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의 레인보우 브릿지

뱅드림 유키나 x 리사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저울의 균형을 수평이 되도록 계속해서 조정하는 일과 비슷하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되 역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그 강도를 조절하고, 양쪽의 균형이 맞춰진다면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지 쭉 지켜봐야만 하겠지. 과하지 않게, 덜하지도 않게 오는 만큼 다시 돌려주며. 정말로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조금도 쉽지 않은, 그런 일인 거다.

“......”

상념에 잠긴 채로 미나토 유키나는 켜지 않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자그마한 크기인 단말기는 전원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당히 장난감 구실을 하였다. 손가락 끝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은 액정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다가, 아가씨는 아까 전부터 의식을 채우고 있던 문제를 다시금 곱씹었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

그건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거실의 TV에는 자신의 삶보다 타인의 삶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중년층을 대상으로 한, 그들의 관음적 욕망을 채워주기에 알맞을 시시한 토크쇼가 방송되고 있었다. 사회 각층 유명인사들의 결혼 생활을 캐내고는 그걸 예시로 삼으며 좋은 부부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는, 그야말로 적당한 구실로 포장된 저급 포르노라고 할만한 프로그램이었다. 채널을 맞춘 건 아마도 어머니. 늦게 귀가한 딸에게 식사를 차려준 다음, 거실의 소파에 앉아 심심풀이로 TV를 켰던 거겠지.

하나같이 멍청한 소리들 뿐이었다. 어느 유명한 영화배우의 결혼 관계가 이혼이란 형태로 끝이 났다든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운동선수가 연애 한 달만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하였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미나토 유키나에게 있어 부스러기만큼의 관심도 줄 가치가 없는 말들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따위 아가씨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 앞에 놓인 중대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인간일수록 주변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법이니. 예시로 내걸린 유명인사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패널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흡사 날벌레가 날갯짓을 할 때의 소음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유키나가 떠올렸을 때였다.

사람 간의 관계가 건전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균형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비단 결혼한 사이에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지요. 그와 같은 말을 꺼낸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직했다. 결코 크게 소리를 낸 게 아니었음에도 어조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화면에 잡힌 발언자는 백발의 노교수였다. 분야의 전문가로 초청받은 사람이겠지. 맞지 않는 주파수에서 터져나오는 잡음처럼 요란하기만 하던 좌중이 조용해지고, 이야기를 꺼내기 한결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노교수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양자가 균등하다는 건 안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지속은 안정감의 여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방호혜적인 관계는 일시적으로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외부에서 강제력이 작용하지 않는 한 천칭이 기울어진 상태로 고정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게 정해진 이치인 셈이다. 다른 출연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말을 이어나가다가, 노교수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면 바깥의 시청자들과 시선을 맞추는 듯 잠시 말없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짧게 말을 덧붙였다.

혹여 자신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받은 기억만 떠오른다면, 관계의 적신호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호의를 착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착취.”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춘다. 작게 중얼거린 단어의 어감이 불쾌하리만큼 좋지 않았다. 기울어진 천칭, 균형, 안정감, 강제력, 파국. 연달아 떠오르는 단어들을 소리내지 않고 중얼거리고는 유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 없음에도, 나이든 교수가 마지막으로 꺼냈던 말이 식탁에 앉아있던 자신을 겨냥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두고 유키나는 손을 들어올려 눈가를 덮었다. 한숨을 길게 쏟아내어도 가슴에 차오른 답답한 감각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못할 감상에 빠져들고 있는 거야. 어쩌지 못할 기분에 짓눌리지 말고 차라리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는 편이 나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가씨는 그대로 멈춰있기만 하였다. 차갑고 어두운 푸른빛 감정 속으로 잠겨들며 의식은 둔해지고 무뎌져서, 제대로 된 행동을 끌어낼 수 없었다.

[우우웅]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진동음을 만들어낸다.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던 아가씨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단말기를 집어들지 않고 유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연락을 보낸 상대가 누구일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협소한 관계만을 가지며 사는 자신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타인과의 교류란 한정된 범주 내에서 예측 가능하게 이루어지니까.

<야호! 유키나, 아직 깨어있어? 잠시 나올 수 있으려나?>

익숙한 어조로 쓰여진 문장이었다. 글자를 읽기만 하여도 유키나는 그를 그대로 따라서 읽는 목소리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역시 리사인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아가씨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와 다를 게 없는 호출이었다. 그닥 중요할 거도 없는 시시콜콜한 용무로 불러내어선, 마지막까지 그리 무게감 없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미나토 유키나와 이마이 리사, 어렸을 적부터 이웃으로 지내는 소꿉친구 두 사람에게 있어 그는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사였다.

단말기를 내려놓고 유키나는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로 통하는 미닫이문의 창문 너머로 옆집 2층의 베란다가 눈에 들어왔다. 연락을 보내자마자 바깥으로 나온 건지, 이마이 리사는 벌써 베란다에 서서 소꿉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 높이의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친구의 방을 훔쳐보려는 것마냥 상체를 이리저리 기울여댄다. 장난기 섞인 그 행동을 제지하려고 유키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키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리사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무슨 일이야?”

미닫이문을 열고서 베란다로 나서며 유키나는 사뭇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상대가 그리 대단한 용무가 있어서 자신을 불러낸 게 아니란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입을 열면 그처럼 따져묻는 말이 튀어나오게 되어버린다. 만약 그녀를 불러낸 게 그리 친분이 있지 않은 제 3자였다면, 낮은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을 듣자마자 기가 죽어버렸으리라. 미나토 유키나는 대하기 무서운 사람이다, 하고 혼자 멋대로 생각을 하면서.

“지금쯤 유키나가 뭘하고 있으려나, 궁금해져서. 자기 전에 잊지 않고 양치질 했으려나 확인도 할 겸.”

“......할 거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유키나, 목 관리를 하려고 가글은 철저히 하지만 그래놓고는 가끔 깜박 양치질 하는 건 잊어버리곤 하니까 말이지.”

“예전 이야기야. 요즘은 그런 적 없어.”

“아핫, 그랬나?”

아이 취급에 심기가 상한 유키나가 한층 쌀쌀맞은 어투로 대꾸하자 리사는 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보이는 차가운 태도에 어색해하거나 마음 상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마이 리사는 늘 그랬다. 언젠가부터 딱딱하고 고지식한 태도를 고수하기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게 된 소꿉친구를, 리사는 언제나 부드럽게 받아들여주고 맞춰주곤 하였다. 그건 말하자면 무조건적인 포용이었다. 말투나 행동을 고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한 차례도 하지 않고, 리사는 바뀐 그대로의 친구를 여태까지 품어왔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의 관계가 이와 같았다는 것마냥.

여름을 앞둔 시기의 밤은 어둡다기보다는 오히려 밝았다. 소녀들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실내등의 인공적인 백색광과 하늘 높게 떠 있는 상현달이 흘리는 은색 광채가 하나로 뒤섞여 베란다를 밝히고 있었다. 유키나는 맞은편 베란다에 있는 리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염색한 게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곤 하는 연갈색 머리카락에 달빛이 묻어 반짝였다. 염색 약품으로는 낼 수 없을 포근한 느낌의 색채가 옅은 어둠 속에서 한결 고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뒤로 묶어올린 머리는 풀지 않은 상태였다. 좋아하는 토끼귀 모양 귀걸이도 연갈색 머리카락 아래 하얀 귓불에 달려있는 게 보였다.

“유키나? 갑자기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뭔가 하고 있던 중이었어?”

“응?”

“잠들 준비를 여태 하지 않은 걸로 보여서.”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리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를 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이제서야 깨달은 모양인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그 자리에서 머리를 풀어내리는 리사를 지켜보며 유키나는 친구가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지를 짐작해보았다. 베이스 연주를 연습하고 있었던 걸까. 밴드 활동에 있어 자신이 발목을 잡아선 안될 거라고 계속해서 걱정하고 있기도 했고. 원래는 패션 잡지를 읽거나 손톱에 여러 문양을 칠하길 좋아하던 리사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런 계통의 취미들은 모두 끊어버린 듯 하였다. 밴드 활동에 집중하기에 방해가 되니까, 란 이유로. 모처럼 유키나와 함께 밴드 활동을 하고 있잖아. 그 정도는 당연하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던가.

기울어진 천칭. 호의의 착취.

“예리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유키나를 부른 진짜 이유가 있었거든.”

“진짜 이유?”

“오늘 귀가하니까 부엌에 식재료가 새로 잔뜩 들어찼더라구. 그걸 보니까 조금 피가 끓어오르게 되어서 말이지, 여태 쿠키 만들었거든. 한껏 만들어서 유키나에게 주려고 불렀지.”

여기 받아. 그렇게 말하며 리사는 보이지 않게 난간 뒤에 내려두었던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를 유키나에게로 내민다. 베란다 간의 간격은 가까웠기에 손을 내밀면 충분히 상대에게 닿을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심심하면 난간을 넘어 상대의 방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만큼, 아래로 떨어질 염려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전한 루트니까. 투명한 포장지에 예쁘게 담긴 쿠키들을 바라보다가 유키나는 조심스레 그를 받아들었다.

“......매번 고마워. 신경 써줘서.”

“아냐아냐, 나야말로 만들 때마다 유키나가 맛있게 먹어줘서 기쁜걸. 이렇게 만들어보면 유키나가 기뻐해주려나, 생각하면서 과자를 만들면 작업이 훨씬 더 즐거워지거든.”

“난, 항상 받기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니까. 그거잖아, 그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유키나가 좋아해주면 난 그걸로 행복해.”

“......”

포장지의 윗부분은 붉은 리본으로 매듭지어져 있었다. 안으로는 고양이 얼굴 모양을 한 쿠키들이 귀여운 모양새로 한줌 가득 들어찬 게 보였다. 한입에 넣으면 알맞을 작은 쿠키 위로 검은 초코칩으로 눈의 형태를 잡고, 가느다란 초코 실선으로 콧수염을 그려넣은 점이 특히 도드라졌다. 단순히 심심풀이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구석구석 정성을 쏟았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키나가 좋아해주면 난 그걸로 행복해. 헤헤 웃으면서 리사가 꺼낸 말에 대해 생각하다가 유키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난, 네게......”

“응?”

“......아무 것도 아냐. 지금 먹어봐도 괜찮을까?”

“아하핫, 아직 양치질 하지 않았지? 늦었으니 너무 많이 먹으면 안돼?”

“알아.”

리본을 잡아당겨 포장을 풀고서 유키나는 쿠키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를 입가에 가지고 간 채로, 바로 삼키지 않고 흘끔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거의 이쪽 베란다로 넘어올 기세로 상체를 기울인 상태로, 눈을 반짝이며 리사는 유키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만든 쿠키를 소꿉친구가 맛있게 먹어주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그녀에게 있어 둘도 없는 즐거움일 터였다. 유키나는 리사의 그와 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상냥함에 자신이 보답할 방법은 고작 건네받은 쿠키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정도 뿐이다. 보은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수준의 은혜갚음. 자신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할 뿐인데도, 상대가 그를 당연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이상 제대로 된 보답을 하지도 않고 넘어가게 되어버린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기울어진 천칭, 호의의 착취. 그렇게 굳어져버린 관계.

입술을 열어 쿠키를 안에 넣고는 오도독, 그를 씹어먹는다. 식감이 건조해지지 않게 안쪽에 시럽을 살짝 첨가해둔 건지 부스러지는 파편들 사이로 촉촉함이 흘러넘친다. 표면에 묻힌 초콜렛은 지나치게 달지 않고 적당해서, 오히려 그 덕분에 한층 뚜렷한 달콤함을 안겨주었다. 초콜렛의 달콤함이 목 너머로 넘어간 다음에는 타액으로 뒤섞인 쿠키 자체에서 만족스런 단맛이 났다. 쓴맛을 싫어하는 유키나의 입맛에 딱 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적당한 수준의 달콤함이 감도는, 그야말로 맞춤으로 만들어진 과자. 언제나 그랬다. 이마이 리사는 미나토 유키나의 입에 항상 달콤함만을 채워주었다. 소녀가 소녀에게 쓰디쓴 감각을 전해준 적은, 소녀의 기억 속에서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맛있어? 입에 맞으려나?”

“......응, 맛있어. 리사가 만드는 쿠키는 언제나 맛있어.”

“꺄아, 유키나- 귀여운 말을 해주네! 리사, 완전 감동- 헤헤, 다음에도 또 만들어줄게.”

“......부탁할게.”

다음 번에도 리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레시피의 쿠키를 만들어서 선물해주리라. 그를 확신하면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스스로가, 유키나는 견딜 수 없었다. 건네받는 호의에 제대로 보답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상대가 계속해서 자신을 아껴주기를 원하기만 한다. 질 나쁜 응석쟁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알지 못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마음만큼은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하는 못되고 심술궂은 꼬마.

“부탁할게, 리사.”

언젠가 일방적으로 상냥함을 전해주는 일에 지친 리사가 떠나게 된다면, 홀로 남겨진 자신은 어떻게 될까. 기울어진 천칭은 결국은 옆으로 쓰러지게 될 터이다. 저울에 올려져 있던 둘의 마음을 모두 망가뜨리면서. 자신 때문에 리사가 슬퍼하는 모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 날 떠나지 말아줘, 리사.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키나는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리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따라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유키나는 생각하였다.

아아, 역시 미나토 유키나는......이기적인 인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마이 리사는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다른 이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소녀의 성품은 그 나이대의 꼬마들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었다. 그런 이유로 속상해하고 있었구나. 확실히 그럼 누구라도 속상하겠지. 그럼 어떻게하면 좋을지 같이 고민해볼까? 그렇게 말해주며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어보이는 그녀를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또래이면서도 연상인 언니나 누나처럼 상냥하게 대해주는 리사는 어느 집단에서나 환영받았다.

상냥함이란 형체없는 개념이지만, 물질과 다르지 않은 속성을 지닌다. 상냥함이란 곧 배려라고 할 수 있고, 배려는 신경 써주는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다. 한 사람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는 마음을 써줄 수가 없게 된다. 누군가의 상냥함을 함께 누리는 존재가 많아질수록, 그 상냥함의 색채는 변함없더라도 농도는 점차 옅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리사, 시내에 새로 생긴 악세사리 가게, 시간 되면 같이 살펴보러 가지 않을래? 응, 용돈 받으면!”

“저기, 그게 이마이......괜찮다면 다음 주 내 생일 때 축하 파티 와줄 수 있어? 여자애는 초대 안하려고 했는데, 너한텐 도움 받은 거도 있고......무, 물론 다른 여자애들도 오고 싶다면 와도 된다고 할 거야.”

미나토 유키나는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좋아하는 아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자신을 돌아봐줄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서 둘도 없이 소중한 소꿉친구의 상냥함이 자신 외의 누군가에게 나누어질 때마다, 소녀 자신의 세계는 그만큼 좁아지고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그게 너무나 싫었다. 상냥한 그녀가 자신만의 친구이길 원했다. 다른 아이들과 따로 약속을 잡거나, 한참 수다를 떨거나, 괜한 우정을 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어버렸다.

유키나가 다른 아이들보다 리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그녀들이 이웃한 집에 사는 소꿉친구 사이라는, 그리하여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지내왔다는 점 하나였다. 서로의 방도 베란다를 통해 맞닿아 있는 덕에 심심하면 상대를 불러내어 온갖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아이 입장에서는 두근거리는 자신들만의 비밀도 있었다. 기쁜 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거나, 무엇이든 간에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라는 무게감은 둘의 우정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었다.

“......”

그렇기에 용납할 수가 없었다. 리사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다른 녀석들의 우정은 허울 좋은 가짜로 보였다. 리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쑥스럽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행복하게 웃곤 하던 유키나였지만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에는 저도 모르게 냉담한 얼굴이 되어버리고는 했다. 리사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는 간혹 유키나와도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아이들이 있었으나, 싸늘하게 쏘아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제풀에 겁을 먹고 물러서고는 하였다.

유키나도 모두와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건데. 리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유키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급우들과 친하게 지내야한다는 점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는 편이 좋다는 부분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은 건 소꿉친구 한 사람과의 관계였다. 리사의 애정을 독차지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좋은 걸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저기, 리사.”

“응?”

“리사는 날 좋아하지? 제일 친한 친구지?”

아이답게 순수한 면이 많았던 그 시절 유키나는 그렇게 묻기도 하였다. 손을 마주 꾸욱 붙들고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맞춰오는 유키나를 앞에 두고 리사는 잠시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기만 하였다. 유키나. 작게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머뭇거리다가 리사는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톰하게 예쁘던 입술이 만들어내는 곡선은 참으로 아름다워서......

“당연하지. 유키나는 리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야.”

“......그래.”

소녀는 소녀에게 언제나 확신을 안겨주었다. 애정을 확인해주는 말보다 달콤한 속삭임은 없었다. 어렸던 꼬마 아가씨는 생각하였다. 좋아하는 아이의 마음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과 다른 누군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다면 리사는 틀림없이 자신을 선택해줄 거니까. 그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반복된다면, 리사의 곁에는 오롯하게 자신만이 남을 터였다.

“리사, 저번에 말했던 가게 오늘 가자! 시간 괜찮아?”

“엇, 마침 한가하려나. 지갑은 조금 위태위태해서 아이쇼핑이 되어버리겠지만-”

“괜찮아. 맘에 드는 게 있음 우리가 하나 사줄 수도 있고?”

“엣, 그건 미안한데.”

“친구잖아, 친구.”

유독 리사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그녀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공부를 집중해서 하거나 별도의 활동에 매진하기보다는 모여서 재밌는 장소를 찾아다니고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어느 학교의 어느 학급마다 있을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리사도 비슷하게 눈높이를 맞춰 장식품이나 매니큐어, 붙이는 속눈썹 같은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곤 하였다. 아니면 요즘 인기 많은 TV 프로그램에 대해 떠들거나, 시설 좋은 가라오케나 유명한 음식점에 대해서. 그런 하등의 쓸모도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유키나, 같이 가줄 거지?”

자신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 사이로 고개를 쭉 빼내어서, 리사는 혼자 앉아있던 유키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같이 가줄 거지? 조심스레 부탁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유키나는 한 차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수업을 마친 뒤의 교실에서, 타인의 무리가 리사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유키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하였다. ‘그들’이 있는 곳에 서서 리사는 유키나가 그쪽과 함께하기를 권하고 있었다. 싫었다. 불쾌함에 명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면서도 막연하게 싫기만 하였다. 리사가 있어야 할 장소는 그들 곁이 아닌, 유키나 자신의 곁이었기에.

“생각 없어. 먼저 돌아갈게.”

“잠깐, 유키나?”

가방을 챙겨들고 망설임 하나 없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신을 부르는 리사를 무시하고서 유키나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신고 있는 구두의 굽이 바닥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친한 친구끼리 짝을 지어 돌아가고 있는 아이들로 요란스러운 방과 후의 복도를, 소녀는 혼자서 걸어나갔다.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앞을 바라보기만 하고서. 걸음의 속도는 일정하였고,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느릿하게까지 느껴졌다.

“유키나앗!”

“......”

“같이 가! 혼자 가지 말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이 팔을 붙든다. 살짝 잡아당겨지는 감각에 몸을 휘청거리며 유키나는 멈춰섰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리사를 돌아보고는 유키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새로 생긴 가게에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의아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유키나는 자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에 같이 가기로 미뤘어. 정말, 유키나도 참.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혼자 가버리구.”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아. 오늘 아저씨랑 아줌마 늦게 오시는 날이었지? 저녁까지 집에서 유키나랑 같이 있어야 하니깐.”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이마이 리사는 당연히, 미나토 유키나를 선택할 거니까. 어쩌다가 같은 학급에서 지내게 되었을 뿐인, 급우라는 명칭으로 묶인 아이들 대신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소꿉친구인 미나토 유키나를 선택할 거니까. 이건 전부, 리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야. 리사도 날 좋아하니까 나쁠 건 없는걸. 소꿉친구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며 어렸던 유키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었다.

기울어진 천칭, 호의의 착취.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겁함.

“......”

고양이 얼굴을 본딴 쿠키를 요모조모 살피다가 유키나는 그를 입에 넣었다. 오도독, 씹히는 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지난 밤 먹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쿠키는 달콤하고, 맛있었다. 열린 틈새에서 쿠키를 하나 더 꺼내들고는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는 봉투를 말아서 가방 안에 밀어넣는다. 하네오카 여학원 본관 정면에 길게 이어붙어있는 유리면에 노을로 물든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유키나는 한 차례 더 오도독, 쿠키를 씹었다.

알고 지내는 후배의 일을 도와준다고 평소보다 늦게 학교에 남아있게 된 리사를 기다리며, 홀로 생각에 잠긴다. 유키나 쪽에서 리사의 일정에 맞춰 기다리는 건 간만의 일이었다. 미나토 가에서 음악에 대한 대화가 오고가지 않게 되었던 그 날 이후, 유키나는 늘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충족하는데 집중하여 일정을 잡곤 했었다. 목표로 하는 가치를 얻는데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일에 대해선 소홀해졌던 터였다. 이를테면, 소꿉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든가.

유키나와 둘이서 돌아가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어. 간만에 함께 돌아가자, 응? 그렇게 말하고는 멋쩍게 웃어보이던 리사에게, 유키나는 차갑게 대꾸했었다. 자신에게는 어떻게든 이루어야만 하는 목적이 있다고. 그를 위해선 한순간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소꿉친구끼리 손을 잡고 함께 귀가하고 싶다는 리사의 작은 소망조차 제대로 들어주는 일 없이 유키나는 스튜디오와 라이브 하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돌려버리곤 했었다.

“......나는.”

또다시 지난 밤 귀에 흘러들었던 노교수의 발언이 뇌리에 떠올랐다. 혹여 자신이 상대에게 무언가를 받은 기억만 떠오른다면, 관계의 적신호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호의를 착취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그를 중얼거리고는 유키나는 쓰게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자신은 알고 있었다.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받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바꾸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관계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언젠가 너무나 슬픈 형태로 끝을 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변명만을 내걸어두고서.

리사를, 소중한 소꿉친구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은 분명 강했다. 할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얼마든 희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애정을 표현할 줄은 모른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전달하지 못하는 애정은 무대 위에서 선보이지 못하는 기술과 다를 게 없다. 그런 건 존재한다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거다. 이마이 리사를 아끼는 미나토 유키나는, 그저 자신도 친구를 아끼고 있다는 생각만을 하며 일방적인 애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서투르다는 명목 하나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덮어버리려는 비겁함에 매달리며.

“유키나아!”

“리사.”

“많이 기다렸지? 미안미안. 모카가 곤란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예상보다 좀 더 늦어지고 말았지 뭐야.”

“괜찮아. 오늘은 연습 없는 날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돼.”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리사는 교정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유키나의 곁에 멈춰선 다음 아가씨는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굳이 달려오지 않아도 되었는데. 유키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서 리사는 호흡을 고르는 와중에도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턱에 맺힌 땀방울이 고운 목선을 따라 또르륵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무방비한 느낌으로 헐렁하게 풀려있는 넥타이와, 그 틈으로 언뜻 보이는 쇄골에 시선을 주다가 유키나는 고개를 돌렸다.

“맞아, 간만에 자주 연습으로 하기로 했었지. 스튜디오 내부 수리,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이쪽도, 하나 여고도 시험이 끝난 직후니까 마침 한 차례 쉬어가기 좋게 시기가 맞아떨어진 걸지도.”

“그러고보니, 유키나가 먼저 가끔은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땐 깜짝 놀랐다구.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도중에 쉴 여유 같은 건 없다고 하던 그 유키나가 말이지.”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이야. 현실적으로 휴식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아. 그리고 자주 연습도 연습인 건 마찬가지니까.”

“흐흥, 유키나, 예전과 비교해서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니까. 역시 로젤리아 덕분이려나.”

그렇지 않다고, 새침하게 잡아뗄 여유도 주지 않고 리사는 히죽 웃으며 얼굴을 쓱 들이밀어왔다. 유키나 얼굴 빨개졌네,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 귀여워라. 어린 동생을 예뻐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는 아가씨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러워하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탓에 유키나는 부정하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다. 입술을 슬쩍 내밀고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럼 이대로 집에 돌아가는 걸까나. 학교에서 곧바로 귀가하는 건 왠지 오랜만이네. 유키나하고 둘이서-”

“오늘은 리사도 푹 쉬도록 해. 이건 권고사항이야.”

“아하하, 평소에도 딱히 무리하고 있지 않다구? 그리고 유키나의 말대로 자주 연습도 연습이지? 유키나와 함께하기에는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한 편이니까, 여유가 있을 때 연습할 거야.”

“누구도 리사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베이스 담당으로 충분히 로젤리아의 음을 받쳐줄 능력이 되기에 영입했던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악기를 다루는 기술만큼이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는 자세도 중요한 법이야. 그리고 이미, 연습이 끝난 뒤 집에 가서도 저녁마다 방에서 베이스 연습......하고 있었잖아.”

“어라, 들켜버렸나?”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들썩이다가 리사는 수줍은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유키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구었다. 완벽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이겠다는 밴드의 방침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건 음악에 열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여야만 할 태도인 거고. 그럼에도, 유키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리사는 또다시 그녀의 모든 걸 소꿉친구를 위해 바치고 있는 걸로 보였다.

“권고사항이 아냐. 로젤리아의 리더로서 지시하겠어. 오늘만큼은 연습 금지야. 기술을 연마하는 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루어질 거야. 서두를 필요 없어. 알겠어?”

“정말, 유키나도. 오늘따라 이상하다니까. 내가 뭔가 걱정 끼친 건 아니지? 이렇게 신경을 써주고.”

“......돌아가자.”

제대로 신경써주고 보살펴주는 법을 알았다면 지금과 같지 않았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삼키며 유키나는 먼저 몸을 돌렸다. 긴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유키나가 걸어나가고, 그 뒤를 리사가 바짝 따라붙는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 듯 걸음을 내딛는 유키나의 곁에, 그녀의 보폭에 맞춰서 리사가 옆을 지킨다.

두 아가씨가 교문으로부터 몇 걸음도 채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어라, 리사잖아.”

“앗, 안녕!”

“뭔가 오랜만이네. 잘 지내?”

“아핫, 요즘 조금 바빴으려나.”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하네오카 여학원의 교복을 입은 여자애 세 명이 친근하게 리사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왔다. 마주 손을 흔들어보이며 리사가 걸음을 멈추었고, 유키나 또한 어정쩡하게 리사 곁에 멈춰섰다. 누구? 그렇게 묻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키나에게 리사는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답을 하였다. 댄스부의 동료들.

“밴드 활동 하는 중이라고 했었지? 댄스부를 잊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구.”

“아냐아냐! 그게, 여유가 나면 얼마든 병행할 생각이니까, 잊은 건 절-대 아니야. 조만간 아코랑 손잡고 다시 나가도록 할게!”

“맞다, 아코도 요즘 안 나왔었네. 독촉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갖지 마. 즐겁고 여유롭게 참가하는 게 우리 댄스부의 목표니까 말야. 리사가 속한 밴드, 요즘 교내에서 유명해서 종종 이야기를 듣거든. 대단하다니까.”

로젤리아에 대해 말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유키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미나토 유키나가 여기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눈을 하면서도 직접 말을 걸지는 않는다. 실제로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마치 팜플렛의 사진 속 인물을 대하는 느낌으로 어색한 태도를 취하면서. 딱히 그게 무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유키나는 그와 같은 분위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이 있어선 안될 자리에 끼어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들 집에 돌아가는 길?”

“그럴 리가. 시험이 끝난 직후잖아? 잔뜩 고생했으니 뒷풀이를 해주는 게 순리! 시내에 나가서 놀 생각이야. 괜찮다면 리사도 같이 가지 않을래?”

“엣, 나도?”

“응, 가라오케도 가고 네일샵도 가고. 최근에 같이 간 적 없었지? 그게, 미나토 씨도......같이 가셔도 괜찮으니까.”

리사를 향해 편하게 말하다가, 유키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애써 말을 덧붙인다. 통성명도 하지 않은 어색한 관계에서 그건 나름대로 상대와 동행하고 있는 이에게 배려를 해준 셈이리라. 물론 순전히 예의상 꺼낸 말이겠지만. 그녀들이 같이 가길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마이 리사다. 시험이 끝난 뒤 신나게 노는 자리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유명인을 초청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게 차갑고 쌀쌀맞기로 이름 높은 미나토 유키나라면.

“난 됐어. 리사, 다녀오도록 해.”

“유키나.”

리사에게 있어 좋은 기분전환이 될 기회라고 생각한다. 로젤리아의 활동에 매진하느라 좁아지게 된 그녀의 세계를 일시적으로나마 원래의 형태로 되돌려줄 수 있으리라. 리사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유키나는 원했다. 하지만......동시에 속이 쓰렸다. 이마이 리사의 주변에는 여전히 그녀와 친분을 가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어버린다. 댄스부의 동료들? 유키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세계와는 조금의 교점도 가지지 않는 이들이 리사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자신들의 무리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불쾌하고 짜증났다.

그들과 리사를 뒤에 남겨두고 휙 자리를 떠나버린다. 멈칫거리며 비켜서는 이름 모를 여자애들 곁을 지나쳐서 유키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유키나, 유키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가씨는 그를 들리지 않는 척 무시하였다. 태연함으로, 혹은 싸늘하게 경직된 무표정으로 얼굴을 꾸미고서 유키나는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딛는 구두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걸음의 속도는 일정하였고,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느릿하게......느껴지게.

“유키나! 혼자서 먼저 가지 말아줘!”

뒤에서 팔을 붙들며 끌어당기는 감각이 기묘하리만큼 익숙하였다. 유키나가 입고 있는 교복의 팔을 붙들어쥐고서 리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멀찍이 시내 방향으로 걸어가는 여자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 유키나는 리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꿉친구의 얼굴을, 밝은 올리브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 맑디 맑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유키나는 몸을 옅게 떨었다.

“놀러가지 않는 거야?”

“유키나와 같이 있던 도중이었잖아? 미리 잡아둔 약속도 아니고, 끼어들기엔 날이 아니라고 할까......조금 피곤해서 시내까지 나가기는 곤란한 기분이라고도 할까.”

“그래......”

“그보다 유키나, 적어도 갈 때는 같이 가자구. 따라잡는 거도 일이란 말이지.”

“......”

안도하고 있다. 그리고 만족하고 있다. 또다시 자신을 선택해준 소꿉친구를 마주하고서 유키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의 결과에 흡족해하는 스스로를 깨달으며 아가씨는 혐오감을 느꼈다. 친구를 위한다는 마음조차도 사실은 거짓인 걸지도 모른다. 그녀를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좋을대로 행동해버리지 않는가. 진정으로 리사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길 원했더라면, 빙긋 웃으며 리사를 모쪼록 잘 부탁한다고......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유키나?”

“......”

“시무룩한 표정인데? 엣, 혹시 유키나, 가라오케 가고 싶었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그런 자신을 질책하지 않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소꿉친구 앞에서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미나토 유키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마이 리사의 한없는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는, 최저의 친구인 거다. 속으로 몇 차례나 그를 중얼거리다가 아가씨는 눈을 잠시 감았다. 시야 속으로 몰려든 몽롱한 어둠이 복잡해진 의식을 가라앉히는 대신, 한층 더 어지럽힌다.

“리사.”

“응?”

“나라는 녀석은......너에게 어떤 친구인 걸까.”

뭐야,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거야 당연히. 웃으면서 그렇게 가볍게 대꾸하려고 하는 듯 하다가, 유키나의 표정을 보고서 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유키나. 작게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한층 깊게 고개를 숙이면서 유키나는 진득한 침묵을 삼켰다. 너의 상냥함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그 상냥함을 이용하는 나는......도대체 어떤 친구인 걸까. 답을 써넣기 두려운 물음을 재차 스스로에게 던지며 아가씨는 어금니를 꾸욱 깨물었다.

하늘에는 더 이상 노을빛이 남아있지 않았다. 잠깐 어둑함으로 들어찼던 길목에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며 인공적인 빛의 길을 만들어낸다. 가로등 하나가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조명 속에서, 두 아가씨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유키나, 괜찮아? 저녁 식사 같이 하지 않을래? 각자의 집 대문에 들어선 다음에도 담장에 붙어서 염려하는 말을 던지는 리사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유키나는 현관으로 들어섰다. 반겨주는 어머니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아가씨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두고, 리사의 방이 보이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다.

그거야 당연히 제일 소중한 친구잖아. 아마도 리사는 그렇게 답해주려고 했던 거겠지. 몇 번이나 들어도 다시금 반복해서 듣고 싶어지는, 너무나 달콤하고 상냥한 대답을. 지금까지 원할 때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받으며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키나 자신이 리사에게 그처럼 다정하고 포근한 애정을 표현하고, 안겨줬던 적이 있었던가?

“리사......”

손으로 침대보를 움켜쥐며 유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미나토 유키나는, 소꿉친구인 이마이 리사를 좋아한다.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사랑한다. 친구 사이여도 자신이 상대를 생각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분명 그렇다고 아가씨는 지금까지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상대를 향하고 있다고.

이제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애정을 받기만 하고 그를 돌려주는 법은 모르는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나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감정일까. 제멋대로인 자신은 리사의 곁에 있더라도 그녀에게 오롯한 행복감을 안겨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쪽만이 애정에서 자라나는 과실을, 그 황홀함을 취하는 관계란 얼마나 기형적인가. 그건 더 이상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진 관계라고 할 수도 없을 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웃던 리사의 모습을 유키나는 떠올렸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중 임간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에, 중학교 첫 문화제를 준비하던 때에, 학급의 아이들과 다같이 지역 축제에 놀러가게 되었을 때에.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리사는 항상 주목받았고,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리사.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줬을 때 고개를 돌리며 환히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는, 분명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보였다.

그런 거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곁에 붙어지내는 이기적인 아이 한 명에게 묶여있는 편보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지내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언젠가 리사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채 도통 움직일 줄 모르는 천칭에 무거운 추를 올리고 있는 걸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게 된다면.

“......”

얼굴을 대고 있는 베개의 면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키나는 파묻은 얼굴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씁쓰레한 물기로 세상이 젖어들고 있는 감각이, 지금껏 소중한 이를 위해 행동할 줄 몰랐던 자신에게 내려진 처벌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잠겨들고 가라앉아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어두운 푸른색으로 차오른 세계에서는 한 가닥의 곡조도 흐르지 않았다.

소녀는 꿈을 꾸었다. 내리는 희미한 안개비에 뺨이 젖어들어가는 감촉 속에서 그렇게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살았던 집에서,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실에 서서 무척이나 좋아하던 곡을 부른다. 한 소절 가량 불렀을까.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곱게 꾸며진 음에 부드럽게 새로운 음이 덧씌워졌다.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곁의 소파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어린이용 베이스 기타를 걸쳐들고 다소 서툰 솜씨로 현을 튕기다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마주보았다. 밝은 올리브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꿈에서도 더없이 예쁜 눈동자였다.

[우우웅]

얕은 잠을 깨운 건 어디선가 울리는 진동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서 유키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입고 있는 교복의 주머니 안에서 단말기가 작게 울렸던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그를 꺼내든다. 휴대폰 화면에서 갑작스럽게 쏟아져나오는 밝은 빛에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살짝 돌렸다가, 유키나는 액정에 떠오른 내용을 확인하였다.

<오늘 밤하늘이 예쁘네. 유키나, 같이 볼래?>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유키나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 오래 잠들지 않았다 싶었는데 시간은 이미 밤 11시를 알리고 있었다. 잠들 준비를 해야할 시기에 잠에서 깨어나다니. 손바닥을 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손가락을 빗 삼아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다음 아가씨는 커튼을 쳐뒀던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미닫이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며 유키나는 침묵을 지켰다. 반대편 베란다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리사에게 자신이 나왔다는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기척 없이 베란다로 향하며 유키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한 차례 문질렀다. 혹여나 눈물을 흘린 자국이 남은 건 아닐지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거울이라도 한 차례 보고 나오는 편이 좋았을 건데.

“유키나-”

“무슨 일이야?”

“연락 보낸 그대로. 자고 있었어?”

“......”

“아까 전부터 방의 불이 쭉 꺼져 있길래. 피곤했던 걸까나.”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어쩔 수 없다. 신경 쓰이게 해버린 건 자신 쪽이었으니. 대답없이 눈길을 피하며 유키나는 난간을 내려다보았다. 리사의 앞에서 말없이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에 무척 초라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에 들어온 밤하늘은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넓고, 어둑하고,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특별할 거 없는 밤하늘인데.”

“후훗, 이런 건 분위기라고, 분위기. 유키나가 밖에 나와주니까 조금 전보다 밤하늘, 더 아름답게 보인다구?”

“이상한 말을......”

“그런 거야.”

어디까지나 친구를 불러내기 위한 핑계란 거였다. 그거도 나름 낭만적인 핑계. 뺨을 살짝 붉힌 채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별 하나를 노려보다가 유키나는 마침내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리사는 예이- 장난스럽게 손짓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구김살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활발하고 매력적인 언제나의 이마이 리사다.

“리사는 뭘하고 있었어? 오늘 연습은 금지라고 했으니까.”

“미나토 대장의 명령대로 자주 연습은 확실하게 농땡이쳤으니까요! 아하핫,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제대로 푹 쉬었으니까 말야. 저번부터 읽으려고 사뒀던 소설책을 처음부터 쭈욱 봤어.”

“소설책?”

“응, 연애 소설! 엄청 좋아해. 읽다보면 두근두근하고, 따라서 부끄러워지고, 그러다가 확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유명한 작가의 신간이야. 제목은 ‘사랑과 우정의 레인보우 브릿지’!”

“......하긴, 예전부터 그런 걸 좋아했었지.”

그녀 나름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기분전환을 했다면 그걸로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유키나에게 리사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자를 들어보이곤 휘휘 흔들어보였다. 유명한 작가가 썼다는 예의 소설책인 모양이었다. 따로 등을 켜두지 않은 베란다에서는 제대로 읽지도 못할 건데, 그걸 또 가지고 나오다니.

“연애란 거, 그런 쪽으로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흐응.”

“음악을 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야.”

“그치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차츰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그래서 폭 빠져들게 되는 일은 정말 멋지다구. 아아, 사랑이란- 하는 느낌?”

“......”

극의 절정 부분에서 탄식을 터뜨리는 연극 배우처럼 소리를 내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리사를 바라보며 유키나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새롭게 만난 이에게 푹 빠져들게 되어서 모든 감정을 그에게 맡기게 되는, 그런 사랑을 동경하고 있는 걸까, 리사는. 친구가 이야기하는 사랑이 여기가 아닌 다른 먼 곳을 향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뭔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로 보기 좋게 짜여졌으니 달콤하게 보이는 거겠지, 소설 속 사랑이란 건. 현실과는 달라.”

“어떠려나? 유키나, 관심 있어? 오늘 읽은 책 내용 알려줄까?”

“관심 없어.”

“제목에 왜 사랑과 우정이 들어가냐면 말이지, 주연인 두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이기 때문이야.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그리고 같은 고등학교까지 간 친구 사이.”

“......”

멋대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서 리사는 즐거운 듯 쿡쿡 웃었다.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건지 곧바로 진지한 태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관심 없는 주제라고 하더라도 친구의 말을 들어주지 못할 건 없었기에 유키나는 말없이 리사를 바라보았다. 리사의 입에서 소꿉친구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면서.

“A와 B라고 할까. A는 차분한 성격의 멋진 아이야. 어렸을 적부터 확고한 꿈을 가지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훌륭한 노력가! 그리고 B는 다소 소심하고 말이 없지만 착하고 귀여운 아이.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낸 A를 정말로 좋아해.”

“......”

“B는 A를 정말로 좋아해서 말야, 언제나 함께하고 싶어해. 그런 자신의 행동이 꿈을 이루려는 A에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으니까 늘 A의 곁에서 그 애를 챙겨주고, 응원해주고 하는 걸로 힘을 낸달까. 물론 A도 B를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으니까 그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말야. 그렇기에 자라면서 자신의 곁을 지키는 B를 대할 때 조금 곤혹스러워하게 되구 말이지.”

“바보같네.”

“그런가?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들어도 그 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아. B는 언제나처럼 A의 곁을 지키고, A는 그런 B를 곁에 두고서 자신이 추구하는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그러던 어느 날, 힘든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와. 제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멀리 떠나야만 하는 상황, 그렇기에 B와는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 돌아오는 건 언제일지 알 수 없고.”

알기 쉬운 구조의 이야기이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겐지모노가타리를 쓰던 헤이안 시대에도 이런 류의 사랑 이야기는 있었으리라. 흔하기에 잘 들어먹히는 내용인 걸지도 모르지. 누군가의 펜끝에서 태어났을 A와 B란 인물에 대해 잠깐 상상해보다가 유키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보는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닌 사정이 얽혔을 뿐이겠지만, 과연 그 당사자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B는 A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좋아하는 A가 자신 때문에 꿈을 접게 되는 건 훨씬 더 싫었어. 그래서, A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우정이라고 말하게 돼. A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하지. 예전부터 쭉 그랬던 대로, 시간이 지나더라도 자기들은 변함없이 친구일 거라고 말해주고서. 그렇게 A는 떠나.”

“......”

“멀리 떨어지게 되었더라도 B는 계속해서 A를 향한 마음을 지켜.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함께 보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이 워낙 바쁜 탓에 A가 좀처럼 답장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 열심히 지내고 있구나, 생각하며.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A가 돌아올 때까지.”

목 아래, 속이 아팠다. 이유 모르게 불쾌함이 몸 안쪽을 긁어대는 감각에 유키나는 손으로 교복 앞섶을 붙들었다. 뭐야, 뭐야 그게. 입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가씨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울어진 천칭, 일방적인 친애의 표시, 보답받지 못할 감정, 마찬가지로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서투르기 때문에 전하지 못할 뿐인 마음.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제서야 A는 B가 그 때까지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을 향한 B의 감정이 그 때 말했던 것과는 달리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돼. 어째서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자책하는 A를 지켜보다가 B는 손을 잡아줘. 돌아와서 기뻐. 쭉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말해주며. 그리하여 둘은 늦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제대로 연인이 되었습니다, 라는 걸로. 두 사람 다 그 이후에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A는 제대로 꿈을 이뤘고, B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잘됐네-”

“......뭐가 잘됐다는 거야?”

“응?”

“결국, 결국 일방적으로 사랑받고 있었을 뿐이잖아. 오로지 애정으로 자신만을 생각해주는 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뚜렷하게 보이는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그에 답해주지도 않고, 그런 주제에 스스로가 원하는 건 전부 다 하려고 하면서! 뒤늦게 후회한다고 한들 용서받을 수 있는 거야? 그런 녀석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난간을 붙든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힘껏 그를 붙든 상태로 유키나는 연이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몸의 떨림이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긴 세월 동안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혼자서 품고 있었을 그 아이가 가여워서, 그리고 그 아이의 애정이 만들어내는 달콤함만을 취하면서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을 이기적인 인간이 미워서. 그렇게나 착하고 상냥한 아이의 애정을 받을 자격 따위, 자기 꿈만 쫓을 줄 아는 인간에게는 없다.

“어째서 혼자서 상냥해야만 하는 거야. 애정을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도 못하는 그런, 그런 최악의 친구를......어째서 그렇게, 변함없이 좋아할 수 있었다는 거야. 말도 되지 않잖아.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있었다고? 표현해서 전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애정에 무슨 의미가 있어.”

“......”

“엉터리 같은 이야기야. 멋대로 이어지는 해피엔딩은 싸구려일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잖아.”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악을 써서 말하고 있다고 유키나는 느꼈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째서 고작 전해들은 소설책의 내용 때문에 이렇게나 동요해야만 하는 걸까. 스스로가 퍽이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희미하게 들었으나 아가씨는 흐트러진 자세를 추스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숨겨놓으려고 꾹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터져서 추하게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현실은 동화 속 세계와는 다르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결말에서만큼은 완전무결한 행복이 약속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으로 편리한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한쪽 방향으로만 애정이 전해졌던 거라면, 일방적인 흐름은 관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되었겠지. 그건, 변명할 여지 없이 사랑을 받기만 했던 쪽의 책임이리라.

A의, 그리고......미나토 유키나의 책임.

“일방적인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 두 사람의 사랑은.”

몸의 떨림이 일순간 잦아든다. 손에 힘을 풀고서 유키나는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난간 가까이에 다가와서 선 리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만 손을 내뻗으면 서로를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서서, 아가씨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길게 이어지는 말을 꺼내기 전, 호흡을 고르는 그런 한숨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다 다르잖아, 그치?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 그리고 그런 만큼 사람들마다 사랑하는 법 또한 다를 거라고 생각해. 엄청 적극적이어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자마자 상대에게 그를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반대로 수줍음이 많아서 도저히 직접 마음을 전달하진 못하고 어떻게든 간접적으로 그를 표현하려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좋아하는 이를 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사랑하는 그 감정을 소중히 품고서 그를 원동력으로 삼아 오랜 시간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 사랑하는 이에게 뭐든 하나 챙겨주지 않고선 못 배기는 사람도 있고, 누구보다 상대를 좋아하면서도 그걸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고-”

“그건......”

“사랑이 서로에게 전해지고 순환을 이뤄야만 한다는 건 분명 틀린 말이 아닐 거야. 애정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게 존재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해서 궁금해하게 되잖아. 확신이 들지 않는 상태에서라면, 확인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할 거구. 하지만 말야, 다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니까, 오고가는 애정의 표현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해. 조금은 무뚝뚝한 사람과 그에 비하면 활발한 사람이, 각자 애정 표현의 강도가 다르단 이유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

“좋아하는구나. 나도 상대를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사랑에는 덧셈과 뺄셈이 필요없어지는 거야. 함께 쌓아올렸던 추억들이, 지나치며 속닥인 한 마디의 말이, 잠깐 마주쳤을 때 보인 눈빛이......그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좋아해, 라고 말해주고 있다면, 그걸로도 한없이 사랑하게 될 수 있어. 사랑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여자애가 될 수 있는 거야.”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상체를 작게 웅크리고서 유키나는 몸을 떨었다. 속을 긁어대던 불쾌함 때문에 견딜 수 없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전신을 건드려대고 있었다. 리사, 리사. 속으로 친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른다. 손을 뻗는다면 닿을 거리에 있는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어렸을 때 집에 돌아오던 길에 늘 그랬던 대로 그녀의 작은 손을 꼬옥 움켜쥐고 싶었다. 리사, 라고......이름을 불러주고만 싶었다.

“유키나, 기억해? 어렸을 때 둘이 같이 노래하고 연주하던 때. 나, 베이스 연주 정말 못했었잖아. 서툴러서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한 곡을 완주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고. 이렇게 연주해봤자 유키나에게 걸림돌만 되는 게 아닐까, 몇 번이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아, 이건 지금도 그런가.”

“그렇지 않다고, 계속해서 말했잖아.”

“응, 유키나, 그 때도 내게 똑같이 말해줬었어. 그리고 내가 실수해서 풀이 죽어있으면, 다시 연주를 시작할 수 있게 곁에서 처음부터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었어. 내가 틀리고 틀려도, 그리고 또 틀려도 한번도 화내거나 질려하지 않았어. 같이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게, 내가 따라갈 수 있게......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노래해줬어. 마침내 한 곡을 완주하게 되면 환하게 웃으며 함께 기뻐해줬어.”

“리사......”

“유키나는, 그 때도 지금도 항상 내게 상냥했는걸. 바뀌지 않았어. 한순간도. 그래서, 그래서 나는......이마이 리사는 말이에요, 그런 네가, 미나토 유키나가......너무나 좋아. 좋아해. 틀림없이 좋아해왔고, 좋아하고 있어.”

별빛이 반짝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이 가득 흘러들어서,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반짝거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밤하늘이 담겨있었다.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한 차례 흘러내린 다음, 유키나는 리사를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그런 상태로 리사는 헤헷,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런 소꿉친구가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 유키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악의를 가지고서 내리누르지 않는 이상 천칭은 그리 쉽게 기울어지지 않는다. 애정을 품고서 소중한 이를 대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랑을 하고 있을 때 특유의 향기가 나는 법이다.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 살며시 닿는 손길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눈빛에서 스며나오는 애정으로 증명되는 관계는 그렇게 이어지고 맺어지게 되는 거다.

“있지, 유키나도 날......좋아해?”

대답할 필요도 없을 물음을 속삭이는 소꿉친구에게, 연인에게 유키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이기만 하였다. 울음으로 잠긴 목소리로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오로지 그렇게만. 리사가 손을 내뻗어 뺨을 어루만져주는 감각이 좋아서 그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있다가, 유키나는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에서, 소녀는 처음으로 사랑을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