 건가?”
던전의 마지막 방. 우리는 퀴퀴하고 낡은 상자를 열어 도면을 획득했다. 블랙 스미스 스킬이 없는 나로서는 이 도면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이걸 아이데른에게 가져다주면 되는 일이다.
바리 던전을 나온 우리는 바로 대장간을 찾아갔다. 엔더와 블래시는 이제 헤어져도 됐지만, 갑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하다며 나를 따라온 참이었다.
“음, 이건…. 내가 말한 게 맞는군!”
도면을 살피던 아이데른은 게브네의 도면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두 팔 걷어붙이고 망치를 들었다. 아이데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딸인 에일렌은 숀에게 하여금 노를 작동시키고 미스릴 광석을 녹이기 시작했다.
두 대장장이의 솜씨가 발휘되는 동안, 불티가 튀고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달구었다. 깡깡,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묘하게 리듬감 있었다.
작업이 밤까지 이어지고, 그동안 블래시와 엔더는 더 볼 만한 게 없다고 느꼈는지 내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도 계속 지켜보기 지루해 잠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반호르 주점이었다. 주점의 주인인 제니퍼와 대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초면인 사람을 상대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주점의 메뉴에는 놀랍게도 술이 없었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제니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빵과 치즈 조각을 건네주었다.
“흐흐. 선물용 와인은 있지만요. 사실 주점이라기보단 그냥저냥 한 끼 때우는 식당이라고 보면 된답니다. 술을 기대하셨다면 안타깝게 됐네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나는 치즈조각을 슬라이스해 빵 위에 얹어 먹었다. 퍽퍽한 식감이었지만 고소해서 먹을 만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데른 할아버지에겐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건가요?”
“별 건 아니고요. 갑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하. 미스릴이 들어갈 정도면 꽤 비싼 갑옷이겠네. 아,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에일렌이 열심히 미스릴 광석을 녹이고 있던 걸 봐서 말이에요.”
“뭐…, 그렇죠.”
나는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르바이트생 리카드가 대신 변호해주었다.
“제니퍼 누님이 돈 냄새에 민감하셔서 그래요.”
“어머, 우리 리카드. 그런 건 조용히 말해야지~”
“윽!”
제니퍼가 리카드의 팔을 꼬집었다. 저런, 많이 아파 보이는 걸….
우리가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 사제 한 명이 다가왔다. 라이미라크 교의 증표를 목에 걸고 있으니 정식 사제긴 할 텐데, 아무리 봐도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라 의아해졌다.
“컴건. 무슨 일이니?”
“…제니퍼 씨, 혹시 요즘 바리 던전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없나요?”
컴건이라 불린 어린 사제가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상한 소리? 흠…, 나는 던전에 들어간 지가 꽤 되어서 말이지.”
“혹시 광부들이 광석 캐는 소리 아냐?”
리카드가 대수롭지 않게 되묻자 컴건이 곤란한 낯을 했다.
“음….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아, 그리고 이분이 솔라 씨가 맞나요?”
컴건이 고개를 돌려 푸른 눈을 내게 마주쳐왔다. 마주 보니 깨달은 건데 아이답지 않게 굉장히 정갈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살며시 입가에 매단 온화한 미소 때문일까.
내가 긍정하자 컴건은 아이데른의 호출을 전해주었다. 드디어 완성된 건가. 나는 세 사람에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제니퍼가 다음에 또 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손을 흔들어 응수해주었다.
“자, 완성이라네.”
아이데른이 만든 미스릴 갑옷은 갑옷 답지 않게 미려했다. 은백색의 광택이 나는 갑옷 부품은 무장했을 때 움직이기 편하도록 연결고리가 유연해 보였다. 그 점 외에도 이것저것 신경 쓴 게 티가 나는 물건이다.
나는 힘 써 준 아이데른에게 사례비를 건네고 케오섬으로 갔다. 아르는 내게서 갑옷을 받고 축복을 내렸다. 정령의 축복은 빛처럼 갑옷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원래도 밝은색인 갑옷이 지하에서 축복의 힘을 머금자 은은하게 발광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갑옷을 입을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이 진정한 팔라딘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갑옷을 착용할 수 있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정령들에게도 인정받아야겠지요.”
아르가 내 머리를 살짝 쓸어내렸다. 샘물처럼 차가운 손이었지만 친애가 담긴 손짓이라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솔라 씨라면 아무 어려움 없을 거예요.”
그녀의 투명한 눈망울이 살짝 휘어졌다. 표정 변화가 옅어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미소를 지은 모양이다.
나는 아르가 일러준 대로 다른 정령들의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에 돌입했다.
키아 던전에 갑옷을 던져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는데, 의식이 점멸되면서 깨어나니 난데없이 흰 늑대가 된 상태라 깜짝 놀랐다. 그런 내 귓가에 정령이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된 상태로 던전을 돌파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험이 내는 의도라 생각하며 진의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거의 늑대의 모습과 동화되었다고 느낄 즘에는 나와 같은 늑대의 모습을 한 정령과 지혜와 힘의 자웅을 겨루었다. 같은 모습이라고는 해도 거의 내 두 배쯤 되는 덩치라 공격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그렇게 물고 뜯기는 사투 끝에, 마침내 그를 쓰러뜨리고 인정받았다. 쓰러진 늑대의 모습이 거짓이었던 양 사라지고, 실체를 분간하기 힘든 환상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던전 초입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 모리안의 예언 속 기사가 바로 너란 말인가…. 그렇다면 난 네게 복종하겠다. 본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몸이니, 필요할 때가 되면 나를 불러라. 그럼 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네게 힘을 빌려주겠다. ]
나의 정의?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은 ‘내 정의란 게 무엇일까’, 라는 초라한 고민이었다.
이윽고 나는 키아 던전 여신상 앞에서 눈을 떴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각을 확인했다.
이걸로 된 걸까.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사라진 갑옷을 착용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령들에게 인정받았음에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진정한 팔라딘이라 부를 수가 없다. 그가 말한 정의조차 분간하지 못하는데….
“정의라.”
입으로 내뱉어 본 단어가 어색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보통 올바른 도리라고들 뜻하는 이 개념은 인간 중 그 누구도 어떤 것이 정의(正義)인지 정의(定義)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개개인의 정의는 상충할 때도 있다.
내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내면 빛의 기사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나는 성급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의는 결국 가치관이다. 무엇을 옳다고 여기는지.
옳다고 생각하는 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있다. 내가 아는 한, 행복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고통과 상실로 괴로워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러나 이건 누구도 마땅히 생각할 수 있는 시원찮은 박애주의다. 남이 볼 때 진심으로 납득할 만한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루에리도 한 때 이런 고민을 했을까.
마음이 복잡해지자 쓰디쓴 기억이 머리 한구석에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왔다.
루에리는 모르간트의 힘을 준다는 말에 넘어갔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으로 원한 것이나 결국 타인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 힘은 파괴적이다.
그럼 루에리가 추구하는 힘은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나?
[ 루에리, 이래도 너에게 세상을 벌할 힘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가? 소중한 걸 잃게 한 인간들의 잘못된 진리와 신념을 바로잡고 싶지 않은가? ]
[ …아냐, 네가 말하는 힘은 올바르지 않아. ]
[ 세상에 올바르지 않은 힘 따윈 없다. 각자의 신념이 있고 정의가 있다. 그걸 끝까지 관철하는 자야말로 올바른 힘을 가진 사람이다. ]
모르간트가 말했던 정의관은 사람을 선동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기에 그런 힘을 가진 거겠지. 적도 설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정말이지 견고했다.
나 또한 그가 옳을지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으니….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왜 남의 말, 그것도 세상을 파괴시키려하는 자의 뜻에 동조하고 있는 거지.
지금은 ‘내’ 정의를 찾아야 할 때다. 길을 헤매지 않고,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려면 나만의 나침반을 찾아야 해.
그래, 잊지 말자. 내 정의를 완성하는 건 결국 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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