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nature take its course
天衣無縫 천의무봉 (5)
*Hitman 연구원 실험체 au
*본 내용은 허구이며, 사실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자살, 살인, 가스라이팅, 고문, 폭행, 잔인한 묘사, 유혈 등 트리거 요소가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장 中-
5. Proxima Centauri
“생각을 해보면 말이야,”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말을 건다. 누군가 들었다면 중성적이라고 했을 음성. 마주 앉아있던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시선은 여전히 약병을 향한 채 분주하게 손을 움직인다. 바늘이 문제인가…. 섭취하는 방식으로 투약해야 하나. 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얼굴이 중요한가? 난 그게 없어도 대화도 할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앞도 볼 수 있는데 말이지.”
그제야 새하얀 눈동자가 검은색 통유리에 비친다. 뜬금없는 주제 탓인지 조금은 황당해 보이는 표정이다. 고운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히더니 입이 열림과 동시에 서서히 풀렸다.
“얼굴이 없으면 눈을 보기가 힘들잖아.”
그렇게 툭 던지더니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간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렇지만 열중한 모습. 프록시마는 그녀를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예화의 말이 무슨 의미일지에 대해서도. 엉킨 실타래에 꼬불꼬불한 물음표가 떠오른다. 저 모든 행동을 지시하는 게 고작 머리에 담긴 작은 기관이라니. 저 물렁한 뇌로는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들을 통속에 모아놓고 빤히 쳐다보는 게 좀 웃기잖아. 사실은 내가 너희를 구경하는 건데 너흰 그것도 모르고.
“그래? 그럼 눈을 달아볼까? 넌 무슨 색을 좋아하는데?”
예화는 대답이 없다. 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와 관 몇 개를 내려놓고 헬멧을 벗겨 가져간다. 부끄럽다며 시잖은 농담을 던지자 키득거리며 웃는다. 달그락거리며 네모난 가방을 정리하던 그녀가 둥글고 매끈한 표면을 손으로 훑었다. 그러다 어딘가에 긁혔는지 거칠거칠한 부분에서 멈춰 손끝으로 그 부분을 툭툭 친다.
“누가 이런 싸구려 헬멧을 갖다 준 거야? 나중에 스티커라도 갖다가 붙여야겠네. 대가리가 봐줄 게 못 되잖아.”
연두색이라든지, 노란색이라든지. 귀여운 걸로.
지는 온통 하얗기만 하면서. 구린 거 가져오기만 해 봐.
프록시마는 인간의 규격과는 맞지 않는 존재였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숨을 쉬면서 삶을 이어갔지만 본질적인 에너지가 달랐다. 행성의 겉표면만 얇게 덮고 있는 기체가 아니라 그 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 제 탄생의 유래를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 흐름을 볼 수 있었다. 활화산처럼 열렬히 일렁이며 제 존재를 알리는 개체가 있는 반면, 휴화산처럼 별의 에너지를 잔잔히 품고 있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프록시마만의 능력이 아니었으니 다시 말하자면 ‘양’들은 서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엑스레이로 이 거대한 지구를 투시해 본다면 인간들의 뼈도 이렇게 보일까?
아무튼 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연구원들은 아무도 몰랐겠지만-양들은 이곳 인간들이 그렇게나 바라는 ‘성과’라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인 프록시마는 주위를 둘러봤다. 벽 하나 너머, 별의 수명을 이어받은 자신의 동족들을 대강 살폈다. 요 며칠 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왜냐하면 자꾸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띄었거든. 처음 몇 번이야 우연이겠거니,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양의 짓이겠거니 넘겨짚었지만 갈수록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가장 최근, 양으로 추정되는 것의 에너지가 한 번 크게 터진 이후로 보이지 않는 것이라든지.
‘일반적으로 한 번 생긴 게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데. 천예화한테 이걸 알려줘야 하나?’
…굳이? 우주인이 쓸 법한 머리 대용 보호구의 유리를 소매로 벅벅 문지른 프록시마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미 없어져 버린 걸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때까지도 미세하게 남아 있던 폭발의 잔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 타고 남은 재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에너지의 출처는 행성의 핵이 아니었으니 그녀를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예화가 알게 된다면 가슴을 칠 사건이지만, 이는 좀 더 먼 미래의 이야기. 지금의 프록시마는 그저 저녁식사 전까지 뭘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날 밤, 굳이 따지자면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각에 예화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 어깨가 굳었는지 스트레칭을 하며 들어오는 연구원은 잔뜩 지쳐 보였다. 평소 그녀의 업무 스타일을 알고 있던 프록시마가 보기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너 일 제대로 안 하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유난이야?”
“네가 뭘 안다고. 앉아서 밥만 축내는 주제에 나한테 게으르다고 뭐라고 하면 안 되지.”
예화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원칙대로라면 관찰실 안에서 흡연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프록시마도 한 개비 받아서 피워 보았지만 연기가 몸 이곳저것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향로와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다. 예화의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진 것처럼 보였으니 흡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긴 했다.
“요즘에 일이 너무 많아. 전에는 나 하나 놀아도 연구소가 돌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이제는 일손이 부족하게 됐다고.”
“궁상떨기는. 그게 다 업-보야, 업보. 네가 하도 쳐 놀아서 벌 받은 거지.”
“지랄하지 마. …상사가 증발했어.”
“상사…. 네 상사라면 스지?”
“아니. 그 사람은 연구팀 쪽 인원이고. 군사 총괄 말이야. 그 왜, 좀 퍼런 머리카락에 재수 없는 소리 자주 하는?”
“아-하.”
곧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워커홀릭처럼 매일 관찰실 안팎을 뛰어다니던데 좀 안 보인다 싶긴 했었지. 그 사람이 추가로 더 도맡아서 하던 일이 공중에 분해되면서 아래에 있던 부하직원들이 갈려나가는 상황인 것 같았다. 쯧쯧, 혀를 비롯한 구강기관이 있었다면 아마 프록시마는 대차게 혀를 찼을 터였다.
“그래서 이 야밤에 나한테 와서 한탄하는 거야? 친구 없는 거 티 나.”
“너보단 많을 걸?”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예화가 프록시마에게 가벼운 딱밤을 먹였다. 플라스틱과 손끝의 케라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괜히 엄살을 부리던 프록시마의 이마, 아니 헬멧에 무언가 턱 하고 붙었다. 뭔지 확인하려 건드렸는데 잘 만져지지 않았다. 그녀는 미련 없이 정형화된 몸의 형태를 풀어헤쳤다.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낙하하던 구형의 물체를 예화가 재빠르게 낚아챘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제 머리를 바라보자니, 어째 못 보던 하트가 있었다. 녹빛에 조금은 유치한 디자인.
“스티커네.”
“저번에 말했었잖아.”
“나도 구린 건 싫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알 바야?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아무튼, 그거 일종의 뇌물이야.”
그만 원래대로 돌아 오라며 예화가 검지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웬 뇌물? 나 존나 비싼 몸인데~ 이런 걸로는 어림도 없어.”
“뭐, 그럼 취소. 어차피 네가 싫다고 해도 일은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었어.”
“…불안하게시리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솔직히 지금까지는 계속 이렇게 월급이나 받아먹으면서 놀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별 건 아니야. 그냥 앞으로 널 더 귀찮게 할 거라고.”
그럼 간다. 담배 끝부분을 바닥에 문지르려고 하다 멈칫한 예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위생이라는 걸 챙기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잘 자라. 내일은 일찍 올 거야. 새까만 프록시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사람이었다면 머리카락이 위치했을 법한 부분을 살짝 쓰다듬었다. 미친, 징그러워! 와락 비명을 지른 그녀가 구석 저 멀리로 달려간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예화가 뭐라고 성질을 부리며 헬멧을 프록시마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텅텅텅…. 그것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그녀의 발 앞에 딱 멈춰 섰다. 다시 차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 거리감에 대해 너무 가깝지 않나, 하고 떠올리는 것이었다.
예화는 프록시마의 얼굴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시니컬한 태도가 꼭 얼굴을 보여달라 할 때만 조르는 것처럼 변하고는 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겠느냐고 자주 말했지만 그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리곤 만들어내서라도 보여달라는 억지를 부렸다. 프록시마는 그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응해보고자 자신을 거쳐간 여러 연구원들의 안면을 갈아끼웠으나 어쩐지 예화는 떨떠름해 보였다.
어느 날인가, 예화가 네모난 상자를 들고 왔다. 안에 든 것은 성체의 고양이였다. 선물이랍시고 내민 그것을 받아들고 프록시마는 기뻐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상자 안에서 회색 털의 고양이가 작게 가르릉거렸다.
“인간 말고 다른 모습도 따라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그리고 고양이, 그러니까 이 생물은 인간들에게 인기가 많아."
아마 다들 너에게 더 호의적으로 대할 걸. 그 얘기를 듣고 프록시마가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네 발 짐승의 몸뚱이를 이루었다. 근데 울음소리만큼은 아무리 따라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야-옹. 정직한 발음을 듣고 예화는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회색 고양이는 저와 똑같이 생긴, 그러나 눈동자만은 호박색인 양에게 다가가 몸을 부비며 친밀감을 표했다. 멍청한 축에 속하는 고양이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양에게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기 마련이었으니. 그러나 프록시마는 은근히 저를 밀어오는 그 작은 머리가 싫지 않았다. 보드라웠다.
그 다음주부터 예화가 다른 일로 바빠지면서 종종 처음 보는 연구원들이 프록시마의 곁에 오고는 했다. 고양이 모습이 호감을 산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프록시마의 위험성도 잊고 곧잘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다. 인간은 정말 단순-하다니까. 과묵한 컨셉을 밀어붙인 그녀는 한 마디 야옹도 없이 많은 이들의 애정을 받았다. 그러다 언젠가 예화에게 회색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부터는 흉내내기를 그만두었다. 무심코 밤 산책을 나갔던 날에 제게 채인 것이 그 표유류였던가. 인간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아니, 더 무른 것 같았다. 프록시마는 자처해서 약한 척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조금 질렸다.
프록시마는 자신이 있는 관찰실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 환풍구의 필요성이나 전등, 카드키의 원리 같은 것도. 그래서 자신이 지금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유리벽도 어떤 원리로 그 너머를 숨기는지 알지 못했다. 분명 밖에서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저는 밖이 보이지 않고 거울을 통해 제 스스로를 보게 되니 참 부당했다. 그러나 저 너머에 있는 게 예화가 아니라는 것 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이 노크를 하기도 전에 발로 벽을 걷어찼다. 삐죽이 성질이 난 까닭은 단지 오늘 아침 메뉴가 별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는지 조용하던 저 너머에서 삑-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또 천예화가 아니잖아?”
“…예, 그렇게 됐어요. 프록시마 씨죠? 오늘도 예화 씨가 일이 좀 바쁘셔서 제가 임시로 맡았어요.”
“걔는 자꾸 무슨 일이 있다는 거야? 애초에 내 담당 말고는 하는 것도-없으면서.”
“이런저런….”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쿠루기가 영 못마땅했다. 전부터 꾸준히, 예화 몰래 연습하던 것이 있었는데 이제 거의 완성될 참이었다. 오늘 그녀 대신 쿠루기가 왔으니 아마 예정보다 늦춰지겠지만.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뭐든 빨리 하고 내 눈앞에서 꺼-져.”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그러니까 너무 흉흉하게 굴지 마세요.”
주사라도 놓는가 했는데 그냥 평범한 검사만 줄줄이 이어졌다. 오히려 평소보다 그 가짓수가 적어서 금방 끝날 정도였다. 차트에 체크 표시를 남발하고 추가로 메모를 끼적인 쿠루기가 관찰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환풍구의 팬이 회전을 멈추자 방 안의 공기가 순환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공중에서 뻗어나온 두 개의 분사구에서 하얀색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뿌연 시야를 개선하고자 인체의 형상을 버렸다. 양의 몸체가 인간체보다 성능이 좋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몸 전체를 구성하는 어둠이 풀리지 않고 점점 더 엉겨 붙었다. 마치 프록시마를 가두는 것처럼…. 인간의 껍데기가 그녀를 옥죄었다.
‘이게 무슨….’
대략 10분 정도가 지나고 팬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혼란 속에서 정적을 깼다. 하수구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연기-실은 안개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가 소용돌이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록시마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가 다시 펼쳤다. 속이 텅 비어 말 그대로 가죽이나 다름없는 피부를 더듬거리다가 쿠루기가 있을 위치를 홱 째려보았다. 프록시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인지 그는 눈치도 없이 수고하셨습니다, 따위의 말을 스피커에 지껄였다.
“야! 이런 미친, 방금 이거 뭐야? 설명하고 가!”
누군가가 가던 길을 급하게 되돌아왔다. 빠른 박자의 진동이 바닥의 콘크리트를 타고 프록시마에게까지 닿았다. 마이크가 켜지는 특유의 기계음이 삐익-하고 찢어질 듯 시끄러웠다.
“깜짝이야. 아, 아. 들리세요?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 거예요? 방금 소리를 지르신 것 같은데….”
“너, 이거 무슨 실험이야?”
“어, 예화 씨가 말씀 안 드렸었나요? 이상하다, 매뉴얼에‘반드시 실험 내용을 실험체에게 고지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텐데.”
“중얼중얼 혼자 못 알아들을 말 하지 말고 설명을 해! 나, 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단 말이야.”
“프록시마 씨가 받고 있는 실험은 양을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연구소의 목적은 그 반대긴 하지만 뭐, 이 실험이 성공하면 그쪽도 확실히 가능성 있다는 게 밝혀지는 거니까요? 그리고 통제만 가능하다면 굳이 인간을 양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근데…양들의 성격이나 사고방식 등을 생각하면 그건 역시 무리일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네.”
“…뭐?”
“잘 못 들으신 거라도 있으세요? 다시 말해드릴까요?”
“그러니까, 날 인간으로 만들겠다고? ……니네가 뭔데?”
“네?”
“아니 그렇잖아. 나는 내 모습에 만족하고 살았다고! 그, 근데 왜 내가 인간이 돼야 하는데? 우, 웃기지 마, 씹….”
“잠시만요,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이, 이제야 깨닫다니. 됐어. 나 여기 나갈 거야. 니 새끼들 다 좆되든 말든 알아서 해. 이런 실험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협조 안 했을 거야.”
“어. 아, 잠시만. 아, 코드 블랙! 대상은 M-910, 위치는…….”
쿠루기가 다급하게 비상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건물 전체에 붉은 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귀청 떨어지게 울렸다. 다시금 몸의 주도권을 장악한 프록시마가 부피를 키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하고 짙은 어둠이 꽤 큰 관찰실 하나를 가득 채웠다. 쿠루기가 급하게 밖으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벽 따위는 양에게 방해가 될 수 없으니까…. 뭐든지 맘대로 부수지 말라고 했었는데 본체로 돌아간 것만으로 근처의 유리가 전부 산산조각이 났다. 벽에도 금이 가 뼈대가 보이기 일보직전이었다.
“씨발, 프록시마 센타우리!!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헐레벌떡 달려온 예화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프록시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팔을 벌리고 섰지만 비정형의 물질을 막아내기에는 한없이 작은 품이었다. 프록시마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꾸물거리며 인간의 껍질을 한 겹 뒤집어썼다. 처음 연구소에 왔을 적 선물 받은 우주복의 대가리는 이미 프록시마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우그러진 채였다. 그동안 예화가 하나씩 붙여준 스티커도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꿋꿋이 머리에 쓰고 있는 꼴이 퍽 괴물스러웠다.
“…너 왜 미리 안 얘기해 줬어? 알려줄 수 있었잖아. 아니, 알려줘야 했잖아!”
“….”
“아, 됐어. 이젠 나도 몰라.”
인간형임에도 여전히 긴 축에 속하는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프록시마는 그대로 예화를 지나쳐 가려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예화가 두 팔로 그녀의 목을 꽉 쥐었다. 목이 졸린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허, 작게 헛웃음 지은 프록시마도 팔 하나를 붙잡았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두말할 것 없는 위협의 표시였다.
“적당히 포기하고 비켜. 나 너 팔 부러뜨릴 수도 있어.”
“…아예 죽이든가. 밖에 나가서 네가 혼자 뭘 할 수 있는데?”
이 괴물 새끼. 짓씹듯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발음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몰라. 뭐가 됐든….”
예화의 옷매무새를 대충 만져준 프록시마가 힘주어 제 목에 닿은 팔을 아래쪽으로 꾹 눌렀다. 나름 조절한다고 한 거였는데 우득, 뼈에 실금이 갔다. 아랫입술을 깨무며 예화는 본능적으로 다친 부위를 반대쪽 손으로 감쌌다. 꼬리를 안쪽으로 마는 포유류와 비슷한 동작이었다. 프록시마는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아 맞다, 하더니-
“나 이거 오늘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
“자아-”
그러더니 손을 쭉 뻗어 예화의 얼굴을 덮었다. 이마, 눈썹, 눈, 코, 뺨, 입술, 그리고 턱까지. 위에서부터 진득하게- 예화의 얼굴을 다시 빚어내다시피 지분댄다. 진중한 손길이 닿는다. 검지 손가락으로 얇쌍한 턱선과 오똑한 코를 따라 그리고 눈꺼풀 위를 가만가만 쓸어본다. 낮게 내려 묶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빗어내린다. 귓바퀴의 말랑한 연골을 꾹 눌러보기도 한다. 그 모든 위치를 기억하고, 재배열하는 과정. 이것은 완벽한 모방이요, 의태이니.
“눈 떠 봐.”
나비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보드랍게 들린 눈꺼풀 아래에 투명한 눈동자가 보인다. 각막의 상피에 살갗이 닿자 본능적인 고통에 예화는 눈을 감았다. 안 돼. 아직 다 못 외웠어. 프록시마의 손가락이 흐물거리기 시작하더니 녹아내려 흑색의 털실같은 것이 된다. 집요하게 동공을 관찰해오는 그것에 눈의 주인이 몸을 뒤로 급하게 뺐다. 그 탓에 미처 거두지 못한 실 몇 가닥이 왼쪽 눈을 세로로 내리긋는 상해를 입혔다. 예화는 작게 신음하며 허리를 숙였다. 팔에 금이 간 것을 깜빡 잊고 눈으로 손을 향했다가 기이하게 몸부림치고 말았다. 좋아, 이제 진짜 됐다.
프록시마는 천천히 제 머리에 얹힌-이제는 처음의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는-헬멧을 벗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예화는 순간 거울을 마주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록시마의 머리에 자리잡은 것이 꼭 저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눈동자가 황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너….”
“짠! 네가 맨날 그랬잖아. 나한테도 제대로 된 얼굴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
“근데 난 상상력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거든. 그래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골랐어. 어때?”
그러고는 상체를 낮춰 예화와 시선을 맞췄다. 반짝거리는 동공 한 편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한다. 그림자 진 반대편에 웅크리고 앉은 그것을 우리는 무어라 칭하는가? 예화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이젠 눈을 볼 수가 있잖아.”
프록시마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멀어질수록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그러나 꿋꿋이 인간의 다리를, 관절을 움직이면서. 남의 것을 훔친 예의 그 얼굴로 호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계속 한 걸음씩.
“코드 블랙 상태를 해제합니다.”
-예, 예? 그럼 코드 클리어입니까? …. 여보세요? 듣고 계신가요?
연구실 한 쪽 구석에는 사라졌던 회색 고양이가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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