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리나

글리나 서사

보몽님 커미션

그저 스쳐지나가는 일상 중 하나로 넘길만큼 단순한 첫만남 이후, 이글은 번화가에서 만났던 이름모를 아가씨를 떠올렸음. 첫눈에 반했다던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는 그런 진부한 감정으로 그녀를 떠올린 건 아니었음. 그녀를 만난 직후, 평소보다 몸이 묘하게 가벼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음. 단순한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있었지만, 자신 뿐만 아니라 그날 그 아가씨 곁에 다가가 그녀와 접촉까지 했던 엘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림을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음. 동화책과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상상하는 엘리의 능력은 위험하긴해도, 연합의 다른 능력자들- 특히나 엘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나이오비가 어느정도 지켜보고 제어할 수 있는 범주였음. 

하지만 번화가에서 그 아가씨를 만나 접촉까지 한 엘리노어는 자신이 경험하지도 못했던, 그냥 얼핏 듣기만 했던 것들을 만들어내 연합사람 여럿을 골치아프게 했음. 달나라에 사는 토끼 수백마리나(일반적인 토끼나 다름없지만 모두 샛노란 빛을 내고 있어 연합에 조명이 필요 없을 지경이었음.), 자아를 가진 장난감 병정들이 연합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음. 토끼들은 토마스와 티모시가 엘리를 설득해서 빛이 나지 않는 '평범한' 토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그 토끼들을 동물원에 보낸 걸로 일단락 됐고 반란을 일으킨 장난감 병정들은 시간이 흐르자 태엽이 풀리며 알아서 작동을 멈췄음. 

우당탕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지하연합에서 일어난 평범한 해프닝이라 치부할 수 있었지만 연합의 참모인 토니는 엘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동화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직접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들을 하루아침만에 구체화시켜 능력으로 실체화에 성공한 것에 대해 굉장히 많은 걱정을 했음. 엘리의 능력이 그녀의 미성숙한 사고를 뛰어넘게 된 것은 아닐까하고. 반란을 일으킨 병정들을 박스에 넣는 걸 한가롭게 구경만하던 이글은 문득, 제 몸에 일어난 신체적인 변화와 엘리의 강화된 능력, 그리고 그날 만난 그 아가씨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음. 

문제는 언뜻 본 그녀가 어디사는 누구인지, 또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모른다는 게 흠이었음. 찾으라면야 금방 찾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음. 만나는 거. 가문의 힘을 빌리면 되는 일이지만, 말 잘듣는 대~견한 도련님 따위 하기 싫다고 뛰쳐나온 자신이 홀든이라는 이름을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이 없었음. 오히려 이 일을 빌미로 큰형인 다이무스를 비롯한 가문 사람들이 또 귀찮게 편지와 사람을 보내오는 빌미를 줄까 걱정했음. 

그렇다고 그 아가씨를 모른척 넘어갈 수는 없었음. 잠깐 가까이에 있었던 자신의 신체 능력도 향상시키고, 짧게 접촉한 엘리노어의 능력도 일시적으로 대폭 강화했던 그녀의 힘을 본 이상 연합으로 데려오는 게 맞았음. 제 예상이 맞다면, 그녀는 걸어다니는 안개와 다름이 없었으니까. 회사나 다른 조직- 특히나 안타리우스에 뺏기면 낭패였음. 이글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발끝을 까딱였음.

"이글형, 보지만 말고 도와달라고요~!"

장난감 병정을 박스에 집어넣던 토마스가 소파에 빈둥대는 이글을 향해 핀잔을 주었음. 착실하게 정리중인 티모시와 토마스를 구경하고 있던 이글은 불현듯 떠오른 기가 막힌 상상에 큭큭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음.

"아ㅎ 미안! 나 갑자기 할일 생겼다!"

"또 무슨 일이요? 농땡이 치려고 내빼시는 거 다 안다구요!!"

"아냐아냐, 청혼서 좀 쓰러 가게."

"네? 청..뭐요? 이력서가 아니라 무슨서요?!"

호들갑을 떠는 토마스와 깜짝 놀라 장난감이 든 박스를 툭 떨군 티모시를 뒤로 한 채, 이글은 자리를 벗어났음. 연합을 막 떠나려던 그때, 요 며칠 소동의 주범인 엘리가 얼굴에 샛노란 크레파스 얼룩을 묻힌 채 다가왔음.

"아찌, 어디가?"

"엉, 나 말야? 내가 어디 가냐면... 음...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공주님 구하러?"

"우와~ 아찌, 나도 갈래!"

"넌 안 돼- 이제 곧 잉게가 네 숙제 검사할 시간이잖아. 어딜 내빼려고?"

이글은 장난스럽게 엘리의 콧잔등을 톡 건드리며 웃었음. 오래 걸리진 않을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완전히 밖으로 나섰음. 

한편, 카롤리나는 자신의 방안에 갇힌 채 며칠 전 외출에 대한 반성문을 수기로 작성하고 있었음. 경호인력을 데리고 나간 외출이라 문제될 게 없다 생각했으나, 사람이 많은 번화가 상가지역을 갔다는 점. 그리고 그곳에서 함부로 다른 사람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작성하게 만들었음. 비상식적이고 강압적인 처벌에 대해 무뎌진 리나는 멍한 표정으로 기계처럼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얀 종이에 써내려갔음. 가문의 어른들, 특히나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모질게 구는 이유를 알고 싶었던 적도 있기야 했음. 왜 나에게만 엄격한 것인지, 왜 나를 억압하고 가둬두려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으나 이젠 그런 궁금증조차 들지 않았음.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부질없었음. 물어보고, 답을 요구해도 돌아오는 것은 '얌전히 있어라'라는 말뿐이었음. 

하얀 백지가 반듯한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지자, 할일을 마친 카롤리나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리나는 투명한 유리 문을 활짝 열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음. 봄이 오긴 아직 이른 것인지, 서늘한 밤바람이 제 뺨을 시리게 만들었으나 제게 허락된 유일한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리나는 가만히 테라스에 앉아있었음. 그녀는 자신이 반성문을 쓰게 된 계기였던 그날의 외출을 떠올렸음. 금발머리의 작은 꼬마아가씨와, 그의 옆에 있던 장발의 남성. 리나는 문득 제게 즐기면서 살고 싶지 않냐는 남자의 말을 떠올렸음. 

"꽁꽁 싸매려는 것치곤 상당히 허술한 경빈데?"

멍하니 제 발끝을 응시하던 카롤리나는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음. 어떻게 온 것인지, 테라스 가까이에 높게 솟아난 나무를 타고 올라온 한 사내가 태연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음. 얼마전 번화가에서 만난 사내임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음. 놀란 리나는 입술을 벙긋대며 그를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음.

"어..어떻게, 대체 왜..."

" 아가씨 입에서 나올법한 질문이 꽤 많아서 헷갈리는데.. 하나씩 답해줄게. 일단 내가 온 이유부터 설명해야겠지? 그날 상가 앞에서 만난 꼬맹이랑 내가 공교롭게도 능력자인데- 아가씨와 접촉한 이후로 꼬맹이도 나도 약간의 변화가 생겨서 말야. 뭐, 걱정할 정도의 큰 문제는 아니니까 이건 신경쓰지 말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설명을 하는 사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리나는 눈만 깜빡였음.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리나와 눈이 마주친 이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덧붙여 말했음.

"번화가에서 만난 그날 네 손에 끼워진 반지의 문양을 보고 어느 가문의 아가씨인지 찾아냈어, 사람을 시켜서 찾으니까 어렵진 않더라고.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냐 묻는다면- 으리으리한 규모인 것치곤 경비 보는 인원이 꽤 적고, 다들 능력자가 아니라서 뭐 쉽게 들어왔지."

"설명은 감사하지만...그게,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당신과 그날 만난 어린소녀가 능력자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랑 접촉한 이후로 뭔가 달라졌다뇨. 그것부터가 말이 안 돼요. 전 아무런 힘도 없는 비능력자인걸요."

"...아, 이거 견적이 나오는데? 왜 이 가문이 아가씨 한 사람을 그렇게나 숨기려 들었는지."

그녀의 말에 계산이 끝난 이글은 헛웃음을 흘렸음. 하르테스 가문의 사람들은 사이퍼의 능력은 물론이고 육체적인 부분도 강화시켜주는 딸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임. 능력자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이 상황에, 전쟁의 원인이 된 '안개'와 동일한 효과를 가진 딸이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 생길 문제들을 걱정했을 것이고, 가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숨기고 통제해야한다 판단했을 것임. 빠르게 상황파악을 마친 이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리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장난스럽게 말했음.

"아, 뭐 이런저런 것들은 나중에 말해줄게. 그건 그렇고 내가 저번에 던전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해봤어?"

"네? 무슨..."

"즐기며 살고 싶지 않냐는 질문 말야. 거의 닷새나 지났는데, 답을 떠올릴 시간은 충분히 되지 않았나?"

카롤리나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음.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이름도 모를 정체불명의 남성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얘길 늘어놓으며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상황이 너무 버거웠음.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그를 두고 테라스에서 벗어날지, 경호원을 부를지 잠시나마 고민하던 카롤리나는 입술을 벙긋대다 작게 답했음.

"...애초에 즐겁다는 감정조차 무엇이었는지 기억 안 나요. 그런 제가 어떻게 즐기면서 살아요?"

다소 비관적인 그녀의 대답에 이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고개를 기울였음. 빡빡한 가문에서 도망쳐 흘러가는대로 즐기며 살아온 자신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음. 이글은 저와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씨익 웃고 답했음.

"그럼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잖아? 즐기면서 사는 게 뭔지."

"그걸.. 어떻게..."

"내가 알려줘?"

능청맞게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나는 입술을 달싹였음. 가느다란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한참동안 망설이던 리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음. 그녀의 답을 들은 이글은 활짝 웃으며 리나에게 손을 뻗다가,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뻗었던 손을 거두고 급하게 말했음 

"아~ 잠깐잠깐- 그 전에, 이것부터 꺼내야겠다."

이글은 안주머니에 챙겨온 봉투 하나를 꺼냈음. 홀든가의 인장이 떡하니 박혀있는 고급진 편지봉투였음. 그걸 리나에게 건네주고는 이글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가볍게 말했음.

"청혼서야."

"청...뭐라고요?!"

"내가 아무리 막나간다 해도 아닌밤중에 귀한집 아가씨 이유 없이 납치할 순 없으니까."

나름 이글이 세운 대책이었음. 적당히 그럴듯한 이유로 가문의 힘을 이용해먹으면서, 뒤탈없이 하르테스 가문의 딸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 물론 다이무스를 비롯한 홀든가 어른들이 뒤집어질 게 분명했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여자도 아니고 명망있는 가문의 딸과 약혼부터 올리겠다 선포하면 덜 귀찮아지지 않을까 싶었음. 물론 이 계획도 말도 안되는 짓이긴 했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 리나를 데리고 나오는 것보단 뒤탈이 없을거라 판단했던 것임. (리나가 이글의 의도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음.)

"저기- 책상 위에 있는 종이 위에 두면 잘 보이겠네. 그 편지 하나면 아가씨 부모님도 다 납득할 거야."

"자, 잠시만요 아무리 그래도-"

"아~ 난 시간끌면서 애매하게 구는 건 딱 질색이거든? 생각은 이걸 받은 다음에 해."

이글은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재촉하며 제 손에 들린 청혼서를 흔들어보았음. 흔들리는 봉투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롤리나는 용기내어 그가 건넨 청혼서를 받아들고는 책상위에 놓인 반성문 위로 홀든가의 인장이 박힌 청혼서를 올려둔 채 테라스로 달려나왔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글은 씨익 웃고 말했음.

"좋아. 아가씨, 이 지겨운 집구석에서 떠나기 전에 '약혼자'끼리 통성명이나 할까? 난 이글. 뭐- 뒤에 붙을 이름은 편지 봉투에 써있었으니까 넘어갈게."

"저는.. 카롤리나예요. 리나, 그냥 리나로 불러줘요."

이글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음. 

"그래, 리나. 이제 새장밖으로 나갈 시간이야. 네가 뭘 상상하든, 그보다 훨씬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해."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