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이마이와 레이디 리사의 변증법적 접근론

뱅드림 유키나 x 리사

“하이드 씨 최면?”

“원래는 내면 심리 어쩌구 관련 기제 각성 저쩌구 하는 이름이던데, 알지도 못할 말 길게 써두면 복잡하잖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부르나봐. 여기, 쓰는 법 간단하다구?”

“흐응-”

들이밀어진 액정에는 곁눈질로 보기만 해도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화상이 흐르고 있었다. 지켜보기 괴로울 정도로 명도와 채도가 높은 무지개색이 부담스럽게 번쩍이다가 천천히 모노톤의 대기 화면으로 침잠한다. 색채의 폭력을 배경으로 삼고 거칠게 구부러지며 소용돌이를 그리는 문양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어딘가 잘못 만들어진 만화경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환상마냥. 화면 전체에 물결과 같은 흔들림이 계속되는 게 풍랑 심한 호수 한가운데 쪽배를 탄 채 바라보는 풍경인가 싶다. 그러니까, 이대로는 멀미날 거 같단 말씀. 우와, 우와아. 탄식과 감탄사 중간 즈음에 위치할 소리를 내며 이마이 리사는 도망치듯 시선을 돌렸다. 웬만해선 친구들이 꺼내는 주제에 어울려주려고 하지만, 이건 좀 힘들다.

“그게 아냐! 순서가 틀렸잖아. 주의사항을 먼저 읽고 준비 화면 켜두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그걸 봐야지.”

“번거롭게 그럴 필요 있어? 주의사항 같은 걸 왜 읽어. 요즘 세상에 설명서 다 확인하는 사람이 어딨니.”

“제대로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 효과가 없었다는 후기도 있었단 말야. 리사, 이쪽 봐줘. 내가 해줄게.”

“으음, 그거 꼭 해야하려나. 방금 전에 보니 잠깐만 해도 충분히 굉장하던데.”

“리사만큼 피실험자 요건에 딱 맞는 사람도 없어. 평소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는 이, 배려심이 강해 자칫 관계에서 손해보는 경우가 많은 이, 내면에 억눌러둔 욕망이 강한 이에게 특히 큰 반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래.”

“오, 오우......”

얼굴 마주한 채로 대놓고 말하기엔 너무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기분이 든다. 세간에서 이마이 리사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대략 그런 형태인 건가. 자기주장이 약하고, 관계에서 손해를 많이 보고, 내면에 억눌러둔 욕망이 강하고? 게다가 피실험자라니, 도대체 무슨 실험을 당하는 건데. 친구들이 난데없이 꺼내든 이야기의 주제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 유행했던 전생 체험 같은 거랑 비슷한 거겠지 싶지만. 별 게 아니라면 어울려줘도 그닥 상관은 없겠지. 그렇게 결론내리고 리사는 어깨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좋아. 이마이 리사, 실험에 참가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으흠, 그럼 지금부터 리사의, 이마이 씨의 내면에 있는 하이드 씨를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이 튀어나올 거에요. 주의사항은, 어디, 어......의도한 범위 바깥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대상자가 반사회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행위는 암시 범주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명확한 거부 의사나 금지 요청을 접할 경우 즉시 암시의 효과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그래서 어쨌든 안전하대! 자기들이 개발해낸 게 대박 과학적이고 혁신적이라네. 약간 기분이 이상해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깔끔해질 거라고 하고. 대충 그런 이야기니까 넘어가자. 빨리 다음으로 넘겨.”

“어휴, 성질 급하긴. 자아, 그럼 이마이 씨, 신형이라서 장난 아니게 크고 반짝반짝 광이 나는 제 뉴타입 하이퍼 갤럭시의 화면에 주목해주세요......”

회색으로 칠해져 있을 뿐인 밋밋한 화면이 흐르길 30초 남짓, 뒤이어 예의 그 번쩍번쩍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영상이 튀어나온다. 묘하게도 아까 곁눈질로 봤을 때와 달리 생각보다 울렁거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공영방송으로 나갔다간 제 2의 폴리곤 쇼크 사태를 일으킬 거 같은 화면이긴 한데, 한 차례 본 걸로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리사는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했더라?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이 튀어나올 거라고?

남들을 돌봐주기 좋아하고, 자연스레 이래저래 챙겨주다보니 산술적으로는 손해를 조금 보는 경우가 왕왕 있긴 했다. 하지만 리사 자신은 그를 부담스런 손해라고 여긴 적이 딱히 없었다. 챙겨주고 살갑게 대해준 보답으로 사람들의 호의와 신뢰를 얻게 되지 않는가. 먼저 나서서 챙겨준다고 해도 거리감을 잡지 못하고 손쉬운 착취 대상으로 전락할 만큼 이마이 리사가 만만한 여자냐고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니지. ‘언제나 리사가 손해보잖아.’ 라고 대놓고 말하는 친구들도, 성실한 마음으로 배려해주고 염려해주는 리사의 마음씨가 고마워서 한 마디를 덧붙이는 느낌인 거다.

직전에 들은 설명을 생각한다면 이 암시 놀이에 하이드 씨 최면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연은 대충 알만했다. 명예롭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단 압박감에 눌려 살던 신사가 내면의 선과 악을 완벽히 분리하는 약을 마신 뒤 일어난 일련의 현상 비스무리한 게 피험자에게 일어난단 거겠지. 그렇다면, 원전에 따를 경우 닥터 이마이와 레이디 리사로 나뉘게 되는 걸까. 하얀 실험 가운을 걸치고는 묵직한 책을 챙겨든 채 피곤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마이 리사와, 도발적으로 폭 파인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능숙한 동작으로 깃털 달린 부채를 펼쳐 하관을 가리고는 눈웃음 짓는 이마이 리사......

“여기까지.”

“......끝났어?”

“와아, 눈 풀려있어. 리사, 괜찮아?”

“어? 괜찮아 괜찮아. 완전 멀쩡해.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때? 어디선가 사악하지만 진실된 목소리가 들려오거나 하지 않아? ‘오늘이야말로 사유리에게 말해야겠어, 너 너무 촐싹거려! 오늘 끝장을 보자!’ 라든가?”

“웃기고 있네! 누가 촐싹거린단 거야. 리사, 저런 말 해대는 아카네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지 않아?”

세키가하라의 전장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 양자의 압력에 휘둘리던 모리 데루모토의 처지가 이러했을까. 양쪽에서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난리통에 영혼 없는 미소만 내보이며, 아가씨는 방금 전 있었던 체험을 반추했다. 번쩍번쩍한 화면을 끝까지 봤고, 그래서 그 다음엔? 뭔가 달라진 점이 있는 건가. ‘튀어나온다’ 라는 제법 과격한 어휘를 쓴 것치곤 그 어감만큼 동적인 변화는 체감할 수 없었다. 뭐, 전생 체험도 실제로 전생을 체험하게 해준 적은 없었으니, 이 나이대 여자애들이 선호하는 오컬트란 대체로 이런 느낌이리라. 서두만 화려하고 알멩이는 없는 괴담. 그 누구도 실제로는 악령과 나홀로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하지도, 실습동 4층 열세 번째 계단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와 마주치고 싶어하지도 않을 거니까.

[우우웅]

“어라, 문자 왔나?”

“내 껀 아닌데. 혹시 리사 꺼?”

“그런가? 아, 그러네.”

깨어난 내면의 자신이 연락을 보낸 거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친구들에게 한번 웃어보이고는, 리사는 단말을 확인했다. 친구들의 기대와는 달리, 억압에서 해방되어 현신한 내면의 악 레이디 리사가 보낸 문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한결 상냥하고 가끔은 좀 더 무서울 수 있는, 이마이 가의 여사님께서 보낸 문자이다.

연락의 내용은 평이했다. 일정에 없던 일이 생겨 오늘 집을 비울 예정이니 언제나처럼 옆집의 미나토 가에 신세를 지든가, 아니면 소꿉친구를 초대해 하룻밤을 같이 보내라는 전언이었다. 리사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있던 이벤트이니 새삼스러울 일은 전혀 아니었다. 옆집의 소꿉친구, 미나토 유키나에게도 익숙한 일이니 오늘 집이 빌 거란 첫 마디만 전해도 척이면 척, 알아서 외박 준비를 할 터. 유키나가 자기 칫솔과 잠옷을 챙겨들고 이마이 가로 들어서는 광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누가 보낸 거야?”

“아쉽지만 엄마가 보낸 연락이네요. 오늘 일정 있어서 외출할 거니 집 잘 지키고 있으래.”

“뭐야! 부럽다! 잠깐, 설마하니 이게 암시의 효과?”

“리사에게 건 암시랑 부모님 일정이 뭔 상관이래. 그래도 부모님을 간접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최면 영상, 있으면 좋겠네. 어머님 아버님, 들리시나요. 당신 아들은 구제불능 멍청이입니다. 그 새끼는 여태 처먹은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교토가 도쿄 안에 있는 줄 알고 있어요. 걔 말고 딸에게 투자하세요......”

“아카네의 오빠 이야긴 됐고, 부러워! 리사, 오늘 마음껏 광란의 밤을 보내겠네. 게다가 내일은 휴일이구.”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믿음직한 옆집 가족을 신뢰하는 부모님은 종종 집을 비우시고, 그런 날마다 리사는 그걸 친구들 앞에 말했었고, 친구들은 늘 이런 반응을 보였었으니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하겠다. 부럽다며 눈을 반짝이는 친구에게 어떻게 답할지에 대해서도 항상 반복되는 답안이 있었다. 얌전히 집 잘 지키고 있어야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하핫, 실없이 웃어보이면 된다. 지극히 이마이 리사답게.

“......그러게. 엄청 기대되네.”

모처럼 유키나와 둘이서만 밤을 보낼 수 있는걸. 아무 일도 없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밤이 될 거야. 내뱉지 않은 말은 음미하듯 한 차례 더 그를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리사는 한껏 미소를 지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기묘하게 건조한 듯 느껴졌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갈증이 미소 짓는 입술 아래로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부모들이 집을 비운 날 소꿉친구 두 사람은 대체로 일관된 양식에 따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저녁 식사 이전에는 주로 해야할 일을 한다. 처리해야할 집안일이 남아있다면 리사의 주도로 그를 먼저 해결하고, 식료품이 부족하다면 같이 장을 보러 다녀온다. 학교 과제가 있거나 시험 기간이라면 식탁에 마주앉아 공부를 해야만 했다. 먼저 마무리를 지은 리사가 가벼운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유키나는 뒤에 남아 지친 얼굴로 노트를 노려보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여유롭게 보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하고, 소녀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거나 방 침대 위를 뒹굴거나 했다. 흐트러진 자세로 몸을 뻗은 채로 이어폰을 나눠끼고 같이 음악을 듣거나, 리사가 읽고 있던 소설책을 대충 뒤적여보거나, 때로는 사이에 둔 단말을 톡톡 두드려가며 온갖 잡다한 정보들을 살펴보며 수다를 떨거나.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깊어지면 각자 침대와 바닥에 깔아둔 이불 속에 들어가 곤하게 잠든다. 이상이 두 사람이 함께 집을 보는 대략의 일과표였다.

일상의 영역에 속하게 된 행동에 부담을 느낄 일은 없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보내게 되니 일상이라고 칭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이 리사는 이 순간, 자신의 집에 소꿉친구를 초대한 사실에 긴장하고 있었다. 둘이서 귀가하는 길에 사정을 말할 때까지만 하여도 복잡할 일은 전혀 없었다. 소꿉친구는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고, 짐만 정리한 뒤 이마이 가로 오겠다고 답했다. 간만에 둘이서 자겠네. 빙긋 웃으면서 미나토 유키나는 그렇게 말했다. 지나가는 말답게, 극히 가볍게.

“흐아......”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한 차례 더 거칠게 세안을 하고는 리사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들어올렸다. 거울 너머로 눈썹을 역팔자 모양새로 치켜세우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치켜세운 눈썹으로 인해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속을 긁어놓기 딱 좋게 비웃음 맺힌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스스로의 얼굴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니.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을 쓸어내려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를 훑어내며 리사는 중얼거렸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봐. 그 말을 남기고 미나토 가에 들어가는 유키나를 잠시 눈으로 좇다가, 리사는 이마이 가로 들어섰었다. 현관에 멈춰서서 약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내려다본다. 근원 모를 열기가 전신에 슬금슬금 번지고 있음을 느끼며 아가씨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근원 모를 열기라고 둘러댈 수는 없다. 열기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리사는 이해하고 있었다. 간만에 둘이서 자게 되었다는 유키나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불쑥 솟아나는 음심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마이 가로 들어서는 유키나를 현관에서부터 밀어붙이고 싶다는 괴이쩍은 욕망이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되는 성가처럼 울리며 의식의 테두리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마이 리사, 그만 좀 하자? 응?”

가방을 대충 집어던져두고 화장실로 들어와 얼굴에 찬물을 끼얹을 동안 몇 개나 되는 욕망의 시나리오들이 ‘오늘의 계획’ 이라는 간판을 달고 흘러갔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사는 반투명한 욕실 커튼 한 장만을 사이에 두고 알몸으로 샤워를 하는 유키나에 대해 상상하고 있었다.

쓸어올린 은빛 긴 머리카락 아래로 조각된 형상처럼 모양새 좋게 아담한 등이 보이고, 맺힌 물기가 날개뼈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리는 광경이 세계를 적신다. 피부가 젖어드는 감각에 취해 기분좋게 풀린 눈을 한 소녀의 얼굴은 원래의 청순함이 살풋 잊혀질 정도로 고혹적이겠지. 그 순간 예고도 없이 커튼을 붙들어 옆으로 확 열어젖히고, 기습에 깜짝 놀라 토끼눈이 되어 두 팔로 상체를 가리는 유키나에게 다가가 어깨를 꾹 붙드는 사람은 바로!

[촤악]

“하아.”

살갗을 적시는 냉수가 조금 전보다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삿된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참회하며 스스로의 등에 채찍으로 인한 흉터를 새겼다는 광신적인 고행자의 일화를 떠올린다. 이런 망상에 시달린 거라면 그런 행위가 나름 충분한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삼키며 리사는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오늘의 자신은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에도 그런 부끄러운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어쩔 수 없잖아.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는 건 죄가 아니니, 생각만큼은 마음껏 했었다. 그건 망상이 실현될 리 없다는 확고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 일탈이었다. 냉정한 이성이 날뛰는 본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한창 활발할 시기인 아가씨의 앙큼한 욕정을 망상의 형태로 해소하는 걸 스스로 용납해왔다. 그랬을 터인데, 안전장치로 걸려있어야만 할 자제력이 반쯤 비어버린 기분이 들어버린다면......

“......설마, 그 하이드 씨 최면인가 때문에?”

짐작하는 바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얼빠지게 들린다고 자평한다. 수건을 걸어두며 리사는 다시금 거울을 바라보았다. 경계 너머의 이마이 리사가 피식 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찌푸리며 들여다보니 오히려 초조해하며 입술을 약하게 씹어대고 있는 모습만이 보였지만. 정신 차리자, 유키나가 올 때까지 시간 별로 없단 말야. 재차 스스로를 다잡는 속삭임을 삼킨 뒤, 리사는 화장실을 나섰다. 던져뒀던 가방을 챙겨들어 아가씨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발코니로 이어지는 유리문 너머로 유키나의 방에 조명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그렇게 판단하며 리사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생각을 정리해본다. 자제력이 좋은 편이라고 자찬해도 좋을 자신이 오늘따라 이토록 흔들리는 게 낮에 학교에서 했던 예의 최면 실험 때문이라고 추정해보자. 내면의 억제되었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다는 설명을 생각한다면 현 상황과 확실히 맞아떨어진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반사회적인 행동은 유발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까지 이마이 리사는 소꿉친구를 향해 끓어넘치는 욕망을 품는 일을 근본적으로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럴 수도 있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침대 위로 돌아누워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한 차례 성질을 내고는, 금방 제풀에 지쳐 아가씨는 축 늘어졌다. 괜히 힘빼지 말고 해결책, 해결책에 대해 생각하자. 주의사항에 따르면 해결책은 둘 있었다. 하나는 한숨 자고 일어나는 거다.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어도, 일단 잠을 자고 나면 최면의 효과는 깔끔하게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행위에 대해 타인으로부터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받는 거다. 목줄 풀린 짐승처럼 날뛰더라도 ‘안돼!’ 하는 지적을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만물의 영장, 사회적 생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안전장치로는 더할 나위 없다.

“둘 다 말도 안되잖아.”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느 쪽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자명했다. 첫 번째, 한숨 푹 자기. 잠시 뒤에 유키나가 올 예정인데,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다. 아픈 척하며 방문을 닫고 누워버린다면? 유키나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은 건 둘째치고, 그런 상황에 속 편하게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이마이 리사의 신경줄은 굵지 않다. 두 번째, 안전장치에 의존하기. 주의사항의 내용이 확실하다면 아가씨가 떠올리고 있는 욕망의 시나리오들이 일방적으로 재현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타인인 유키나가 거부한다면 그 시점에서 최면은 끊어질 거니. 문제는 거부 반응이 나오기 직전까지는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 미친 듯이 굴러갈 거란 점이다. 소꿉친구가 겁에 질려 자신을 거부하는 광경을 상상하기만 하여도 리사는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되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겁낼 필요가 있어? 문득 그런 속삭임이 귓가에 닿는다. 둘도 없는 소꿉친구잖아. 유키나도 분명 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구? 솔직하게 원하는 바를 표현한다면, 그 방식만 조금 세련되게 한다면 유키나도 반드시 이해해줄 거야. 혹시 모르지. 어쩌면 유키나 쪽에서도 내심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용기를 내보는 거야. 어쩌면 오늘을 계기로 언제나 원하던, 하지만 여태까지 상상만 해보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을지도 몰라. 더 깊고 친밀하며 세상에서 유일한, 그런 관계로.

“......멋대로 충동질 하려고 들지 마.”

힘없이 뻗어있던 손이 이불을 꽈악 움켜쥐었다. 방금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에 환멸하며 리사는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 앉으면 책상과 그 위로 연결된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보기 좋게 가지런하게 정돈된 책들 중 상당수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은 아직까지는 없지만 리사는 소설들을 통해 수많은 애정 관계들을 추체험해왔다. 그게 허상의 세계원리 속에서 짜맞춰진 구도라고 해도 그 안에 하찮은 거짓만 있을 리는 없잖는가. 로맨스 소설 권위자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로 내공을 쌓아왔기에,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육체 관계부터 시작하는 연애는......무조건 망해! 예외가 없단 말야! 게다가 미술이나 음악을 하는 배경을 가진 경우에는, 그냥 망하는 게 아니라 파멸이야. 절대로 안돼!”

육체 관계로 시작하는 애정에는 죄다 그렇다고 확언해도 좋을 정도로 현실도피를 원하는 충동이 관계에 끼어든다. 지금 이 순간을 잊게 만들어줄 위안이 필요할 뿐인 거다. 지켜보는 입장에서야 상대의 품속에서만 잠깐의 안식을 찾는 모습이 애틋해보이고 일견 진실된 것마냥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씨앗의 재질이 그래서야 이후 싹트는 관계가 정상적인 형태를 갖출 리가 없다. 살갗으로 전해지는 한순간의 온기를 원해서 만난 사람들은 그 일시적인 위안에서 더 이상 의미를 얻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그러한 온기를 다른 상대에게서도 얻게 되어버린 순간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연애의 첫 마디는 어떤 식인가. 세상 모두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고, 사람들마다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역시 가장 왕도적인 건 진심이 담긴 고백과 함께 이어지는 첫 키스로 열리는 관계이리라. 불안감에 서두르는 일 없이, 지금까지 쌓아온 인연의 깊이를 믿으며 확신 속에 주고받는 고백은 그만으로도 이미 두 사람이 앞으로 나눌 평생의 애정을 보장한다. 다음 차례 약속처럼 따라붙는 입맞춤은 생크림 케이크 위에 톡, 예쁘게 놓인 딸기와도 같은 상징인 거다. 그야말로, 화룡점정.

“언제부터 품어온 마음인데......내 각오는, 순정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냐. 한낱 욕정 때문에 유키나랑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야. 평생 동안 함께 걸어가면서 유키나가 울 때 같이 울 거고, 웃을 때는 같이 웃을 거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이마이 리사.”

혼잣말이 멈춘 방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누구에게 이토록 비장하게 말하고 있는 거람. 순간 자신의 꼴이 우습게 느껴져서 리사는 힘없이 웃어버렸다. 지킬이자 하이드인 존재와 어둠 속에서 마주친 어터슨 박사가 상대가 광인이 아닌지 의심했던 건 분명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었겠지. 언제 이루어질지는 아직 확언할 수 없다만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지, 혹여 고백을 받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지도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 그걸 헛되게 해선 안된다구. 뒤늦게 치밀어오르는 멋쩍음을 가라앉히고자 리사가 덧붙여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딩동.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 리사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과연 유키나를 마주하고서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입안이 바싹 마른다. 로젤리아의 베이스로 처음 무대에 올라가던 때 이상으로 긴장감과 자기불신이 아가씨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런 와중에도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 없단 일념으로 리사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달칵]

“어서 와!”

“실례할게. 그런데, 운동하는 중이었어?”

“어? 아니, 아냐. 집에 들어오니 좀 더워서, 얼굴에 열이 사알짝 오르는 기분? 그보다 저녁 식사로 전골 요리 어때?”

“좋아. 리사가 해주는 음식은 무엇이든 언제나 맛있으니까, 당연히 좋아.”

“와, 와아, 기쁜 말을 해주네. 그런 말 들어버리면 심장에 조금, 흐으, 무리가 갈지도.”

그렇담 유키나를 재료로 삼아 조금 특별한 요리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어울려주려나. 충동적으로 요염하게 미소짓고는 상체를 들이미는 행동을 취하려다가, 리사는 헛숨을 들이삼키며 신발장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유키나가 듣기 좋은 귀여운 말을 해줬다는 걸로 순간적으로 외줄 위를 타고 있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고작 이 정도에 이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엄청 위험한 거 아닌가.

그래도 혼자 소리내어 결의한 게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수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비대하게 커져버린 욕망을 제대로 붙들어주고 있는지, 거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리사는 나름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었다. 오늘따라 유키나의 머릿결이, 그리고 그 아래로 언뜻 엿보이는 목덜미의 살결이 매만지고 싶을 정도로 고와보인다거나, 가까이 앉아있는 덕분에 매순간 흘러드는 체취가 향긋하고 달콤하여 참을 수 없이 좋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쉴새없이 흘러갔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남았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망상에 휩쓸려 대화의 주제를 놓쳐버리는 일이 없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아가씨는 내심 안도하였다.

“읏차, 그럼 식사 준비를 해볼까나.”

“나도 도울게. 간단한 일이라도 돕고 싶어.”

“그럼 테이블 세팅 부탁해.”

안도감이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를 연 다음, 리사는 저도 모르게 야채보관함 대신 길쭉한 튜브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명한 용기 안에는 지난 번에 썼던 생크림이 반쯤 남아있었다. 가능한 남기지 않고 한번에 다 쓸 요량이었는데 팩 하나에 든 양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조만간 사용할 일이 있음 좋겠는데. 이 정도 양이면 적당한 생지 위에 골고루 바르는 걸로 다 쓸 수 있으리라.

하얗고 부드러운 바탕 위에, 그처럼 새하얀 크림을 흩뿌린다. 유키나의 피부 위에 묻는다면 생크림도 본연의 백색을 상대적으로 잃어버릴지도. 마지막으로 속옷 한 장까지 벗고서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 누운 유키나에 대해 상상한다. 부끄러워 살짝 몸을 움츠린 자세에서는 역시 복부가 크림을 묻히기 좋겠지. 귀여운 배꼽 부근으로 희미하게 은근한 곡선을 그리는 예쁜 몸을 따라 치근덕거리며 묻는 흔적을 엉망으로 남기는 거다. 그 다음은 앙가슴에서부터 그 주변으로, 충분히 봉긋한 언덕을 온통 덮어버리자. 선명하게 보여 사랑스러운 쇄골과 늘 좋은 향이 감도는 목덜미 위로 생크림 특유의 달큼한 내음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문지르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는......

“리사?”

“......흐앗?”

찐득한 손길에 반응하여 약하게 신음성을 내뱉던 목소리가 지워지고 대신 의아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이 남는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다음, 소스라치게 놀라며 리사는 정신을 차렸다. 식탁에 수저를 놓던 도중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유키나를 마주 바라본다. 손에 들려있는 튜브통이 열린 채 그 끝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리사는 황급히 팔을 아래로 내렸다. 뚜껑을 닫으려는 손이 벌벌 떨려서 몇 번이나 단순한 작업을 실패했다.

“바닥에 조금 떨어졌는데, 그거 크림이지? 그건 왜?”

“이, 이거? 마침 필요할 거 같아서......”

“그래? 전골 만드려던 거 아니었어?”

“아앗, 맞다! 그랬지! 요즘 전골에 생크림도 들어가던가?”

“생크림? 들어가지 않지, 보통. 어둠 전골이라면 몰라도.”

“그으렇지?”

수명이 줄어드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귀 안쪽으로 전신의 혈관이 쏠려드는 감각이 드는구나. 바닥에 떨어진 크림을 치우려는 척 황급히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리사는 호흡을 골랐다. 유키나로선 이상하긴 해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지나갔다고 생각한 건지, 식탁에 수저를 놓는 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어떻게든 넘어갔다는 안도감 이후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서, 바닥을 깨끗하게 정리한 뒤에도 아가씨는 잠시 동안 주저앉은 채 약하게 몸을 떨었다.

저녁 식사는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흘러갔다. 또다시 헛짓거리가 시작될 낌새라도 느껴지면 젓가락으로 허벅지를 내리찍을 각오까지 하며 리사가 긴장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식사 중의 대화는 활기를 죽인 채 단답만을 내놓는 리사에 의해 극히 형식적인 수준으로 오고갔지만, 유키나가 전골의 완성도에 만족하며 짧게나마 찬사를 남겼기에 식탁 분위기는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부엌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마찬가지로 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양치질과 세면을 끝낸다. 문제는 그 다음. 친구가 먼저 샤워를 하는 동안 꼼짝도 않고 방에 처박혀있다가, 목욕을 끝낸 직후 특유의 자극적인 요소들과 함께 잠옷 차림으로 돌아온 유키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리사는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닦아내고 말린 뒤에도 젖었던 흔적이 고운 광택으로 남는 긴 머리카락, 살내음과 섞여 미칠 정도로 좋을 수밖에 없는 은은한 샴푸 냄새, 물로 몸을 씻어낸 다음 개운한 만족감으로 야릇하게 풀어진 얼굴.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마주하고서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리사에게는 없었다.

“리사, 오늘 많이 피곤한 거 아냐?”

방으로 돌아온 리사에게, 염려가 섞였지만 다소 샐쭉하게 늘어지는 시선을 보내며 유키나가 그와 같은 말을 꺼낸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늘 리사의 행동은 자연스럽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다고, 웃으면서 적당히 둘러대는 말을 하여도 소꿉친구를 바라보는 유키나의 눈길은 풀리지 않았다.

“혹시 마음에 부담되거나 하는 일이 있다면 알려줘. 말해주지 않으면, 난 알아채는 게 늦어버리니......”

“차암, 유키나도. 그런 거 아니래두.”

“리사가 자주 무리하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미리 못이라도 박아둬야겠어.”

“무리하는 일 딱히, 없는데.”

“......”

대답 도중 잠깐 멈칫한 지점을, 그 공백의 의미를 간파했을까.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리사를 지긋하게 바라보다가 유키나는 낮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대화가 끊어져 분위기가 어색하게 흘렀다. 오히려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답답한 공기는 쿡쿡 찔러오는 바늘처럼 경각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줄테다. 스스로를 달래며 리사는 소꿉친구와 약간의 거리를 두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유키나와, 풀이 죽은 채 그런 친구를 훔쳐보는 리사. 불안한 침묵이 길어져서 무거운 공기로부터 서서히 실재하는 무게감마저 느껴버릴 즈음이었다.

“......마사지 해줄까?”

“엥?”

“사요가 알려줬어. 피곤이 누적될 때는 지압을 해서 풀어주는 게 좋다고. 지금 리사에게 필요할 거야.”

“그, 그렇구나. 아니, 있어봐, 유키나가 나한테 해주는 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키나는 폴짝 몸을 움직여 한순간에 리사와의 거리를 좁혀버렸다. 급작스럽게 포효하는 내면의 본능을 죽이느라 소꿉친구가 속으로 숨을 끅끅 삼키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확고하게 결심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올린다. 이제부터 몸 여기저기를 주물주물 만지겠습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듯 위협하는 레서판다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게 지극히 앙증맞다. 밴드의 리더이자 압도적인 가창력을 가진 보컬로서 무대 위를 휘젓는 순간 휘몰아치는 카리스마는, 여기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상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걸 현실에서 이루어도 좋다고, 고삐를 풀어버려도 전혀 잘못될 게 없다고 끊임없이 속삭여대는 욕망의 결정체 레이디 리사였다. 나아가 신체적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의지력이 한층 거세게 밀려드는 충동을 견뎌낼 거라는 보장이 없다. 유키나가 마음을 써주는 건 정말로 기쁘지만, 무조건 거절해야만 해. 만에 하나 하게 된다면 적어도 내 손목 발목을 묶어두고 하든가! 필사의 각오로 그런 결론을 내리는 동안, 겉으로 보기에 리사는 그저 몸을 뒤틀며 끙끙 앓는 소리만을 내었다.

“그럼 할게. 리사도 긴장 풀어.”

“자, 잠깐만. 유, 키나! 진짜 안돼......”

“......아프지 않을 거야. 으음, 조금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할테니까.”

“미,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흐아앙!”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발바닥에 닿는, 참기 힘들게 간지러우면서 그로 인해 번지는 기이한 황홀감에 스스로가 듣기에도 화들짝 놀랄만한 소리를 흘린다. 작게 터져나온 비명에는 체감하고 있는 쾌락의 색채가 묻어났기에, 그를 들은 유키나도 뺨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래도 약간의 민망함 때문에 시작한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리사가 매번 무리하니까 그런 거야. 변명처럼 그렇게 톡 쏘아붙이고서 소녀는 계속해서 작은 손을 조물조물 움직여댔다.

자극은 약한, 그래서 예민한 지점을 침범당한 순간 극대화된다. 무방비한 부분을 읽혔다는 불안감과 자신의 약점을 쥐었음에도 상대가 그를 상냥하게 매만져준다는 충족감이 뒤섞여 성애의 쾌락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키나가 어떤 생각으로 친구의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대는지와 상관없이 리사에게 있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는 틀림없이 애무였다. 그리고, 성적인 흥분감은 필연적으로 이성을 녹슬게하고, 자제력을 무너뜨린다.

“어때?”

“......흐윽, 하으윽.”

“......으음.”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양손 모두 담요 끝자락을 몇 번이나 휘감아 움켜쥔 리사를 살피다가 유키나는 민망한 광경을 목격한 꼬맹이처럼 황급히 시선을 숙였다. 사심 따위 품지 않고, 믿을만한 이에게 받은 충고대로 행동했을 따름이었다. 행위의 순수함을 입증하려면 동요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를 끝마치는 수밖에 없다. 서로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맞닿는 살갗에서 번지는 열기가 뜨거워졌단 이유로 중간에서 멈춰버린다면, 훨씬 더 곤란할 뿐이다.

발바닥을 만져주던 손길이 종아리로 올라간다. 원래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며 지압을 행해야만 했지만, 지금 리사의 반응을 참고할 자신이 유키나에게는 없었다. 어설프게 마무리를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수밖에. 헐렁하게 여유가 남는 잠옷 바지를 걷어올리고 맨살에 자극을 줄 건지, 아니면 얇은 옷 위로 약하게 내리눌러줄 건지. 유키나가 적당하게 자세를 잡은 순간이었다.

뒤돌아 엎드려있던 리사가 몸을 세워 유키나의 상체를 붙든다. 잡아끄는 악력이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기세에 놀라 유키나는 이끄는 방향으로, 리사의 품으로 끌려들어갔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두 다리가 유키나의 얇은 허리를 휘감았다가 마치 잠금쇠가 맞물려 닫히듯 단단히 죄어들었다. 리사. 당혹감에 친구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가, 유키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매달리듯 엉겨붙으며 몸을 밀착해오던 리사가 한층 깊게 파고들더니 유키나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흔적이 남을 정도로는 강하게.

그렇게, 흐른다. 몇 초, 아니면 십여 초, 아니면 1분 남짓의 시간이.

“......유키나.”

“......응.”

“나, 오늘 진짜 좀, 피곤한가봐. 아무래도 일찍, 자야겠어.”

“그래.”

“유키나, 나 부탁 하나만......”

남은 심지를 스스로 태워버린 뒤 점차 꺼져가는 촛불처럼 목소리가 약하게 흩어진다. 이해가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으나, 훌쩍이며 우는 리사를 다독여주며 유키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금 전 맹목적으로 얽혀오던 몸짓은 진즉 가라앉아, 리사는 그저 친구가 입고 있는 잠옷 끝자락만을 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내가 잠든 다음에, 유키나가 잤으면 좋겠어. 내가 자는 거 확인하고, 그 다음에......”

“그럴게.”

“유키나가 먼저 잠들어버리면, 더는 정말, 안될 거 같아. 으응, 정말 무리......”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리사가 자는 거 확인한 다음에 내가 자면 되는 거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움직임이 애처로울 정도로 약하다. 짧은 순간 뒤엉킨 의지와 욕망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둔 탓에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전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어떻게 비춰질지, 그럼에도 아무런 의문도 없이 부탁에 따라주는 친구의 행동이 얼마나 고마운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다. 간신히 유지한 이성으로 떠올리는 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만약 유키나가 먼저 잠에 들게 된다면.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그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는 걸 어둠 속에서 듣게 된다면. 간신히 사그라든 내면의 욕망이 그 상황에서 어떠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괜찮아. 리사.”

“아......”

“리사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줄게.”

머리를 쓰다듬는 작은 손의 존재감이 의식에 스며든다. 뭐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옴싹이다가, 리사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앞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은 따뜻하고 상냥해서 이미 그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유키나, 나 정말 힘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쌓아온 소중한 관계를, 한순간 쾌락을 위해 불장난의 연료로 써버리자는 충동을 견뎌냈어.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미 꿈결에서 흐르는 의식처럼 일렁이는 중얼거림을 삼키고는, 아가씨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방감에서는 승전 선언에 이어지는 환호성과 흡사한 맛이 났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리사가 떠올린 첫 생각은 공감각을 담은 시의 한 구절 같았다. 왠지 기분 좋게 개운한 아침이네. 한 차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창문을 통해 비쳐드는 선명한 레모네이드 빛 진한 햇빛에 감탄한다. 매사 부지런하게 일찍 일어나는 리사로서는 침대에서 마주할 일이 좀처럼 없는 늦은 아침의 색채였다.

“......어라? 지금 몇 시지?”

정신을 차리며 리사는 자신의 휴대폰을 찾았다. 침대 옆의 협탁에는 단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맞다, 어제 유키나가 왔었지. 기억을 떠올리고는 아가씨는 뻗던 팔을 멈칫 떨었다. 어제 저녁 있었던 일련의 소동을 상기하는 건 결코 즐겁지 않았으나, 회상의 끝에 리사는 최면이 풀렸음을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다. 한숨 자고 나면 해결된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구나. 찜찜함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문제가 마무리되었다고 믿는 게 마음 편하다.

[달칵]

“아, 마침 일어났구나.”

방문이 열리고 유키나가 들어온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하게 커피 냄새가 났다. 여전히 잠옷차림이 아니었다면 아침 일찍 인근의 카페라도 다녀온 걸까 생각했으리라.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리사의 곁으로 다가와서, 유키나는 친구의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살펴보는 시선이 묘하게 집요하다.

“확실히 무리하고 있었나보네. 이렇게 늦잠도 푹 자고. 안색이 좋아보여서 다행이야.”

“아하하, 미안. 괜히 걱정끼쳤네.”

“리사는 걱정 좀 끼쳐도 좋아. 말했잖아. 그래야 나도 알 수 있다고.”

가볍게 말하고는 피식 웃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걸 말했다는 듯이. 그런 다음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중대 발표를 앞둔 것마냥 엄숙한 분위기를 잡는 유키나를 바라보며 리사는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조금 전의 여유로움이 훅 꺾여나간 느낌으로, 말을 고르던 유키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리사가 피곤해보여서, 아침 준비, 내가 했거든. 별 건 아니긴 하지만......”

“에에? 유키나가 식사 준비한 거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래서, 준비해뒀으니 내려가서 먹자. 정말 별 건 아냐. 토스트에 계란 하나씩 구웠어. 그리고 커피랑.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야.”

“유키나......”

“......조금 타긴 했어. 끝에만 조금.”

준비해뒀으니 빨리 내려와.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건지 톡 던지듯 말을 남기고는 유키나는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길게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남기는 궤적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계단을 콩콩 내려가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때에야 리사는 참았던 반응을 내보였다. 더없이 행복한 감정을 담아 쿡쿡 웃음짓다가, 차오르는 감정으로 젖어버린 그대로 울음기를 삼킨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뜨겁게 피어오르고 있는 감정에서 갈라져나온 웃음과 울음이었다.

“......완전 좋아해. 유키나, 정말로 좋아해!”

지금 당장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편법 삼아서 그렇게 힘껏 외친 다음, 리사는 친구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방에 남겨진, 나란히 놓여있는 두 사람의 단말 위로 레모네이드 빛 물결이 온화하게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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