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립스틱의 신데렐라

뱅드림 유키나 x 리사

그건 무더위가 찾아들기 전의 이른 여름, 휴일이 끝난 뒤 돌아온 어느 월요일이었다. 학년이 바뀌고 2달 가량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기에 사교성이 좋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무리를 지은 터였다. 이마이 리사 또한 활발한 성향의 아이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고, 얼핏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기울여주며,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분위기를 띄울 줄 아는 건 물론 때로는 아이들 간의 다툼을 풀어주는 중재자 역할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학기 초부터 친하게 지낼 상대를 물색하는 분위기 속에서 리사에게 열렬한 러브콜이 쇄도했던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무리를 이룬다고 표현해도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의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할만한 행동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거침없이 수다를 떠는 일. 좋아하는 가수와 배우에 대해 흥분해서 떠들어대다가, 용돈 문제처럼 그 나이의 눈높이에서는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고민들을 늘어놓으며 서로 상담을 하고는, 귀찮게 쌓여가는 숙제를 두고 그런 과중한 과제를 떠넘긴 교사들에 대해 치졸한 험담을 쏟아낸 다음에, 인근에 새로 들어선 유명한 가게에 대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정보 교환을 하는 거다. 일정한 간격으로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는, 도돌이표에 묶인 변주곡 같은 대화를 나누는 행위야말로 교실 속에서 깔리는 관계망의 핵심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정말이지, 잠깐만 있어봐. 재촉하지 않아도 이야기 할 거라니까.”

“얘는, 왜 뜸을 들이고 그러는 거야. 바로 어제 일이잖아.”

그 날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좀 더 열광하게 되는 이야깃거리가 놓여있었다는 점이 조금 특별했을 뿐이다. 수다를 떨 소재의 근원은 무리에 속해있는 한 아이에게 있었고, 주제는 10대의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연애 관련이었다. 호기심 많은 소녀들에게 사랑이란 언젠가 자신들이 답파해야할 신비로운 미답지 같은 개념이었다. 신대륙에 대한 정보를 캐묻는 탐험가들과 같은 심정이 되어,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소녀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사랑 이야기를 꺼내며 소란스럽게 열광하고는 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직접 연애를 체험했다는 선언은 그야말로 승전 기념식에서 개선 장군이 풀어놓는 무용담과 같은 무게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일요일에 첫 데이트를 했었다. 거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호기심 많은 소녀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에 도마 위에 오른 안건은 당시 모여있던 소녀들에게 한층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귀기 전부터 당사자였던 아이는 친구들에게 그 남자애에게 고백해도 좋을지, 사소하게 있었던 일을 두고 그를 과연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해도 될지, 고백한다면 어떻게 코디하면 좋을지 등등 온갖 일들로 상담을 청해왔던 터였다. 소녀들은 매번 불꽃 튀는 토론을 벌이곤 했고, 자신들이 내린 결론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건지를 흡사 경마장에서 미리 점찍어둔 기수를 쳐다보는 심정으로 기다리고는 했었다. 사연이 그러다보니, 첫 데이트에 대해 보고를 하는 자리는 그야말로 극적으로 사업 운영에 성공한 최고경영자가 흡족한 표정을 한 주주들에게 현황을 전하고 약속한 배당금을 나눠주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던 거다.

친구의 데이트 경험담을 듣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그리 깊은 감상은 없이, 리사는 가볍게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애가 제법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느니, 데이트 중간에 목이 마를 즈음 먼저 마실 걸 구해서 건네주는 센스를 보였다느니 하는 부분마다 낮게 감탄사를 내어주다가, 헤어지기 전 손도 조심스레 잡게 되었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한 차례 박수를 치며 뺨을 붉힌다. 좋은 느낌이었잖아. 장난기 섞어 말을 꺼내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일 때까지만 해도 리사는 그닥 진지함 없이 지켜보는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리사는 연애할 생각 없어? 분명 인기 많을 건데.”

“맞아. 남자애들은 리사처럼 섬세하게 신경 써주는 타입에 엄청 약하니까 말야.”

“에? 갑자기 초점이 이쪽으로 넘어온 거?”

“그게 말이지, 이런 화제가 나올 때마다 리사, 무척 관심 보이는 표정이긴 한데 딱히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걸. 이상형이라든가, 좋아한 적 있는 남자애 이름이라든가, 연애 감정 느낀 경험담이라든가.”

한순간에 시선들이 리사에게로 모여든다. 이제 사귀는 사람이 생기게 된 아이가 짐짓 권위자가 된 듯한 어조로 지적하는 말에 주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갑작스레 발언대로 끌려나온 참관객처럼 당황하여 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던가? 한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던가? 하긴 그랬으리라. 평소에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주제가 나올 때마다 리사는 한층 더 ‘들어주는 역할’ 에 충실해지는 편이었으니.

“혹시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가 있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편이라거나?”

“앗, 그거다!”

“의외로 순정파, 랄까. 그런 인상?”

“아냐, 아냐. 그런 상대 없어. 정말!”

리사가 부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 만족하여서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 주제가 바뀌며 모여든 시선들도 금방 다른 쪽으로 옮겨갔고, 리사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손등으로 뺨을 슬쩍 문질렀다. 생각도 못한 흐름에 휘말린 탓에 도통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끈질기게 들러붙어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라니. 딱히 그런 비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생각해보면 정확하게 지적을 당한 셈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리사는 애정이라는 감정에, 연애라는 관계맺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도서관에 갔었던 날, 열람실에서 소녀가 뽑아들었던 책도 연애소설집이었으니. 누군가에게 있어 별님보다도 아름답고, 달님보다도 상냥하며, 햇님보다도 따스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열렬한 사랑 이야기에 나온 한 구절의 표현은 인상적이어서 꼬마 아가씨는 몇 번이나 그를 따라 읽어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좀처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유독 이 화제에 있어서 자신이 과묵해진다는 사실에 대해 여태 자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연애와 데이트인가. 아무리 아껴도 부족한 용돈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 시작한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리사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는 자신도 두근거리는 사랑을 하게될 거라고 막연하게 꿈을 꾸고는 있지만, 지금은 도통 그게 어떤 모습일지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하이틴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훤칠하게 키가 크고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는 미소를 멋들어지게 짓는 남자애라거나,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요즘 한창 인기인 차분한 인상의 미청년이라거나......친구들이 종종 말하곤 하던 그런 부류의 이상형 묘사도 그리 의미있게 와닿지는 않는다. 훗날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었음 좋을지 적당하게라도 설정하는 게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탕조차 잡아두지 못한 개념을 두고 그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

“저기, 리사? 듣고 있어?”

“......응? 아, 아하하, 듣고 있었어. 그게, 끝 부분을 조금 놓치긴 했지만!”

“돈 모아서 방학 때 같이 놀러가자는 이야기 중이었거든.”

주변의 다른 아이들보다 어설픈 부분이 많아서, 나름 성숙한 티가 엿보이는 친구들에 비해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해 능숙하게 이야기하려면 자신은 아직 100일? 혹은 그 이상? 성장을 위해 긴 시간을 보내야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가 아직 미숙한 탓에 이 화제에 있어 또래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는, 리사는 흘러가고 있던 이야기에 자연스레 합류하였다. 실내 풀장 괜찮네, 나도 가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일과가 끝난 뒤, 리사는 같은 학급의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복도를 총총 뛰어나갔다. 당번인 아이가 있다면 기다려주고, 시간을 맞춰 다들 함께 귀가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리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선약이 항상 존재했다. 같이 가지 않는 거냐고 학급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5학년이 되어 학급 배정이 예년과는 다르게 된 이후로 방과 후 리사의 목적지는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두 칸 건너 다른 학급의, 이어지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뒷문 주변 창가.

“유키나!”

봄이라는 계절은 아름다웠고, 유자로부터 부드럽게 짜낸 맑은 즙과도 같은 색채의 햇살이 유리 표면에 흐르며 공간을 온기로 적셨다.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햇빛 아래에서 자아낸 실처럼 얇은 은빛 머리카락은 유달리 곱게 보였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고 있는 탓에 비쳐드는 봄날의 햇빛을 면사포처럼 머리 위에 두르고 있다가, 여자아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길을 들어올렸다. 급하게 달려와서는 자신의 앞에서 가쁘게 숨을 고르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미나토 유키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하아, 후우우, 됐다. 유키나. 오늘 하루 어땠어?”

“괜찮았어.”

“음음, 다행이네! 돌아가는 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서로 이야기해주자.”

“응.”

미나토 유키나는 이마이 리사가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소꿉친구였다. 소꿉친구라고 해도, 단순히 같은 유치원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정도의 인연이 아니었다. 유치원을 같이 다녔다는 건 기본. 그에 더해 바로 이웃집에 살고, 게다가 서로의 방은 베란다가 맞붙은 형태로 이어져 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두근두근 가슴이 뛸 수밖에 없는 비밀을 오랜 시간 공유해온 사이라고 해도 좋겠지. 자신의 방에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 곧바로 답이 돌아오는, 그런 경험을 나누며 자란 관계는 그리 흔하지 않을 거니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번 같은 학급에 배정된 덕분에 소녀들은 언제나 붙어다니곤 했었다. 확률의 여신이 그녀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 학기 첫날 아침 등교길에 잔뜩 풀이 죽어있는 친구를 달래주다가, 리사는 유키나와 약속을 했었다. 학급은 나뉘게 되었지만 일과가 끝난 뒤 귀가는 매일 함께 하기로. 각자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는 방과 후에 만나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로 알려주자고.

리사가 길가의 경계석 위를 따라 장난스레 걷는 동안, 곁을 걸어가며 유키나는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하였다. 1교시 시작 전 창문 밖으로 담벼락을 따라 유유자적하게 걷는 귀여운 삼색 고양이를 봤다는 보고부터, 아침 등교길에 리사가 나눠줬던 사탕을 수업 중에 몰래 먹었다는 고백에 더해, 음악 수업 때 예전 함께 불러보곤 했던 노래가 예시곡으로 나와서 살짝 들뜬 기분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나가는 전언은 생동감 있게 동적이라기보단 차분함이 과할 정도로 정적인 잔잔함으로 채워져 있었으나, 리사는 유키나의 말을 즐겁게 들었다.

“리사는 어땠어?”

“나도 언제나처럼 평범했달까. 아, 그러고보니 애들 사이에서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마침 끝에 도달한 경계석에서 폴짝 뛰어내리고는 리사는 오늘 있었던 ‘특기할만한 사건’ 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주제는 물론 오늘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일에 대해서. 저번에 이야기했던, 고민 많다는 애 기억해? 그래서 말야, 그 애가 드디어 예의 그 남자애랑 사귀게 되었거든. 지난 주말에 데이트를 했다고 해서 오늘 그걸로 다들 난리였어. 데이트를 했다니, 대단하지. 데이트를 하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엄청 좋을까? 두근두근한 느낌? 나로선 도통 감도 잡히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살짝 들뜬 채로 설명과 감상을 이어가다가 리사는 말을 멈췄다. 유키나에게 있어선 어차피 친구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일 뿐, 관심 없을 내용으로 너무 떠들고 말았으려나. 애시당초 유키나는 이런 주제에 별반 관심을 두는 편도 아니지. 대화에 흥미를 잃은 기색으로 다른 곳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돌리고 있을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녀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

“미안! 유키나는 이런 이야기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 나도 참, 혼자 신나서......”

“리사.”

“응?”

유키나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새초롬하게 치켜뜨고 리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유키나가 호기심을 보일 때의 반응이란 사실을 소꿉친구인 리사는 알았다. 유키나가 자신에게 집중해주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낀 동시에, 리사는 예상과는 다른 친구의 반응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유키나는 사랑 이야기에 들떠하는 또래의 여자애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막연하게 품고 있는 환상에 열광하는 게 아닌,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두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눈빛.

“데이트, 해보고 싶은 거야?”

“에?”

갑자기 예상 못한 물음을 꺼내면서도 유키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기에, 그로 인한 이질감에 리사는 잠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깜박이고만 있는 친구를 마주보며 유키나는 다소곳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눈꼬리를 순하게 내리고 있는 유키나의 표정에서는 짓궂게 놀리려는 의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입술 끝을 옴싹이고 있다가 리사는 멋쩍게 웃었다. 다른 누군가가 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으리라.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능청스럽게 답을 했겠지. 말을 꺼낸 상대가 다름 아닌 유키나란 점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 되어버린다.

“아하하. 관심은, 있으려나? 어디까지나 호기심 정도지만!”

“데이트는, 두 사람이 일정을 맞춰 외출하는, 그런 거였지?”

“그렇, 지?”

“......응.”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유키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리사 또한 그 곁에 멈춰선다. 생각에 잠겨서 말없이 허공의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는 유키나의 행동은 리사에게 있어 친숙했다. 이름난 가수부터 무명의 일반인까지 출연하여 제각기 가창력을 뽐내는 방송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기준에 생소하고 낯선 창법의 곡이 흘러나오곤 할 때마다 유키나는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받아들이기 난해하지만 관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주제에 집중하여, 흡사 벽면에 비치는 빛무리 아래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꼬리는 느릿하게 흔들어대는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사색은 길었고, 소녀들이 멈춰서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마찬가지로 귀가하고 있는 아이들이 곁을 지나간다.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길의 측면에 붙어선 다음 리사는 자신들을 돌아보는 눈길을 향해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걸어가던 중 난데없이 멈춰섰다는 상황이 다소 어정쩡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그 때문에 친구를 다그치거나 주의를 환기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생각을 이어갈 여유를 주고는, 기다릴 뿐.

그렇게 짧은 공백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리사.”

“응?”

“데이트, 해볼래?”

물음표가 하나 머리 속에 톡 튀어올랐다가, 곧이어 엄청난 수의 물음표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서 최초의 물음표를 덮어버린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대었다가 다음 순간 리사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헛숨을 삼키고는 잠시 호흡을 하는 걸 망각할 지경으로, 그렇게나 놀라서. 자신이 혼자서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을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어, 확신 없는 표정을 하고서 소녀는 손을 들어 자신과 상대를 번갈아 가리켜보였다. 데이트? 나랑, 유키나가? 손짓에 담긴 의미가 전해진 건지, 리사를 가만히 지켜보던 유키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그녀가 데이트를 한다. 이마이 리사와 미나토 유키나가, 데이트를 한다. 그 한 문장을 수십 번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리사는 그 이외의 생각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제대로 생각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진다는 게 이런 상태를 두고 말하는 거구나. 문자 그대로 머리 안쪽이 백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수업 시간에 딴청을 피우다가 기습적으로 호명을 당했을 때처럼, 아니 그런 경험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게.

“그, 그게......유키나, 데이트를 한다는 말은......”

“같이 약속을 잡아서 외출하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분명 맞지만......조금 다르려나, 싶기도.”

“어떤 면에서?”

“으음, 뭐라고 해야하지. 데이트는, 그러니까......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데이트 신청이란 걸 하고, 그 다음에......”

사실 정확히 아는 건 조금도 없지만. 애매한 심정에 뒤로 갈수록 말을 흐리고는 리사는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 가볍게 소리내어 웃고는 손을 들어 옆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행동한다고 한들 혼란스러운 기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유키나와 데이트를 한다. 재차 그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사는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유키나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얌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끄러미 리사를 바라보며, 얇은 눈썹 끝은 살짝 치켜올리고 있는 채로. 오후의, 비가 갠 뒤 맑아진 가을 하늘을 연상케하는 눈동자에서는 장난을 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절차가 필요한 거라면, 방금 내가 리사에게 신청을 한 거야.”

“에?”

“좋아하는 사이라면 되는 거지? 그럼 충분하다고 생각해. 나는 리사를 좋아해.”

그리 심각하지 않아도 좋을, 얽혀드는 무게감은 없는 ‘좋아해’ 였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았던 유키나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 순간의 고백에는 알 듯 모를 감정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우정의 반짝거림이 조금 더 많이 깃들어 있었겠지. 하지만 때로는, 무게감 없는 작은 돌멩이가 수면을 두드리며 호수에 커다란 파문을 그리기도 하는 법이다. 자각 없이 전해진 말이 무감하던 마음에 멎지 않을 떨림을 만드는 듯이.

“유키나......”

안개처럼 옅은 발음으로 중얼거리고는, 상대를 바라본다. 부름에 답이라도 하듯 유키나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여보였다. 마른 침을 삼키고서 리사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시선의 끝이 멋대로 유키나의 얼굴을 훑으며 움직였다. 예쁜 이마를 단정하게 덮는 앞머리와 말랑하게 볼살이 남아있어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뺨을,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움직일 때 간혹 겉으로 드러나는 초승달처럼 모양새 고운 귀를, 평소 단아하게 꼭 다물어진 분홍색 어여쁜 입술을. 유키나, 원래도 예쁜 편이었지만, 하지만 이렇게나 예뻤던가. 게다가 동시에 어딘가 멋지기도 해. 어쩌다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말을 할 때에도 시선을 돌리며 뺨을 붉히기만 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뚜렷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걸. 멍하게 그와 같은 감상을 떠올리다가 리사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데이트를 한다는 건 자신들이 하기에는 뭔가 걸맞지 않은, 전혀 다른 무언가일 거라는 막연한 걱정은 이제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그게......”

“......미안해. 내가 떠올린 게 리사가 생각하는 데이트와는 전혀 다른 거라면, 취소할게. 잊어줘.”

“에?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의 결론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확신이 없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혼자서 괜히 분위기를 타고는 실수를 해버렸다고 생각한 건지, 표정을 굳히고 제안을 없던 일로 하려는 유키나의 말에 리사는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펄쩍 뛰어나갔다.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코끝이 맞닿을 지경으로 가깝게, 그 정도의 간격. 다가온 친구를 보며 유키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한 발 늦게 리사 자신도 놀라 그 자리에서 작게 한 차례 더 깡총거리며 작게 몸을 들썩인다.

“하자, 데이트!”

“......괜찮은 거야?”

“응, 완전 괜찮아! 그게, 나도......좋으니까! 유키나가! 데이트도 좋아! 부, 분명 좋다고 생각해!”

“리사, 목소리가 커.”

“미, 미안.”

나지막한 타박을 듣고서야 자신이 있는 힘껏 소리를 치듯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녀는 깨달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길가에 서 있는 자신들에게로 기웃기웃 들러붙은 상태라는 사실도. 이마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리사는 긴장하여 뻣뻣해진 몸을 간신히 한 걸음 뒤로 움직였다. 무언가 말도 안되게 극적인 순간이 지나갔단 느낌만 어렴풋하게 들었다. 키가 커지기 직전에 찾아드는 신호라고 어머니에게 들었던, 언젠가 찾아들었던 약한 열병의 감각과 비슷했다. 아프다기보다는, 몽롱한.

이야기가 끊어지고 몇 초 동안 소녀들은 멀뚱하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왠지 머쓱해져서 눈을 몇 차례나 크게 깜박여댄다. 가자. 작게 말하며 고갯짓을 한 뒤 먼저 걸음을 뗀 건 유키나였고,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추며 리사가 그 곁을 따라붙었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생각이 많아져서 오히려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집중하는 모양새로.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건너야 할 길목의 신호등이 달칵 붉은빛으로 바뀐 일은 흡사 극의 진행을 위한 장치가 예정에 맞춰 작동한 것만 같았다. 보도의 경계에 서서 소녀들은 신호를 기다렸다. 트럭 한 대가 급하게 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려간 이후 주변은 조용해졌다. 어수선한 도시 공간에 짧게 생겨난 한적함. 내딛던 발에 기울이던 신경이 자연스레 곁에 서 있는 상대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그래서, 데이트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걸어오는 내내 떠올리고 있던 물음 하나가 혀에 매달린 채로 답답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입 바깥으로 꺼내지 못하고 리사가 얇은 한숨만 삼켰을 때, 이야기를 꺼낸 건 유키나 쪽이었다.

“새로 악보를 사야한다고 했었지? 다른 곡, 연습해보고 싶다고.”

“에? 앗, 으응.”

“학교에서도 생각했었어. 오늘 같이 사러가는 게 어떨까, 하고. 리사가 가고 싶다던 새로 생긴 가게에도, 아마 갈 수 있을 거야.”

“오늘? 지금 집에 간 다음에?”

“같이, 갈래?”

학교가 마친 이후 둘이서 일과를 함께 보내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부모님들이 귀가하실 때까지 같이 집에서 놀거나, 손을 꼭 마주 잡고 외출하는 게 그녀들의 일상이었으니. 외출 제안은 부담없이 꺼낼 수 있는 편이었고, 거기에 그렇게까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유키나가 그와 같은 말을 꺼냈다면 리사는 생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이번에도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확연히 붉어진 얼굴로.


준비가 끝나면 내가 유키나에게 갈게. 잠시만 기다려줘. 각자의 집 현관으로 들어가기 전, 담벼락 너머로 소꿉친구에게 그렇게 말을 전한 뒤 리사는 폴짝 뛰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향할 건지 정하지 못했음에도 마음이 급해서 달음박질부터 치는 토끼처럼, 평소보다 어수선한 태도로 소녀는 자신의 방을 한 차례 훑었다. 동전이 짤랑짤랑 제법 묵직하게 들어가는 지갑을 꺼내들고, 둘러매는 작은 가방을 챙긴다. 가방에는 곱게 접은 손수건과 만약을 대비하여 챙기는 밴드가 들어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외출하는 거라면 준비는 그걸로 좋았다.

“어디, 이러면 되려나?”

가방을 둘러매고는 리사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허리에 작은 리본 매듭이 달린 연남색 원피스는 여름의 초입에 어울리는 귀여운 느낌을 냈다. 코디에 섬세하게 신경을 기울이는 어머니가 챙겨준 옷이니 어울리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걸로는 부족했다. 이미 학교에 입고 갔던 옷이 아닌가. 데이트를 나가는 거라면 좀 더 본격적으로 준비해야만 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사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마음에 들어했던 옷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다들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한여름의 옷들까지 꺼내들어 거울 앞에 들고가기를 반복하다가, 소녀는 지난 가을 특히 마음에 들어했던 작은 베레모까지 머리에 써보았다. 계절에 맞게 파스텔톤으로? 아니면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어두운 색감으로? 아직 더운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민소매의 깔끔한 옷차림이 좋을지, 아니면 팔목까지 단정하게 덮는 옷차림이 좋을지. 가까스로 좁힌 후보들을 번갈아 들어보다가 리사는 베란다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어느 쪽이 보다 어울릴 건지 유키나에게 물어본다면 간단할 터였다. 잠시 고민은 하겠지만,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결정을 내려줄 테니.

“......그건 곤란하지.”

오늘은 유키나에게 의존해서는 안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리사는 커튼을 쳤다.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과정을 혹여나 소꿉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선물을 건네주기 전에 포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아쉽게 되는 부분과 비슷하겠지. 혼자 힘으로 유키나의 곁에 섰을 때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나설 거야. 커튼의 끝자락을 꾸욱 끌어당기며 리사는 그렇게 결심했다.

옷, 그 다음은 머리끈, 그 다음은 잡다한 장신구들. 책상 위 탁상시계의 시침이 점차 커다란 원을 그려나가고 있었으나 고심 속에 빠진 소녀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가방을 고쳐매고, 튀어보이는 양말을 신었다가 수수한 걸로 바꿔보고, 머리끈을 풀고 빗질을 새로 했다가 다시 묶는다. 아무리 보아도 어딘가가 부족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유키나, 이런 모습으로 나가도 귀엽다고 말해주려나.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슬 목걸이를 풀어버리며 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입어도, 어느 부분을 손보더라도 거울 속 자신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데이트를 하기에는,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리고 무엇 하나 명확히 알지 못하는 꼬마애. 이대로 나선다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제대로 된 두근거림 없이 결국 평소의 외출과 다를 게 없어질 거란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소중한 소꿉친구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는, 묘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 한낱 흘러가는 일상의 한 단면으로 남게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거울 속 소녀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진다. 거울 세계의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다가 리사는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 안에서만 해답을 찾으려고 한 게 한계였던 거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 되려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을 시도해보는 게 맞겠지. 잰걸음으로 거실로 내려온 뒤 리사는 고개를 빼서 드레스룸이 있는 쪽을 기웃거렸다. 집은 비어있었고, 지켜보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지만 소녀는 눈치를 살피며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엄격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모녀 관계임을 안다면 소녀의 다소 능청스러우면서도 언제나 남을 배려하며 상냥함을 잊지 않는 성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소녀가 부모의 소지품을 가지고 이런저런 장난을 치더라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두고 심하게 혼내지는 않을 터였다. 허락받지 않은 행동을 멋대로 해버릴 정도로 소녀가 말괄량이는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그와 같은 사고를 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덮개에 붙은 거울이 거실에서 흘러드는 빛을 받아 반사광을 흘렸다. 양쪽으로 개폐하게 되어있는 화장대는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 각 단에 종류를 맞춰 작은 병들과 얇은 붓들을 보관할 수 있게 되어있었고, 손바닥보다 큰 두툼한 곽들은 하단에 붙은 두 칸의 서랍장 안에 가지런하게 넣어둘 수 있었다. 어깨 너머로 어머니가 화장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던 입장에서, 화장대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장품들의 종류에 리사는 당혹감을 느꼈다.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소꿉놀이를 할 때 쓰던 장난감 화장대와는 겉의 구조만 비슷할 뿐 아닌가. 막연하게 화장을 하면 제법 어른스럽게 보일 거라는 기대감이 한 풀 꺾일 지경이었다.

“아냐, 천천히 해보면 될 거야.”

본 적 없는 상표들과 좁은 면적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을 불안한 눈으로 살펴보면서도, 리사는 꿋꿋하게 화장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얄팍하긴 하지만, 겉치장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로부터 이래저래 주워들은 지식은 있었다. 뭐, 떠들어대는 애들도 정말로 화장을 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으나 그 시점의 리사로서는 전해들었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얼굴 전체에 바탕을 깔아야 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얀 크림을 얇게 바르는 거였던가? 아니면 가볍게 분칠을? 더운 여름 땀띠가 돋았을 때 피부에 뿌리곤 하던 분말을 써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화장대 내부의 칸막이들을 살펴보다가 리사는 그나마 눈에 익숙한 물건을 찾아냈다. 생김새조차 생소하여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를 화장품들이 가득했지만, 그 중에 자신도 쓸 줄 아는 물건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소녀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다음은, 뭘 해야 좋을까. 가끔 집에 찾아오는 고모님이 피부에 촉촉한 습기를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여 말하던 일을 떠올리고는, 소녀는 속이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옥색의 병을 집어들었다. 샘물을 담은 듯 맑게 들여다보이는 모양새가 내용물을 어느 정도 뿌리더라도 몸에 해롭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주었다. 둥글게 튀어나온 윗부분을 꾹 눌러보고는, 칙- 소리를 내며 공중에 물기를 흩뿌리는 광경에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탕이 잡혔으면 강조선을 그리고 포인트를 살려주는 단계에 들어간다고 했던가? 드라마에 등장하는 스타일 좋은 여성들이 흔히 연출하듯 입술을 따라 붉은 루즈를 바르는 광경을 한 차례 상상해보고는, 립스틱 형태로 생긴 물건을 찾아 손을 뻗는다. 커튼을 쳐두고는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둑한 드레스룸에서 리사는 애매한 지식과 확신 없는 직감에 의존해 손을 움직여나갔다. 얼굴에 무언가를 뿌리고 바를 때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을 따라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을 조금씩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화장을 하고 나가면 유키나, 분명 깜짝 놀라겠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매력적이라고 칭찬해주려나. 리사, 화장을 했더니 정말 예쁘네. 그렇게 말해줄까. 립스틱 덮개를 열고 꽁무니를 돌리며 리사는 멍하게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입술에 뭉툭한 끝이 문질러지는 감각은 묘하게도 기분 좋았다. 입술을 칠하는 과정만큼이나 화장을 하고 있다는 실감을 안겨주는 행위도 없었다. 도톰한 편인 입술 위를 한 차례 훑은 다음 아쉬운 기분에 리사는 재차 덧씌우기를 반복했다. 덧칠할 때마다 입술을 마주 문지르는 걸 잊지 않는다. 손이 달달 떨려 이따금 방향이 빗나가기도 했지만, 꾸욱 힘을 줘서 내리누르면 문제될 건 없었다. 입술 위로 남는 흔적이 밀려나듯 번지는 감각도 들었으나 소녀는 거기까지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화장을 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거는 일이랍니다. 자신감의 마법, 매혹의 마법! 그와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흘러나오는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린다. 재투성이 신데렐라를 앞에 두고 요정 대모가 요술 지팡이를 휘휘 흔들어대는 장면에서, 어지럽게 빛에 감싸인 지팡이가 어느 순간 얇은 모양새의 립스틱으로 바뀌는 연출이 인상적이었기에 소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감의 마법, 매혹의 마법. 장밋빛 루즈를 입술에 바른 신데렐라가 요염하게 미소짓는 걸로 끝나는 영상은, 옛 이야기에 담긴 내용을 한 방울의 정수로 응축해 담고 있었다.

“후우......”

이제 충분하다는 만족감을 느낄 즈음 되어서 리사는 손을 내렸다. 뭐가 더 필요할까.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위로 살짝 쓸어올리는 과정? 언젠가 그런 식으로 화장을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 작은 브러쉬 같은 걸 사용했었지. 눈썹솔을 찾기 위해 리사가 화장대 내부를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얇은 판 위에 쇠구슬을 굴리는 듯한 차임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있는대로 긴장하고 있던 탓일까. 누가 난데없이 등을 톡 건드린 것마냥 리사는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다급하게 일어서는 몸짓에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누가 온 거지. 어머니께서 돌아오신 건가? 당황하여 주춤거리며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리사는 거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침과 분침은 소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놓여있었다. 너무 오래 지체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유키나를 기다리게 만들었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건데. 초인종을 누른 게 유키나일 거라고 짐작하면서 리사는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문을 열어줘야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사는 화장대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것저것 시험해보느라 꺼내둔 화장품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나름 정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사용하였으나, 종류가 너무 많은 탓에 점차 난잡해지게 된 모양이었다. 손을 댔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처음 그 상태로 돌려둬야만 할 터. 빨리 정리하고 유키나에게 가자. 마음을 정하고 소녀는 화장대의 덮개문을 손으로 붙들었다. 덮개 안쪽에 붙은 거울이 다른 각도로 움직이며 빛을 쏘았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이 실내를 가늘게 찢었다. 현관의 차임벨이 연달아 두 차례 더 울렸으나 리사는 호출에 응답하러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덮개문을 건드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거울 속에서 소녀의 왼손이 뺨을, 허옇게 뜬 표면을 건드리며 움직였다. 손가락의 끝은 붉게 칠해진 흔적 주변에서 멈췄다. 입술의 원래 형태를 지워버릴 지경으로 넓게 퍼진, 흡사 이야기 책에 나오는 괴물의 형상처럼 삐뚤한 자국.

거울에 비친 소녀의 얼굴은 엉성한 화장으로 인해 그야말로 참담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화장이라기보다는 분장이라고 말하는 쪽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지난 가을, 테마 파크의 할로윈 행사 무대에 올라왔던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진행자가 꼭 이와 같은 분장을 했었다. 지나치게 하얗게, 동시에 지나치게 붉게. 무엇을 해야하는지에만 집중하여 손을 움직이는 동안 거울을 한번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다. 소녀가 품었던 기대와는 달리, 화장대 앞에는 한결 성숙한 모습이 된 아가씨 대신 치기 어린 욕심에 휘말려 엉망이 된 꼬마가 보기 안쓰럽게 있을 따름이었다.

리사는 손바닥으로 힘껏 얼굴을 문질렀다. 이런 흉해진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 들뜬 마음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서러운 심정에 눈에서 눈물이 한가득 흘러넘쳤다. 물기로 화장이 번져서 한층 엉망이 되고 있었으나 어렸던 리사는 그저 손바닥과 손등으로 얼굴 표면을 닦아내려고만 하였다. 유키나가 기다리고 있단 말야. 마음 한쪽에서 사납게 꾸짖는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다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리사?”

움직이던 손이 얼어붙는다. 위층에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작지만 뚜렷했다. 친구를 찾는 유키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작게 걸음을 옮기는 기척도 들렸다. 어째서 유키나가. 그렇게 생각했다가 리사는 금방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베란다를 통해 넘어왔으리라. 기다려달라고 말한 이후 전혀 소식이 없는데다가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답이 없었고, 크지는 않지만 비명까지 울리지 않았던가. 방이 비어있는 걸 보고 한층 걱정하고 말겠지. 그를 증명하듯 리사를 찾는 유키나의 행동은 점차 다급해지고 있었다.

유키나에게는 죽어도 이런 모습 보일 수 없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더라도 좋으니 유키나에게만은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고 있는 친구의 목소리가 점차 가깝게 다가올수록 리사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에 몸을 떨었다. 드레스룸의 문을 닫고 그늘 속으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생각일 뿐이었다. 유키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서 리사는 드레스룸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였다. 화장대 앞 탁자에 올려뒀던 화장품 몇 개가 굴러떨어져 소녀의 주변에 데구르르 흩어졌다.

“리사? 어디 있는 거야?”

“......”

“리사!”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는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불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며 유키나는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어깨와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떨려서, 리사는 몸을 움츠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엉망이 된 모습을 현장과 함께 고스란히 유키나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거실을 한 차례 둘러본 다음 몸을 돌리면 문이 열린 드레스룸이 시야에 들어올 거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리사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계단을 뛰어서 내려오던 신데렐라가 벗겨진 유리구두 때문에 그만 넘어지게 되었더라면. 그래서 뒤따라오던 왕자님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더라면. 자정이 지나 시계탑의 종이 울리고, 요정 대모의 마법이 겨울날의 입김처럼 한순간 허무하게 사라지고, 달빛 머금은 아름다운 비취색 드레스와 별빛 담긴 보석 목걸이, 웅장한 호박 마차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게 되어버렸다면. 그렇게나 흠모하던, 조금 전까지 두근거림을 품고 마주 대할 수 있었던 왕자님의 앞에서 볼품없는 재투성이 여자애의 모습으로 서게 되었다면.

“......리사?”

“......유, 유키나.”

적어도 울지는 않아야지. 이를 꾹 악물며 그렇게 다짐을 하였으나, 드레스룸의 열린 문을 향해 걸어온 유키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리사는 저도 모르게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서도 유키나는 울고 있는 리사의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맞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해서, 그에 안도하면서도 리사는 다른 손을 들어 화장품과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보, 보면 안돼. 지, 지금 나, 흐윽, 이상해서......부탁, 부탁이야.”

“리사......”

“나, 어, 엄청 바보같은 짓을 해서, 흐어엉, 그래서......미안, 미안, 유키나가 기다리는데, 흑, 미안해......”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데, 데이트, 흐윽, 잘하고 싶어서......유키나가, 그렇게 말해줘서, 데이트, 말해줘서, 기뻤는데, 엄청 기뻤, 는데......”

얼굴을 가리는 손을,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 아래로 붙들어내린다. 두 손을 모두 맞잡은 채로 유키나는 리사와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민망함과 미안함으로 뒤섞인 심정에 눈길을 피하려고 하다가, 리사는 천천히 소꿉친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엉망진창에 괴이쩍은 상황이었음에도 유키나는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지도, 짜증내지도 않는다. 리사, 괜찮아. 짧게 반복해서 꺼내는 말은 짓고 있는 표정처럼 잔잔해서, 그 어느 위로보다도 상냥하게 느껴졌다.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가슴 속에 넘치게 차올랐던 서러운 감정은 눈물에 섞여서 모두 사라진 듯 싶었다. 리사. 한 차례 더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목소리에 소녀는 힘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나가 좋아서, 유키나가 데이트를 하자고 해준 게 너무 좋아서,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가고 싶어 화장을 하려고 했었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가 되어서, 그래서 그렇게 예뻐진 모습을 누구보다도 유키나에게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 채우고 있던 하나의 감정이 쏟아져나간 뒤 생겨난 공백 속에서, 잔류물처럼 전하고 싶은 말이 덩어리째 찰랑거렸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술만 위태롭게 달싹일 뿐이었다. 꺼낼 수 있는 말은, 그보다는 훨씬 짧았다.

“......얼굴, 많이 이상하지?”

“하얀 게 조금 묻기는 했지만, 리사의 얼굴은 그대로야.”

“엉망이 되어서, 유키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지금도, 보이고 싶지 않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음에도, 그를 듣고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차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유키나를 마주하고서 리사는 그런 친구가 얄밉다고, 조금, 아주 조금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식으로 조금, 아주 조금 얄미운 친구를 둬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소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여전히 따뜻했다.

“엉망이 되지 않았어. 말했듯이, 리사의 얼굴은 그대로야.”

“그대로일 리 없는걸. 여기까지, 붉은 게 번져서......”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야.”

“......”

“리사의 얼굴은, 그대로야. 귀엽고, 예뻐.”

숨을 들이삼키는 소리는 분명 작았음에도, 유독 크게 들렸다. 호흡하는 법을 잠시 잊은 채로 리사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짧은 소동을 벌이는 동안 요란스레 치솟았던 의식 속 불협화음들이 한순간 소거되어 진공 상태에 놓이게 된 것만 같았다. 소꿉친구의 표정에는 변함없이 담담한 기색만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의식하지 않고,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한 이의 얼굴로.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가 흡사 짧은 훌쩍거림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서럽지 않은데도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리사는 어깨를 꾸욱 움츠리며 그를 견뎌냈다. 다시 눈물을 보인다면 밀려든 행복감을 놓쳐버릴지도 몰랐다. 역시, 역시 유키나가 좋아.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해진 마음이 가슴 속에 자리잡아서, 혹여나 그를 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리사는 한쪽 손을 자신의 앙가슴에 올렸다.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의 존재가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 잡은 데이트는 취소하는 걸로 되었다. 나란히 앉아서, 소녀들은 어질러진 화장품들을 정리하였다. 손을 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끔 완벽하게 원래대로 돌려둘 수는 없었으나, 머리를 맞대고 제법 노력한 끝에 화장대는 누가 봐도 깔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화내시지 않겠지. 지나가듯 꺼낸 유키나의 중얼거림에 리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통해 노을 직전의 진하면서도 얕아진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거실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 유키나는 물티슈로 리사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혼자서 할 수 있다고, 부끄러움을 못 이긴 리사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말없이 묵묵하게 행동을 계속하는 유키나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얼굴을 맡기고, 끈적하게 들러붙은 흔적들이 닦여나가는 과정을 느낀다.

“유키나, 미안해......”

“리사가 잘못한 건 없어. 사과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나 때문에......”

“리사.”

“응......”

해본 적도 없는 화장을 하겠다며 나서지만 않았어도 유키나까지 말려들어 고생하게 만들지 않았을 건데. 한참을 기다리게 놔두고, 무척이나 걱정하게 만든데다가, 지금은 뒷처리까지 책임지게 해버렸다. 잘못한 게 없다고 딱 잘라서 유키나가 말을 했음에도, 작은 실수에도 자책하곤 하는 리사로서는 죄책감을 쉽게 벗어버릴 수 없었다. 화장을 닦아내어서 원래대로 돌아온 얼굴에는 풀죽은 기색이 가득했다. 용도를 다한 물티슈를 아래에 내려놓고는, 유키나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베이스, 처음 연주했던 때 기억해?”

“으응.”

“나도, 처음 노래불렀던 때를 기억하고 있어. 지금 듣는다면, 분명 어설프다고 생각할 거야. 음의 높낮이 조절도 밋밋하고, 안정감도 없고, 발음도 떨려서 나오고 했었으니. 하지만 그렇게 시작했었으니,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어. 리사도 베이스로 나랑 같이 세션을 할 수 있고.”

“유키나......”

“화장, 리사는 오늘 처음 해봤던 거잖아. 데이트도, 오늘 처음해보자고 내가 말을 꺼냈던 거였고. 그러니까, 리사가 잘못한 건 없어.”

알겠어? 끝에 작게 확인하는 말에서는 더 이상 자책하지 말라는, 타박과 응원이 동시에 묻어났다. 리사가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는 사이 유키나는 소파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얼굴, 깨끗해졌어. 그렇게 말해주고는 빙긋 웃는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입술의 부드러운 곡선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있잖아, 유키나.”

“응?”

“다음에는 나, 화장......더 예쁘게 해서 보여줄 수 있도록, 해볼게.”

그러면 오늘 가지 못했던 데이트, 그 때 같이 가지 않을래. 뒷말은 꺼내지 못한 채 리사는 쑥스러워서 에헤헤 웃어버리고 말았다. 꺼내지 못한 부분도 눈치채줬을까. 내리기 시작한 노을을 한 폭의 배경으로 삼고 서 있다가, 유키나는 소꿉친구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 이걸로 됐다! 여기, 거울 있으니 확인해봐.”

“가, 감사합니다......”

“린린, 엄청 잘 어울려! 리사 언니, 대단하다!”

“흐흥, 린코가 원래부터 예쁘다보니 메이크업이 한층 더 잘 받는 거지만 말야. 조금 더 밝은 느낌의 매력을 살렸을 뿐이라고 할까나.”

굉장히 신기한 걸 발견한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시로카네 린코는 건네받은 손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여러 각도로 자신을 살펴볼 수 있게 손거울을 움직이는 손놀림은 그녀가 집중하여 패드나 마우스를 붙들고 있을 때처럼 정교했다. 은막 속에는 화사한 봄빛 색채가 뺨에 살풋 남은 듯한 귀여운 아가씨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수줍어하는 듯 옅은 홍조가 감도는 뺨에서부터 퍼진 봄기운은 코에 닿아 산뜻한 강조선을 남기고, 입술에 닿아 촉촉한 매료 포인트를 만들었다. 금방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아서 어둑해보이는 눈가 또한 지금은 생기가 감도는 듯 보였다.

“자연스럽게 약간 터치한 수준이니 마음 편하게 하고 다녀도 좋아. 학교 갈 때도 세이프, 일지도.”

“그건 안됩니다. 교칙상 위생상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 화장은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로카네 씨는 저와 같은 하나사키가와 소속, 친분이 있는 사이여도 예외를 둘 수는 없습니다.”

“죄, 죄송해요......”

“에이, 지금은 교내가 아니잖아. 괜찮아, 괜찮아. 사실은 말이지, 언젠가 사요도 메이크업, 해주고 싶다고 늘 생각했거든. 쿨한 매력을 한층 강조! 라는 컨셉으로.”

“거절하겠습니다. 필요 이상의 꾸밈은 방해가 되니까요.”

교문 앞에서 메이크업을 이유로 엄격하고 무서운 풍기 위원에게 붙들리는 상황을 상정이라도 해본 건지, 위축된 모습으로 린코는 손거울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화장을 받은 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으로, 소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의 얼굴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린린, 봄날의 아가씨 같아. 곁에서 우다가와 아코가 한층 들떠서 칭찬하는 말에 작게 웃는 반응에서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과다한 메이크업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메이크업을 받은 린코가 기분 좋게 웃는 광경이 싫지는 않은 건지 지켜보던 히카와 사요는 눈매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리사 언니, 다음은 나! 아코도 해줘! 컨셉은......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마계의 지배자, 라는 느낌으로! 콰광, 하고 연막 속에서 솟아오르며 등장하는 모습에 어울리게?”

“아, 아하하. 난해한 테마네.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기도 하고......”

“우다가와 씨. 너무 소란스럽게 행동하지는 말아주세요. 아직 연습까지 여유 시간이 남았고, 긴장을 푸는 건 나쁘지 않지만 준비하는 기간 또한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주의를 주는 말을 하고서 사요는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 방향으로 따른다. 눈길이 모인 끝에는 마이크의 머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는 미나토 유키나의 모습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발 늦게 깨닫고는, 유키나는 의아함 깃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텐션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어요. 사요가 다소 멋쩍어하며 덧붙인 말에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는, 로젤리아의 리더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딱히 엄격한 느낌은 없이, 그러는 게 좋겠지- 라는 정도로.

“어쨌든, 리사 언니 대단해. 리사 언니처럼 화장을 잘하는 사람도 없구 말야. 댄스부에서도 사람들이 리사 언니에게 부탁하고 싶어하는 경우 자주 있잖아.”

“으응, 뭐어- 도와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애들이 예뻐지는 걸 지켜보면 나도 기분 좋기도 하고.”

“멋져! 리사 언니는 어떻게 화장하는 거, 지금처럼 잘하게 된 거야?”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코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리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이크 받침대 앞에 얌전하게 서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유키나의 모습을 시선으로 훑고는, 아가씨는 붉어진 얼굴로 수줍음을 무마하려는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어쩌다보니, 이려나.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말에는 따스함이 묻어났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 특유의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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