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nature take its course

天衣無縫 천의무봉 (4)

HitMan by Jack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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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man 연구원 실험체 au
*본 내용은 허구이며, 사실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자살, 살인, 가스라이팅, 고문, 폭행, 잔인한 묘사, 유혈 등 트리거 요소가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0장 中-


4. 薛志赫

"잠시만, 거기 멈추세요. 상처를 봐야 합니다."

"전 괜찮으니까 지혁 님 일 보세요. 방금 제이 님 능력 발현된 거잖아요? 관련해서 더 확인해 볼 것도 많고, 아무튼 어…추, 축하드려요?"

"그 확인과 관련된 업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상처 부위에 문제가 더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치유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치유된 이후에도 피부에 이상은 없는지 이런 걸 기록해두고 싶습니다.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하하하. 당연히 협조해야죠. 근데 좀 나중에…."

"제가 의료진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요. 제가 직접 할 수 있어서요."

지혁은 한사코 저의 호의를 거절하는 우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 손으로 귀를 붙잡고 있던 그는 이제 양손을 전부 써서 거의 상처 부위를 틀어막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게 상사인 저에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는 꽤 필사적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놓아줬을 것이다. 지혁이 스스로 쌓아 올린 이미지는 그래도 친절한 쪽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역시도 양보를 해줄 수 없었다. 그 짧은 찰나에 스친 그 색깔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했다. 차마 붉다고는 할 수 없는 색이었다.

속이 타들어가는지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우현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왼쪽을 한 번, 오른쪽을 한 번, 다시 왼쪽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지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은 끝부분부터 색이 하얗게 죽어가고 있었다. 

"저, 저도 꽤 많이 놀랐으니까요. 혼자 진정할 시간을 주시면 좋겠는데…."

"우현 씨,"

낮은 음성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던 동공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네? 저 진짜 괘, 괜찮아요, 지혁 님…. 걱정해 주시는 건 가, 감사하긴 한데요- 지혁은 차분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모든 가설들을 없는 셈 치기로. 섣부른 단정은 오히려 정답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현은 두말할 것 없는 인간이다. 뭐, 아직은. 그러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지.

"우현 씨,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십니까?"

"…네?"

"지금 말해주시면 그냥 못 들은 셈 치고 지내겠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십니까?"

우현이 그 특유의 푸른빛 눈동자를 빛냈다. 그의 표정이 느릿하게 분노에 비슷한 것으로 변하는 걸 보며 지혁은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우현 씨가 크게 다치신 줄 알고 걱정되는 마음에 그만.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 다 그 같잖은 변명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무런 대처도 없었다. 우현은 지혁이 상사였기에, 지혁은 그것을 정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우현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 개인 숙직실로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지혁은 끝내 '놓쳤다'는 감상이 들어 텅 빈 오른손을 꾹 쥐었다.

우현의 말도 맞았다. 원래대로라면 제이를 조사할 인원을 최대한 빨리 꾸려 능력의 촉매로 보였던 손가락의 상처를 살펴야 했다. 게다가 총이라니. 나머지 실험체들을 다치게 하기 전에 얼른 공간도 분리해 두어야 했다. 흰 가운의 주머니에 넣어둔 업무용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발신자가 다음 지시를 바라는 연구원들일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지혁은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고 모든 알림을 무시한 채 스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H-118의 능력이 발현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상부에서 연락이 오면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읽음 표시는 한참 뒤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지혁은 설정창을 내려 방해금지모드를 켰다. 방금까지 오던 모든 연락은 손가락을 옆으로 넘김으로써 전부 지워버렸다. 여기서부터는 그녀가 알아서 하겠지. 그는 익숙하게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지혁에게도 숙직실이 주어졌지만 항상 밤을 새 가며 서류 작업을 하다 보니 밥과 잠 모두 이곳에서 해결하기 일쑤였다. 창문을 등지고 의자에 앉으면 책상 위 삼각기둥 모양의 명패가 보였다. <총책임자 설지혁>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패보다 더 가까이에 네모반듯하게 놓인 서류를 보며 그 껍데기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되새겨야만 했다. 

'…전쟁이라.'

이 연구 자체도 일종의 군사기지이니 사실 이런 공지를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실전에 투입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거니와 당장 전투에 투입시킬 수 있는 결과물도 없었다. 지금이야 개전하지 않았으니 시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장 내일 중국과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할지 어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급하다 한들 인간을 인외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상부에서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지혁을 달달 볶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지혁의 초조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서류를 처음 읽었던 몇 달 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5 페이지, 6 페이지그리고 9 페이지. 한 장이 부족했다.

정부의 기밀문서가 사라진 것은 이것을 전달받은 지 4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보통 기밀문서는 받자마자 읽어보는 것이 원칙인데 그날따라 유독 불운이 겹쳤다. 첫 번째로, 문서를 처음 전달받은 요원들이 단체로 전염병에 감염되는 바람에 예비로 붙여 두었던 신참이 문서 전달을 담당하게 된 것(연구 특성상 감염병뿐만 아니라 질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섬 출입이 불가하다). 두 번째로 신참이 지혁에게 해당 문서가 정부에서 직접 내린 기밀임을 잊고 알리지 않은 것. 세 번째로 그 무렵 샬롯이 관찰실을 탈출하는 바람에 연구소 전체가 발칵 뒤집어진 것.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잊힌 문서는 섬에 도착한 지 무려 4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지혁의 눈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문서 한 장과 그 신입 요원이 사라진 뒤였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마 흐름상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기보다는 요약에 가까운 페이지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신입 요원이 서류를 들고 도망쳤다는 설이 유력해 보였으나 문경이 XI 실험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그의 손 한 짝을 발견하면서 무마되었다.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요원을 죽인 사람이 그 문서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것뿐. 이제는 조사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지혁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대로 상부에 보고를 올리면 제 무능함만 알리는 꼴이었다. 기껏 총책임자라고 앉혀 뒀더니 기밀이나 털리고 도움도 되지 않는 머저리. 그게 자신이라는 걸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신입 요원이 잘못한 일인데 그가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남은 책임이 전부 자신에게 전가되는 건 너무 억울했다. 화가 났다. 

'바라는 걸 해주면 되는 게 아닌가?'

지혁은 느리게 눈꺼풀을 닫았다.

'양이 될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는 스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절대로 제이를 성공체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여린 그 심성 때문에. 그리고 실험체가 누구든지 간에 실험의 강도를 조금만 올려도 반대하고 나서겠지.

'윤리적인 이유로 반대한다면 그 명분을 없애면 그만이지.'

그래, 어차피 군사 병기에 눈이 돌아있는 상부이니 제가 제대로 된 성공체만 갖다 바친다면 이런 사소한 실수 정도는 없는 셈으로 쳐 줄 것이다. 범인을 잡기는 해야 하니 사정을 들으면 따로 조사팀을 보내겠지만 그걸로 제 커리어에 흠집이 나진 않겠지. 지혁은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는 우현의 자리에 연구 기록지를 놓았다. 그의 이름을 쓴 것처럼 날인도 제가 대신해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가서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것보단 나았다. 실험 도중에 방해를 받는 건 결과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언젠가 부딪치게 된다면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비어있는 관찰실 하나를 차지해 키카드를 등록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우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손에서 나풀거리는 종이는 보지 않아도 그 연구 기록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혁 님 이게 뭐예요?"

"보시다시피 연구 기록지입니다. 실험을 담당할 연구원이 필요한데 마땅치 않아서 일단 임의로 제가 써뒀어요. 날인은 하셨습니까?"

곁눈질로 힐끗 보니 역시 도장을 찍기는커녕 꺼내지도 않고 저에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니요! 저한테 언질도 안 해주시고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전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연구가 너무 지지부진하길래 총책임자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실험체가 돼요?"

"이게 제가 생각한 최선입니다."

우현은 입을 떡 벌리고 뻔뻔한 지혁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혁은 밴드가 거즈가 붙어있는 그의 왼쪽 귀에 잠시 시선을 향했다. 그것을 느꼈는지 우현이 작게 스친 정도라서 피도 금방 멎었고, 이제는 괜찮아요. 하고 우물거렸다.

"제 실험을 돕기 싫으십니까? 그럼 뭐, 대체 인력은 꽤 있으니까요. 편하게 말해주셔도 됩니다. 우현 씨 다음으로 제안을 드리려고 했던 분은 소녀 씨…."

우현이 눈에 띄게 기겁했다. 지혁도 소녀의 가학적인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언급한 것이었으나,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별 말은 않았지만 표정으로 '그렇게 된다면 지혁 님은 죽을지도 몰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남을 괴롭히는 데 취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아 입매를 슬쩍 가렸다.

"무조건 하시는 거예요? 제가 거절해도 무조건?"

"네. 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하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도장을 방에 두고 와서."

우현이 다시 몸을 돌렸다. 올 때는 순식간이었던 것 같은데 갈 때는 발걸음이 무거운지 한 세월이 걸렸다. 덕분에 지혁은 관찰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관찰실과는 달리 실험실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연구소가 처음 만들어질 무렵에는 양들의 크기를 어림잡지 못해 건물의 크기가 지금보다 더 작게 설계되었다고 했었다. 아마 이런 구조의 관찰실도 그때 설계되었던 것 중 일부가 남아 만들어진 잔재일 것이다. 양들을 실험할 때 쓰기에는 그들의 크기 때문에 부적절했고, 일반적인 실험체들을 넣자니 생활공간과 고통을 유발하는 공간이 너무 가까워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됐었다. 그렇지만 실험체와 연구원이 동일인인 지금은 최적의 환경이었다.

'이게 구속복인가.'

유리로 된 실험실 안에 들어가 한쪽 팔만 옷에 넣고 대충 버클을 채워보고 있자 우현이 도장을 던지다시피 책상에 올려놓고는 지혁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대체 구속복을 왜 입고 계세요? 하…. 그걸 혼자 입을 수 있겠냐고요. 아니 그리고 실험을 지금 당장 시작하는 거예요? 지혁 님 잠시만요, 우리 조금만 천천히 일을 진행하면 안 될까요? 아, 급해서 시작하는 연구라고요? 맞죠, 맞는데 하루만 느긋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직 저 도장도 안 찍었잖아요. 그는 지혁이 간신히 넣은 한쪽 어깨를 아득바득 빼내어 구속복을 다시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눈으로 욕을 하는 건지 그냥 미친놈을 보는 시선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실험은 당장 내일부터 진행할 겁니다. 아무래도 투약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까요. 약 용량이나 종류 같은 거, 언제 뭐 넣어야 하는지 저기에 다 적어뒀으니까 그거에 맞게 준비해서 내일 오세요. 구속복은…그냥 궁금해서 입어보고 있던 겁니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키카드를 찍고 제 발로 실험실을 나갔다. 우현이 내팽개친 도장을 집어서 기록지에 꾸욱, 찍은 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을 자신의-어차피 이 관찰실 자체가 지혁의 것이었으니-책상 서랍 아래에 집어넣었다. 

"다른 연구원들한테는 뭐라고 말할 생각이세요? 저만 반대하는 건 아닐 텐데요."

"아, 그건…."

잠시 고민하던 지혁은 대충 연구소의 미스터리가 하나 추가된 셈으로 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개연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를 덧붙이다가는 어딘가 하나 빠진 구멍이 생길 게 분명했다.

"실종된 셈 칠까요?"

"…네?"

"어차피 여기 그런 일 종종 있잖습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재작년인가에도 누구 한 명 사라졌었고."

"그 사람 퇴사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처리했던 기억이 있긴 하네요."

경악하는 표정이 꽤 볼만했다. 내일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가운을 벗었다. 우현은 슬금슬금 지혁의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여기 키카드 제 것도 되나요? 아, 아직 등록 안 해뒀는데 내일 아침에 우현 씨 오기 전까지는 해두겠습니다. 아, 네. 지혁 님, 안녕히 주무세요. 우현 씨도 좋은 밤 보내세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문이 닫혔다. 관찰실 안에 비치된 옷장을 열어 보니 어깨에 H라는 글자 자수가 박힌 하얀 옷 한 벌이 있었다. 입을 생각은 없었지만…아, 그래. 나도 이제 실험체 코드가 있어야지. 아직 사람이니까 에이치(H) 다시(-),

'9시 21분.'

921 정도로 할까. H-921.

우현은 그 뒤로 매일같이 지혁의 관찰실에 찾아왔다. 투약은 때로 생각한 것보다 괴롭고, 때로는 예상 외로 너무 아무렇지 않았다. 묘한 점은, 항상 지혁이 고통에 몸부림친 다음날은 반응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날이 반복되자 기시감을 느낀 그는 우현의 연구일지를 빠짐없이 확인했지만 투약량의 차이를 보는 것보다 글자 수의 차이를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xxxx. xx. xx

투약량: 50mL
상태: 좀 힘들어하심

xxxx. xx. xx

투약량: 80mL
상태: 좀 많이 힘들어하심ㅜㅜ

xxxx. xx. xx

투약량: 30 50mL
상태: 괜찮아지심 ^.^

이 얼토당토 않는 일지에 지혁은 기운이 쭉 빠졌다. 낙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0미리를 썼다가 지운 날은 유독 약이 돌지 않는 것 같던 그날이었다. 투약량을 임의로 줄여놓고 아닌 척 고쳐 쓴 거겠지.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남들보다 자존심이 센 그가 드물게 자괴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그것도 하나의 능력이었다. 오늘은 일지를 다 뜯어고치고 다시 쓰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투약도 똑바로 하라고 한 소리 해야지.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우현이 또 하루치 쓰레기-연구일지-를 들고 등장했다.

"지혁 님, 안녕히 주무셨-"

울컥, 갑자기 그의 입에서 무언가 치밀었다. 컥, 소리와 함께 허리까지 굽혀가며 고개를 숙인 우현은 입을 꾹 다물고 손바닥으로 황급히 가렸다. 급하게 발로 바닥을 문지르다가 덜덜 떨리는 나머지 손으로 목에 맨 키카드를 찾았다. 지혁은 처음에 그가 어딘가 잘못된 줄 알고 놀랐으나, 그게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임을 깨달았다. 차마 어떤 해명이랄 것도 하지 못하고 키를 마구잡이로 누른 우현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그의 신발과 복도가 부딪쳐서 내는 소리가 멀리, 저 멀리까지 울렸다. 홀로 남은 지혁은 급하게 바닥을 살폈다. 검은 얼룩이 두 세 방울, 아니 방울? 액체라 칭하기도 애매한-물컹거리고 점성 있는 그것들이 짓뭉개진 채로 지익, 끌린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채취해 멸균팩에 옮겨 담았다. 이건,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또 다른 가능성…!'

그것에 눈이 먼 지혁에게 관찰실 바닥에 간 작은 균열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김 서린 창을 보고 신나 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나 손가락으로 그린 작은 그림으로 만족하기를. 소매로 창을 벅벅 문질러 그 너머를 보게 된다면, 기어코 그 너머에 있는 수평 동공을 마주하게 테니.

그것은 과연 양의 탈을 쓴 늑대인가, 아니면 늑대의 탈을 쓴 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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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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